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 사월이 한창이다.
봄이 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꽃들이 경주를 하는 사월.
출발선에 웅크렸을 때 눈치보던 어린 봄,
봄이 착! 하게 착해지기를 기다려 세상 모든 꽃들은 착하게 다툰다.
서로 지기위해 다투니 신은 이 세상에 화가를 대신 보내어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색을 입히는 것으로 보답하였다.
이에 여신의 마음에 깃드는 이상한 상사병.
신은 질투하여 이 잔인한 사월에 마지막으로 시인을 선물하였다.
진달래 꽃을 보기 위해 보름 전부터 시인의 가슴으로 뛰었다.
4월 17일 일요일은 4월의 절정.
피기로 약속한 꽃은 저마다 아낌없이 온몸을 흔들어 샴페인을 터뜨렸다.
햇살은 어느덧 깊어 있었고 저 멀리 빛나는 산은 온통 진달래.
산이 잎사귀 돋는 연두도 아니요 나무들의 진초록은 더욱 아니다.
온통 꽃분홍 진달래로 기어오르는 산.
놀라운 분홍산, 이런 산이 있었다.
도화지에 분홍산을 칠하고 이런 산 있다고 우기는 아이를 그려본다.
아마도 그 아이는 틀을 벗어난 미술선생님에겐 독특한 영감을 안기고
시를 이해하는 국어선생님에겐 영롱한 시어를 안기리라.
여수 영취산, 진달래를 가슴으로 읽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기 좋은 산.
길가엔 산앵두가 만개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산앵두와 닮은꼴 산벚나무도 봄산을 수놓는다.
제비꽃이 길을 붙잡았다.
늘 그렇듯 가만히 웃는 꽃
늘 그랬듯 무릎 꿇는 나.
땅속에 집을 짓고
봄날 잠시 흙을 빌리는 제비의 처소.
제비꽃은 그냥 가라 하는데
나는 자꾸만 엎드려 이 무슨 봄 얘긴가.
같이 간 미소언니의 친구분은 고사리가 지천이고 이름모를 나물이 지천인듯 쉽게 캐셨지만,
도무지 내 눈엔 고사리는커녕 진달래나 제비꽃 이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
손에 든 나물 이름이 용애나물이라 했는데, 옛날에 임금님 수랏상에 올랐단다.
삼겹살 구워 먹을때 함께 싸서 먹으면 미나리처럼 알싸한 향기가 난다는 잎.
나는 그래도 제비꽃잎을 닮았구나, 이해하며 걷는다. 물론 드디어 한 솎음 캐긴 했다.
미소언니와 언니의 친구인 나물박사.
산을 통해 알게 된 미소언니는 넘치는 감동 에너지를 간직한 만년 소녀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슴의 신명이 기쁨을 발산하라 말하는 것일까.
언니의 환호성은 그냥 씩 웃는 나와 차별되며 마음속까지 즐기는 감동을 어떡해서라도 표현해야
감정에 보답하는 거라 믿는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도 손동작 하나, 함박웃음 하나,
팔로 날개를 만드는 동작 하나하나에 쉼없는 감정의 동요와 재치가 번떡인다.
순간의 감동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저 행복한 표정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이 표현된다는 건 내겐 저 산너머의 영역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신기했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언니와 산행 후미팀을 꾸리게 되면서
무언가 내게 느낌이란게 전해져왔다. 스스로를 발굴한다는 느낌!
씩씩하고 활달한 성격에 살아가는 아픔이나 눈물 지을 일따윈 가슴에 묻었다는 느낌!
여행을 통해 생의 씁쓸함을 훌훌 터는 것을 터득한 사람이라는 느낌.
활달할수록 생의 이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미소언니의 삶을 아직 잘 알진 못해도 그 쾌활함에서 간혹 보이는 한 두마디의 경험치들은
두루두루 내공을 쌓은 자의 것이었다. 좋은 풍경에 우리 부부를 앉히며
우리가 가진 자체의 순수함을 그렇게 끄집어내 주는 것은 도대체 어떤 혜안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오늘도 미소언니의 쾌할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찬 인생의 맛을 보고 배운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벗이 되고 산에서 만난 사람은 스승이라 하고 싶다.
진달래 속으로 진입한다.
기쁨과 행복이 도란도란 터지는 마을길을 걷는 기분이다.
말하는 것이 목울대를 타고 그저 울리는 것처럼
사소하게 느껴지는 짧은 감탄사.
흉내에 급급한 립스틱이 초라하다.
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분홍빛 나비 한 마리!
철계단 건너 영취산 정상(510m)을 향해 갈 때도
여러 무리의 분홍 얼룩이 군데군데 초록과 봄을 다투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살고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느긋하게 생활에 스며들듯
아름다운 분홍이, 한때 밀쳐두었던 촌스럽다는 그 꽃다운 색깔이
가슴으로 스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달래가 아름다운 영취산은 진례산(510m)과 영취산(439m)을 합쳐 영취산으로 불렀는데,
최근엔 옛이름 찾기의 하나로 둘을 구별해 부른다고 한다.
영취산은 석가모니가 최후로 설법을 폈던 인도 영취산과 모양이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데,
나는 도무지 이 새로운 가설앞에 이제 고개를 끄덕이고싶지 않다.
나이 먹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일까. 어떤 것에 서린 학습의 흔적이 소중했던 한때를 비웃듯이
감정에 와닿는 이 순간의 사소한 것들이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배짱이 두둑해지니 말이다.
알게 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점이랄까.
알게 되었을 때가 희열이었다면 받아들이는 것은 수긍하는 것 같다.
삶은 어쯤 돌다리 하나 건너듯 무엇에서 무엇으로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루봉 오르는 계단 한켠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다가 나는 바람을 느끼게 되었다.
길지도 않은 5분의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5분이란 알고보면 얼마나 미약한 휴식의 시간인가.
그럼에도 그 어느 단잠보다 귀중한 5분의 휴식.
그때 내게로 불어오며 땀이 베인 몸을 말리는가 하면 시원하게 안마까지 해주던 산바람.
한 떼의 아이들이 무리지어 내려오는 나무계단으로 어디서 불어오는 꽃바람인지,
바람으로 멱을 감은 내가 잠시 앉았다 일어서는 것으로도 날아오를것 같던 달콤함.
산에서 쉬는 5분동안 나는 나룻배처럼 산뜻하게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시루봉을 향해 갈때는 가져간 물이 바닥날 정도였다.
어느덧 봄은 여운을 남기지 않으려는 메마른 일간지처럼 읽히다 버려지고
가져간 물은 곧이어 더운 여름이 무참하게 우리를 찾으리라는 것처럼 밍밍하게 목을 적셨다.
계절은 너무 빨리 돌고 우리의 시간은 고속회전한다.
지나간 날들이 어제 일보다 또렷한데 벌써 몇해전의 일이라는 말을 겁없이 나누었었다.
지금도 나는 젊지만, 그것에서 불안을 느낄 때 내 몸은 정밀한 기계처럼 반응하였다.
결코 젊지 못하지만 나이들지도 않았기에 젊음의 뒤안길이란 그 말이 와닿는 걸까.
문득 생각할 때 우리의 시간은 젊은 날의 혈기보다 불안정해 보이고 가팔라 보인다.
삶의 시간이 자꾸 빠르게 돌아 목마름처럼 간절한 무엇이 우리를 치기 때문일까.
그러나 봄의 연둣빛은 날개를 달았다.
가만히 돋움할 수 없는 이 신록의 필살기.
무리진 세때처럼 들나비처럼
온 산을 휘감아 오르는 저 푸릇한 신기루들.
나는 가던 걸음 잠시 잊는다.
뾰로롱 뾰로롱 피어오르는 풍금소리 들리는 듯,
그래도 아직 푸릇한 살가움이 있다는 온갖 자상한 내용들.
아, 이제야 봄이 태어나고 있구나.
목마름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건 아니구나.
이 연둣빛이 초록으로 짙어질 기간보다 우리의 시간은
온갖 내용으로 가득 찰 것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진달래 꽃산행은 잘 꾼 한바탕 꿈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했다.
( 우리는 GS칼텍스 - 월내재 - 골명치 - 철계단 - 도솔암 - 평바위(시루봉)
- 영취산을 지나 - 삼거리에서 흥국사 가는 길을 택했다.)
흥국사 앞에선 택시를 타고 원점으로 가야 해서 다급하게 뛰어야 했다.
다리가 아파 웬만해선 산행을 미루는 친한 언니는 다녀온 이후 계단을 못내리는 병(?)에 걸려
방문턱도 살살 디뎌야 했지만, 아름다운 산행이었다는 것에는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어딘가로 떠나야 돌아와서 편히 살 것처럼 여행을 떠난다고도 하고
바람 한 번 쐬고 와서 생기는 활력의 덕으로 여행이 소중하다 하지만,
여행은 그냥 '그냥'인 것 같다. 사는 것에 이유를 대라면 막연해지는 그냥의 살이들.
그러면서도 알차고 내실있는.. 말보다 나은 실속들로 꽉 찬 살이들.
그냥 살아간다 해도 하나 실망할 것 없는 진득한 사람들의 더 진솔한 이야기들.
그냥 살이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말하라 하면 이상해지고 그냥, 해버려도 좋지 않을까.
여행은 그 속에서 꿈에 속하는 한 부분처럼 아직까지 동경이자 설렘이다.
그냥 동경하고 설레는데, 그게 그저 좋은데... 이유란 어리석다.
첫댓글 화~~ 온 산허리를 휘돌아 화르르 화르르 불타오르는 진달래, 영취산의 진달래가 저리도 화려하더냐? 나도 며칠전 황홀한 진달래랑 놀다 왔는데 꽃이랑 또 놀고 싶어진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흥얼흥얼... 3년 전에 대만을 함께 여행한 분이 돌아 올 그리운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은 즐겁다고 하데.
요번 사진은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좀더 화사하게 잡아야 했는데, 실물에 비해 마음이 너무 앞섰나봐요. 다녀와서 바로 쓰지 못해 그 감흥이 못미쳤는지 글도 안되대요. 너무 아름다운 것에 하찮은 감정이 따라갈 수 없었던 것처럼...
기가 찬 사람 둘이 만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