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목 | 관객모독 |
대본 | http://www.artsonline.or.kr/ 대본이 안떠요;; 이곳에 가서 보세요^^ 대본을 보실수 있습니다.(왜 안뜰까;;;) |
원제 | Publikumsbeschimpfung |
부제 | 극단 76극장 제13회 공연 |
극단 | 76극장 |
대표 | 기국서(奇國敍) |
제작 | 76극장 제작부 |
기획 | 76극장 기획실 |
작가 | 페터 한트케//독일 |
번역 | 양혜숙(梁惠淑) |
연출 | 기국서 |
홍보 | 디자인//최정우//인쇄//광성문화사 |
총무 | 예산집행//이상철 |
기타 | 운영위원//강능원,, 송승환//기타//이광성,, 김명림,, 박경호,, 박정애,, 김정규,, 최종만,, 권칠인 |
인물수 | 합4//남//여//아역//기타 |
출연 | (최영준// // ) (조주미// // ) (박동과// // ) |
등장인물 | ( //네 명의 화자 (話者)// ) |
공연일정 | 1979.10.27-1979.11.20//서울 76소극장//1979.11.22-1979.11.26//부산 Cafe Theatre//1979.12.1-1979.12.2//전주 시민회관 |
구분 | 번역극//실험극//언어극 |
작품구성 | 단막 |
심의 | (심의접수일자//1984. 2. 21) (심의접수번호//23) (심의일자//1984. 2. 21) (심의결과//통과) (관람구분//미성년자 관람불가) |
배경 | //무대// |
줄거리 |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오게 되면 으레 작품이 상연되기 전까지 극장 나름의 익숙한 분위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러 소리들을 들려 주고, 안내원으로 하여금 격식을 갖추지 못한 관객의 출입을 통제한다. 연극이 시작되면 배우들의 걸음걸이를 비룻하여 조명 등 모든 것이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배우들은 두서없는 욕설을 마구 퍼붓는다. 배우의 환영의 말을 시작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형상이 없는 새로운 연극, 관객과 배우들은 통일체가 되어 간다. 생각은 자유롭고 관객들은 더이상 방청하는 게 아니라 말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연극이 관객들의 일상생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으며 환상이나 현실의 일부도 아니다. 남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체득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얘깃거리를 만드는 것도, 함께 상연하지도 않는다. 단지 함께 상연되어질 뿐이다. 이게 바로 언어 연극이다. 연극의 무대와 연기와 소품 모두가 실제 존재하는 것이며, 연극을 위한 것이 아닌 현실 그대로의 공간의 의미를 갖는다. 극적인 사건도 없고, 카타르시스도 없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이 연극의 중심이며 촛점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공간은 다른 공간으로 기만되지 않으며 다른 세계로 통하는 어떠한 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말의 표적이며 비유의 대상물이다. 침묵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며,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관객들은 이 연극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관객에 대한 모욕을 시작한다. 여기서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처럼 흘러 간다. 단절되지 않고, 그러나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은 채, 다만 말장난인 언어연극에 쓰여지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아무 기교도 아니며, 결말도 없고, 미래를 형상화하지도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말을 할 뿐이다. 관객들은 뭔가를 표현하고 있다. 좌석에 앉아 있는 것조차도 질서이고, 연극에 응시하고 있는 것 또한 참여이다. 앉아 있을 때와 일어섰을 때에 차이점을 말한다. 배우들은 어떤 감정도 육체화하지 않고 오직 말로만 표현한다. 관객들은 모든 것을 의식하게 되지만 우리들의 말에 의해 침착하게 된다. 여러 가지 요구를 하지만 관객들 따라 하지 못한다. 아직도 관객들이 현재를 의식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배우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연극이 그 리얼리티를 살리지 못함으로 해서 그 순수성을 상실했다. 시간과 함께 상연되는 연극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한 연극만이 진정한 연극이다. 연극에 우연이란 저절로 생기는 일은 불가능하며, 모든 건 사실 그대로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모든 것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말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연극은 서두에 불과하다. 다른 연극의 서두가 아니라 행했던 일과, 지금 행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행할 일에 관한 서두이다. 그 외 수많은 것들의 서두이다. 이 작품이 끝나기 전에 배우들은 관객들을 모욕할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마음껏 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즉시 막이 내린다. |
작품설명> | ((송동준(서울대 인문대 독문학) < 한트케의 극작품 상연은 번번이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종래의 연극과는 전혀 다른 형태 및 내용을 담았다. <관객모독>은 그의 최초의 반묘사극적 연극이다. 그것은 종래의 묘사극 방법에 적용된 일체의 굳어져 버린 '사실성'을 잃은 형식들을 부정하고 있다. 이 극은 앞에 둔 관객을 주제로 한 관객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서문이다. 관객을 주제로 하여 연극에 대한 관객의 관습적 종래의 태도를 관객 자신에게 말해주며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종래적 자기망각의 태도에서 벗어나 무대와 직접적 관계를 갖게끔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관객을 향해 욕설을 사용한다. 이것은 동시에 종래의 전통적 연극에 대한 비판 및 부정이고 또한 환상을 위주로 하게 될 모든 극에 대한 비판 및 부정인 것이다. 무대가 의미 공간을 나타내는 종래의 연극은 연극의 본래적 기능을 망각한 '불순한' 것으로 한트케는 비판하고 있다. 현대극을 대변하고 있는 소위 '서사극' 연극의 기능적인 면에서는 전통극과 다름 없는 '불순한' 현상으로 그는 보고 있다. 그것은 브레히트가 '서사극'의 기본 모델로 그리고 있는 '거리장면'의 현장 재현적, 현장검증적 기능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발생했던 행위를 재현하는 현장검증이 아닙니다." 현실이 아닌데도 마치 현실인 양 구성하는 가상 및 허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연극이 전제들을 이와같이 일체 부인한다. <관객모독>은 '언어극'으로서 현실을 언어로 중개되는 언어 외적인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속에 내재된 현상을 나타낸다. 이때 말과 말 사이의 침묵된 부분은 종래의 극에서처럼 어떤 표현수단이 될 수 없다. 언어의 유희, 언어의 형식 속에 담기게 됨으로써 이 현실의 체험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개념 및 파악의 전제를 제시해준다. <관객모독>속의 현실은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들의 현실이며 그들이 밟고 있는 무대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관객의 현실로서 일상의 자연스러운 표현형식, 즉 부정 모욕 등의 형식에 담겨 있다. 페터 한트케의 극은 브레히트 소외효과, 소위 대중예술(pop Art), 헤프닝스(Happenings), 구체문학(Konkrete Poesie), 형식주이 및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의 언어문제에 있어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은 L.비트켄슈타인의 언어 이론이었다. 그는 언어를 단어 및 문장이 지니는 내용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관찰했다. 그의 주된 언어이론서인 <철학적 분석(phiosophische Untersuchungen)>에 담은 중심사상을 한트케는 다음과 같이 인용 서술하고 있다.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체계를 해명하고자 하는 철학자들만이 단어의 뜻에서 구원을 받는다." 비트켄슈타인이 말하고 있듯이, '말에 있어서 그 단어의 사용'이다. 말의 의미를 사용의 방법에 의존시킨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이론은 한트켄의 형식주의적 문학관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언어의 기능적 관찰을 통한 실증주의적 언어분석은 언어를 이름 팻말에 불과한 죽은 물질적 수단만이 아닌 실제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능이 있음을 명백히 해준다. 언어에 산 힘이 있어 그것은 인간의 사고는 물론 행동의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언어를 단순히 묘사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그것은 이 후자의 산 기능을 무시한 부당한 처사요 부당한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율성은 조종 및 조정의 기능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한트케는 언어의 실제를 그것이 묘사하는 사물에서 보지 말고 그것이 작용하는 사물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보통의 언어 사용자에게는 잘 의식되지 않는 이러한 언어의 자율적 기능을 음흉한 힘으로 보고 이 '음흉성'을 파악하고 나타내 보이도록 하는 것이 문학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트케의 문학은 특히 그의 극은 언어를 통한 인간의 자동화를 저해하기 위해 언어가 지닌 그러한 힘을 투시하고 들추어낸다. 비트켄슈타인의 말을 빌어 문학의 활동을 '언어의 수단을 통해 우리들 오성의 마법에 걸려드는 데 대한 투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영애 <<정직한 삶의 참 모습>> 흔히 현대의 독일문학을 조망할 때 시(詩)의 정치화 내지는 정치의 시화(詩化)와 언어(言語)라는 테마의 두 가지 흐름을 이야기한다. 앞의 흐름은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 지렛대를 놓고 양자택일을 작성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뒤의 흐름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어문제에 집중하는데 이들 역시 그것을 정치적인 원인으로 귀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사회적 조건이 바뀐다고 해서 언어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첫계열에 속하는 사람이 페터 바이스, 엔켄스베르거 등이고, 둘째 계열에 속하는 사람이 하이센뷩텔, 한트케 등이다. 사실 문학이 언어속에서 산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유독 오늘날의 문제일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시대에서 특이한 것은 언어가 사고의 한계라는 인식이 자라면서 언어는 문학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 되었다는 주지의 사실이다. 말하자면 카프카의 말대로 문학이 '진실에의 탐험'이라면 언어는 오늘날 낡은 수레가 아니고 탐험이 향하는 비밀에 싸인 목적지가 된 셈이다. 이는 많은 현대 작가들에게 해당되지만 특히 Handke에게 적용된다. 프랑스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스스로 밝힌 것은 유명하다. 그의 많은 작품연보중에서 대략 눈에 뜨이는 작품제목만 보더라도 우리는 한트케가 어디쯤 서 있는 작가인지 짐작할 수 있다. 두말할 나위없이 우리시대 한가운데 서 있는 1942년생의 작가이다. '서독 비평의 총아' '이미 자기 시대의 시그널적 존재' '젊은 문학의 쇼우보이'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작가' 따위로 불리울 만큼 소설, 희곡, 시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또한 귄터 그라스 이후 가장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진 독일어계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문단에서 그의 기반을 굳혀준 두 개의 연극작품 <관객모독> <카스파>에서부터 한트케의 작품을 꾸준히 관류하는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 체제의 노출을 들 수 있다. <관객모독>에서는 연극 '극장'이란 체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고착된 의식세계의 해방이 겨냥되고 있다. <관객모독>은 배우 네 사람이 나와 마음 내키는 순서대로 대본을 단조하게 읽으며 '힛 퍼레이드'의 스타일로 관객의 연극에 대한 기대를 하나하나 대화, 무대장치, 휴식, 줄거리, 시간, 작가와 관중의 거리 등 연극의 모든 기본 요소가 부정된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굳어버린 어법이나 판에 박힌 언어에 대한 비판이고 나아가 문학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연극의 도구를 부정함으로써 관중으로 하여금 그들이 고착된 의미의 강요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형식화된 기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케 한다. 관객의 모욕은 결국 관객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학사상>>1977.11월 중에서-)) |
참여의말> | ((번역의말//양혜숙(이화여대 독문학) <<전통에 대한 도전의 시도>> 인류의 역사는 전통과 전통에 대한 절실하고 용감한 도전의 반복속에 이어져 가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합쳐진 '생(生)'의 양면성의 과녁을 뚫고 이루어지는 한 개인의 완성을 거듭 밟으며, 부서지고 이루어지며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며 전통인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 유산으로 내려오는 문화의 전통이란 그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 개인이 창의성에는 무거운 짐으로 부각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류 집단에게는 맹목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있어 전통이란 한없이 편리하고 필요한 마음이 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집의 구조와 배치도가 시대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하듯이, 전통 또한 천재적이고 시대 초월적인 한 개인의 창의력을 통해 변형되기 마련이다. 서구의 연극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몇몇 천재들에 의하여 몇번의 획기적인 도전이 시도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도전의 시련을 겪으면서 자라온 서구의 연극사를 거울 삼아 우리도 한동안 한국 연극의 현위치를 찾아보려고 애써 왔과 그 결과 남의 역사에 투영된 나의 모습을 찾는 길 보다는 오히려 직접 나의 원천과 나의 전통을 찾아 보는 길이 오히려 지름길이라는 것을 터득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오늘날의 잇닿은 창작극만의 무대에서 우리는 이러한 한국 연극의 또 하나의 발전상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연극이란 예술이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출발하여야 하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발돋움해야 된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 다른 나라의 연극예술의 발전상에서 우리의 연극현실을 투영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연극적 전통을 찾는 일과 세계 연극발전을 더듬는 일을 병행하여 한국의 연극원천을 민족적 차원에서 찾는 동시에 세계적 차원으로 발돋움해야 함이 마땅하리라 믿는다. 개미만한 한 개인의 힘을 모아 신의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실존을 입증하고 파악하기 위해 페터 한트켄는 서구 연극 전체의 무거운 전통에 도전을 감행하였고 그 결과 그는 <관객모독>을 세상에 내놓았다. 개인의 차원에서 역사와 세계에 도전을 시도한 한트켄의 천재성에 감명을 받은 바 컸음을 고백하며 무엇보다도 근 2천여년을 거듭하여 쌓아온 연극전통에 정확한 과덕을 시도한 그의 대담성과 명확성에 대한 찬사로 이 작품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번역을 하면서 부러웠던 것은 전통의 줄기가 그렇게 명확하게 도전의 대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그의 역사적 현실이었다. 이제 76소극장에서 이번 공연을 통해 이루어질 연극적 결실의 목적과 원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개될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동시에 또 한번의 용감한 도전을 통해 착실하고 단단한 연극사의 주춧돌이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 ((출연의말//최영준 <<또 한번의 살풀이를--->> "흰 분칠에 빨강코로 사랑얘기 들려줬지 영원히 변치말자 하아던---." 한달동안 공연히 빈 새끼손가락질만 해대고 "굳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굳어버리게 되는 겁니다."하며 핏대를 세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거의 일년만에 또한번 관객과 서로 빤히 쳐다보며 악 써야되는 살풀이를 하게 됐다. 이는 필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페터 한트케라는 색안경낀 독일 박수무당의 신이 들린 게 틀림없으렸다. "해프닝을 위한 해프닝이 아니다." "우리가 먼 센세이션을 노린 욕질인 줄 아냐? 성실, 친절, 진지하란 말여" 국서형의 총알같은 말을 귀따갑게 들으며 무대에 올랐던 <관객모독>의 공연 첫날 눈이 나빠 저 초롱거리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붙잡진 못했어도 느낀 전율, 그래서 열심히 지껄이고, 소리지르고 울고, 웃고 그리고 암전. 박수소리와 함께 우리의 홍일점, 주미 양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더랬다. 부담이 컸을 것이다. 나는 욕지꺼리에 생긴 흥분감을 누르며 한트케의 예지에 박수를 보냈다. 욕먹을 질문일 줄 뻔히 알면서도 "국서형, 이거 꼭 해야됩니까?" 어쨌거나 애매모호하게 뒤통수를 후려치려는 국서형의 심사나, 경이롭게만 돌리던 남의 나라 말들이나, 하긴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근로기준법과는 거리가 먼) 연습 덕분인지 그래도 주봉이 발음은 카터를 닮아가고, 영락없는 JAL 스튜어디스 조주미, 장폴 동과등 기라성들에 어깨를 견주며 어디 그럼 나도 이소룡(李小龍)---? 또 다시 치를 관객과의 살풀이, 어떻게 판가름될까?)) |
작가소개> | ((1942년 오스트리아 그리펜 태생의 젊은 작가 한트케의 명성과 업적은 그 젊은 나이에 비해 대조적으로 수없이 많고 다양하다. 특히 언어연극의 개념을 파악하고 연극에 있어서의 언어의 한계성과 언어의 무한한 포용력을 동시에 제시한 그의 희곡작품은 독일어권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에서도 많은 관심과 찬반의 격론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가 받은 상만 하여도 하우프트만상을 비롯하여 실러상, 뷔히너상 등 독일 문단의 최고상들이며 그의 비정치적이고 비사회참여적 작가 태도는 그의 작가로서의 순수한 성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전후 독일의 유일한 작가단체(47그루우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기존작가들에 대한 도전으로 기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당시 25세밖에 안된 그는, 사실세계나 겨우 반영하는데 급급한 전후파 기존작가에 대항하여 새로운 작품을 쓰겠노라 장담하였고 그후 10년을 통해온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하기 이를데 없다. 3편의 장편소설, 단편 23편(2편의 단편, 21편의 이야기) 8편의 희곡 작품, 두권의 시집, 4편의 라디오드라마, 한 편의 시나리오, 한권의 평론집 등. 이렇게 다양한 작품형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제는 오직 하나, 반영의 세계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어떻게 작품화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의 투철한 언어는 철학에 뿌리박고 있으며, 또한 고전적인 명료함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희곡작품은 <카스파>(1968년), <보덴 호수 위로의 기마(騎馬)>(1970년), <미성년자가 성인이 되려 하다> 등이며 여기 번역된 <관객모독>(1966)은 한트케를 연극계에 데뷔시킨 획기적인 작품이다.)) |
이미지 | 원래 이미지 몇개가 있었는데요..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던 홈피가 폐쇄가 됐나봐요.. 이미지가 안떠서 재가 임의로 지웠어요^ㅁ^출처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입니다^^ |
첫댓글 쫌;; 예전 글입니다만;;;;;;ㅠㅠㅠㅠ
이거 어디서 본듯한데 생각안남... 나이가 먹어갈수록 건망증만 심해지고 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