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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인
박정하 노모가 쓰러지셨다.
그해 여름, 봉락리 방앗간에서 발을 헛디뎌 첫 낙상한 후 8년이 지난 봄날이었다. 그러니까 2012년(85세)은 발을 헛디뎌 계단을 미끄러진 경우였다. 장성한 자식들 숫자대로 쌀 방아를 찧어주러 출타했었다. 방앗간에 들어갔다가 주인이 보이지 않자 바깥으로 나올 때 하필 태양이 직선으로 쏟아져서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뭔가 헛다리를 짚는다는 느낌으로 몸이 기우뚱하더니.
퍼퍽.
엉덩방아를 찧었다. 처음에는 그냥 사소한 실수인 줄 알았으므로 낟알을 쪼으러 오구르르 모여있던 참새 떼가 일제히 포릉포릉 날개를 쳤을 뿐이다. 몸이 끊어지도록 아팠으나 그보다 먼저 구경꾼들의 눈이 더 부끄러웠다. 그냥 ‘허허’ 웃으며 슬그머니 일어서려 했었다. 이상하다. 일어서려고 다시 무르팍에 힘을 주는데 한쪽 다리가 아예 사라진 듯 ‘휘청’ 하더니 풀자루처럼 주저앉는 것이다. 소스라쳐 비명을 지르자 방앗간 아저씨가 후두두 달려 나왔다.
그렇게 복숭아뼈가 부러진 것이다. 늙은이들은 뼈가 푸석푸석한 석회질로 되어있기 때문에 엉덩방아 한 방에도 쪽박 깨지듯 부서지곤 한다. 회복은 어렵다. 부러진 부분의 골막으로부터 골절이 만들어져 뼈가 붙는 작용을 해야 하는데 골막이 없어지면 뼈의 성장이 멈춰지면서 재생 기능까지 잃기 때문이다.
입원 직후, 당신께서는 치미는 부아를 더 못 견뎌 하셨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쪼그랑 할머니가 되어 병실 침대에 등을 붙여야 한다는 게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더 힘든 건 굴욕감이었다. 간병인이 바지를 벗겨주었고 엉덩이를 씻기며 대소변을 수발했다. 85세의 쪼그랑 할머니가 되어서야 생전 처음 젊은 사내 앞에서 알몸을 보여주는데 하필 반말이다. 젊은 의사가 노모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다가 친한 척.
“절대로 일어나면 안 돼요. 한 번만 더 넘어지면 끝장이야.”
“운동은 못하나요?”
“말씀이라고 해. 지금 또 부러지면 다시는 못 고쳐. 알겠지? 왜 대답 안 해요?”
반말투가 거슬린 노모께서.
“우리 자식 나이가 60이우.”
그제야 젊은 의사가 재빨리.
“할머니 병 빨리 나으시란 뜻이지요.”
그렇게 겨우 경어체 카드를 받아내었다.
이번에는 뇌경색이었다. 93세 어느 봄날 ‘휘청’ 쓰러지면서 그 후 영원히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모든 게 바뀌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주사를 맞았고 침대에 누워 먹여주는 밥으로 살았다. TV나 신문은 당연히 없었다. 핸드폰 통화도 사라졌다.
딱 하나, 그미의 이름을 다시 찾게 된 점 하나만 특이한 사건이다. 소학교 시절에는 ‘박정하’였고 군청서기 때는 이름 두 자를 뺀 ‘박 양’이었으니 70여 년 만이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 군청 서기 시절에 호명하던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소환된 것 하나만 좋아진 것이다. 그랬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이었다.
70여 년 동안 이름자가 사라졌었다. 스물셋 늦깎이로 시집오면서 20년 이상은 ‘규호메’였으니 ‘김규호 어머니’라는 서산 사투리의 준말이었다. 40년 후 남편이 퇴임을 하고 아들 김규호가 어른이 되면서 다시 ‘하늘랄메’로 변경되었으니 손녀 ‘하늘이 할머니’의 줄임말로 한동안 불리기도 했다. 가장 품격 있는 호칭은 ‘사모님’이었는데 남편 김구원이 오랫동안 교장으로 복무하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그래서일까, 젊은 날부터 남의 집 품앗이를 거부하면서 동네 논두렁 아낙들과의 차별을 보여주었다. 호미 들고 밭을 매기는 했으나 자기네 텃밭으로만 한정시켰다. 그리고 항상 깔끔했다. 호미질이 끝나면 깨끗하게 닦은 다음 다시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밥상과 부엌부터 정돈했다. 그 대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했으며 가족들에게 따순 밥을 올리고 정작 자신은 남은 찬밥을 처리했다.
괜찮은 인생도 있었다. 다섯 자식을 대학에 보냈으며 남편의 정년퇴임 후 부부 동반으로 동남아와 유럽까지 다녀오는 화양연화의 노후도 있었다. 아파트에 정착한 노년에도 그 흔한 아파트 경로당조차 나가지 않았다. 교장님 출신인 김구원은 오히려 경로당에 들러 고스톱도 치는 소탈함을 보여주는데 그미 혼자 요지부동이었다. 5월 어버이날 경로잔치에도.
“같이 구경 가.”
지아비의 간절한 요청도 설레설레 도리질 쳤었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늙은 할미끼리 오그르르 모여 줄을 맞춰 박수치고 춤을 추는 게 싫었다. 쪼글쪼글 늙은 주름살끼리 모여 젊은 선생의 손짓을 보며 키득키득 따라 하는 게 유치원생처럼 유치해보였다. 그게 자존심이었고 그만큼 외로웠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독서와 TV 시청으로 노후를 보냈다. 그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드라마의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시간대를 챙기며 기다리기도 했다. 외출은 딱 한 곳, 소도시 시장 골목 ‘광천새우젓’ 사무실 소파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물전 사장 김숙자의 아버지 역시 교장님 출신이어서 남편 연줄로 ‘어머님’ 소리로 방석을 내주는 그 자리가 가장 편안했다. 귀가할 때마다 젓갈 한 통씩 팔아주면서 어른의 체통을 세웠다.
그 권위가 뇌경색 한 방에 모래성처럼 무너진 것이다. 뇌의 동맥이 막혀 혈액이 흐르지 못해 뇌 조직이 괴사하는 병이다. 그렇게 병동에 입원하면서 영원히 격리될 줄은 모친께서 차마 예상치 못했다.
처음 쓰러졌던 85세 때가 더 충격적이긴 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 석지옥(51세)라는 장년의 간병인을 고용한 것이다. 피부가 백옥같이 하얗고 눈동자가 호수처럼 출렁였다. 그 여자가 가느다란 손으로 노파의 식판 수발을 들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러나 노모는 80여 년 만에 다시 기저귀를 차면서 수발하는 간병인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특히 돌싱의 이력을 못마땅해 하며 혹독하게 날을 세웠다. 밥을 먹다가도.
“남자가 자주 찾아온다.”
실제로 오후 두 시만 되면 깎은 밤톨 스타일의 사내 하나가 병실 바깥에서 기웃거리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노모는 그 흔적을 꼬치꼬치 묶으려 했다. 석지옥이 뾰루퉁 인상을 찌푸리면.
“일당을 받았으면 말을 들어야지.”
목청 크게 세우려 했다. 심지어.
“너는 간병인으로 온 거냐? 연애하러 온 거냐?”
소리를 질러 병실 사람들을 석고처럼 굳게 만들기도 했다. 20일 후 퇴원을 하고 나서도 노모는 지팡이를 짚게 된 자신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때까지는 그렇듯 불안하나마 자존감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랬다. 그때까지는.
8년 후, 두 번째 쓰러지셨을 때는 요양보호사의 방문을 받을 즈음이었다. 남편의 사망 후 요양보호사가 ‘주당 5일 하루 4시간’씩 방문하여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살림도 소소하게 거들었다. 다섯 명의 자식들이 순번을 짜 주말을 채워주는 구조로 간신히 노후가 지탱되는 중이었다.
2019년 3월 이후 코로나 시국이 도래하면서 그나마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산공단에 근무하는 요양보호사 남편의 회사에 코로나 접촉자가 나타난 것이다. 환자가 아니라 접촉자였지만 센터에서 대번에 요양보호사의 케어를 일시 차단해버렸다. 그 대신.
“다른 요양보호사로 임시 대체할께요.”
그 수습책마저도.
“혼자 살 수 있어.”
단칼에 거절한 게 마지막 자존심이다. 노모 혼자 일주일을 보내는 게 불안했지만 맏아들 김규호 역시 ‘형제들이 돌아가며 방문하면 될 거야’ 하며 우물쩍 넘어간 게 이유이다. 부천에 사는 남동생 김규철의 주말 방문 순번이었는데 형제 카톡으로.
“부천에 확진자가 생겨서.”
망상망상 주저하자 노모께서.
“오지 마. 아직은 끄떡없어.”
쉽게 대답하는 바람에 김규호까지 동생에게.
“가지 마. 타이어 바퀴에 균이 묻어 전파되면 다 죽을 수도 있어.”
전날보다 3명이 늘어나 코로나 확진자가 전국에 13명으로 집계되니 긴장되는 상태이긴 했다. 그렇게 보호자 없는 며칠이 이어지다가 노모가 쓰러지면서 비상사태가 발생했고 심약한 자식들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이다.
처음 탑승은 소도시 시립병원까지 가는 119구급차였다. 응급실에서 MRI와 CT를 연달아 찍더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 대도시로 옮기고 싶으면 연락을 해드리고요, 아니면 그냥 여기에서 약물 치료를 해드립니다.”
“약물로도 치료가 되나요?”
“아니오.”
“…….”
“가족의 결정에 따릅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점병원으로 두 번째 앰뷸런스를 몰았으니 이동비만 현금으로 18만 원이 들었다. 새로운 대학병원으로 옮기자마자 또 MRI와 CT를 연달아 찍었지만.
‘먼저 병원에서 찍었는데 그 자료로 대체하면 안 됩니까?’
머뭇머뭇하던 그 말이 절벽처럼 막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조건 노모를 눕히고 돌리고 꺾으며 주사를 놓고 사진을 수십 방 찍더니 수술실로 직행했다.
CT는 몸속을 투과하는 방사선을 컴퓨터로 영상화하는 장치이다. X선관을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단면으로 잘라 해부학적 구조의 변형과 질환의 유무, 성격 등을 알아볼 수 있다. 회질, 백질, 혈액, 종양, 뇌척수질 등의 섬세한 차이를 데이터로 기록하며 3차원 영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반면에 MRI는 자기공명영상이다. 자석통 안에 들어가 신호의 차이 값을 측정한 다음 컴퓨터로 재구성하여 영상화시킨다. 환자의 자세 변화 없이 인체의 영상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CT는 부위에 따라 4∼10만 원이며 MRI는 한 부위 당 30∼60만 원인데 요즘 병원에서는 무조건 두 검사 모두를 병행시킨다. 비용이 부담되지만 거부할 수도 없으며 병원의 특성상 표정 관리도 잘해야 한다.
그렇게 노모가 입원하면서 박정하 피붙이 형제들에게 모든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과거라는 진행이 차단되면서 지금 이 순간부터 현재이며 앞으로가 미래라는 시간적 구분이 확연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문득 망우동 매하 이모가 떠오르기도 했다. 노모보다 열두 살 적은 용띠 동갑인 매하 이모는 이른 나이인 75세 어느 날 뇌의 핏줄이 터지면서 7년째 입원 중이다. 처음에는 착한 이모부께서.
“누워 있어도 집에 아내가 있다는 게 든든해.”
그렇게 흥부 같은 마음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다가 7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아내의 수발에 최선을 다하던 이모부 역시 등이 굽더니 검버섯 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3년째 즈음에 슬쩍 던지던 하소연의 농도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제 힘이 빠졌어. 경비도 다 떨어지고.”
몸과 돈에 시달리는 그 이중고의 시간이 잦아지면서 전화 통화도 민망해졌으니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문장 그대로였다.
그때까지는 코로나라는 용어조차 모를 때였다. 2020년 3월 어느 날, TV 화면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TV에 등장하여 코로나라는 새로운 용어의 사태를 설명하는데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동그란 얼굴에 두툼한 입술,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담담한 표정들이 뭔가 음험한 불안을 예고하는 것이다.
노모의 통장에 적힌 마지막 현금이 1억 원이었으니 초고령 노인네로서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 돈을 툭 털어 손주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불현듯 선언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규호네 5남매 모두 딱 두 명씩만 생산해서 손주가 ‘2 곱하기 5’로 도합 딱 10명이었다. 당연하지만 노모 역시 자식보다 손주 사랑이 더 두드러졌다. 부양 의무 없이 사랑만 쏟으면 되는 조건이 안락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91세 어느 날 갑자기 손주들 10명에게 500만 원씩 보내면서 딱 절반인 5,000만 원이 잘려 나갔다. 손주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깜짝 선물을 감사히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맏아들 김규호를 부르더니.
“나머지 5천만 원 모두 손주들에게 또 줘야겠다. 1인당 오백만 원씩.”
순간 김규호의 머리에 복잡한 셈법이 엄습하면서.
“기다려 보시지요.”
“손주들 푸릇푸릇 이쁠 때 빨리 나눠주고 떠나야지. 저승에서 무슨 돈이 필요하겠니?”
“갑자기 왜 그래요? 돈이 필요 없다니?”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면서도 문득 ‘이승’과 ‘저승’이란 단어가 짙게 다가오는데.
“행복할 때 가는 게 가장 좋은 죽음이야.”
“기다려봐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응답한 ‘혹시 무슨 일’이 실제로 터진 것이다. 그리고 박정하 노모의 치료비는 일단 나머지 5천만 원 통장에서 지출하게 되었으니 노모의 ‘통 큰 결심’을 차단시킨 게 형제들 입장에선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했다.
2021년 현재 간병인에게 입금시키는 금액이 가장 크고 나머지는 감당할 만하다. 입원 사흘째, 청구서 꼭대기에 수술비 2000만 원이 적혀있어서 숨이 콱 막혔는데 실제 납입액은 127만 원이라서 ‘휴우’ 안도하는 동시에 깜짝 놀란 것이다.
“왜 이렇게 싸지?”
뇌경색의 경우입원 28일까지는 보호자 부담금이 수술비의 5프로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20-30프로로 상향 조정되지만 1년 병원비 총액 600만 원이 넘으면 몇 달 후 다시 통장으로 환급되는 시스템이다. 누나 김규옥네 재미교포 아들, 딸의 가족들도 병원 수속을 미루었다가 한국에 올 때마다 병원을 찾는단다. 한국과 미국의 병원 경비의 차이가 무시무시하다나. 딱 하나, 한국 땅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경비가 있으니 그게 간병비이다. 14개월 동안 1인 간병인을 고용하자 노모 통장의 마지막 잔고 알토란같은 5천만 원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크다. 너무 크다.
간병인은 85세 때의 석지옥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을 만났다. 나이는 50대에서 70대 초반까지였으며 두 사람은 조선족 출신이었고 나머지 네 명은 토종 한국인이었다. 한 사람을 빼고 대부분 키가 작았으며, 혼자 사는 여자가 셋이고 나머지 절반은 남편이 있었다. ‘좋은 사이’도 있었고 ‘나쁜 사이’도 있었으니 저마다의 사연들이 지난하다. 그중에서 다섯 번째로 만난 간병인과 가장 오래 함께 하면서 그만큼 의지했던 것 같다.
병원마다 코로나 검문이 엄격하게 바뀐 줄은 막상 겪을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 출입문에서부터 촘촘한 그물망 수속 절차를 마쳐도 좌우지간 가는 곳마다 닦고 조이면서 낯선 방문객을 호시탐탐 핀셋으로 찍어내는 것이다. 김규호 역시 수배자처럼 덫에 채이듯 끌려 나왔다. 무심히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3층 문이 열리자 하얀 셔츠를 입원 젊은 사내 세 명이 안쪽을 살피더니, 대뜸.
“나오시지요.”
드라이한 어투에 초장부터 기가 죽었다. 옷깃에 표찰을 찬 여자들이.
“저는 간병인인데요.”
“저도요.”
그렇게 간병인 표찰을 찬 사람들을 열외 시키더니 다시 간병인과 당일 보호자 딱 한 명으로 여동생 김규선도 제외시킨다. 드디어 김규호만 딱 찝어.
“나오세요.”
“나는 보호자요. 오늘 입원한 환자의…….”
입원 첫날도 보호자는 딱 한 사람만 허용되는 규칙을 전혀 몰랐으므로.
“아저씨, 나오세요.”
“나도 보호자라니깐, 왜?”
티격태격도 못한 채 끌려 나오니 그 후 병원 어디에도 몸을 둘 곳이 없어졌다.
그 종합병원은 전국에 열 개 정도가 포진된 계열사 그룹인데 지난달 그중 하나가 코로나에 노출되면서 병동 전체가 문을 닫았단다. 동시에 나머지 계열사 병원의 신뢰도까지 추락되었으니 사태가 말이 아니다. 죄우지간 코로나 환자가 발견되었다는 소문만 터지면 와르르 문을 닫는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2층 건물 전체의 100여 명의 의사와 수백여 명의 간호사와 직원들 그리고 비정규직 알바들까지 싸그리 손발이 묶이게 되니 그게 한반도의 코로나 계엄령이다. 집회나 종교 모임은커녕 학교 수업조차 받을 수 없으며 친교를 위한 식사도 할 수가 없다. 환자 옆에는 딱 한 명의 보호자만 허(許)하게 되었으므로 그 후로는 간병인 표찰을 바꿔 차야만 면회가 가능했다. 그건 그렇고.
간병인은 24시간 풀타임 근무이며 보호자가 지불하는 일당 9만 원에서 센터에 떼어주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수입이다. 환자를 14일 정도 연달아 돌보다가 겨우 몇 시간 외출 후 다시 병실로 돌아오는 구조이다. 그러다가 환자가 퇴원하거나 세상을 떠나면 다시 센터로 복귀하여 로테이션 순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노모의 첫 간병인은 북간도 출신 이미숙인(57세)으로 청량한 먹머루 눈빛이었다.
“죄송하지만 간병비 얘기가 되었나요?”
“9만 원요.”
날마다 내주는 사람 입장에선 만만찮은 금액이다. 간병비는 일당직이 기본이지만 장기 입원의 경우 휴일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고 법에 규정되어 있다.
“부탁이 있는데요. 할머니, 식사 때 밥 한 공기만 추가해주세요.”
노모의 밥상에 젓가락 하나 올려놓으면 그만큼 절약이 된다니, 그러마고 했다. 아무튼 간병인들은 돈 쓸 시간이 없으므로 거꾸로 번 돈의 몽땅 저축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10년을 채우면 소액의 연금 수급도 가능하니 3D 업종의 고단함 대신 노후가 쬐끔은 보장되는 시스템이다.
조선족 출신인 이미숙 간병인은 어투에서부터 딱 ‘을’의 표시가 나타났다. 한국 정착에 성공은 했지만 막상 지난한 난관들이 고달프다며 지금도 동업 직종 본토인의 텃세를 호소하는 중이다. 김규호가 느끼기에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에 만났을 때의 커튼이 활짝 열린 채 ‘하하호호’ 웃던 안락한 공기가 사라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면회를 갈 때마다 어렵쇼, 수상한 풍광이다. 모든 커튼이 내려진 채 싸-한 공기로 변신한 것이다. 모두 새로 등장한 키다리 간병인 때문이라고 수근대는 중이다. 그러니까 불과 몇 명의 공동체라도 저마다 보듬어주는 품성이 다른 것이다. 노모를 괴롭힌 옆자리 간병인인 그미를 그냥 ‘송’이라 부르겠다.
그 첫 갈등은 노모의 움직임 때문이다. 혼몽 상태에서 간신히 팔을 움직였는데.
“왜 건드려?”
‘송’이 기차 화통소리로 벌떡 짜증을 냈단다. 안타깝다. 조선족 출신 이미숙은 토종 간병인의 기에 눌려 ‘그러지 말라우요.’ 항의조차 못했다고 종시 억울해한다.
송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표정을 지니고 있으니 하나는 화사함이요, 또 하나는 싸늘함이다. 환자 정면에서의 싸늘했던 표정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사한 사슴 눈빛으로 변신하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미소와 우수가 혼재된 그 표정 또한 진실이므로 얼핏 청량하게 가슴을 울릴 수도 있다. 특히 목사님과 전화할 때는 허리까지 싸리회초리처럼 낭창낭창 흔들면서 청량한 톤의 언어를 내뿜는다.
“단 한 마디도 놓칠 게 없어요. 목사님 말씀은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비단주머니 해법 단추로 풀어주시네요.”
그러다가 담당 환자와 ‘면 대 면’이 되는 순간 B사감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몸을 다루고 팔을 비튼다. 그의 환자 역시 의사 표현을 전혀 못하므로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박정하 노모 역시 휘두르는 대로 고스란히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규호도 아내와 함께 면회를 갔다가 오픈게임에서 기가 꺾였다. 노모의 굳어가는 손등을 조심조심 쓰다듬는데 송이 다가오더니 낮고 강한 톤으로.
“한 사람은 나가세요.”
두 사람 면회는 금지라는 그게 병동 규칙상 맞는 말이긴 해서.
‘아니, 의사도 아니고 경비원도 아닌 사람이 왜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항의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 커튼을 내리고 노모와 눈빛만 맞추며 몸을 바싹 낮춰 나오려는데. 송이 2번 침대 간병인에게.
“우리 엄마 맡아주세요.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
부탁하는 표정이 자연스럽다.
‘이게 뭐지?’
‘환자 외에는 사용 금지’ 팻말이 붙은 실내 욕조에서 그 여자 혼자 샤워를 시도하는 것이다. 간병인들은 복도 끄트머리 화장실을 사용하라는 규칙을 당당하게 어기니 그게 내로남불 타법이다. 남들의 법과 원칙에는 엄격하되 자신의 규칙 위반에는 관대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규호는 숨죽이는 수화(手話) 면회를 끝내고 살금살금 나왔다. 흐흐흐, 이번 면회도 성공이다, 비로소 안도하며……그리고 또 하나, 송이 환자에게 붙이는 ‘엄마’라는 호칭만큼은 정겨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았다. 동시에 ‘부모처럼’이라는 어휘에 이중성도 어렴풋이 느꼈고.
여동생 김규선 역시 면회 금지 상태에서 환자를 만나려니 위장 진입 작전을 쓸 수밖에 없다. 간병인 명찰을 빌려 차고, 대기실 벤치에서 혼자 쉬게 한 다음 이차구차 수속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간신히 진입했는데 하필 그때 송이 노모에게 호통치는 장면을 만났으니, ‘딱’ 걸렸다.
“팔 치우라구횻! 왜 자꾸 넘어와. 내 말을 개무시하나.”
노모의 팔뚝이 침대 모서리를 넘어 옆구리에 스치자마자 송이 ‘아이구 아야’ 아픈 표정으로 생쑈를 한다는 얘기는 이미숙 간병인에게서도 두어 번 들은 바 있다. 지금도 송은 혼자 솔개처럼 눈을 부라리는 중이고 가련한 노모 혼자 병아리처럼 발발 떠는 상황이다. 나머지 침대는 모두 성벽처럼 닫힌 채 움쩍도 하지 않는다. 아, 내 노모가, 구십 평생 도도한 자존감 하나로 살아오신 그 노모가, 한반도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박정하 씨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눈빛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장면이다. 그것도 절반 이상 반말 투인데.
“팔을 꽁꽁 묶어놔야지, 도대체 성경을 볼 수가 있나, 잠도 잘 수가 없으니 불면증으로 생사람 쓰러지겠네.”
“……아.”
“늙은이 팔뚝이란 게 삭은 장작처럼 파삭파삭하는데 한 번 부딪치면 꼬챙이처럼 아프단 말야.”
그 막말을 감수하는 중이다.
“너무 오래 살면 못 쓰는 거야.”
간병인으로서는 절대 안 되는 말도 쏟아낸다.
먹하니 지켜보던 김규선이 ‘찬’하고 가로막으니 바람 소리가 훽, 스치는 것이다.
“이 환자의 딸입니다.”
일순 고요, 고요가 맴돌았고 송의 고개가 조신하게 조아려지는 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얼굴도 홍당무처럼 발그스레 달아오르니 야수처럼 포효하던 그미가 급 겸허한 모드로 변신한 것이다. 지금은 그렁그렁 젖어있던 김규선의 눈시울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무슨 일이시죠?”
낮게 터지는 목소리에 서슬이 서린다.
“……그게 아니구요.”
그 후 송은 익은 벼처럼 다소곳해졌다. 노모의 눈빛도 아주 잠깐 눈사람처럼 녹는가 싶더니 아, 눈시울까지 번지는 것도 막내딸과 비슷하다. 안타깝다.
보름 뒤, 송의 환자가 세상을 마감하면서 병실을 떠났으므로 짧은 악연이 표표히 마감되었다. 석별 과정에서 그미의 눈빛에 맺힌 이슬도 아슴아슴해서 ‘측은지심과 노여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며 수도에 빠지는 중이었다. 닫혀있던 커튼들이 일제히 열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노모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요구르트 빨대에 입술을 대셨노라는 전언이다. 그 상황이 어쩌면 노모가 ‘을’의 자리에 서게 된 마지막 스크린이었을 수도 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모른다.
좌우지간 가는 병원마다 수술과 시술을 요구했고 거부할 때마다 전원(轉院)을 채근받는다. 대학병원은 중증 환자의 숙박업소가 아니니 야박하지만 그 요구가 맞는 것이다.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는 환자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을 찾아 나가는 게 정답이다. 문제는 시술을 한다손 치더라도 환자의 몸이 좋아질 확률은 1도 없다는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아, 세상을 합리적으로 떠나는 방법은 제발 무엇인가. 다시 앰뷸런스로 치달리니 도심지 차량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쫘악 갈라진다.
박정하 노모는 1928년생으로 소학교 졸업장 하나가 처음이자 마지막 학벌이다. 두세 살 혹은 예닐곱 살까지 많은 동급생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공부에 몰두했다. 호롱불에 머리카락 태우며 산수를 끝내며 뜨개질이나 수예까지 재주를 보였다. 상급반 진급 이후 무용과 콩쿠르 대표 선수였고 어깨 너머 배운 풍금으로 학예회 대표로 연주도 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정돈된 글씨와 출중한 주산 실력을 인정받았다. 진학을 못했지만 군청 서기로 취업이 되면서 새벽 첫차로 출근하여 막차로 귀가했으니 돌이켜보면 가장 풋풋한 청춘의 시절이었다. 면내 최초로 파머를 했고 발바닥에서 15센티 올라가는 치마를 입어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여자 최초로 자전거를 타면서 신작로에서는 가장 멋쟁이였으나 사내들이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소학교 훈장을 만나 족두리 쓰면서.
‘서울로 시집가고 싶었는데’
펑펑 운 게 청춘의 마지막이다. 그랬다. 서울로 시집만 가면 뭔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칸방 월세를 살더라도 빌딩과 인파 사이를 비집고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셈이었다. 그게 불발되면서 수십 년 험지의 일상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70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세 번째 병원.
여기서 만난 흑룡강 출신의 김미진 간병인(63세)은 눈빛만으로도 신산의 질곡이 보인다. 키가 작다. 얼굴에 ‘착함과 고생’이라고 동시에 적혀있었다. 그미가 살아온 그 강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부근을 흐르는데 ‘아무르강’과 ‘헤이룽강’이라고 동시에 부른단다. 유유히 흐르던 물결이 위아래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류쯤이란다. 몽골 북부의 오논강에서 갈라져 동쪽으로 흘러 흐르다가 마침내 타타르 해협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김미진은 그 흑룡강 중류 언저리에서 보따리 옷 장사로 생계를 유지한 20년의 이력이 있다. 그 한인촌은 상점 간판마다 한자어와 한글을 동시에 표기한단다. 보디랭귀지를 합친 소통이지만 중국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3개 국어를 구사한다니 만만찮은 생존력이다. 주민들 모두 가난했고 여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 특히 북한에서 압록강 건너온 여자들은 약점이 많은 만큼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었단다. 그미도 그랬다.
“나는요, 누가 뭐래도 서울 사는 지금이 행복해요. 내 인생을 쏟아내면 소설책 열 권 이상 나온다우.”
사연을 토로하려는 표정을 짓는 바람에 얼떨결에 경청하다가 몰입에 빠지기도 했다.
“스물한 살 꽃띠 나이였다우.”
바나나를 절반으로 얇게 잘라 노모의 입에 넣어주더니.
“납치한 인간들이 즈이 멋대로 내 몸 가격을 먹였는데 ‘아얏’ 소리도 못한 채 팔려버렸어요. 인신매매 인질 신부치고는 운이 좋다 할까요. 팔려는 갔지만 뜻밖으로 시댁 사람들 인품도 괜찮습디다. 열두 살 많은 남편은 서른세 살 띠동갑인데 핏줄 닮아 성품이 착하긴 했어요. 오른팔을 못 쓰고 발가락 네 개가 잘려 나가 절룩거리는 건 약초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그런 거구요.”
딸까지 하나 낳은 김에 마음잡고 살아보려는데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의 신고로 다시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5년을 살았으니 기박한 팔자이다. 형(刑)을 마치고 이차구차 돌아오니 남편은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딸은 훌쩍 커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더란다.
‘얘를 위해 평생을 살아야갰다.’
그런 결심에 빠졌는데, 웬일일까, 착한 시부모가.
‘한국이라도 넘어가서 너 하나라도 행복하게 살아라.’
진정성을 보여주니 놀라운 사태이다. 그 후 여기저기 브로커를 알아보았고.
“이백만 원 내면 국경 통로까지는 태워다 줍니다. 목숨값은 거기까지고 나머지는 모릅니다. 월경하는 사람들 틈에 알아서 끼어 가시우.”
그렇게 탈북자 무리에 섞여 산 넘고 물 건너 하염없이 걷고 오르내리고 걸은 것이다. 함께 따라 나온 여섯 살 딸이 가장 문제였다. 날씨까지 추워지니 ‘배고파’ ‘추워’ 하며 울먹이는데 실제로 얼굴빛이 파리한 게 금세 쓰러질 것만 같다. 그래도 일행들로부터 뒤처지는 게 무서워 바싹 고삐를 쥐며.
“자꾸 울면 너만 산속에 뚝 떼어놓고 간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움직여. 아니면 나 혼자 간다. 일어섯!”
소리 지르자 울음을 뚝 그치던 딸의 표정이 굳은살처럼 맺힌 것이다. 한국행에 성공을 하고 시간이 15년 이상 흘렀는데도 겁박을 주던 그 모진 기억이 아직 송곳처럼 아프단다. 그 딸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타이어 공장 사무직에 취업하더니 익은 배 같은 성품의 총각을 만나 둥지까지 틀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시집간 딸이 아기만 낳으면 간병인이고 뭐고 죄다 마감하고 손주 하나만 보며 여생을 살고 싶단다. 그미는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놓는 와중에도 노모의 입술에서 흐르는 침을 연신 닦아준다.
아, 사연이 또 하나 있다. 남편이 죽었으니 세속의 기준으로는 시부모와의 연이 끝난 거지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 안부를 묻는다는 상큼한 스토리이다. 해마다 명절 때는 빠짐없이 선물도 보내고.
그러다가 김규호를 힐끗 바라보더니.
“직업은 뭐예요?”
물으면서 무채처럼 얇게 썬 사과를 박정하 노모의 입에 넣어주더니 김규호에게는 사과 하나를 통으로 건넨다. 정년퇴임 선생이라는 말이 선뜻 떨어지지 않아 사과 한 입만 어리버리 깨무는데, 먼저.
“농사지으세요?”
이미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므로 아무렇지도 않다. 그게 김규호의 외연이자 눈에 보이는 실체임을 인정하는 중이다. 그랬다. 수십 년 교직 생활의 이력에도 그가 스승의 패션으로 비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혼술 단골이던 포장마차 아저씨는 도배공이냐고 물었고 제주도 여행 때 식당 아줌마는.
‘객지에서 밀감 따느라고 고생이 많다.’
도루묵 한 마리를 더 얹어주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또 있다. 출퇴근길에 만난 시내버스 기사님도 직업을 묻더니.
‘진짜 선생님이냐?’
되풀이하며 묻기에
‘가짜 선생은 아니라우.’
교육청 신분증을 보여줘도 연신 갸우뚱대는 것이다. 김규호는 괜찮다, 괜찮다, 며 사과를 한 입 깨문다. 이빨 자국 선명한 ‘깨문 사과’가 되었다.
모든 악이 ‘깨문 사과’로부터 온다고 성경에서 설명했으니 그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이다. 하느님이 이브에게 산통을 겪게 하고 아담에게는 중노동을 부여한 성경 이야기는 각자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백설공주의 사과’가 있고 아들의 머리에 올려놓고 화살을 쏜 ‘빌헬름 텔의 사과’도 있으며 흑사병을 피해 케임브리지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만류인력을 찾아낸 ‘뉴턴의 사과’로 이어진다.
‘에리스의 사과’는 또 어떠한가? 데살리아 프티아 국왕인 펠라우스가 데티스와 재혼할 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초대하지 않아 벌어진 사연이다. 에리스가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문구를 써서 연회석에 던지자마자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까지 세 여신 이 아귀다툼을 벌인 후 그 질투가 마침내 트로이 전쟁으로 연결되는 긴장 드라마이다.
마지막으로 ‘튜링의 사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천재 수학자 튜링이 암호 해독기를 발명해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니, ‘2차 대전 승리가 영국의 처칠과 튜링 때문’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법원은 튜링에게 동성애 질병을 고치기 위해 성호로몬 주사를 맞으라고 강제한다. 그 결과 발기불능, 유방의 발달, 중추신경손상 등으로 영혼까지 파멸된다. 그가 결국 청산가리가 주입된 독사과를 먹고 목숨을 끊으니 튜링이 ‘한 입 깨문 사과’가 죽음의 사유가 된다. 훗날에 스티브잡스가 컴퓨터 이름을 ‘애플’이라고 명명한 이후 지구는 컴퓨터의 포로가 되었다.
다섯째 강소진 간병인(70세)과 5개월을 함께 했으니 가장 가깝게 의지한 셈이다. 나중 얘기지만, 노모는 야외 면회 장소에서도 자식들보다 강소진의 얼굴을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휠체어에서 간병인만 연신 쳐다보는 해맑은 눈빛이 안타까우면서도 일면 다행스러웠다. 또 있다. 간병인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노모의 휠체어를 끌고 나와 등나무 산책로를 휘돌아오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300명이 넘기 시작하면서 ‘거리두기’가 갈수록 강화되는 즈음이었다. 뉴스에 등장한 정은경 질병청장의 머리카락이 반백으로 변모하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그 재활병원에서도 전원을 강요하는 이유는 보호자 김규호의 ‘재활치료 거부 의사’가 가장 크다. 94세로 한 살 더 늘어난 노모를 물리치료실에 끌고 가 10여 분 이상 억지로 세워놓는 상황이 너무 아픈 것이다. 운동이 아니라 기합 수준이니 솔직히 치료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 수술과 시술을 거부하면 전원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활병원 역시 재활치료를 거부하면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는 것이며, 또 그게 맞다. 여동생 김규선은 강소진 간병인을 새로 옮기는 요양병원까지 동행하고 싶어 했다.
“함께 갈 수 있나요?”
“못……가.”
거절하는 강소진 간병인의 눈시울이 그렁그렁 번지더니.
“지난번 할머니도 내 눈앞에서 숨이 끊어졌는데 몇 달……동안 밤마다 나타나는 거야. 미안해요.”
그러더니 10만 원 봉투를 불쑥 내미니 뜨악스럽다.
“마지막 환자를 따라가는 게 너무 무서워.”
그렇게 결별한 이틀 뒤에 다시 전화가 온 게 마지막이다.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데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게 자신이 없어요. 어머니께서 이번을 못 넘기고 꼭 돌아가실 것 같아서 무서워. 미안해. 그리고……나도 이제 간병인 그만해야겠어.”
끄윽끄윽 울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짧은 인연이 끝이 났다. 그래도 노모의 얼굴을 직접 보며 손도 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걸 깨달은 건 요양병원으로 옮긴 이후의 이야기이다.
동북부 위성도시인 그 요양병원으로 옮기자마자 모든 면회 시스템이 차단된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700명으로 불어나면서 고령층에서부터 백신 접종이 실시되었으니 막연하나마 ‘코로나 종말론’의 기대감도 생길 즈음이다. 백신은 고령자 순서를 원칙으로 하되 두 차례 맞아야 효과가 있으나 자칫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단다.
문제는 요양병원의 면회구조이다. 그동안 일반병원에서 그물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면회를 시도하던 모든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딱 한 가지, 월 1회에 한하여 15분 동안만 허용하되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낀 상태로 유리창 너머에서 핸드폰 통화를 하는 게 유일한 소통이다. 그리고 병원 측과 작성한 동의서 내용은.
DNR(do not resuscitate 소생술 포기) 동의서는 작성된 상태이나 기본 치료는 할 수 있음.
요양병원에서의 보존치료 기준은 급성기 병원으로 전원하지 않고 증상치료를 하는 것들임. 예를 들면.
폐렴 : 항생제와 영양수액 치료 등.
패혈증 : 중심 정맥 내 카테너 삽입, 항생제와 영양 수액치료, 상태에 따라 중환자실 전실 등.
호흡곤란 : 원인에 따라 약물과 산소 투여 등.
인공호흡기 : DNR 동의서를 작성했으므로 치료하지 않음.
그밖에 감염, 출혈, 소화기계 문제 등은 요양병원에서의 보존치료로 함.
건강이 악화될 경우의 대책
1. 적극적 치료를 위해 대학병원으로 전원하지 않는다.
2. 모든 치료는 요양병원에서 한다.(치료비가 증가하지는 않음)
3. 보존치료를 거부할 시는 요양원이나 집으로 옮긴다.
1인 1실은 환자 한 명에 간병인 한 사람이 1 대 1로 독방을 따로 쓰는 구조로 비용이 가장 많이 든다. 그리고 6인 병실에서 각자 개인 간병인을 두는 ‘6인실 개인 간병인 제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간병인 한 사람이 환자 6인을 모두 보살피는 공동간병시스템 등 여러 선택 사항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병원비 총계는 6500만 원, 두 달 전 노모 통장의 5천만 원이 바닥나면서 그 후 5남매가 1인당 80만 원씩 갹출이 시작되었으니 저마다 형제와 그들 부부끼리 불안증이 낑낑 생길 즈음이다.
또 한 가지, 몇 차례 면담으로 안면이 가까워진 수간호사 한 분이.
“공동간병실로 가세요. 좋은 자리가 나왔어요.”
그렇게 1인 간병인을 피하라는 언질을 받으면서 설핏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코로나 이후 병실 출입이 금지되면서 간병인 센터의 상태 체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된다. 점검이 불가능해지면서 간병인들의 성품에 따라 환자의 환경이 천양지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간병인 쪽으로 선택하려는데, 새로 만난 서성미 간병인(68세)의.
“얼마 사시지 못할 것 같은데요. 거기로 가면 욕창이 생겨요.”
그 핀잔 한방에 결심이 깨어졌다. 노모의 생이 진짜 얼마 남지 않으셨다면 머지막까지 개인간병인으로 이어가야겠다는 판단이다. 문제는 6인 병동이 자리가 없어 1인1실 병동을 사용하니 대여로만 또 하루 5만 원씩 추가가 된다. 게다가 서성미 간병인이.
“11만 원인데요. 휴일 수당을 따로 주셔야 해요.”
“10만 원만 하지요. 처음 시작할 때는 9만 원이었다가 올 초부터 10만원으로 올랐고 지금 11만 원이니 저희들의 경비 감당이 쉽지 않네요. 게다가 6인실이 나타날 때까지 개인실 경비만 매일 5만 원씩 추가 요금이 발생해서……네, 네.”
그러나 호통을 치듯.
“어머니가 얼마나 산다고 돈을 깎으려 해횻?”
약한 부분을 찌르는 바람에 우물쭈물 울며 겨자 먹기로.
“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인가요?“
“네 번이요. 모두 수당을 따로 받아야 해요.”
“그러면 월 330만 원에 또 유급휴가 대체 간병인비로 44만 원이 플러스 되는 거네요. 간병비만 한 달에 374만 원을 쓰는 게 도저히 자신이 없네요. 게다가 6인실 자리가 나올 때까지 매일 5만 원씩 병실료를 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돈, 돈, 돈 말씀하는 것도 불효라구요. 길어야 한 달인데……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노모를 놓고……이름도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박정하이신데 마지막 대우 좀 제대루 하라구횻!”
그 말이 비수처럼 아파서 1인실을 수용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막내 김규선과 전화할 때마다.
“5만 원을 더 주세요. 휠체어에 태우려면 몸이 무거워 균형을 못 잡아서 넘어져 허리라도 부러지면 대형 사고예요. 그때마다 남자 간병인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 사람한테 월 5만 원이라도 얹어줘야 낯이 서겠어요.”
그렇게 5만 원을 더 보냈으니 밑 빠진 독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내는 격이다. 한번은 병원비를 계산하러 갔다가 출구에서 그야말로 우연히 서성미를 마주쳤을 뿐인데.
“세탁비 2만 원이 필요해요. 500원짜리 동전을 두 개씩 넣어야 세탁기가 돌아가거든요.”
‘세탁비 달라는 간병인은 처음인데요’ 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돈이 만 원밖에 없네요.”
배춧잎 한 장 깎아서 만 원을 아꼈을 뿐이디.
“노모 등허리에 물집에 생겨서 연고를 발라줬어. 2만 원이요.”
마찬가지로 ‘물집은 병원에서 치료해주는 거 아닌가요?’라고 대들지 못했다. 그렇게 36일이 되던 어느 날 형제들이 공동간병실로 모시기로 결정한 건 요양병원 수간호사의 메시지도 이유가 된다.
안녕하세요.
박정하 노모의 뇌경색 발병 후 오랫동안 적극적인 치료에 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요양병원으로 오신 후 점차 편안한 상태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욕창이나 폐렴도 없고 혈액 검사로도 특별히 나쁜 증상은 없습니다. 이제는 노모의 노환 정도를 생각하시며 돌봐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집중적 치료보다는 병원에 맡기시고 월 치료비 일정액을 들이면서 돌봐드린다는 차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적극적인 치료도 하셨고 현재 보존치료를 하는 상태이므로 개인 간병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방금도 병실에 가봤는데 전반적으로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간병을 잘 하시는 분을 찾아 그쪽 병실이 비었을 때 공동간병실로 바꾸시면 어떨까 해서 문의 드립니다. 지금 가장 중시하는 부분은 욕창과 폐렴입니다. 아직 그런 상황이 보이지 않지만 노모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가장 답답합니다.
간신히 면회 신청이 이루어졌을 때 유리창 저쪽에 나타난 노모의 초록색 얼굴이 충격이었다. 짙푸른 초록이 사람의 얼굴에 씌워지는 순간 송장 색깔로 비친다는 사실을 아프게 느끼는 것이다. 그나마 처음 5분가량은 면회 공간에서조차 휠체어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으니.
“아이고. 엄마!”
김규선이 유리창 앞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여자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든 노모가 통유리 저쪽에서 입술을 위아래로 연신 들썩이기 시작했으나 내용을 짐작할 방도가 없다. 뭔가 강렬한 SOS였을 거로 떠올린 것은 나중 얘기이다.
‘나를 빨리 내보내다오.’
그 행간을 알았을 때는 한참을 지나서였다. 코로나 확진자가 15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밤 8시 이후는 두 사람 이상 모이지 못하던 시국이다.
공동간병인으로 변경하겠다고 마음을 고백하자 수간호사가.
“미리 얘기하지 마시고 당일에 이야기하세요.”
이것저것 따져보니 그래야 할 것도 같았다.
마침내 그 당일에 서성미 간병인에게 전화를 했다. 스마트폰을 누르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몇 차례 심호흡 누르며 연습도 했다. 수신음이 떨어지자 김규호가 차분하게.
“지금까지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노모께서 오랜 시간 동안 행복하고 편안하게 보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들도 경제력으로 힘들기 시작하고 매달 수백 만 원 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여기서 마치고 공동간병인을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두근두근 말을 열었는데 뜻밖으로.
“별말씀을요. 이제 그만 하셔야죠.”
“이제껏 살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하면서 그 간병인에게 불편했던 선입견을 모조리 지우는 중이었다. 저무는 여름, 미루나무 아래에서 노모의 쇠락을 떠올리며 글썽글썽 눈시울도 닦았다. 그런데 20분 후에 또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기 저쪽의 서성미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딴판으로 격앙된 채.
“저는 당신네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서 모셨어요.”
‘앗, 당신이라니요.’
뜻밖의 호칭 변화에 놀랐지만 일단 고즈넉이 듣기만 한다.
“우리 아들도 교수이고 둘째 아들은 변호사예요. 내가 돈이 없어서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불쌍한 노인네들 보살피고 싶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정성을 다했다구요. 밥도 열심히 먹이고.”
‘어머니께선 콧줄 식사만 했는데요.’
그 말을 꾹꾹 누른 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의 보살핌에 감사드리고 마지막 남은 몇 시간까지 잘 보살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틀치 간병비를 더 얹어주셔야 마무리가 깨끗해집니다. 일산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고요. 어제 우리 교수 아들이 방문 왔을 때 짐을 얹어 보내지 않아서 택시에 꽉 차게 싣고 가야 해요. 트렁크 세 개를 버스에 태울 수 없잖아요.”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정성을 들이셨듯이 마지막까지 어머니처럼 환자를 보살펴주세요.”
“그러니까 택시비 30만 원 주세요.”
그 답변을 일부러 회피하며.
“감사함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당장 주시고 끝내요. 30만 원.”
노모의 마지막 남은 그 세 시간이 두근두근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수화기 저쪽에서 고래고래 지르는 또 다른 목소리도 있었으니.
‘뭐가 저렇게 불효한 아들이 있어.’
옆자리 간병인들이 합세하여 지르는 고함소리가 쟁쟁하다.
‘즈이 어미 죽기 직전에 그 정도 효도 못 하나?’
아, 노모 혼자 그 무시무시한 악담을 견뎌내야 하는 현실이 무섭다. ‘설마 노모를 때리지는 않겠지’ 하면 벌벌 좌불안석이지만 코로나 정국에서 병동에 들어갈 방도는 없다. 90평생이 한참 지나도록 도도한 자존심 하나만으로 살아온 박정하 노모께서 지금 온몸을 결박당한 채 아들에게 가해지는 집중 포화를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터지지만 그래도 울컥을 꾹 누르며.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저희가 15개월 동안 1인 간병인을 모셨는데 이제 경비가 바닥이 났고 노모 역시 더 이상 케어 받을 내용이 거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효한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보살핌을 부탁드립니다.”
“이거 보세요. 옆자리 6번 침대는 노모를 7년째 1인 간병인으로만 채용했어요. 부모를 위해 간병비만 3억 이상 들이면서 불만 한 가지도 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배웠다는 분이 그렇게 효심이 약하면 강복을 받지 못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터질지 몰라 그쯤에서 전화기를 내렸다. 그 후 두어 차례 울리는 발신음이 대포 소리처럼 크게 들렸지만 차단시켜야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전혀 모르는 번호 하나가 떠서 ‘뭔가’ 하고 받았더니 서성미의 옆자리 간병인이었다.
“여기 서성미 간병인께서 환자를 어머니처럼 보호하고 정성으로 살폈어요. 그런데 헤어질 때 이런 안 좋은 모습이 되었으니 내가 잘 얘기해서 25만 원으로 깎아줄 테니 좋게 헤어지세요.”
타협을 제시하는 목소리이다. 전화를 끊고 끊고 수간호사에게 이야기하자.
“주지 마세요. 제가 올라가볼 게요.”
단칼에 자른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벨이 울렸지만 어떠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무서운 간병인과 작별한다. 거꾸로 매달아도 한 시간은 지나갈 거라며.
그러다가 노모의 사진 한 장과 함께 문자 메시지를 받게 된 것이다. 겁먹은 얼굴로 파들파들 떠는 노모의 사진이 오싹 소름 끼치는데.
‘사진 좀 오래 보라구요. 늙은 부모 이 모습 잊지 말고 기억하라구요. 저는 떠나지만 짐은 맡기고 몸만 빠져나왔으니 아직 병실에 들어갈 기회는 있어요.’
그 겁박에 울컥하지 말고 대응하지 않는 게 차선임을 안다. 그런데 이튿날 떠 노모의 사진 세 장을 더 보내는 것이다. 빼빼 마른 수수깡 표정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여전히 응답하지 않는 방법 이외는 대책이 없다. 그리고 또 다음날 벙어리장갑으로 포박된 사진 다섯 장을 또 보냈으니,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처절힌 음울함이다. 아래에 적은 마지막 문장은.
‘이대로 살다가 죽겠지. 크크크.’
세상에는 분명히 나쁜 사람이 있었다. 힘이 전혀 강하지 않더라도 음지의 악마란 게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모는 지금 공동간병실에서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을 보내는 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맑고 청량한 초가을 햇살’이 솜털처럼 쌓이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