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518
■ 2부 장강의 영웅들 (174)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3장 작은 거인 (1)
그 무렵, 제장공(齊莊公)은 만화와도 같은 착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난영 일행을 진(晉)나라로 잠입시켜 강성을 치게 한 직후 그는 정말로 진나라 원정군을 편성하여
서진(西進)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난영(欒盈)이 강성만 점령해준다면 아무런 문제 없다.
누가 보아도 황당한 일이었으나 세자 시절부터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 제장공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진(晉)나라에 다다르려면 위(衛)나라를 지나야 했다.
길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한 그것이 관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장공(齊莊公)은 그런 절차를 일체 생략했다. 다짜고짜 위나라 국경 안으로 쳐들어가
공격을 퍼부었다.- 위나라는 진나라 편이다. 우리에게 길을 빌려줄 리 없지 않은가.
놀란 것은 위나라였다. 위상공(衛殤公)은 재빨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제나라 군대의 목적이 위나라 정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그는 각 성읍의 수장(首長) 들에게 명했다.
- 야전(野戰)을 피하라. 성문만 닫아걸면 제군(齊軍)은 그냥 지나칠 것이다.
위상공(衛殤公)으로서는 적절한 조치였다.이로써 제장공이 이끄는 서정군(西征軍)은
이렇다 할 저항을 받지 않고 쉽게 진나라와의 국경지대인 황하 기슭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만 건너면 진(晉)나라 땅이다.문제는 여기서부터 였다.- 강을 건너 계속 서진(西進)할 것인가,
아니면 이 곳에 머무르며 난영으로부터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제장공의 측근 장수들은 하루속히 황하를 건너 진(晉)나라 수도
강성을 들이치자고 주장했고, 행정을 담당하는 신료들은 난영의 결과를 보고
진퇴 여부를 결정하자는 의견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안영(晏嬰)은 또 한번 군주를 모욕하는 간언을 올렸다.
"주공께서는 무력을 믿고 맹주국을 쳐서는 안 됩니다. 만일 친다면 성공하지 않는 것이
우리 제(齊)나라를 위해 복이 될 것입니다. 덕이 없는데 공을 세우면 반드시 주공에게
우환이 미칩니다."제장공(齊莊公)은 안색이 돌변했다. 쓴약을 마신 듯한 표정이 되었다.
- 덕(德)이 없다.신하가 자신의 군주에게 할말은 아니었다.
설사 덕이 없는 군주라 해도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런데도 안영(晏嬰)은
태연자약하게 '덕이 없는 군주가 공을 세우면 화를 당한다' 라고 호언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살벌해졌다.모두들 안영에게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제장공(齊莊公)은 쓴 웃음만을 지었을 뿐, 안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안영은 본래 저런 자' 라고 치부해서인가.
제장공(齊莊公)은 장수들을 향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황하를 건너 진나라 영토로 쳐들어가리라!"
황하를 건너면 조가(朝歌)라는 읍이다. 이 읍은 은(殷)나라 말기의 수도였다.
주왕(紂王)이 아침부터 노래를 부르게 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주왕조시대에는 위(衛)나라 도성이었다. 그러나 위나라가 적적(赤狄)의 공격을 받고
황하 동쪽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진나라 영토가 되었다.제장공(齊莊公)은 전군을 동원하여
조가를 공격했다.
조가(朝歌)는 옛 왕조의 도읍지 였으므로 성이 크고 단단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제장공은 내정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전투에 임해서는 용맹하고 치밀했다.마침내 조가(朝歌)를 함락시켰다.
제군의 사기는 높았다. 여기서 제장공(齊莊公)은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일대는 태항산 북로로 진격케 했고, 다른 일대는 맹문(孟門)을 경유하는 남로를 취하게 했다.
- 양군은 형정(熒廷)에서 합류한다.형정은 진나라 영토 깊숙한 곳으로 곡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소읍이다. 지금의 산서성 익성 부근. 이 계획대로만 되면 진(晉)나라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가(朝歌)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제장공의 계획은 일시에 무너졌다.
- 곡옥 군 패배.마침내 난영의 죽음 소식이 제나라측에 날아든 것이었다.
제장공(齊莊公)으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제(齊)나라와 진(晉)나라는
3천여 리가 넘는 먼 길이다.내부의 도움 없이는 진나라 도성에까지 이를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군량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병법에 밝지 않은 사람이라도 금방 알 수 있는 이 문제점을 제장공(齊莊公)은
오로지 난영만 믿고 감행해왔다. 곡옥을 1차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 난영이 강성 공략에
실패하고 곡옥(曲沃)까지 함락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럴 때 제장공(齊莊公)은 과단성이 있었다. 주저 없이 명했다."철군하라!"
그런데 그는 그냥 철수하지 않았다.
- 진나라 병사의 시체를 소수(少水) 강변에 쌓고 큰 언덕을 만들어라.
진군(晉軍) 병사들의 시체를 묻어주어 진혼(鎭魂)하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나라 군대의 무공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였다.이를테면 승전 기념관인 것이다.
제(齊)나라 군사들은 진나라 병사들의 시체를 모아 소수 강변에 산보다 더 큰 분묘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긴 하였으나 진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들이 공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황하 서안 옹유(雍楡)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노나라 군대가 회군하는 제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그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제장공은 노군(魯軍)을 깔보았다.군대를 진격시켰다.
노(魯)나라 군대는 의외로 단단했다. 좀처럼 적진을 돌파할 수 없었다.
그때 후미가 어지러웠다.- 진군(晉軍)이 침공해왔다!제장공(齊莊公)은 기겁했다.
제군을 기습한 진나라 군대는 강성에서 일으킨 추격군이 아니었다.
태항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한단(邯鄲)의 병사들이었다.
이때 한단 병사를 이끌고 제군 후대를 덮친 진나라 장수는 조승(趙勝)이었다.
조승은 조전(趙旃)의 아들이다.지난날 조씨 일족이 도안가로부터 변을 당했을 때
집안일로 한단으로 나가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한 사람이었다.
그 뒤 송(宋)나라로 망명했다가 조씨 일문이 복권하자 다시 한단으로 돌아왔다.
조승(趙勝)이 이끄는 한단 병사들은 용맹스러웠다.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날카롭게 제군(齊軍)을 몰아붙였다.
제장공(齊莊公)은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황하를 건넜다.
피해가 적지 않았다. 군사 수천 명을 잃었고, 장수 안리(晏氂)를 조승 군에게
포로로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참패였다.제장공(齊莊公)은 전에 없이 분노했다.
- 기어코 보복하리라!
51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