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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덕여고24기 원문보기 글쓴이: 전현숙
학봉종택 ...학봉 김성일의 종택 학봉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경상우병사로 임지에 가던 중 책임을 추궁받아, 서울로 압송되다 류성룡의 도움을 풀려났다. 그리고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돼 '일사보국 신지원야(一死報國 臣之願也: 한번 죽어 보국하는 것은 신의 바라는 바입니다)'라며 1593년 4월, 56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의병 모집과 영남사수 임무에 진력했다. 그는 "진양(진주)이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적이 항상 침 흘리면서 엿보는 바가 이 성에 있다. 나는 맹세코 이 성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수할 터이다"라며 진주성에서 싸우다 최후를 마쳤다.
봉정사에서 내려와, 학봉종택 가던 길에 국화차 시음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인 운장각은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보물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
'운장'이란 말은 '저 넓디 넓은 은하수,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퇴계 이황선생이 학봉에게 써 준 병풍인데, 탁본을 떠서 이 댁의 종부가 5년간 자수로 놓았다고 한다. 무이구곡도 과거 시험 본 시험지. 감탄하며 보고, 듣고 ,질문하고... 목련의 열매라고 한다. 후손 분께서 얼마나 열심히 안내해 주시던지 감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