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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초기불교란 무엇인가? 3. 왜 초기불교가 중요한가? 4. 초기불교의 근본사상, 법(法, dhamma, dharma) 5. 법(法, dhamma, dharma)이란 무엇인가? 6. 법(法)은 교학과 수행으로 구성된다. 7.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離苦得樂]이다. 8. 열반의 실현이 궁극적 행복이다. 9. 법(dhamma)은 아비담마의 생명이기도 하다. 10. 법은 해체했을 때 드러난다. 11. 해체해서 보기는 초기불교의 생명이다. 12. 법은 어떤 방법론으로 고찰하는가? 13. 자상(自相)을 통한 공상(共相)의 확인 14.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아공법유를 주장하는가? 15. 맺는 말 |
1. 들어가는 말
먼저 발제자에게 주어진 이 주제는 발제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깊고 어려운 주제라는 점을 하소연하고 싶다. ‘초기불교의 근본사상’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대승불교로의 흐름’은 이 분야에 문외한인 발제자에게는 더욱 어렵고 난감한 주제이다. 게다가 발제자는 이 주제를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본 콜로키움이 있기 팔일 전인 5월 8일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제를 맡기로 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불교학에 깊은 식견을 가진 여섯 분들의 교수님이 토론자로 내정이 되어있으므로 소납이 다 하지 못하는 점은 토론자들께서 담당해주리라 생각하고 발제문을 적어보려 한다.
발제자는 ‘초기불교의 근본사상’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부터 생각해보았다. 발제자는 이것을 불교의 뿌리요 시작점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이해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우리는 불교(佛敎, Buddha-sāsana) 혹은 초기불교라 하고 이것을 불법(佛法, Buddha-dhamma) 혹은 법(法, dhamma, dharma)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리해보고 이것이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로 어떻게 전승되었는가를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초기불교의 근본사상과 대승불교로의 흐름’이라는 주제를 소화하려고 한다.
2. 초기불교란 무엇인가?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면 왜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에 넣는가? 초기불교의 직접적인 전거(典據)가 되는 니까야와 아함에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적지 않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은 니까야와 아함으로 전승되어 온다. ‘니까야(Nikāya, 部, collection)’는 5부 니까야로 전승되어 오는데 5부 니까야 가운데『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 긴 모음, 길게 설하신 경),『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中部,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상윳따 니까야』(Saṁyutta Nikāya, 相應部, 주제별로 모은 경),『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增支部, 숫자별로 모은 경)은 모두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부처님이 직접 사용하신 언어로 알려진 빠알리(Pāli)어로 전승되어온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다『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āya, 小部)의 7가지 경들, 즉『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법구경』(法句經, Dhammapāda),『자설경』(自說經, Udāna),『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장로게』(長老偈, Theragāthā),『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본생담』(本生譚, Jātaka)은 당연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인 초기불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말씀을 모은 것(經集)’으로 직역되는『숫따니빠따』는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은 가장 권위 있는 경이다.
‘아함(阿含, Āgama)’은 북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아함(阿含)은 아가마(āgama)의 음역이다. 아가마(āgama)는 ā + √gam(to go)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이 쪽으로 전해 온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전승된 가르침’을 뜻한다. 아함은『장아함』(長阿含),『중아함』(中阿含),『잡아함』(雜阿含),『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아함이 전승되어 온다. 이들은 각각 남방불교의『디가 니까야』(長部),『맛지마 니까야』(中部),『상윳따 니까야』(相應部),『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에 상응한다.
이들은 한문 번역본인 아함(阿含)만 남아있다. 한문 번역본의 저본이 되었을 범본 아가마(Āgama)는 극히 일부 단편만 발견되었을 뿐 지금은 소실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한문으로 축약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초기불교의 일차자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니까야와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청정도론』과 여러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들에서는 니까야와 아가마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4부 니까야를 4가지 아가마(catu Āgama)로 부르고 있으며(DA.i.2 등)『디가 니까야』를 ‘디가 아가마’로(DA.i.2)『맛지마 니까야』를 ‘맛지마 아가마’로(MA.i.1)『상윳따 니까야』를 ‘상윳따 아가마’로(SAṬ.i.6)『앙굿따라 니까야』를 ‘앙굿따라 아가마’로(AA.i.3) 부르기도 한다.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유가행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불교로 전개되어온 불교 2600년 역사에서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에 공히 같은 형태로 남아있는 불교체계는 초기불교 뿐이다. 그리고 남방․북방으로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전혀 다른 언어와 문자로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니까야와 아함이 서로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3. 왜 초기불교가 중요한가?
①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요 뿌리이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초기불교는 불교 만대의 기준이요 표준이며 잣대다.
무엇이 불교고 무엇이 불교가 아니냐는 판단을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③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체계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분석적이다. 이는 수학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과학이라는 현대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5온․12처․18계․22근․4제․12연기와 37보리분법으로 잘 조직되어 있는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체계는 과학적 접근 방법이다. 그리고 나와 세상을 신․수․심․법(身․受․心․法)으로 해체해서 살피는 수행태도는 과학자나 의사가 데이터나 환자를 객관화시켜서 잘 살펴보는 태도와 일치한다.
④ 초기불전의 매개 언어인 빠알리어를 비롯한 범어는 격변화와 동사곡용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한글과 같은 언어체계이다. 그러므로 한문 경전과 달리 문법적 구조가 정확하다. 따라서 문장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⑤ 초기불교의 이해는 자주적인 진정한 한국불교를 구현할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을 통해서 중국불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효 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다.
4. 초기불교의 근본사상, 법(法, dhamma, dharma)
이제 초기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부처님[佛, Buddha]의 가르침[敎, sāsana]을 불교(佛敎)라 하고 아울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法, dhamma)이라 한다. 이처럼 불교 특히 초기불교는 법(法, dhamma)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이다. 초기불전에서 법을 강조하시는 곳을 몇 군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A4:21)
임종에 다다른 왁깔리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22:87)고 말씀하셨으며 그런 뒤에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하시고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설하셨다.(「왁깔리 경」(S22:87))
“법을 의지처로 삼고[法歸依] 법을 섬으로 삼아라[法燈明].”(D16 §2.26 등)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M3)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 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과 나눈 대화에서, “바라문이여, 우리들은 귀의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우리는 법을 귀의처로 합니다.”(M108 §9)라고 바라문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22:87)는「왁깔리 경」(S22:87)의 말씀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 그대로 계승되어 다음과 같이 강조되고 있다.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若以色見我)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以音聲究我)
삿된 길을 걸을 뿐(是人行邪道)
여래 볼 수 없으리.(不能見如來)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dharmato Buddhā draṣṭavyā)
참으로 스승들은 법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22:87)는 부처님의 말씀은『금강경』에서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로 계승이 되었으며 대승불교의 여러 경론에서 법신불(法身佛)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돈과 재물을 제일의 가치에 두는 자본주의가 극대화된 지금의 대한민국에 사는 발제자를 위시한 출가자들은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M3)고 고구정녕하게 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할 것이다.
5. 법(法, dhamma, dharma)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법이란 무엇인가? 중국에서 법(法)으로 번역되어 정착된 담마(dhamma) 혹은 다르마(Sk. dharma,)는 √dhṛ(to hold)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현대의 여러 백과사전들도 다르마 혹은 담마를 간단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초기불전을 위시한 모든 불교 문헌에서도 담마 혹은 다르마(dhamma, Sk. dharma)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초기불전에서도 담마[法, dhamma]는 다양한 문맥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모든 법[諸法, 一切法, sabba- dhammā, sabbe dhammā]’을 설명하면서 법(dhamma)의 용처를 열 가지 경우로 설명하고 있다.(『초기불교이해』 73~74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J.R. Carter 교수는 상좌부 주석서 문헌에 나타나는 법(dhamma)을 정의하는 술어 33가지를 열거하면서 초기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법의 용처를 설명하고 있다.(『Dhamma』156~159쪽 참조)
법(dhamma)에 대한 경들과 여러 주석서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법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요, 둘째는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 一切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기한다. 전자는 ‘불법(佛法, Buddha- dhamma)’으로 정리되고 후자는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으로 일컬어진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전자의 의미로 많이 쓰이고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후자로 해석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것[任持自性]’이라는 기준으로 분석하고 분류하여 법을 표준화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佛法]과 일체법(一切法)은 같은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서도 “일체법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一切法 皆是佛法, sarvadharmā Buddha-dharmā, 제17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이 바로 법(dhamma)이요,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밝힌 것이며[一切法], 이것은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과 깨달음을 실현하는 토대가 된다.
6. 법(法)은 교학과 수행으로 구성된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초기불교의 법은 니까야와 아함에서 동일하게 전승되어오는 ① 교학(pariyatti)과 ② 수행(paṭipāda, bhāvanā)으로 정리된다.
⒜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5蘊․12處․18界․22根․4諦․12緣)의 6가지 주제로 집약된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여기서 무더기[蘊, khandha], 감각장소[處, āyatana], 요소[界, dhātu], 기능[根, indriya], 진리[諦, sacca], 연기[緣起, paṭicca- samuppāda] 등으로 구분되는 법들이 이 통찰지의 토양(paññā-bhūmi)이다.”(Vis. XIV.32)라고 정의하여 불교교학의 근간을 온․처․계․근․제․연의 여섯으로 설명하고 있다. 논장의 두 번째인『위방가』(分析論, Vbh)에도 제1장부터 제6장까지의 주제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나(오온)와 세상(12처, 18계)과 진리(4성제)와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12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르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는 부처님의 교학(pariyatti) 혹은 교법이라 부른다. 이것을 한자로 정리하면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이 되고 숫자를 넣어서 표기하면 5蘊․12處․18界․22根․4諦․12緣이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⑴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① 물질[色, rūpa] ② 느낌[受, vedanā] ③ 인식[想, saññā] ④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⑤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⑵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
⑶ 계(界, 요소, dhātu): 18계 = 12처의 마음[意, 마노, mano]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 가지.
⑷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① 눈의 기능[眼根] ② 귀의 기능[耳根] ③ 코의 기능[鼻根] ④ 혀의 기능[舌根] ⑤ 몸의 기능[身根] ⑥ 여자의 기능[女根] ⑦ 남자의 기능[男根] ⑧ 생명기능[命根] ⑨ 마노의 기능[意根] ⑩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⑪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⑫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⑬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⑭ 평온의 기능[捨根] ⑮ 믿음의 기능[信根] ⑯ 정진의 기능[精進根] ⑰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⑱ 삼매의 기능[定根] ⑲ 통찰지의 기능[慧根] ⑳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⑸ 제(諦, 진리, sacca): 4제 = ①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②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③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④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⑹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ṭiccasamuppāda): 12연기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나타낸다. ① 무명(無明) ② 의도적 행위들[行] ③ 알음알이[識] ④ 정신․물질[名色] ⑤ 여섯 감각장소[六入] ⑥ 감각접촉[觸] ⑦ 느낌[受] ⑧ 갈애[愛] ⑨ 취착[取] ⑩ 존재[有] ⑪ 태어남[生] ⑫ 늙음․죽음[老死]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憂悲苦惱]
이러한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는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반야심경』에서 온․처․계․제․연의 다섯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 초기불교의 수행은 사념처․사정근․사여의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의 7가지 주제로 구성된 37보리분법(조도품, 助道品)으로 정리되고 이것은 다시 계․정․혜 삼학과 사마타․위빳사나[止觀] 등으로 체계화되기도 한다.
37보리분법은『상윳따 니까야』의 45번째 상윳따(S45)부터 51번째 상윳따(S51)까지의 주제로 모아져있으며『위방가』제7장부터 제12장까지의 주제로 설명되고 있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도 세존께서는 삼학을 강조하셨다. 삼학(三學, tisso sikkhā)은 ‘세 가지 공부지음’으로 옮길 수 있는데 계(戒, sīla)와 삼매[定, samādhi]와 통찰지[慧, paññā]를 공부짓는 것(sikkhā)을 뜻하며 중국에서 계․정․혜 삼학으로 정착이 되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덕목이다. 계학(戒學)은 도덕적인 삶을 뜻하고 정학(定學)은 삼매 수행을 말하고 혜학(慧學)은 통찰지의 개발을 의미한다.『디가 니까야』「합송경」(D33) 등에는 “세 가지 공부지음[三學, tisso sikkhā]이 있으니, 높은 계를 공부지음[增上戒學], 높은 마음을 공부지음[增上心學 = 삼매를 공부지음], 높은 통찰지를 공부지음[增上慧學]이다.”로 언급되고 있다. 계․정․혜 삼학은『디가 니까야』제1권의 12개의 경들에는 23단계 계․정․혜의 정형구로 정리되어 있고 『맛지마 니까야』의 여러 경들에서는 15단계 계․정․혜의 정형구로 정리되어 나타나기도 하며 그 외 여러 경들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여러 전적에서도 계․정․혜 삼학과 사마타․위빳사나(samathaa,-vipassanā, 止觀)는 강조되고 있다. CBETA(Chinese Electronic Tripiṭaka Collection, Version April 2010, Chinese Buddhist Electronic Text Association)로 검색을 해보면 한문 경론에서 三學은 2485번이 나타나는 것으로 검색이 되었다. 戒學 혹은 增上戒學이나 定學(心學) 혹은 增上心學이나 慧學이나 增上慧學으로도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마타․위빳사나는 중국에서 止觀으로 옮겨졌으며 우리에게 천태지관이나 마하지관 소지관 등으로 알려져 있다. 止觀은 CBETA에서 12996번이 나타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온․처․계․근․제․연으로 정리되는 교학은 다시 제(사성제)로 축약되고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는 수행은 8정도로 귀결된다. 그리고 사성제의 도성제는 8정도를 뜻하고 8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바른 견해)은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S45:8)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이다. 즉 교학(이론)에는 수행(실천)이, 수행에는 교학이 포함되어 이론과 실천이 함께한다. 부처님의 최초설법인「초전법륜경」(S56:11)은 바로 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천명하시는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으로 정리되는 이러한 가르침들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종헌 제2조가 천명하는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며 역시 종헌 제2조가 강조하는 ‘전법도생’의 법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7.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離苦得樂]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한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법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불교의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행복의 실현이다. 부처님은 행복과 행복의 실현을 가르치셨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역된 많은 경론에서도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나타나고 있고(『大般若波羅蜜多經』『大方廣佛華嚴經』『大智度論』등)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불교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하여 왔다.(『백일법문』참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① 금생의 행복 ② 내생의 행복 ③ 궁극적 행복이 된다.(혹은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 SA.i.328 등)
8. 열반의 실현이 궁극적 행복이다.
열반(涅槃, nibbāna)의 실현이 바로 궁극적 행복[至福, parama-sukha]이다.(parama- sukhaṁ nibbānaṁ sacchikaroti, Mil.324; DhpA.iii.261 등) 초기불교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궁극적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는 것(nibbānassa sacchikiriya)이다.(D22, M51, S38:1 등)
그러나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문득 실현되지 않는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과 진리와 조건발생에 대한 교학적인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토대로 한 바른 수행이 필요하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교학(pariyatti)과 수행(paṭipāda, bhāvanā)은 강조되고 있다.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 주제로 정리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의 7가지 주제와 계․정․혜 삼학으로 요약된다.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하는『반야심경』의 목적도 ‘구경열반을 증득하는 것([得]究竟涅槃, niṣṭhā-nirvāṇa-prāptaḥ)’이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의 근본 목적을 밝힌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도 보살의 근본서원을 “뭇 삶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는 것(일체중생 …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 제3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유식에서 열반은 무주처열반(『成唯識論』,『攝大乘論』)으로 이해되었으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것으로도(生死涅槃二種平等,『大乘入楞伽經』) 생사와 열반이 생사와 열반이 서로 조화로운 것(生死涅槃尙共和, 『法性偈』)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정리해 보면,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이며 특히 궁극적 행복으로 불리는 열반의 실현이다.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법을 강조하셨으며 법은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갖추고 있다. 이론적 측면을 교학이라 부르고 실천적 측면을 수행이라 일컫는다. 교학의 주제는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 혹은 온․처․계․제․연의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수행의 주제는 37보리분법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이요 이는 계․정․혜 삼학으로 귀결되며 정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고 혜는 위빳사나 수행으로 완성된다.(A2:3:10) 이러한 교학과 수행의 주요한 가르침은 대승불교에서도 그대로 계승이 되었다.
9. 법(dhamma)은 아비담마(Abhidhamma)의 생명이기도 하다.
세계의 불교학자들은 불교 2600년의 흐름을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유가행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불교의 여덟 가지 큰 흐름으로 나눈다. 이를 큰 나무에 비유하면 초기불교는 불교라는 나무의 뿌리가 되고 아비담마(아비달마)는 그것의 밑줄기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각각 가지나 잎이나 열매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법(dhamma)은 ① 부처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②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고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법(dhamma)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뒤부터 이 법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불교의 밑줄기를 튼튼하게 한 불교가 아비담마이다. 문자적으로 아비담마(abhidhamma)는 abhi(① about, ② above) + dhamma(법)로 분해가 된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는 ① ‘법에 대해서(법에 대한 연구)’ 혹은 ② ‘수승한 법’이라는 뜻이 된다. ① 현장스님은 전자 즉 about(대하여)의 의미를 존중하여 구사론에서 對法(대법)으로 옮겼고 ② 진제스님 등은 후자 즉 above(위에)의 뜻을 존중하여 승법(勝法) 혹은 무비법(無比法)으로 옮겼다.
이처럼 아비담마는 ‘법(dhamma)을 연구하는(abhi, 對) 체계’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비담마는 법을 연구하는가? 아비담마는 ‘고유성질[自性, sabhāva, Sk. svabhāva]’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고찰하여 체계화하고 표준화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attano sabhāvaṁ dhārenti ti dhammā - DhsA.39)”으로 정의한다. 북방 아비달마의 논서인『아비달마 구사론』이나『구사론기』에서도 능지자상(能持自相) 혹은 임지자성(任持自性)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라는 기준으로 고찰하여 ① 고유성질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 즉 ‘빤냣띠(paññatti, Sk. prajñapti, 施設, 假名)’라 하여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개념적 존재(빤냣띠)는 허공 꽃과 같고 토끼 뿔과 같고 거북이 털과 같아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개념적 존재를 해체하거나 배제하고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존재가 실재하지 않음은 대승불교에서 인무아나 아공이나 무아상․무인상․무중생상이나 무수자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②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勝義法, paramattha-dhamma]이라 부른다.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바로 이 구경법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설하신 다양한 법들을 고유성질을 가진 것[任持自性]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이처럼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 법은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sabhāvaṁ dhārenti dhammā, DhsA.39 등, 能持自相 故名爲法『아비달마 구사론』)’으로 정의된다. 아비담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별로 분류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법을 일목요연하게 표준화하고 있는데 상좌부에서는 이를 심․심소․색․열반의 4위 82법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를 심․심소․색․심불상응행․열반의 5위 75법으로 정착시켰고 유식에서는 이를 발전시켜 5위 100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적통을 자부하는 상좌부 불교의 아비담마 체계는『아비담맛타 상가하』(Abhidhamma -ttha Saṅgaha)에 집약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대림스님/각묵스님 공역, 초기불전연구원, 초판 2002년, 11쇄 2014년)로 번역되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10. 법은 해체했을 때 드러난다.
초기불교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발제자는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말한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hajjaṁ) 설하시는 분”(S8: 8 {742})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이를 북방불교에서는 분별설부(分別說部)라고 불렀다.(『阿毘達磨俱舍論』,『阿毘達磨大毘婆沙論』등) 분별(分別)은 한국불교에서 다분히 분별망상(分別妄想)으로 이해되고 있어 발제자는 이 위밧자를 해체로 풀어서 옮긴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등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 지어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欲]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들의 일관된 흐름이다.(『초기불교이해』54쪽 이하, 139쪽 이하 등을 참조할 것.)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이유이다. 그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처럼 제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자아[我]니 인간[人]이니 중생(衆生) 이니 영혼[壽者]이니 우주니 하는 무슨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척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 반야중관에서는 我空으로 유식 등에서는 人無我로 표현한다.)
둘째는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러한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 해서 제법이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이를 반야중관에서는 法空으로 유식 등에서는 法無我로 표현한다.).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假名, 빤냣띠, 산냐]로 뭉뚱그려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존재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존재를 오온이나 12처 등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과 고와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할 때 불가능해보이던 중생의 해탈은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전뿐만 아니라 대승경전에서조차 무상(無常)을 통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통한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부르며, 무아를 통한 해탈을 공(空)해탈이라 천명하고 있다.(『화엄경』「정행품」) 토끼 뿔과 같은 자아에 계합하는 것이 해탈이 아니라 무상․고․무아에 사무쳐야 해탈이다. 불자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즉시 외도가 되어버린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11. 해체해서 보기는 초기불교의 생명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지워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그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 넌더리, 역겨움, 구토, nibbidā)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欲, virāga]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의 일관된 흐름이다.
불교적 인생관,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신념을 가진 부처님 제자라면 해체라는 관문에 들어서지 않고 불교를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석을 강조하는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이건,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중관이건, 종합을 강조하는 화엄이건, 그것은 모두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고유성질[自性]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발제자는 놀란 적이 있다.(아래 §12 참조) 이런 토대 위에서 그들은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초기불전에서 가장 절실하게 말씀하시는 이 해체해서 보기가 빠져버린 듯하여 실로 유감이다. 특히 여래장 사상을 중시하는 우리 불교는 법으로 해체해서 보라는 부처님의 명령(sāsana, 가르침)은 분별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초기불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불성과 여래장을 세우기에 급급하고, 본성자리를 상정한 뒤 그것과 하나 되려고 생짜배기로 용을 쓰고 있다. 해체하지 않고 무엇을 세우는 것은 비불교적인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설혹 해체해서 보지 않고 직관만으로 나와 세상을 공(空)이라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해체를 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외도의 자아이론(아상)이나 진인이론(인상)이나 영혼이론(수자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그토록 해체를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래장 계열에서 주창하는 여래장이나 진여나 불성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라는 깃발을 내걸고 외도 짓을 하는 현양매구(懸羊賣狗)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므로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든,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든,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든,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 할 것이다. 해체의 토대를 튼튼히 한 뒤에 직관과 종합을 해도 늦지 않다. 해체의 기본기에는 아예 무지한 채 법계장엄부터 하려드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장가부터 보내려는 조급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니겠는가. 위에서 밝혔듯이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고유성질[自性 혹은 自相]을 강조한다. 이런 토대위에 그들은 법의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뭉쳐두면 속고 해체해야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라.’이다. 뭉쳐두면 개념(paññatti)에 속고 법(dhamma)으로 해체하면 깨닫는다.
12. 법은 어떤 방법론으로 고찰하는가?
그러면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를 해체했을 때 드러나는 이 법은 어떤 방법론으로 고찰해야하는가?『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법들에는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 이 둘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를 [변형된다는] 개별적 특징[自相, paccatta-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ii.291∼292)
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적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개별적 특징과 보편적 특징 즉 자상과 공상이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의 주석서와 복주서 등의 문헌 수 백 군데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상좌부 불교에서는 법을 고찰하는 방법으로 자상과 공상을 채택하였으며 이것은 북방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경론에서 무수하게 등장한다.
이처럼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은 법(dhamma)을 파악하고 구명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과 여래장 계열의 모든 논서에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자상과 공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교교학을 논할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CBETA로 확인해 보면 『대반야바라밀다경』은 다음과 같이 자상과 공상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상윳따 니까야 주석서』(SA.ii.291∼292)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自相謂一切法自相。如變礙是色自相。領納是受自相。取像是想自相。造作是行自相。了別是識自相。如是等。若有為法自相。若無為法自相。是為自相。共相謂一切法共相。如苦是有漏法共相。無常是有為法共相。空無我是一切法共相。”(『대반야바라밀다경』)
법을 자상공상으로 고찰하는 방법론은 한역 경론들에도 무수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CBETA로 자상을 검색해보면 12404번 검색이 되고 공상은 10815번, 자상공상은 705번이 검색이 된다. 경우의 수를 더 줄여서 제법자상공상으로 검색하면 117번이, 일체법자상공상으로 검색하면 40번이 나타나는 것으로 검색이 된다.
예를 들면 能取諸法自相共相(『阿毘達磨順正理論』) 諸菩薩摩訶薩於一切法自相、共相皆應證知(『大般若波羅蜜多經』) 謂此論中分別諸法自相共相(『阿毘達磨大毘婆沙論』) 謂此心品善觀諸法自相共相無礙而轉(『成唯識論』)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아비달마 – 중관 – 유식 – 여래장 – 밀교 - 선불교의 수많은 문헌에서 자상과 공상 혹은 자상공상 혹은 제법자상공상/일체법자상공상은 도처에서 언급되고 있다.
13. 자상(自相)을 통한 공상(共相)의 확인
초기불전에서 세존께서 강조하고 계신 교학과 수행체계는 아비담마의 용어를 빌어서 설명하자면 ‘자상(自相)을 통한 공상(共相)의 확인’으로 정리가 된다. 물론 자상과 공상이라는 술어는 아비담마에서부터 사용되었지만 자상의 내용이 되는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과 37보리분법과 계․정․혜 등의 법들과 공상의 내용인 무상․고․무아는 초기불교의 핵심 내용이 됨은 자명하다. 오히려 자상과 공상으로 정리되는 법체계를 빼버리면 초기불전에 남는 것은 덕담이나 도덕적인 삶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등의 가르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체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불교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는 이미 인천교(人天敎)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후대의 불교들도 강조점에는 차이가 나지만 모두 이런 교학과 수행 체계를 받아들여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교라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는 ‘자상(自相)을 통한 공상(共相)의 확인’이라 정리된다. 고유성질의 특징(자상)에 따라서 법들을 분류하고 이들 가운데 특정 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공상)를 통찰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비담마․아비달마는 현장 스님이『구사론』에서 대법(對法)이라 번역하였듯이 ‘법에 대해서’ 즉 ‘법의 연구’를 강조하기 때문에 제법의 자상에 따른 분류를 중시하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무상․고․무아의 공상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본에 깔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교학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상좌부 아비담마는 여기에 투철하다.
물론 북방 아비달마 체계 가운데 가장 강력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 vādin)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一切有, sarvāsti].’는 부파의 명칭이 보여주듯이 제법의 자상(고유성질)을 확인하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하였다. 북방 아비달마 체계뿐만 아니라 모든 북방 대승불교 교학의 도구서적이 되는『아비달마 구사론』은 고․집․멸․도의 사성제의 입장에서 제법을 심도 깊게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제법의 모습과 성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고성제와 그 원인이 되는 집성제에 초점을 맞추어 제법의 자상 혹은 고유성질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상․고․무아의 보편적 성질 즉 공상(共相)을 무시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열반과 열반을 실현하는 도닦음(각각 멸성제와 도성제)도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지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는 모두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해탈․열반의 실현을 강조하지 않는 불교가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렇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거나, 자기 학파의 논리만을 내세우는 옹졸한 사람일 뿐이고 상대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는, 정말 상식이 없는 무뢰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발제자가 너무 심한 표현을 한 것일까?
14.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주장하는가
아비달마 특히『아비달마 구사론』이나『아비달마순정이론』등에서 보듯이 북방 아비달마가 이처럼 제법의 자상의 입장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반야․중관계열을 위시한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아비담마․아비달마의 입장을 아공(我空)은 설하지만 법공(法空)은 말하지 못하고 법유(法有)를 주창한다고 비난하며 그래서 아비달마를 소승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면 과연 아비달마 특히 남방 상좌부의 아비담마는 법유(法有)를 말하는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 존재 특히 나라는 존재를 오온 등의 법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은 법들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극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이다. 모든 유위법들은 무상․고․무아라는 보편적 성질[共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굳이 반야․중관적인 술어로 표현하자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도 법공을 논리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 한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제법을 명쾌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이런 입장을 실유(實有)라고 해버리면 반야․중관이야말로 법의 법자도 모르는 악취공(惡趣空,『成唯識論疏抄』등)에 빠진 자들이다. 반야․중관의 이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뿌리요 불교의 출발점인 세존을 소승배로 취급하는 오만방자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법의 고유성질[自相]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인 찰나(khaṇa)도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석서들은 강조하고 있다.(『초기불교이해』222쪽의 154번 주해와『아비담마 길라잡이』제4장 §6과 해설 참조) 서양에서는 이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亞刹那)’라고 옮겼다. 이처럼 찰나도 이미 흐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사의 적통이라고 자부하는 상좌부에서의 찰나는 절대로 상주론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찰나는 아마 중관학파의 가유(假有)나 가법(假法)의 입장과 거의 같은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무엇보다도『중론』은 “조건 지워져 일어나는[緣起]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ṁ tāṁ pracakṣmahe.)”(『중론』(24:18))라고 읊고 있는데 상좌부 아비담마는 제법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24가지 상호의존[緣, paccaya]으로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고 설일체유부 등 북방 아비달마는 제법의 상호의존을 6因-4緣-5果로 설명해내며 유식은 10因-4緣-5果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를 아공법유라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내가 쓰면 법공이고 네가 쓰면 법유인가?
법에 대한 반야․중관의 입장은 직관적(intuitive)이고 이것은 존중받아야 하고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 입장은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분석적(analytic) 입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존재를 해체하고 분석해서 제법의 무아를 천명한다. 과연 이러한 분석적인 방법이 없이 직관만으로 제법무아를 천명할 수 있는가? 발제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에서 난무하는 공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이 그것을 증명한다.
분석이 없는 직관은 신비적(mystic)일 뿐이다. 법에 관한 한 부처님께서는 와서 보라는 것(ehi-pāsika, S16:21 등)이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으며, 스승이 비밀스럽게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는 스승의 주먹[師拳, ācariya-muṭṭhi]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대반열반경」(D16 §2.25)에서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분석적인 방법론이 바탕이 될 때 직관적인 반야․중관의 입장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반야․중관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는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석과 직관이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견제할 때 그것이 진정한 중도적 입장일 것이다. 직관만 강조하다 보면 그것은 옹졸하고 편협하고 과격하고 극단적인 도가 되어버린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괴로움을 말하면 중관적인 입장에서는 괴로움은 본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중론』「관사제품」) 그런데 괴로움이 본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 괴로움이 없어지는가?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발제자부터 밖에 나가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무명이나 번뇌를 말하면 이것도 본래 없다고 할 것이다. 본래 없다는 말로 갈애와 무명이 해결되는가? 아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수행(bhāvanā)에 몰두하지 않고 머무는 비구에게 ‘오, 참으로 나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기를.’이라는 이러한 소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결코 취착 없이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무엇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다.”(「까뀌자루 경」(S22:101))
불교교학의 기본전제를 무시한 ‘오직 직관’은 곤란하다고 본다. 발제자는 오히려 초기불교와 초기불교의 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상좌부 아비담마의 ‘자상을 통한 공상의 확인’을 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더 멋진 설명으로 본다. 한국불교가 이러한 자상의 입장을 더 분명히 수용할 때 반야․중관에 토대한 직관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발제자는 확신한다.
15. 맺는 말
이상으로 발제자는 초기불교의 근본사상을 부처님이 강조하신 법(法, dhamma, dharma)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이것이 대승불교로 어떻게 흘러들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발제문에서 거론한 점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는 등의 법을 존중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태도는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는『금강경』의 말씀으로 계승이 되었고 이는 대승불교의 법신불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② 초기불교 교학의 기본 주제인 온․처․계․제․연의 가르침은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반야심경』에서 온․처․계․제․연의 공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하다.
③ 초기불교 수행의 기본 주제인 계․정․혜 삼학과 사마타․위빳사나[止觀]는 대승불교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지관겸수와 정혜쌍수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④ 초기불교의 목적이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의 실현도『반야심경』과『금강경』에서 그대로 계승이 되었고 유식과 여래장 계열 등의 경론에서도 중시되었으며 대승의 여러 경론은 열반의 개념을 두고 활발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⑤ 법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법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도 후대 불교 전적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⑥ 초기불교의 특징은 해체(vibhajja)해서 보기이다. 개념적 존재[施設, 假名, paññatti]를 해체하면 법(dhamma)이 드러난다.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를 대승불교에서는 아(我, ātman) 혹은 인(人, pudgal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념적 존재의 실체 없음과 법의 실체 없음은 대승불교에서 아공․법공 혹은 인무아(pudgala-nairātmya)․법무아(dharma-nairātmya)로 계승되었다. 아비달마는 아공법유를 주장하므로 소승이라는 식의 대승불교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공이니 법공이니 하는 대승불교의 논리를 따라 굳이 말하자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도 아공․법공 혹은 인무아․법무아로 귀결된다고 해야 한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의 성자(ariya)들을 10가지 족쇄(saṁyojana) 가운데 몇 가지를 풀어내었는가와 연결 지어서 설명한다. 초기불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열 가지 족쇄[十結, saṁyojana]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의 성자의 경지와 견도(見道, dassana-magga)와 수도(修道, bhāvanā- magga) 등의 문제는 상좌부 불교의 주석서들의 도처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북방 아비달마의 도구서적이라 할 수 있는『구사론』에서도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그리고 견도․수도에 대한 논의와 여기에서 발전한 번뇌장(kileśa-āvaraṇa)과 소지장(jñeya-āvaraṇa)에 대한 논의도『성유식론』과『유가사지론』등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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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5월 16일)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있을 제2회 동국불교 콜로키움의 발제문을 여기에 올려봤습니다.
주로 졸저 <초기불교이해>를 토대로하여 주섬주섬 챙겨 넣다보니 16쪽의 많은 분량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제도 어렵고 광범위하고 대승불교쪽은 문외한인데다가
4일만에 완성한 참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끄러운 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까페에 올리기를 망설이다가 그래도 까페의 법우님들과 공유하는 것이 도리이고
법우님들의 공부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여 오늘에야 이렇게 올렸습니다.
잘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각묵 합장
고맙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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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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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각묵스님 덕분에 사부대중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더 명확하게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 세미나 콜로키움 자리에 가보면 발제자나 관련 토론자들외에 참석률이 저조한편인데 대강의실임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어 돌아가거나 서있는 청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묵스님의 강의는 늘~~유쾌합니다. 고맙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 소중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스님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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