능지기 600년, 함흥 억새
억새 (화본과), 건원릉을 600년 동안 지켜온 함흥 억새
잘 다듬어진 묘역과 담장이 둘러쳐진 양지바른 명당 터의 묘입니다. 봉분에는 봉두난발처럼 억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습니다. 조상 묘에 대한 우리의 전통 예(禮)로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묘의 형세나 봉분을 둘러싼 호석(護石)과 상석 등을 보면 지엄한 분의 묘입니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려 있습니다. 이 묘는 조선 초대 임금 태조 이성계가 안장된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조상의 묘를 살피고 돌보는 일이 효행이고 후손들의 책무였습니다. 자손이 있음에도 벌초하지 않는 행위는 불효로 간주하였고 묘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으면 흉하게 보고, 자손이 없는 묘로 여기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대행업체를 이용하여 벌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추석 성묘 전 벌초를 직접 하는 것이 후손의 중요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추석 전 한두 주말은 교통체증이 심한 현상을 겪는 것도 윗대 어르신들의 묘에 벌초하러 가는 차량 때문입니다.
이토록 벌초를 중요시하는 우리 문화인데 왜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의 건원릉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가 아닌 억새가 무성히 자라고 있을까?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구리시 동구릉에는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문종, 선조, 영조 등 7 왕 10 왕후 묘가 모여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입니다.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개국조의 왕릉이니만큼 조선에서도 특별하게 관리하였습니다. 태종은 왕릉 조성 후 노비와 토지 및 수호군을 두도록 하여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고 지금도 동구릉은 문화재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에서 관리,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건원릉의 봉분은 잡초가 무성한 것처럼 보이는 억새에 덮여 있을까요?
건원릉에 억새가 무성하게 된 데는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라 합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저지르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앞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개국시조인 부왕을 멀고 먼 함흥에 안장한다면 나라의 위신과 제사 지낼 때의 불편함, 가까이 모시고서 자신이 정성껏 예를 차리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마음 등으로 도성 근처에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유언에 따르는 대신에 함경남도 함흥 땅의 억새와 흙으로 봉분을 조성하여 유언에 갈음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후 함흥에서 옮겨온 억새를 잘 보살피는 것이 이곳 봉분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면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봉분에서 억새가 지속해서 자라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능 아래에 함흥에서 옮겨 온 억새밭을 별도로 만들어 기르면서 필요에 따라 계속하여 봉분에 억새가 빈자리를 메꾸며 보충했다고 합니다. 이토록 정성껏 관리한 덕에 건원릉 봉분의 억새는 1408년 태조의 사망 이래 600여 년의 세월 동안을 봉분 위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머나먼 고향 땅 함흥에서 옮겨온 억새는 태조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는 충실한 능지기의 역할을 하며 600여 년의 세월을 태조와 함께 지내온 셈입니다.
망우리 고개 너머 아차산 마루금에 롯데월드타워가 어른거리는 건원릉 전망
억새는 벼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산과 들에 자랍니다. 잎은 긴 줄 모양이고 꽃은 7~9월에 줄기 끝에 10∼30cm의 부채꼴이나 산방꽃차례를 이루어 피는데 꽃이삭은 자줏빛입니다. 잎을 베어 지붕을 이는 데나 마소의 먹이로 쓰이며 여러 가지 변종이 있습니다.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억새 물결을 보고 흔히 억새꽃이라고 하는데 속칭하는 ‘억새꽃’은 꽃이 아니라 잘 익어서 갓털(冠毛)이 풍성하게 부푼 억새의 솜털 씨앗 송이입니다.
건원릉은 평소에는 능침에 접근할 수 없지만 1년에 한 차례 개방합니다. 하얀 억새 이삭이 절정기인 10월 말에서 11월 초 2~3주 동안 1일 2회, 회당 20명씩 예약자에게만 개방합니다. 올해는 11월 1일부터 20일에 걸쳐 개방했습니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하얀 억새의 솜털 씨앗이 휘날리는 건원릉 바로 뒤의 약간 불룩한 곳, 잉(孕)에 서서 멀리 전방을 조망했습니다. 잉이라 불리는 곳은 풍수의 기혈이 모이는 장소라 합니다. 야트막한 앞산의 능선 너머로 망우리 고개 능선이 보이고 그 능선 뒤로 아차산 능선이 이어집니다. 망우리 고개 능선에 철탑이 보이고 그다음 아차산 능선 위로 롯데월드타워가 굴뚝처럼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날씨가 쾌청하면 선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망우리(忘憂里)의 지명에 대한 올바른 내역을 알게 되었습니다. 망우리 공원은 공동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에 도시개발 명목으로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했고 많은 묘가 이곳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막연하게 ‘공동묘지가 많이 있어서 망우리라 했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설사에게 들은바, 기록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정도전의 도움으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뒤이어 장차 자신이 묻힐 묏자리까지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고개에서 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정한 묏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제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모든 근심을 덜었다."라고 말해서 이때부터 이성계가 머문 고개를 '망우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토록 600여 년의 역사적 유래가 있는 유서(由緖) 깊은 지명을 꼼꼼히 살펴봄도 없이 얕은 상식과 판단으로 성급하게 공동묘지가 있어 망우리라 했나보다고 속단했으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해설사 말에 의하면 이러한 연유도 모른 채 왕릉에 억새가 무성한 모습만을 보고 화를 낸 어르신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이전에 본인만의 생각과 선택적 판단에 의한 속단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봉분에 무성한 억새를 보고 화를 낸 분이나 망우리라는 지명을 공동묘지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상황의 전후를 살펴봄도 없이 섣부른 자기만의 속단을 앞세운 탓으로 보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인식과 믿음의 바탕이 이렇게 쉽게 개별적 선택에 따라 속단하는 추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사리와 이치와 유래를 따져보기에 앞서 자신과 주변 같은 무리의 한 가지 편향적 사고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세태. 그리고 이에 함몰되어 비판적 판단의식을 상실한 채 SNS 등을 통한 편향적 확대 재생산의 가짜 뉴스에 편승하고 마는 간편한 사고방식이 대세인 양 보입니다. 이치와 공정, 상식은 내팽개치고 자기 편한 대로 쉽게 어느 편에 합류해버리는 약삭빠른 사례를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봅니다.
그러다 보니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번져나가 다수 여론처럼 보여 점차 자기 확신으로 이어져 양심마저도 없는 듯한 행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600년 능지기 억새와 망우리 지명(地名)에 관한 섣부른 속단 사례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작금의 사회, 특히 옳고 그름의 구분도 없이 서로 다름이라는 명분으로 시류에 약삭빠르게 영합하려고만 하는 정치판의 질적 퇴화와 편 가르기도 이런 추세의 하나로 여겨야 하는 것인가? 별의별 생각이 어지럽게 난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