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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가장(梅軒公家狀)
공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겸익(謙益)이며 자는 자부(子裒)이고 호는 매헌(梅軒)으로 울산인이니, 곧 현감공(縣監公) 겸수(謙受)의 다섯째 아우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휘 예(藝)의 6세손이다. 중추공은 휘 종실(宗實)을 낳으니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수군절도사(行水軍節度使)였고, 수사공은 휘 직강(直剛)을 낳으니 봉사(奉事)였고, 봉사공은 휘 식(植)을 낳으니 충순위(忠順衛)였고, 충순위공은 휘 변림(變林)을 낳으니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정(訓鍊正)이었다. 훈련정공은 휘 우춘(遇春)을 낳으니 자가 응서(應瑞)로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이었고 처 흥려박씨(興麗朴氏)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자공(自恭)의 딸이었다.
만력(萬曆) 을해년(1575) 정월 29일 술시에 고을의 치소(治所) 서쪽 웅촌면 주남리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단아하고 엄중하며 온아하여 어린 나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크게 달랐다. 5세에 조부 상을 당하고, 18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그때 공은 범어사(梵魚寺)에서 독서하고 있었다. 4월 15일에 도적이 동래부(東萊府)를 함락하고 승승장구하였는데 공이 범어사 산길을 통하여 황급히 도망하여 본가로 돌아오니 쓸쓸히 사람의 자취가 없었으므로 이에 원적산(圓寂山) 일조암(日照菴)에 올라가서 비로소 모친과 여러 형과 만나 함께 난리를 피하였다. 그때 백형(伯兄) 현감공은 지혜와 용기가 무리에서 빼어나서 전장(戰場)에 드나들며 세운 기이한 공적이 많았다. 창의(倡義)한 여러 사람에게 이끌리게 되어 모친을 봉양할 수 없으므로 다만 때때로 도피한 산막(山幕)에 와서 뵈었을 뿐이었다. 오직 공은 슬하를 떠나지 않아서 봉양하면서 효성을 다하여 비록 엎어지고 자빠지며 도망가서 숨는 와중에도 드실 죽을 마련하고 단 음식을 반드시 구하여 드렸다.
이듬해 계사년(1593) 8월 초4일에 산막에서 모친상을 당하자 몸이 여위어 가며 예를 다하고 산골짜기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백씨는 또 조정의 명령을 받아 기복(起伏)하여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갔다. 그때 도적은 평양에서 패배하여 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울산으로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바닷가의 지면에는 군영을 파서 서로 지켰으나, 산과 들을 찾아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런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거제(巨濟)에서 왜적의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에 머물며 주둔하여 서해에서 들어오는 도적의 길을 막으니 전라우도 일대는 이로 말미암아 홀로 온전하게 되었다. 공은 그 소식을 듣고 넷째 형 겸복(謙福)과 더불어 곧 흉측한 예봉을 피하고 구걸하면서 나주의 관해(觀海) 선생 임공(林公) 댁에 이르렀다. 선생은 휘가 회(檜, 1562~1624)이고 자가 공직(公直)이니 곧 금호(錦湖)의 조카이고 송파(松坡)의 어린 아우였다. 금호는 퇴계(退溪)의 문인이었다. 그 가문의 성가(聲價)를 계승하고 그 연원을 이어서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고아함을 기르면서도 관직에 나가지 않으니 곧 한 시대의 유종(儒宗)이었다. 선생은 그때 또 상중(喪中)에 있다가 공의 형제를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 아껴서 그들을 안타까이 여겼다. 사모하며 봉양하는 3년 동안 학문과 예법을 가르쳐 성취에 이르게 하였다.
돌아와서 상복을 벗게 되자 공은 강개하여 의리를 떨쳐서 마침내 백씨의 임소(任所)로 가서 계책을 도와서 세우고 전쟁 중인 군진(軍陣)에 출입하여 자못 공훈이 있어서 행군자감참봉(行軍資監參奉)에서 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 전란이 막 평정되고 나자 불행하게도 백씨가 부임하다가 일찍 죽고 세 명의 형도 차례로 영락하니 나아가 성취함에 뜻이 없어서 옛집으로 물러나 돌아갔다. 전란 중에 상제(喪制)를 다할 수 없었다고 하여 대양산(大陽山) 모부인의 묘 아래에 장막을 엮고 여막(廬幕)에서 3년 동안 거주함으로써 유모(孺慕)와 호천(昊天)의 아픔을 부침으로써 지금까지 그곳을 가리켜서 ‘이공이 살던 여막 터’라고 부르고 있다. 전쟁의 화마가 스친 여파로 문득 한 상전벽해 세계가 이루어져서 가까이에 사인(士人)의 자녀가 없었으므로 전란 중에 배필을 정하여 건즐(巾櫛)을 받들게 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계축년(1625)에 이르러 공의 스승 관해 임선생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전적(典籍)이었는데, 그때는 혼조(昏朝)로 정사가 어지러우니 역신(逆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임선생의 정직함을 미워하여 거짓으로 죄안(罪案)을 만들어서 선생을 양산군에 유배하였다. 양산은 공의 거주지인 주남리와 거리가 2식(息) 남짓이었으므로 공은 선생이 유배되어 실의(失意)한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날로 유배된 곳으로 달려가서 뵈니, 선생은 공을 보고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눈물을 떨구었다. 이로부터 늘 문하에 가서 기다리면서 달고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먼저 모아 두었다가 소매 속에 넣어 가서 드렸다. 공경과 정성을 다하기를 부친을 섬기듯이 함으로써 이전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또 임선생이 유배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나 옷자락을 걷어들고 논란(論難)하였으며 더욱 성리(性理)의 학설을 듣고 일동일정(一動一靜)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지켜서 마침내 큰 유학자가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권하여 깨우치기를 “너는 나이가 아직 늙지 않았으니 속히 혼례를 올리는 게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자못 공의 혼인을 위하여 조용히 생각하였다. 그때 선생은 밀양부사와 친밀하여 문안이 서로 이어졌고, 또 밀양 사람 중에 책을 가지고 예를 묻는 자가 있었으므로 선생은 그래서 공에게 죽원(竹院)의 일직(一直) 손씨 가문과의 혼인을 권하였는데, 손씨 또한 영남의 사족이었다. 공의 혼인은 곧 천계(天啓) 2년 임술년(1622) 정월 27일로 공의 나이 48세 때였다. 그 뒤에 자손이 번성함은 선생의 덕이 아님이 없다.
이듬해 계해년(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유배되어 쫓겨난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니 임선생은 유배된 지 무릇 11년이었다. 마침내 불러서 예조정랑에 제배하고 곧 광주목사를 제수하였다. 천계 4년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경성에 들어오니 임금은 공주로 거둥하고, 선생은 고을의 군병(軍兵)으로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잡혀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공은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검은 갓과 흰 옷 차림으로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반장(返葬)하게 되자 공은 나주의 본댁에 달려가 곡하고 제사를 지냈다. 인하여 3년 동안 심상(心喪)하고 상복을 벗는 날에 이르러서 천 리를 멀다 않고 가서 제사 지내고 곡읍(哭泣)하면서 한결같이 옛 예법을 지켰다. 대상(大祥)이 끝나고 돌아가겠다고 고하자 선생의 부인 정씨가 그 의리에 감복하여 공에게 당(堂)에 오르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군(家君)께서 세상에 계시던 날에 누가 이 문하에서 노닐지 않았겠습니까? 먼 길에 제수(祭需)를 가지고 예를 다함이 이공과 같은 이가 없으니 진실로 믿음직한 정의(情義)와 도타운 성례(誠禮)가 아니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가군의 서책 몇 권을 특별히 공에게 드리니 이것 또한 잊지 못할 의로움이라는 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하였다. 공은 사양하지 못하고 받들어 받아서 돌아왔다. 시전(詩傳)·논어(論語)·통감(通鑑)·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책이 산질(散帙)로 지금까지 종손 집에 전해지고 있다.
공은 우아하고 고상한 취향이 있어서 젊어서부터 여럿이 어울려 글을 읽는데, 간혹 그 옆에서 즐겁게 장난치는 자가 있어도 마치 보이는 게 없는 것처럼 하였다. 날마다 부지런하고 조용하여 온후(溫厚)하고 단상(端詳)하여 일에 삼가고 바루지 않음이 없었다. 그 어버이를 섬김에는 정성과 공경을 두터이 하여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 드려서 비록 도망가며 흩어지는 와중이라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피며 입에 맞게 음식을 마련함에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함으로써 다하지 못한 상제(喪制)를 이었다. 그 형을 섬김에는 공경과 사랑을 깊이 하여 화락하고 우애가 깊었는데, 여러 형이 일찍 죽은 것을 종신토록 아프게 생각하여 여러 외로운 조카를 구휼하여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졌다. 늦게 결혼하여 아내를 얻으니 문정(門庭)이 엄숙하였다. 스승을 위하여 3년 동안 심상(心喪)하니 옛 예법에 부합하고, 임금을 위하여 의리를 떨쳐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검을 잡았으니 충의가 정성스러웠다. 전(傳)에 이르기를 “백성은 셋에 의해서 살아가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해야 한다.” 하였으니 아, 오직 공만이 그것을 다할 수 있었다.
늘그막에 정사(精舍)를 지어 매헌(梅軒)이라고 편액하고 꽃과 대나무를 심어 그 사이에서 읊조리며 소요하였다. 세상의 이러저러한 일을 사절하고 한 방에 단정히 앉아 도서를 좌우에 두고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방도를 더욱 닦으니 모두 자손과 후세의 법칙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공은 깊이 스스로 겸양하고 감추고 숨겨서 스스로 남보다 특이하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고상한 풍모와 아름다운 행동을 가지고서도 초야(草野)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사람들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인조 23년 을유년(1645) 12월 25일에 고종(考終)하니 향년 71세였다. 이듬해 병술년 봄에 연답(蓮畓) 향로봉(香爐峯) 아래에 장사 지냈는데, 이 산은 대체로 이름난 승려 성지(性智)가 잡아 준 곳이었다. 공은 임종 때 멀리 가리키면서 입으로 말하였으므로 그 바른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 뒤 자손이 요절하는 참사가 있었고 공의 넷째 손자 문백(文白)이 그 일을 주관하였다. 76년이 지나 경종 원년 신축년(1721) 12월 17일 오시에 옛 분묘를 파고, 임인년(1722) 정월 16일 인시에 옛 분묘의 서남쪽 10여 보 되는 신좌을향(辛坐乙向) 언덕에 다시 묻었다. 뒤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되었다. 부인 손씨는 만력(萬曆) 31년 계묘년(1603) 4월 초8일에 태어나서 20세에 혼인하고 숭정(崇禎) 14년 신사년(1641) 11월 초10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39세였다. 임오년(1642) 11월 14일 언양 천소(泉所) 무동산(舞洞山)의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고(考)의 휘는 시복(諟復)이고, 조(祖)의 휘는 호(顥)로 진사였고, 증조의 휘는 상운(祥雲)으로 장사랑(將仕郞)이었으며, 고조의 휘는 세흘(世紇)이었고, 외조 박문효(朴文孝)는 찰방(察訪)이었다. 모두 6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철성(鐵城) 이광계(李光啓)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고령(高靈) 김중석(金重碩)에게 출가하였으며, 장남의 휘는 정원(廷元)으로 결혼 전에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정헌(廷憲), 그 다음은 정의(廷義), 그 다음은 정례(廷禮), 그 다음은 정지(廷智), 그 다음은 정신(廷信)이었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매우 번성하였다. 아, 공의 훌륭한 덕성과 착한 행실이 어찌 후손과 노둔한 무리가 능히 분명히 밝힐 바이겠는가?
5세손 구암(瞿庵) 성오(省吾)는 삼가 쓰다.
公姓李氏 諱謙益 字子裒 號梅軒 蔚山人 即縣監公謙受之第五弟也 資憲大夫 知中樞院使 世子左賓客 諱藝之六世孫也 中樞公 生諱宗實 嘉善大夫行水軍節度使 水使公 生諱直剛 奉事 奉事公 生諱植 忠順衛 忠順衛公 生諱變林 武科訓鍊正 訓鍊正公 生諱遇春 字應瑞 尙瑞院直長 娶興麗朴氏 禦侮將軍自恭之女
以萬曆乙亥正月二十九日戌時 生公于府治西熊村面周南里第 公天質端重温雅 自髫齡 屹異凡兒 五歲遭皇考喪 十八歲値壬辰倭亂 于時公以讀書在梵魚寺 四月十五日 賊陷萊府 乘勝長驅 公由梵魚山路 蒼黃奔走 來到本家 寂無人跡 乃上圓寂山日照菴 始與母氏及諸兄相遇同避亂 其時伯兄縣監公 智勇出倫 出入戰場 多有異蹟 爲倡義諸公所挽 不能奉養母氏 但時時來謁于避幕 獨公不離膝下 供養竭誠 雖顚沛奔竄之中 饘粥之資 甘旨之味 必求進焉
翌年癸巳八月初四日 丁憂于山幕 哀毀盡禮 權窆于山谷 伯氏又被朝令 起服從軍 時賊敗於平壤 捲兵南下 自蔚山至于順天 沿海地面 掘營相守 搜覓山野 恣行殺掠 而李統制舜臣 大破倭賊舟師于巨濟 留屯閑山島 以遏西海入寇之路 全羅右道一帶 由是獨全 公聞之 與第四兄謙福 轉避凶鋒 乞行至羅州觀海先生林公家 先生諱檜 字公直 即錦湖之猶子 松坡之穉弟也 錦湖退陶門人也 繼其家聲 襲其淵源 優游林泉 養高不仕 即一世之儒宗也 先生時又居憂 一見公兄弟 奇愛悲憐之 思養三年 教訓學禮 俾至成就
及還服闋 公慷慨奮義 遂赴伯氏任所 贊畫籌策 出入戰陣 頗有勳勞 行軍資監參奉 陞奉事 亂甫平定 不幸伯氏赴任早卒 三兄次第零落 無意於進取 退歸故莊 以亂中不能盡喪制 結幕于大陽山母夫人墓下 居廬三年 以寓孺慕昊天之痛 至今人指爲李公居廬址 兵火之餘 便作一滄桑世界 近無士人子女 以亂中作配 使奉巾櫛焉
荏苒至癸丑 公師父觀海林先生已登第 官典籍 時昏朝政乱 逆臣爾瞻等惡林先生之正直 誣成罪案 配先生于梁山郡 梁山與公居周南里 相距二息餘 公聞先生賦鵩 不勝驚愕 即日馳謁於謫所 先生見公歡喜 握手爲之垂泣 自是常往候於門下 寸甘粱味 必先收蓄 袖去進獻 竭盡敬誠 如事嚴父 以報宿昔之恩 且林先生謫居 己多年所 摳衣論難 益聞性理之説 一動一靜 皆遵先生之敎 遂成大儒 一日先生勸喩曰 汝年未老 從速禮聘可也 自是頗爲公娶默念焉 時先生與密倅素善 存問相續 且有密人挾册問禮者 先生因爲公勸婚於竹院一直孫氏家 孫氏亦嶺之士族也 公之旭朝 卽天啓二年壬戌正月二十七日 公時年四十八 其後螽羽之詵詵者 莫非先生之德也
越明年癸亥仁廟改玉 盡還流放諸人 林先生在謫凡十一年也 遂召拜禮曹正郎 尋除廣州牧使 天啓四年甲子 逆适入京城 上幸公州 先生以府兵迎戰 戰敗被執 罵不絶口而死 公聞先生死 以玄冠素服 北望痛哭 及返襯 公奔哭致祭於羅州本宅 因行心喪三年 以至服闋之日 不遠千里 祭奠哭泣 一遵古禮 及祥畢告歸 先生夫人鄭氏感其義 請公入堂語之曰 吾家君在世之日 孰不遊此門 遠路齎奠盡禮 無如李公者 苟非情羲之孚 誠禮之篤 烏能及此乎 家君書册略干卷 特以授公 此亦傳道不忘之誼也 公辭謝不得 拜受而歸 詩傳論語通鑑東醫寶鑑等 卷散帙 今傳在宗孫家
公雅有高趣 自少群居讀書 或有嬉戲於其側 若無覩焉 日用勤靜 溫厚端詳 無非謹勑之事 其事親也 篤於誠敬 承順悅豫 雖奔迸之中 溫凊滫瀡 靡不用極 廬墓三年 以續未盡之制 其事兄也 深於敬愛 湛樂友于 以諸兄之早沒 終身思痛 恤諸孤姪 撫若己子 晚娶有室 門庭肅然 爲師心喪三年 合於古禮 爲君奮義 白面杖劍 忠義拳拳 傳曰 民生於三 事之如一 噫惟公能盡之矣
晚築精舍 扁之曰梅軒 樹以花竹 嘯詠逍遙於其間 謝絕世故 端坐一室 左右圖書 研精覃思 益修修齊之方 皆可爲子孫後世則 然公深自謙讓鞱隱 不欲自異於人 故終使高風美行 送老丘樊 人無知者
仁廟二十三年乙酉十二月二十五日考終 享年七十一 翌年丙戌春 葬于蓮畓香爐峯下 此山盖名僧性智所占 公臨沒時 遙指口命 故失其正穴 其後子孫 有夭折之慘 公第四孫文白主其事 越七十六年景廟元年辛丑十二月十七日午時 破舊墳 壬寅正月十六日寅時 改窆舊墳西南十餘步辛坐乙向之原 後贈漢城府右尹 夫人孫氏 生于萬曆三十一年癸卯四月初八日 二十歲成婚 終于崇禎十四年辛巳十一月初十日 享年三十九 壬午十一月十四日葬于彥陽泉所舞洞山乙坐辛(向)之原 考諱諟復 祖諱顥進士 曾祖諱祥雲將仕郎 高祖諱世紇 外祖朴文孝察訪 凡六男二女 長女適鐵城李光啓 次女適高靈金重碩 長男諱廷元未娶早歿 次曰廷憲 次曰廷義 次曰廷禮 次曰廷智 次曰廷信 內外曾玄極爲蕃衍 嗚呼公之懿德善行 豈後孫駑劣輩所能闡明哉
五世孫省吾謹書 瞿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