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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음력 1월 1일 자시,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김천고등학교 졸업
1968년 남동생 자살, 가족과 미국(동부 버몬트)로 이민, 태권도장 운영, 이민 초기 미국인과 결혼, 두 번 유산으로 인한 건강 악화, 죽을 고비 넘김.
1978년 미국 여자팀을 이끌고 <국제태권도 대회> 참가.
1985년 실리콘 벨리로 이주, <라이트 하우스> 사업 시작,
1989년 LMS (Light Monitering System) 발명,
1994년 시계 무술 마스터 협회에서 Grand Master 인정서 수여함.
1995년 <라이트 하우스>가 연간 매출액 5천만 불 달성. <라이트하우스>가 미국 100대 유망 100대 기업으로 선정됨. 미주 교민회의 상 수상.
1996년 태연 김 쑈 진행 (샌프란시스코 시장, 풋볼 선수 등 유명인사를 초청해 김태연이 직접 진행하는 토크 쇼, 전미 150여개 도시에 배급, 20-40대 중반 여성 중 5-6백만 명의 시청자 확보함.
1998년 < Businessperson of the Year> 상 수상
2001년 라이트 하우스 연간 매출액 1억불 달성, 경쟁업체 PMS를 제치고 반도체 클리닝 분야에서 업계 1위가 됨, 미용(엔젤힐링), 인터넷(모닝플래닛, 테이터스토어) 등 유망 분야로 사업 확장함.
2003년 7개 사업체 운영.
年매출 1억 달러 IT 女帝, 美 TYK그룹 김태연 회장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계집애라는 이유로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아버지는 재수 없는 년이라고 늘 때리고 구박하셨죠. 친구들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마음 아플 때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가 바로 별입니다. 별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곤 했죠. 이 꽃의 이름은 ‘스타게이저(Stargazer)’ 입니다.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이죠.”김태연 회장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꽃 한송이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얼굴로 가져가 향기를 맡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이 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바로 그녀가 말한 스타게이저(금자백합)다. 자신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어김없이 이 꽃이 따라다닌다. 김회장이 소유한 12만평 규모의 대저택 이름도 바로 이 꽃 이름에서 따온 ‘스타게이저’다. 김회장은 불우했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김회장은 연 매출 1억달러인 미국 라이트하우스의 최고 경영자다. 최근 사업 다각화를 꾀해 미용분야의 엔젤힐링, 인터넷 분야의 모닝플래닛, 데이 더 스토어, 엑스닷컴 등을 거느린 TYK그룹을 이끌고 있다.
TYK는 바로 김태연 회장 본인의 영문 이니셜이다. 라이트하우스는 현재 반도체 클리닝룸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회사로 손꼽힌다. 지난 95년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망 1백대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비즈니스에서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
국내 벤처기업인 탑헤드와 사업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탑헤드는 하나의 모티터로 두 개의 화면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새로운 개념의 PC모니터인 ‘수퍼모니터’ 개발업체. 뛰어난 아이디어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제품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품이라면 세계 무대를 보고 한 번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라이트하우스의 실무팀이 직접 방한, 탑헤드 관계자와 미팅을 통해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탑헤드와는 지분투자, 미국 내 합작법인 공동설립, 글로벌 시장에서의 마케팅 등에서 협력할 방침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자금액이나 지분참여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
김회장은 “비즈니스에서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며 “탑헤드와 협력하게 된 것도 바로 탑헤드 직원들 모두가 마음이 아름답고 신뢰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이 사람들이라면 같이 손을 잡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금액과 방법은 밝히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탑헤드뿐만 아니라 국내 IT산업에 투자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 외모가 곧 나의 상품”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생활하던 김회장은 24세때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하루 세 끼 수제비만 해먹었다고 할 정도로 고생스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접시닦이, 화장실 청소 등 생소한 미국 땅에서 그녀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허드렛일로 고생만 하던 그녀에게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바로 태권도였다.
7살 때 삼촌들에게 배웠던 태권도가 미국 땅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김회장은 인근 학교를 무작정 찾아가 태권도를 가르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물론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쯤 매달린 끝에 그녀는 결국 그곳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도 ‘캔 두’(Can Do : 할 수 있다)정신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로 통한다. 태권도를 통해서 미국에 자리를 잡았고 결국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김회장은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공인 태권도 8단인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서게 됐다.
김회장의 성공 비결에는 캔두 정신과 함께 특유의 이미지 관리도 한몫 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고유의 헤어스타일과 화장술로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던 것.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내 자신이 곧 상품”이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또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1백년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죠. 난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오늘이 마지막 생애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바로 미래고 또 과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아랫사람이나 청소원 등 말단직원들을 먼저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십여섯의 나이에 아직 미혼이다.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하지만 파란 눈의 아들과 며느리에 손자까지 둔 대가족을 이끌고 있다. 그녀가 모두 입양한 자녀들이다. 이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대저택 ‘스타게이저’에서 함께 살고 있다. 김회장의 자식들은 현재 라이트하우스를 비롯한 TYK그룹의 중요한 요직들을 맡고 있다. 외국 출장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들과 동행한다.자녀들 모두 태권도를 통해 김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다.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와 인정받는 사회생활을 했지만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이다. 부모의 이혼, 알콜중독, 마약중독 등으로 나락에 떨어졌던 그들은 하나같이 김회장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됐다.
가장 최근 김회장의 아들이 된 막내는 이탈리아 마피아계 출신의 망나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막내아들 역시 김회장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면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고, 현재 TYK그룹의 계열사인 모닝플래닛 사장을 맡고 있다. 또 약물중독자, 장애인, 공사장 막노동꾼 등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고용해 훌륭한 인재로 키우는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나의 성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열린 인간개발연구원의 강연회에서 행한 김태연 美 TYK그룹 회장의 강연을 간추려 싣는다. 김회장은 2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할 수 있다(Can do)’ 정신으로 오늘날 TYK그룹을 이룬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이다. 나는 23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캐나다 국경 근처 동부 버몬트에 자리를 잡았다. 버몬트는 눈이 많고,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차갑기만 했다. 68년 당시는 동양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인종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Sun is not disappear(태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구름에 가려질 뿐이다. 언젠가 태양은 다시 나와 햇빛이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몰라서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쓴 뒤 100여 집을 찾아 다녔다.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Hi, My name is Kim Tae Yun, I want to be your friend).” 100여 집을 다녔지만 문을 열어준 곳은 몇 집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꿈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컸다. 어떻게 하든지 문을 열겠다는 마음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100 집 중 단 3곳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라고 했을 때 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100 집 가운데서 3곳이라고 하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떤 집에 들어갔더니 친절한 얼굴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냥 “Yes(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주인이 커피를 내 주었다. 나는 얼마나 쓰던지 첫 모금을 뱉어내고 말았다. 나는 아직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태권도 가르쳐
나도 경상도 여자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참 고집쟁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 여자들은 정말 대접받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나였지만 미국에 가면서 마음먹은 것은 빨리 미국인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에 간 첫째 목적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었다. 한 달을 계속 찾아갔지만 반응이 없었다. 한 달을 넘기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사전을 찾아 적어 놓았던,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다치는 것이 싫다며 거절을 하였다. 나는 태권도란 그런 것이 아니며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다시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1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1주일이 지난 후 다시 찾아갔다. 교장선생은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기회를 줘 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그 때 다시 생각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월급도 필요 없다고 했다. 돈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경험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나는 최고의 선생님으로 선정되었다. 오후 3시에 수업이 끝난 다음 체육관에서 일반인과 선생님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밤에는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주유소에서 일을 했다. 그 때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책임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청소 일에 평생 머무를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라는 마음을 깊숙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삶에는 항상 역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3년을 일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좋은 학벌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학교, 인생의 학교에서 정신의 공부를 하였다. 나는 1946년 정월 초하루 자시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그런 때에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손자가 나오니 조상님도 이해를 하실 것이다”며 제사를 미루고 기다리게 하셨다. 대를 이을 손자가 나온다고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핏덩어리에게 고추가 없자 할머니는 “아이구, 김씨 집안도 망했네”라고 하셨다. 그런데 바깥에서 할아버지가 “우리 손자 고추가 얼마나 큰가”하고 물어왔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고추가 없다고 하자 다시 찾아보라는 명까지 내렸다고 들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 즉시 제사상으로 달려가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주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런 출생으로 나는 설날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재수 없는 계집아이의 생일이라는 것이 식구들에게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함께 하는 팀워크 부족
우리 회사에는 공채가 없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빨리 평가한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서류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믿는 것이다. 공채가 없다는 것은 사랑과 인내와 보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부하 직원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보답을 해 준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에 못 미친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팀워크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은행돈을 빌리지 않는다. 나는 사업을 새로 하는 사람에게 3년 동안은 이익을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두 회사에 재투자하라고 얘기한다. 나는 몇 개의 회사가 있지만 서로간에 돈을 대주지 않는다. 내가 맨손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내 자식들에게 그 힘을 물려주고 싶다. 내 손녀는 11살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그냥 주지 않는다. 자립정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물려주고 싶다. 아이가 돈을 쓰고 싶다고 하면 왜 하고 싶은지 물어보고 주었다. 잔디를 깎고, 접시를 닦으면 용돈을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손녀의 손을 잡고 은행으로 간다. 그리고 계좌를 만드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5∼6살 때부터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그렇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해주려 한다. 또 기업을 할 때 청소부부터 챙기라고 얘기한다. 미국에서는 훌륭한 사업가들이 가난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인텔의 시작도 차고였다. 나는 가끔 변장을 하고 직접 청소를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상급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다음으로 오늘을 마지막 생애로 생각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사람들은 오늘을 잊어버리고 100년을 살 것처럼 생각한다. 현재가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늘의 할 일을 진실을 다해 하라고 얘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경우도 많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생애가 더욱 멋지게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3년 후의 바람을 생각해 보라.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이렇게 해 보라.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 힘든 일들을 하나씩 벗어버린다고 생각하라. 몸을 씻을 때 어려움도 하나씩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샤워실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두려움이 들었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신한다.
젊음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 기울여
- 어떻게 태권도를 시작했으며, 미국에 간 경위는. 한국에서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6세가 끝나고 7살 때 외가집에서 지냈는데 삼촌이 8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새벽마다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외삼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다. 삼촌들은 여자아이가 무슨 운동이냐며 거절했지만 결국 내 고집에 꺾여 가르쳐 주었다. 지금 시애틀에 있는 그 삼촌을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 간 이유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고 어머니를 자주 때리셨다. 그리고 첩이 5명이나 있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어머니와 나를 때리는 것을 말리다가 많이 맞았고 자살을 해 버렸다. 나는 너무나 상처를 받았고 도망가다시피 떠났다. 내가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마도 굉장히 불행했던지 성공했던지 했을 것이다.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다.- 나이와 상관없이 젊음을 유지하고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사는 비결은.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몸을 쓰레기통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 목을 보면 아직 주름이 없다. 손은 젊은 사람 같다. 그것을 위해 나는 많은 노력을 했다. 지금도 잠은 2시간밖에 자지 않고 매일 운동을 한다. 그리고 기운동과 공부를 한다. 외부적으로 받는 도움은 우리 회사의 스킨케어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유일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때를 벗는 것이다.
- 강연을 듣고 나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김 회장이 느끼는 한국 여자와 남자의 인상은.한국 여성들은 매우 훌륭하지만 서로 밀고 당겨주는 힘이 부족하다. 서로 힘을 합하면 무궁무진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 둘째가 한국 남성들 흉내내는 것을 보면 유머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남성들은 권위를 찾는다. 사진을 찍으면 웃다가도 폼을 잡는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실리콘밸리 신화 이룬 김태연 회장의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김태연 회장은 기자들의 명함을 받으며 꼭 기억하겠다는 듯 이름을 힘주어 읽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렀다. 악수는 손을 감싸 쥐며 가볍게 흔들면서 당당하게 해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다정스러운 자신감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당당함과 진실함은 아마도 오늘의 그를 만든 비결이었을 것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받았던 냉대, 성공의 밑거름이 되다
정월 초하루 자시, 제사를 준비하고 있던 김씨 문중 사람들은 종손 며느리의 진통에 제사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뒤흔들 장군감’� 기다리던 식구들의 기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사그라졌다. 아이를 받아낸 할머니는 “김씨 집안 다 망했네”라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미역국을 솥째 내동댕이쳤고, 태어난 아이가 여자임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조상 앞에서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큰 벌을 주십니까?”라며 통곡을 했다.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리더로 인정받고 있는 김태연 회장(62)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았던 출생의 순간은 낙인이 되어 자라는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은 상상할 수도 없는 구박과 냉대로 이어졌고,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에게는 무관심과 폭력을, 한 맺힌 어머니에게는 원망을 받아야만 했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도 그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나는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참 많이도 받았어요. 내 눈물을 채우자면 한강도 넘칠 거예요. 항상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정월 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요.”하지만 지금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치에 섰다. 그는 반도체 장비 회사인 라이트 하우스(Lighthouse Worldwide Solutions)를 비롯해 모닝 플라넷, 데이터 스토어X, 엔젤힐링 등 6개 회사를 소유한 TYK 그룹의 회장이자 태권도 도장인 ‘정수원’을 운영하는 태권도 8단의 여성 최초 ‘그랜드마스터’다.
라이트 하우스는 실리콘밸리가 벤처 위기로 무너져가던 때에도 성장을 거듭해 동종 업계 1위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우량 회사이며, 그가 진행하는 ‘태연 김 SHOW’와 직접 출간한 책들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제게 ‘어떻게 그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참 힘들었겠어요’ 라고 얘기하죠. 네.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좌절과 시련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쓰러져버려요. 인생은 전쟁이니까요. 저도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의 무기는 ‘눈물을 알았다’는 것이라는 점을요.”아픔을 겪었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은 김태연 회장에게 밑거름이 되었다.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정말 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절실히 했고 탄탄하게 자신을 갖추려 노력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과 공상을 구별하지 못해요. 흔히 공상을 꿈이라고 생각하고 좇으려 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냉정하게 판단해서 꿈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꿈을 정했으면 레이저를 쏘듯 집중해서 파고들어야 해요.”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은 인생의 필수 준비물
그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말이 있다. 바로 할 수 있다는 ‘Can Do’ 정신. 지난 2001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CAN DO쇼’를 열어 감동을 준 바 있다. ‘김태연=Can Do’라고 연결될 만큼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저는 버스를 탈 줄 알고, 전화를 걸 줄 알고, 화장실에 갈 줄 알고, 입에 밥을 떠 넣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꿈을 가지고 마음속에 그리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포기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은 ‘재수 없는 가시나’였던 김태연을 ‘한국을 빛낸 55인’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사람들을 사귀고, 사무실을 겸한 방 한 칸으로 잘 알지도 못한 사업에 뛰어든 일화들은 유명하다.“멸시와 배척은 한국에서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스물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버몬트에서의 삶이 시작됐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를 누가 좋아했겠어요?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쓴 종이를 들고 1백 채의 집을 돌아다녔어요. 딱 세 군데서 문을 열어주더라구요. 끊임없이 두드린 결과,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줬어요.”사업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이민자들은 식당이나 세탁소, 미용실 등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었다. 신앙의 힘으로 반드시 잘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출발했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집까지 팔아 돈을 마련했고 근처 식당에서 개 먹이로 쓰라고 공짜로 주던 소 뼈다귀를 매일같이 얻어와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오늘의 이 시간을 기대하면서 고생과 동고동락했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는 말처럼 중심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실리콘밸리로 옮겨 부딪치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계약을 할 때도 다른 업체에서는 10만 불에 체결되는 걸 우리에게는 70만 불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들은 제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저는 ‘좋아, 이번은 내가 손해 보마’라는 생각으로 승낙해요. 그리고 최고의 기술과 정성, 믿음을 보여주는 거죠. 지금 당장 눈앞의 것만 계산해서는 사업을 할 수 없어요. 멀리 내다보고 판단한 뒤 공격적으로 움직여야 해요.”도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실을 다지고 정성으로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이 기본이다.
김태연 회장은 자신도 ‘상품’임을 항상 잊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보면 누구나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화려한 외모 또한 ‘인생 전략’이다. “살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상대방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상대의 시선을 잡아 끌 수 있을까 고민해요.”내면을 보여줄 기회를 얻기 위해 우선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면 특징적인 외모만큼 좋은 것도 없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조그만 동양 여자로서는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은 어떻게 보면 필수적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듣는 말이 ‘Are You Chinese or Japanese? (당신 중국인이에요? 아니면 일본인?)’였어요. 그들 눈에는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니까 그랬겠지만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싫더라구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머리도 올리고 화장도 하고. ‘튀는’ 외모 덕분에 다들 중국인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김태연’으로 기억해요. 외모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먼저 건네기도 하구요. 만나는 사람들, 혹은 그 자리의 성격에 맞춰서 옷을 입어요.”그는 인터뷰 자리에 꽃이 수놓인 연두색 정장을 입고 나왔다. 인터뷰에 임하는 오늘의 ‘전략’을 물었다. “초록색을 기본 컬러로 선택한 것은 편안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싶어서예요. 오랜만에 친정(한국)에 왔으니 잘 보이고 싶거든요(웃음). 이 꽃은 국화예요. 내 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화 같은 누나, 내 몫까지 잘살아줘’라고 글을 남겼어요.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국화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잘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동생도 봤으면 해서 입었습니다.”그가 화장과 옷차림만으로 외양을 가꾸는 것은 아니다. 올해로 62세가 됐지만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체력과 활기를 가졌다. 태권도로 다져진 몸은 군살 하나 없이 탱탱하고 손이나 목도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다.“운동은 종류 상관없이 두루 좋아해요. 태권도야 말할 것도 없고 축구, 야구, 탁구 다 즐겨요. 도전을 즐기기 때문에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도 즐겨요.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계획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쓰죠.”
서로의 가슴속 상처를 품어 안으며 만들어진 가족의 인연
엄청난 부와 성공을 거뒀고 후회 없이 모든 일에 도전해왔던 그도 사실 아쉬운 점은 있다.
“어렸을 땐 다들 나보고 못생겼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고 또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봤어요. 연애를 하면 어떨까 궁금하네요. 지금이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멋진 남성이 나타난다면 좋겠지만…. 나는 연애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용기 있는 남자가 없네. 하하.”이민 초기, 주변의 권유에 떠밀려 한 미국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서러웠던 어린 시절만큼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인종 차별과 멸시 또한 매서웠다. 그 시절 그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고 의사로부터 ‘장례 치를 준비를 하라’는 선고를 받을 만큼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다.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의 곁에는 소중한 자녀들이 있다. 그에게 태권도를 배우다 양자가 된 6남 3녀.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마약과 폭력, 섹스로 얼룩진 생활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었지만 김태연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보듬었다. 따뜻한 정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은 자녀들은 이제 그의 가장 큰 보물이 되었다. 자녀들은 든든한 사업 파트너로, 능력 있는 직원으로, 유쾌한 아들로, 다정한 며느리로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 또한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어머니’란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만큼 자녀들을 아낀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아들이 ‘햇볕정책’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김 전 대통령께서 놀라시더라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음식까지 가르쳤어요. 내가 한국인이니까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의 나라잖아요. 한국의 효를 배워서일까요? 정말 놀랄 만큼 효자들이에요.”눈물겨운 기억만 가득한 한국 생활이었지만 김태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뿌리는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란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만큼, 외국인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이름이 있을 법도 한데 김태연에게는 외국 이름이 없다. 덕분에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태연’이라는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그가 한국 사람임을 꼭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 그의 꿈은 ‘김태연 같은 사람을 많이 키워내는 것’이다. “내가 잘났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의 ‘성공’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을 키우고 싶은 거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이겨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어려운 아이들과 특히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요. 엄마가 아이를 키우잖아요.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인내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엄마니까 여성들의 역할이 무척 크죠.” 사회 교육 사업에 힘을 쏟고 싶다는 그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교과서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끊임없이 도전한 김태연 회장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스스로 훌륭한 브랜드가 되어야 해요. 자기만의 생각에 깊이 빠지지 말고 유연한 사고로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으면서요.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못해요? 할 수 있어요! Can Do!”
경운의 젊은이 들여!!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도전하세요^*^ 도전 준비 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