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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진전원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큰별
기도는 핵무기보다 강하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입니다.
말로만 기도하자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기도하지 않는 목회자는 자신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장로, 집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정말 우리 민족이 기도 할 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백성은 망합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복을 받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기도하는 본인은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복받는 가정입니다.
1 기도하면 곤경이 돌이켜진다(욥기 42:10)
□ 욥기 42:10
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 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곤경을 돌이키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들의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도 어려운 곤경에 풀려나서 돌이켜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내 곤경을 하나님께서 돌려주시면 완전히 바뀌어 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도적맞고 자식 죽고 몸에 병들고 굉장한 곤경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욥의 곤경 가운데 돌이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곤경을 돌이켜 주실 줄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기도하면 그러한 곤경이 돌이켜질 줄 믿어야 합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평생 고생만 하다가 끝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내가 지금 제아무리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곤경은 돌이켜지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다는 이야기가 불황이라고 합니다. '안된다', '불가능하다'라는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서는 않됩니다. 내가 한다고 할 때는 불가능하고 않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때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면 먼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들의 살 길입니다.
울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입니다. 어려움 속에 처하게도 하셨다가 그 어려움을 해결하게 해 주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러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좌절한다거나 낙심해서는 않됩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는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바다물도 달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인력때문에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바다물이 들어왔다가 나갑니다. 들어올 때가 있으면 나갈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하루에 두 번씩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곤경이 그대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의 축복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성경 에스더에 보면 모르드게가 배옷을 입고 울며, 울어도 보통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 주셨습니다. 당시에 유다인의 전멸을 계획하고 있는 하만을 자신이 만든 함정에 자신이 빠져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상황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사실은 정말로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면 만사가 형통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 마음을 흠족하게만 하면 부모가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됩니다.
청주의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예수님을 알기 전에 어떤 병에 걸렸는데 그 병은 다리가 점점 썩어 들어가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다리가 그 병에 걸려서 다리가 썩어들어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데 피부병이 생겨서 수술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루고 미루었는데 어떤 권사님이 오셔서 전도를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병은 암병처럼 무서운 병이라고 합니다. 썩어들어가면서 나는 그 냄새는 이루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목사님에게 그 권사님이 계속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권사님이 회개하면 병고침을 받는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갔다 준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데 깨끗하게 고침받게 되어 지금은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때 저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곤경을 돌이켜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병들 때가 있으면 고침을 받을 때가 있고, 빚질 때가 있으면 갚을 때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가 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망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마귀의 세력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얼마나 어려운 곤경에 빠졌습니까? 보리고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외국에 의해서 구호 물자로 살았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예수의 복음이 들어오게 하셔서 오히려 쌀이 남아 돌 정도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므로 풍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곤경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뒤집어 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곤경에 빠져 그 곤경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과거보다 훨씬 더 좋은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욥이 병이 들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곤경을 돌이켜 주시므로 더 큰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환난날에 부르짓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역사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욥의 친구는 욥을 조롱합니다. 그래서 욥이 말하기를 친구들은 나를 조롱하나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곤경을 당하여 그 곤경과 더불어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환난날에 내게 부르짓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것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난날에 우리가 앉아서 소주잔을 들이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 한다거나 나의 사업을 망하게 한 그 사람을 저주하도록 원망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어린 다윗일찌라도
우리가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약한자가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골리앗 앞에 다윗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어린 아이로 취급합니다. 사실 당시에 다윗에 어린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역사하실 때 단번에 넘어지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내 앞에 골리앗과 같은 어려운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 앞에 홍해가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갈라지게해 주십니다. 나의 앞에 여리고가 무너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38선도 무너지게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통일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화가 복이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갈 때는 이제 끝나는 것 같은 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려가는 것이 동기가 되어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 잘 사는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교회는 어려움과 박해를 받을 때 서로 합심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문제의 해결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우리들도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기도를 쉬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만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분명 돌이켜 주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핵무기 보다 강하다
예수님께서도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해야 하는 데 자기 고집대로 자기 계산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겁날 것이 없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진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실 때 문제는 해결되고 맙니다.
핵무기보다 더 강한 것이 바로 기도의 무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생각하면 않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과 한 편이 되셔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응답의 축복을 주십니다.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체험을 주십니다.
조급할 때 기도하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곤경에 휘말려 어찌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억울한 곤경을 돌이켜 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외면한 것 같은 침묵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침묵의 시간이 오래간다고 낙심해 버리면 않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급하고 조급하면 않됩니다.
내 머리롤 내 계산대로 하려고 할 때 언제나 조급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매사에 너무 조급하다고 생각될 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좀 차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면 조급하고 급했던 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믿는 후로는 무언가 달라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하루 아침에는 불가능합니다. 꾸준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꾸준히 기간과 장소를 정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곤경을 당할 때 결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들이 언제나 범하기 쉬운 문제는 어려움이 왔을 때, 즉 곤경이 나에게 닥쳐 왔을 때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어려움이 나의 불성실함 때문이라고 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죄 때문이하고 한다면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죄가 없는 데도 당하는 곤경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빨리 그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상황 판단은 내가 무조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만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단비가 올 것입니다. 기쁨이 올 것입니다. 지금 사업이 망하고 있는 데도 왠지 모를 감사가 나옵니다.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회개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곤경을 돌이켜 주시겠다는 징표로 이해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다면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곤경을 돌이켜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 눈물의 기도를 하자(예레미야 애가 2:18~19)
□ 예레미야 애가 2:18~19
18)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강처럼 흘릴찌어다 스스로 쉬지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성경을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매 내 마음에 합한자라 하였습니다.
천하없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도 아버지의 마음에 안들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 예배당을 잘 지었다고 합시다. 아무리 잘 지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보실 때 금으로 칠벽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예배당은 성공하지 못한 예배당입니다. 부흥회를 하는 데 사람들이 오천명, 만명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 예배를 드릴 때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 예배가 아니면 모였다가 먼지만 일으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실 때 가증하게 보신다면 우리가 별별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식도 중요합니다마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는 주여,주여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이 있는 형식은 중요합니다마는 내용이 없는 형식은 위선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빈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의 내실이 없는 자들이 겉으로는 요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에 원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실 정도로 우리가 우리들의 삶을 가꾸고 주님께 순종하며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기적이 일어난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만 들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시지 못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우리들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그릇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얼마나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느냐를 성찰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다
시편 56편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주여 나의 눈물로 침상을 적십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지 흘린 눈물이 자신의 침상을 적셨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올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정도 눈물을 흘려야 침상을 적시게 됩니까? 이러한 눈물의 기도를 드린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비록 모태신앙이라고 할지라도 주 앞에서 한번도 눈물의 기도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좀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 뭐가 대단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간절한 기도를 한번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은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의 삶이 그러한 간절한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의 평안한 삶이었습니까? 그러한 평안한 삶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평안한 삶에 대한 눈물의 감사를 드려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교만하고 오만한 태도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너무나 매말라 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안에 간직 된 진리의 말씀이 희석되었다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드려 본 경험이 있는가
그러한 사람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용없는 껍데기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먹을 빵이 없어서 생사의 귀로에 서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저 북녘동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보지 못한 사람과 어떻게 신앙을 얘기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모든 정책을 경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또한 경책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경제면 다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의 실력으로 우리나라가 이렇게 좀 먹고살만해졌습니까? 문론 우리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실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좀 먹고 살만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과연 경제면 다 되는가
우리나라 같이 지하자원이 풍족하지 못한 가운데서 세계 무역국가로서 10위권 안에 든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 만족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에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앞으로의 세계 판도의 주 핵이 아시아가 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인구적으로 봐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봐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의 시대속에서 저 10억이 넘는 중국과 러시아에 어느 민족이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감당하겠습니까? 일본이 하겠습니까? 유럽인들이 하겠습니까? 중국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민족과 더불어 과거에 얼마나 억압을 받았습니까? 그들과 부담없이 접촉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을 이렇게 잘 살게 해 주신 것도 다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경제적 부흥이면 다 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강하게 해 주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을 하지 알아야 합니다. 그 돈에 노예가 되고 그 돈이 신이 되어져 버린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돈을 지배해야 할 것입니까? 그 돈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서 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재물과 물질은 모두 다 천국국고에 해당됩니다. 그 천국국고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앞에 공금유용을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폭포수 같은 눈물의 기도
이제 우리 한국교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바로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필요에 부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잘되기를 원하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라고,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고, 병마에 고침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셔야 하는 것은 오만가지 이땅에 것을이 잘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눈에 눈물이 말라버렸다면 여러분들의 소원은 허공을 향하여 외치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를 드려보셨습니까? 다시한번 각성과 갱신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구역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교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너무나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어떤 판자촌 동네에 불이 났습니다. 한밤중에 잠자는 사이에 불이 났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가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면 다 타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깨우는 사람이 있어서 한 사람도 타죽지를 않았습니다.
깨우지 않으면 죽는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잠자는 영혼들을 위해서 깨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깨워야 합니다. 사망의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들, 자신이 가는 길이 사망의 길인 줄을 모르고 가는 사람들에게 그 가는 길에서 멈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망의 단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목이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않는 사람들은 그 죽은 영혼들의 부르짖는 하소연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 위급한 상황인 데도 점잔 떨려고 가만히 있다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성종 목사님께서는 「기독신보」의 특별시론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작은 종이요, 허물많은 종이기에 큰 소리를 외칠 자격도 힘도 없어 외쳐봐야 모두들 외면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침묵의 죄를 범할 수는 없으니 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자격이 없다고 외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침묵의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강수같이 하소서
"주여, 내 눈에서 눈물이 강수같이 나오게 하옵소서. 내 눈에서 눈물의 가도가 강수같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그처럼 울어야 합니까? 여러분들의 죄악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죄악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능청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나를 "내가 이래도 되는가 내가 명색에 직분자로서 이래도 되는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것을 느껴보지 못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의로운척 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남을 비방했고, 그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까?
김창인 목사님은 "주의 종들은 말씀의 은혜가 있던지 권위가 있던지 둘중에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먼저 말에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가시박힌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얼마나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일관했습니까? 형제의 눈에 티는 볼 줄 알면서도 내 눈에 들보는 왜 못봅니까? 자신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울어야 됩니다.
교회를 위한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많은 것들이 필요로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눈물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감사한 사람이 누구냐면 새벽에 교회에서 엉엉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감사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님을 볼 때 그것이 그렇게 감사하고 좋아 보였습니다. 전날 밤 10시나 11시부터 새벽까지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그러한 기도 덕분에 저가 당시에 밤중에 먼 길을 오고갈 때 교통사고 한번 당하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운전할 때 깜박 졸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기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 편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성도들을 위해서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을 위해서 좋은 선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은 언제나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말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장로님들이 모이면 자기교회 목사님 흉을 보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사님들이 모이면 우리교회는, 우리 목사님은 하면서 흉을 봐서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설령 목회자가 여러분 보실 때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고 그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너는 강수같이 눈물을 흘릴찌어다"라는 말씀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얼마전에 저는 마천동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 부흥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 집회를 인도하면서 저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가 진액을 짜서 그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시간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날, 셋째날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날은 교사들이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연극배우가 연극해서 눈물을 흘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눈물을 원치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정말 진실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이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이라면 진실한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진실한 눈물을 흘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어린 영혼들을 위해 울 수 있고 죽어져 가는 영혼들을 위해 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여 나에게 눈물을 주시옵소서"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죄악 때문에 괴로워서 울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죄를 뉘우쳐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눈물의 기도를 드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주의 사랑에 감사해서 울면서 주여, 나같은 것 구원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나같은 것 직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나같은 것 기도의 대열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여러분 쇼하는게 아닙니다. 진실한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할 때 여러분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실 겁니다.
성경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이제 죽는다고 할 때 벽을 향해서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생명에
15년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눈물의 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녹이는 위력이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어떻게 울었느냐면 재를 무릎쓰며 베옷입고 통회하고 자복하여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심판하려고 하시다가 유황불을 다 거두어 버리시고 니느웨를 멸망하시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되도 죄악의 도성이 되면 멸망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가 발전이 되고 수출이 잘 되어야 나라가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부강해 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가 발전되도 죄악의 도성이 되면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불이 넘어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을 범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진이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서울을 10초만 흔든다고 하면 그 아파트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강 다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때에 기도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기도하는 데 아무나 찾는 게 아니고 진실한 기도를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사윗감을 찾고, 며느리감을 찾을 때 아무렇게나 찾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진실하고, 장래성이 있는 진짜 사람을 찾지 않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에게 다른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올 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나쁜 데가 있었습니다. 충신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귀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시인할 줄 알았고 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잘못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눈물의 기도가 있는가
여러분들이 구역예배를 드릴 때 진실한 눈물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찬양대로 봉사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감격해서 울 줄 하는 찬양대원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독일에 가서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서울음대를 못나왔다고 해도 좋습니다. 물론 그곳을 나왔다면 더욱 좋겠습니다마는 어떠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꾀꼬리 같은 음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천하없는 가창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진실한 감동이 없다면 주님은 기쁘게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잘 봅니다. 어느 학교 나왔느냐. 어느 집안이냐. 간판이 어떠냐. 얼굴이 얼마나 미남이냐. 미인이냐. 주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영안이 열렸느냐. 그 마음밭이 돌짝밭이냐. 길가밭이냐. 옥토밭이냐. 그에게 정말 강수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느냐. 나라를 위하여 비판하지 않고 울 줄 아는 사람들이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위해서 울 줄 알고 성전에 나와서 통성기도 할 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야당 총수나 여당 총수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게 받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 주의 종들을 위해서 울줄 알고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녀들을 교훈한다면 자녀들이 그 부모 앞에 누가 감동을 받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원수의 마음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눈물은 어떠한 죄라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하얀 광목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얀 광목에 먹물이 뿌려졌습니다. 천하없는 '한스푼'을 넣는 데도, '한스푼'을 통째로 넣는다해도 그 얼룩을 다 빼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먹물보다도 더 새까만 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 앞에서 진실로 하룻밤 자면서 강수같은 눈물을 흘린다면 흰눈보다도, 양털보다도 더 희게 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영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의 종들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제단 앞에서 많이 운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고 그렇게 믿습니다. 제가 환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 때로는 환자에게 온 정성과 사랑이 갈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목사안수도 안받고 전도사 때인데도 벌떡벌떡 낫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전도사 때, 신학공부 초창기 때인 데 엉엉 울다보면 더 나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해 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희한한 환상을 바라지 말고 여러분들 오늘밤 옷깃을 여미고 잎만 무성한 나무가 되지 마시고 열매를 맺는 그러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믿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다면 찍어 버릴 나무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며 땅만 차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좋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회사에서 봉급이 인상되고 승진되기를 원하신다면 그 회사에서 일만 열심히 하고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만 되면 봉급과 진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고 싶으면 하나님의 마음만 기쁘시게 해 드리면 구하지 않는 것까지라도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축복해 주십니다.
애들이 공부만 잘하면 옷도 사주고 싶고, 용돈도 주고 싶어 하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진실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내가 이제부터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 쓸 데 없는 것, 이기적인 것 내가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사시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파트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뜨거운 눈물 한 병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다윗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주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을 위해서 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이러한 눈물을 병에 담으소서 라고 기도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눈물이 주의 병에 담겨지기를 원합니다. 일년 열두 달 기도의 눈물은 빈병입니다. 일년 열두 달 기도가 겉치레만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옛날에는 이웃집에 초상이 나면 동네가 다 울었습니다. 모든 동네 사람들이 같이 울면서 슬퍼했습니다.
요즈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안추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를 하자고 고래고래 소리지르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하기야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이 없는 때가 되어버린 형국입니다. 왜 그토록 약삭 빠르게 계산에 빠릅니까? 그 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앞에 오늘밤 눈물을 요구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내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실컷 울고 나면 막힌 것이 툭 터집니다. 목사님들에게는 설교가 힘있게 나갈줄로 믿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기뻐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나면 날개가 달린 것과 같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밤에는 울음으로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는 시편기자의 말씀따라 기쁨이 우리를 더욱 복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결재하시면 막을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도장 찍으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일꾼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우는 부모가 있다면 그 자식은 복됩니다. 주의 종들이 양떼를 위해 운다면 거기서 자라고 있는 양떼들은 복있는 양떼들입니다. 구역장이 구역을 위해서 울고 있다면 그 구역원은 복된 구역원입니다. 주일학교를 맡은 교사가 울고 있다면 그가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 반 학생들은 사랑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낮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가만히 않아 있는 데 저가 경북 영주 준홍 소백산 밑에서 자랐는 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부르셔서 주의 종을 삼아 주셨다고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렇게 귀하고 복된 자리에 앉혀 주셨는가? 자리가 중요한 만큼 강단에 설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한 두 번 들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밤잠을 안자고 오신 분들인데 내일 또 직장에 나가실 분들인데 일을 하셔야 될 분들인데 가정일을 하실 분들인데 그냥 돌아가시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께서 영원한 진리의 생수를 마시러 오는 데 주여, 저가 무엇이관대 하고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도 흠모 할 만한 귀한 목사의 반열에 세워 주셨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온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스라엘 너희를 떠낸 웅덩이를 봐라 그 떠낸 바위 그 자리를 보아라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가치가 없고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로 저를 택정하시고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고 죄만 범해왔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길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은 눈물의 길밖에 없습니다.
저쪽에서 핵을 만든다고 해서 우리도 핵을 만든다고 될 줄 압니까.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천하없이 핵무기의 할아버지 뻘 되는 무기를 만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먼저 기도의 진액을 하나님께 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밤에 우리가 기도하는 데 나 자신을 위해서 울게 하옵소서. 가족을 위해서 좀 울게 하옵소서. 내가 정말 교회를 위해서 재물되게 하옵소서. 이 민족을 위해서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의인 열명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멸망치 않겠다고 했는데, 오늘밤에 여러분, 교회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엉엉 울면서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쓸데 없는데 너무 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울 수 있는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사업확장을 위하여 몸부림쳤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 보내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너무 소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매상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수준을 올리려고는 그만큼 노력을 못했습니다. 관심밖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밤은 아버지 앞에서 가슴치면서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옆사람 생각하지 말고, 남편생각 하지말고, 자식 생각 하지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기도하는 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명히 이 설교를 주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여러분들 가운데 녹아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울고나면 질병이 녹아내릴 것입니다. 여러분들 막힌 사업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나라를 악의 무리가 손대지 못하도록 불벽을 세워 주실줄 믿습니다. 우리 마음들이 너무 굳어져 있지 않습니까? 가뭄 들은 논바닥처럼 짝짝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오늘 눈물을 채우듯이 눈물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울 수 있기 바랍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주여 나에게도 진실한 눈물을 주시옵소서" 겉으로는 지금 웃고 있으나 속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웃고 희희덕 거려도 마음은 괴로운 사람들 있을 겁니다. 그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악령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오늘 밤에 우리의 굳어 있는 마음을 녹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녹여 주시옵소서. 말라있는 개천에 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말라있는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실한 눈물이 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나 자신을 바로 찾기 원합니다. 주님 주시는 참 모습을 찾기 원합니다.
아버지여 역사해 주시옵소서. 오늘밤에 능력을 받게 하옵소서. 주여 이 민족이 회개하게 하옵소서. 주여 교회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강단마다 눈물이 쏟아지게 하옵소서. 구역예배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여 교사들이 눈물 흘리게 하옵소서. 주여, 대통령부터 우리 온 백성이 회개하는 민족되게 하옵소서. 아버지, 주의 귀한 사자들이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기쁨의 복을 주시옵소서. 건강의 복을 주시옵소서. 경제의 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복을 주시옵소서. 우리 김영삼 대통령이 통치하는 동안에 세계 만방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시신 우상을 다 뿌리채 뽑게 해 주시옵소서. 텔레비젼에 잡신들 나오는 것 다 제거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성령을 방해하는 자들 다 제거시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국회에서도 기도하고 개회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국회위원들이 기도하고 나라의 국정을 담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대법원장이 예수믿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학교 선생님들이 다 예수 믿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대학 총장들이 다 장로님, 목사님, 집사님 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역사해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하시면 다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우리 목사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장로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전도사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권사님, 집사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교회 주일학교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각 기관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교회가 타락하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지켜 주시옵소서. 아버지 십자가 섰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교회마다 소금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빛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섬기는 교회 사자 목사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주의 종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장로님들 붙잡아 주시옵소서. 목사님을 잘 보필하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장로님들 가정마다 영육간에 복을 받게 하옵시고 맘껏 봉사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권사님들, 집사님들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평신도들 가정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교회마다 확장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가정이 평안해야 나라도 평안합니다.
주여, 가정이 평안해야 교회도 평안합니다. 평안을 주시옵소서. 우리 가족들 아버지가 지켜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병든 가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고쳐 주시옵소서. 입원해 있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질병에 있는 가족들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남편의 믿음이 좋아지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사업 책임져 주시옵소서. 아내에게 주안에 기쁨을 주시옵소서. 건강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자녀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진학 할 자녀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아버지, 결혼 할 자녀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직장에 들어갈 자녀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군대에 들어가 있는 자녀 책임져 주시옵소서. 아버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자녀들 지켜 주시옵소서. 방황하는 자녀들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 안믿는 형제들 위해 기도하오니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많은 가족들 위해 기도하고 있사오니 해결시켜 주시옵소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듯이 우리의 가정에는 사철에 봄바람이 불게 해 주시옵소서. 가정제단 쌓게 해 주시옵소서. 전도하는 가정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가정에 빛을, 병든 가정에 문제가 해결되게 해 주시옵소서.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게 해 주시옵소서. 모든 갈등이 해결되게 해 주시옵소서. 마귀의 더러운 것들은 물러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기도는 핵무기보다 강하다(사사기 2:11~15, 3:9~11)
□ 사사기 2:11~15, 3:9~11
11)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에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어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15)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신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9)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읏니엘이 죽었더라.
"북한에 핵이 있는가 핵이 있다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김일성이 핵을 가지고 이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정말 인간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핵에 대한 두려운 공포는 과거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여기에 우리들의 생사가 걸려 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장착해야 하고 팀스피리트는 물론 재개되어야 하고 필요한 양만큼의 잠수함과 전투기를, 에이왝스도 구입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군의 항공모함은 동남아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핵탄두를 배치하고 평양을 조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탄의 이용물로 등장하고 있는 예리한 칼을 쥔 세살짜리 개구장이 김일성이 원자탄의 단추앞에서 북한의 2300만을 볼모로 잡아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악날한 자세는 바로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나름대로 전술전략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핵이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 핵을 조종하고 있는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마치 태양신의 대리자로서의 바로와 하나님 여호와의 대리자로서의 모세와의 싸움과 같은 그러한 상황이 우리들에게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신으로 둔갑한 김일성이 진정한 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의 진정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김일성의 핵을 분명코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50 년 동안 김일성 왕조는 북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산 흡혈귀로 세계에 기록에도 없는 잔인함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50년 동안 남쪽에 있는 우리들은 태평을 누려왔습니다. 그 태평스러운 나날이 복에 겨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를 못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과거를 섭리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망각하고 우리가 마치 우리들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했느냥 오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김일성의 핵을 통해 우리들을 징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했음을 회개합시다. 서로 불신하여 사분오열 되어버린 우리들의 교계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는 백성들을 버리시는 법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혹 우리들을 구원하실런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죽을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핵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기도는 핵탄두를 녹여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륵 하겠습니다.
백성의 악행과 하나님의 진노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한 헌신의 시대인 여호수아시대가 끝이 나고 가나안 정복을 알지 못하는 패역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민족을 강대하게 해서 그들로 이스라엘을 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2:11 ~15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정확하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 앞에 범죄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신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버리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신을 섬깁니다. 우상을 섬기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 나왔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데 그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섬깁니다. 또한 물질이 신으로 둔갑당합니다. 물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1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는 행동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시도록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를 짓고 하나님을 외면한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않됩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14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대적의 손에 팔아버립니다. 또한 대적을 당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디를 가던지 재앙을 만나게 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자 괴로움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진리입니다. 복음입니다. 우리들에게 왜 이러한 말씀이 증거되게 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리들에게 권면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불러오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려움이 왔을 때 그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또한 사람을 의지하면 않됩니다. '아무개를 찾아가면 좀 도와 주겠지'라고 해서 찾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꼭 실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내가 기대하는 사람에게서는 도움이 없고 오히려 나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역사해 주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화가 복이 된다
우리가 지금 북한의 핵 때문에 사실은 겁이 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겁이 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해외로 도피하고 싶다거나 두려워 떨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화가 복으로 변할 줄 믿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팔려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요셉의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버렸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하고 고민하고 낙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39: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하심을 보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만 하면 만사가 형통케 됩니다. 이러한 만사가 형통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축복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볼 때 어떠한 자식을 원합니까? 말썽만 입히는사람은 부모님의 근심을 가져옵니다. 그럴때 부모님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지게 되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일에 형제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20~21)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화가 복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의 손에 애굽으로 팔려지게 되었지만 후일에 요셉이 하는 말이 오히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비관은 금물입니다.
지금은 김일성이 핵을 가지고 장난하지만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화가 복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자 그들을 징계했습니다. 바로 이방 세력들을 등장 시켜서 그들을 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여 부르짖을 때 여호와의 신이 충만한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사사기 3:7절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고 말씀하고 3장 8절에서는 그 결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이방 세력에게 파십니다. 그래서 8년 동안 이방 세력인 구산 리사다임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때 3장 9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자 구원자를 세워 주십니다. 세워 주실 때에는 3장 10절의 말씀따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구원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방 세력을 무찌르도록 역사해 주셔서 11절에 몇년동안 태평하게 해주셨다고 합니까? 무려 40년 동안 태평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부르짖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신이 충만한 구원자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충만한 주의 종들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과 기근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축복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 본다고 할찌라도 우리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 때문에 노예로 살고 고통 가운데 살 때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함
이스라엘 자손이 40년 동안 태평하니까 이제 그 태평케 해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을 의지합니다. 이방 신상 앞에 절합니다. 세상이 좋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 중심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3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죄를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전보다 더 악하게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좀 평안할 때 기도하고 기도를 저축해야 하는 데 전혀 다 외면합니다. 기도하자고 제아무리 소리쳐도 시집가고 장가들고 먹고 마시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것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0년 전에 하나님께서 대적에게 당하게 해 버릴 때, 진노하실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했던 그 정신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사업이 이제는 좀 펴지게 해 주시고 자녀들이 아무 탈없이 잘 자라고 있기 때문에 오만방자하기 시작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언제 있었느냐는 등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
물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지옥갈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정욕적인 상실한 마음대로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악을 제어할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 재물과 더불어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범죄의 자리에 있도록 내버리시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래서 사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 앞에 또 범죄하자 3장 12절 말씀 따라 이방 대적인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압왕 에글론을 18년 동안 섬기게 합니다.
그들이 범죄 할 때 3:8절에서 구산 리사다임을 8년동안 섬기게 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자손이 또 그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좀 먹고 살만하면 눈을 다른 데 돌립니다.
어려울 때에는 죽기살기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한눈 팔지않고 일합니다. 이제 좀 먹고 살만하면 한 눈 팔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대적의 손에 재물을 다 빼앗겨 버리게 한다든지 재물에 독수리 날개를 달아버립니다. 아니면 사고를 당하게 한다든지 패가망신하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지라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백성들을 돌아봐 주십니다.
그래서 3:30절에 무려 80년 동안 태평하게 해 주십니다.
태평할 때 조심하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얼마나 태평합니까? 그 태평속에서 좋다, 평안하다고 하면서 안일한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그냥두시겠느냐고 하시면서 북한 핵탄두가 우리들에게 날아오지 않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만약에 아직도 그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심히 두렵습니다. 회개합시다. 우리 다 같이 모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 못했음을 회개합시다. 모여 금식하며 부르짖어 용서를 구합시다. 혹 핵탄두를 통하여 우리를 징계하시려다가도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실런지 어떻게 압니까? 통일의 날도 더 빨리 오게 해 주실지 어떻게 압니까? 문제는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들의 진액을 짜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핵탄두보다 더 강합니다. 핵무기도 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핵무기도 보다 더 강한 것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과거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6?25의 전쟁이 할키고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았습니까? 과거 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이, 형제들이 총탄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어찌할 수 없는 모습을 경험해보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겠습니까? 지금 우리 회개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기도하기만 하면 김일성이 장난하고 있는 저 핵은 문제가 아닌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3:31절에 보면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소모는 막대기로 대적 600명을 죽입니까? 600명 정도이면 일개 대대병력입니다. 그 대대병력을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다 처치합니까?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적을 무찌르려면 아군은 그 적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소모는 막대기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그 막대기는 소 모는 데나 필요하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실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도 걱정하십니까? 그래도 두려워 합니까? 여러분들에게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모는 막대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멀쩡한 사지 육신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십시오. 핵 아니라 핵에 할아버지 뻘 되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한번 손보기만 하시면 그만입니다.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의 기도다
지금 우리 주변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어떠한 문제가 일어날지 모르는 말그대로 불확실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확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충현기도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구국철야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많은 성도들이 오셔서 하나님에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전국에서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분들이 진정으로 애국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로는 애국한다고 정치가들이 야단이지만 진정으로 애국의 길은 하나님께 이 나라를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부르짖는 주님의 종들이 진정으로 애국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월남전에도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나라없는 백성의 불행을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에게 예수믿는 장로님을 대통령으로 세워 주셨으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쉬면 되겠습니까? 우리 교단 장로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겠다는 그러한 유치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십니다. 마지막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물질적인 축복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제아무리 핵무기를 가지고 자신의 정권과 김일성궁을 지킨다고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한번 손보기 시작하면 핵무기 아니라 천하 없는 것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핵무기보다 우리들의 기도가 더 무섭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핵무기보다도 더 강합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해 의심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주여 불을 주옵소서(열왕기상 18 : 20~24)
□ 열왕기상 18 : 20~24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흘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로다.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라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말며 나도 한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24 너회는 너회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사람의 정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을 받으면 마귀의 자식이 되고, 주님의 영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며 또한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임하신 불길과 같은 성령의 새힘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마다 불길같은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갈멜산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
본문 21절에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이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렇게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 여호와를 좇을 것이요,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 바알을 좇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결단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소위 양다리를 걸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기고 그를 좇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를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믿는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과 전혀 구별이 없는 자들을 가리켜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혹 우리가 그러한 사람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엘리야가 백성에게 결단을 촉구하자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그런 결단을 촉구할 때 어떠한 이야기가 나와야합니까? 우리는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라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불이 떨어지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갈멜산에 불이 떨어졌는지를 알아보면서 여러분들도 그대로만 하면 여러분의 가슴에도 불이 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갈멜산에 역사할 때 많은 장작을 갔다 놨다고 해서 불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휘발유를 갔다 놓았다고 해서 불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 때 불이 떨어졌느냐면 본문 30절에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세워야만 불이 떨어집니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질 때 하나님께서 불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져 버린 제단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무너진 단을 수축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무너져버린 그 현장에는 아무런 역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에는 여호와의 불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한 두 사람이 모여 기도해도 불이 떨어진다
비록 한 두 사람이 모인 곳일찌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성령의 불길과 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도 아니요, 좋은 배경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녁에 피곤을 무릎쓰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그 다음날 직장에 출근해도 피곤치 않는 새힘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불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라"고 합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입니까? 얼마나 기쁜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고 하셨습니다. 이삭에게도 말씀하실 때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불을 주셨지만 엘리야가 혼자 죽을 각오로 기도를 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불을 주셨습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열심히 목숨을 바쳐 기도하는 자들에게 불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적고 작다고 낙심해서는 않됩니다.
또한 많다고 자고해서도 않됩니다.
겸손히 기도한 자에게 불의 역사가 있다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줄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만 해결해 주셔야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한 겸손한 기도의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과 교회를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은 미국 인구의 전체 5%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적은 사람들이 미국을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다 타락해도 나 혼자만이라도 바르게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회와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냥깨비 하나는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불을 일으킵니까? 작은 고추가 맵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바르게만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기도의 불만 받으면 구역 식구들을 다 태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불로 무디어져버린 우리들의 심령을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불로 태울 수가 있습니다. 그 위력을 체험하시는 분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할 때 불의 역사가 있다
에스라 10:1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할 때,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통곡하여 기도할 때 많은 백성도 따라서 기도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모범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처럼 하지 않는다고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기도회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개 집사가 나오지 않았다고 흉볼 필요도 없습니다. 나 혼자라도 제대로 기도하기만 하면 불은 제대로 퍼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동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남의 일처럼 구경꾼의 위치에 있지 마시고 바로 나의 하나님, 우리들의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곤하여 졸지라도 하나님은 그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어려운 문제를 가능하도록 인도 해 주십니다.
기도의 불이 떨어지면 이기는 역사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선지자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귀손 시냇가로 도망갔다고 했는 데 저는 귀손 시냇가가 어떻게 생겼나 하고 가서 봤는데 지금은 물도 흐르지 않고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갈멜산에서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해 주셔서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게 했습니다. 이기게 하시는 승리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인 것입니다.
신명기 7: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주신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방 원주민들을 다 진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이방신인 바알을 섬기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바알을 처치하십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바알의 선지자들을 진멸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셔야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 승리하게 주십니까? 성령의 불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어야 합니다.
나를 불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불을 끄는 자가 아니라 불을 붙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작은 불씨가 된다면 얼마 좋겠습니까 ? 그런 작은 불씨로써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그 불씨위에 물을 부어버리는 사람은 아닌지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고후 13:5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방수 체질이 되어서 불을 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그 사람이 가는 곳에는 분쟁이 있고,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에는 되는 일도 않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자고 해도 그 사람은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안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고 "주여 믿습니다"하고 우리는 순종만 하면서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나도 엘리야 처럼 가는 곳마다 불을 붙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던지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불을 붙이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120명이 먼저 불을 받고 가는 곳마다 불을 붙이자 대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하게 해 주실 때에는 벼락을 치면서 부흥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는 사람들의 진액을 통하여 불을 붙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어떻게 기도일 불을 붙일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분량만큼, 그릇만큼 성장시켜 주시고 부흥시켜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가 전도사 시절에 어떤 교회에 청년회를 지도하게 되었는 데 처음 그 교회를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회가 아무런 신앙의 힘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불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청년들이 교회에 모이기는 모이는 데 형식적으로 모이고 친목회로 모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사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가 기도하면서 어떻게 이 청년들을 뜨거운 신앙의 사람들을 만들것인가를 고민하는 가운데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먼저 한 사람씩 기도실로 데리고 가서 단 둘이 앉아 기도의 불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청년회장부터 그렇게 시도를 했습니다.
청년회장 다음에 부회장과 같이 기도를 했는 데 그때는 이미 불이 붙은 회장을 참석시켜 셋이 뜨겁게 기도의 불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점점 한사람씩 불어나게 되자 그 불길이 전 청년회원에게로 번지기 시작하여 온 청년회가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청년회가 되어서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들어와도 불이 자연스럽게 붙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기도의 불을 붙이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지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모였다 하면 여론은 "오락하자, 게임하자"고 합니다. 친교를 목적으로 야외로 나가자고 합니다. 물론 친교도 해야 합니다. 문제는 뜨거운 기도의 불을 붙인 다음에라야 그 불의 위력으로 친교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정적적으로 보아서는 않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불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이성을 초월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을 받고 보면 제아무리 힘이 든다고 할찌라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 힘이 듭니다. 어렵게 됩니다.
인간의 계획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만이 일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의 향을 많이 저축하면 나의 후손이 열매를 먹는다
기도의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30년 동안 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속상해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십시오.
불을 지피면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립니다. 우리가 기도의 불만 붙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일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일감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자발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고 불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충만한 은혜로 넘실거립니다.
불이 떨어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명동 네거리에서, 서울역에서, 버스안에서, 전철 안에서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불을 받아야 진짜 일을 합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지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혼자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언제나 옆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을 받고 불을 붙이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에 영광을 돌이며 여러분이 사는 곳에는 평화가 넘치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5 기도할 때 오는 축복(누가복음 3:21~22)
□ 누가복음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교회를 오래 다니지만 기도를 형식적으로 하고 진심으로 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직분자들 가운데 기도를 정말 결사적으로 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왜 못하느냐면 기도할 때 기도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바르게 알고 나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에 만사형통의 복을 받는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 역사가 나타났고 성경책을 볼 때에 기도를 하기만 하면 사자굴에 들어가도 역사가 나타납니다. 기도만 하면 옥에 들어가도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한 역사가 옛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 형편으로 부터 문제해결을 받을 것을 믿게 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기도로서 주님만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옥문이 열려지도록 해 주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바로 기도의 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T.V를 볼 때 리모콘으로 멀리서도 체널을 마음대로 조종하듯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만 바르게 형성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리모콘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의 위력을 아는 자는 기도의 시간을 투자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것보다 기도의 위력을 아는 자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문제해결을 맛보는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인간의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위력과 그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 깨달은 사람은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우리들은 그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우리 주님은 시작부터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모세도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의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그 일을 실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쁜 일과 속에서도 기도를 시간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목사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믿음의 신조입니다.
동서남북 다 막혀 있어서 어찌 할수 없다 할찌라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것은 누가 무엇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도장으로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그 확신은 저에게 "다른 것 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만 많이 하라"라는 주님의 조명하심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리할 때 능력의 종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나갔습니다.
열려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기도할 때 홍해도 열려지고 하늘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많은 돌에 맞아 순교하기 전에 기도를 했습니다. 저가 생각하기에는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한 간절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하늘 문이 활짝 열려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일글어지는 상황인데도 얼굴이 더 밝아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지금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다 할찌라도 은혜를 못받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수심이 가득차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이 은혜와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굴에 나타나 있게 마련입니다. 얼굴이 좀 못났다 하더라도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개성대로 아름답게 은혜롭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생활을 잘 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 얼굴만보면 은혜를 받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다 열립니다. 기도하면 나에게도 열린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회하기를 원하고 신학교 가기를 원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목회의 길을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또한 시험에 떨어지면 그것대로 하나님께서는 좋게 해 주십니다. 나중에 먼 훗날 과거를 회상하기를 "아하 그때 그것이 그렇게 되었구나"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범사를 좋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열심히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환경을 인내하며 승리로 장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어려움이 와도 불평불만이 없게 됩니다. 또한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나타나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가 나도 모르게 조용히 역사하십니다. 이슬비에 옷 젖은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성령이 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데 여러분들의 그 뜻대로 채워 주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찬송이 기쁘고, 성령 받으면 기도할 맛이 나고, 성령 받으면 걱정이 물러가고, 성령 받으면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지금 성령충만함을 받은 자인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체크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자꾸 성경을 보고 싶다거나 기도를 하고 싶은 생각,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난다면 그것은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데 교만이 앞서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면 그것은 지금 나에게 징계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혹은 내 의지로 일을 하려고 할 때 재미가 없습니다. 자꾸 남의 일에 간섭이나 하려고 하고 남의 일을 트집잡으려고 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다들 좋아서 '합시다' 하면 자기는 '아니요'하고 반대합니다. 소위 가시가 됩니다. 여러분 좋은 덕을 끼치는 사람은 되어도 가시가 되지 맙시다.
성령이 임하면 일이 재미있게 되고 모든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실 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밀어 붙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밀어 붙이면 언제나 문제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아 저 이야기는 아무개 집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라 바로 저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로구나 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악한 귀신도 물러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는 우리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악령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귀신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라는 말씀 따라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은 믿는 기도가 역사가 나타난다고 했지, 내가 집사이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거나 내가 장로 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표적이 따른 것은 아닙니다. 믿는자에게 표적이 따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의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리 귀신을 쫓아도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시험 온 후에야 비로소 기도하는 데 우리는 시험이 오기 전에 기도로 무장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시험이 온 후에도 기도하면 좋은 것입니다만 시험이 오기 전에 기도로 무장하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지혜 가운데 지혜입니다.
기도하면 불안이 물러간다
기도하면 불안이 물러감으로 편안해 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평안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쓸 돈이 없을까 하고 근심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용해도 부족하지 않는 데 마귀는 부족하다고 걱정하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만 하면 편안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왠지 모르게 기쁨이 옵니다. 평안해 집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사람
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기도를 배웁시다(누가복음 11:1)
□ 누가복음 11:1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우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신앙인들 역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도에 관한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도를 배움으로서 우리들의 신앙이 좌절하지 않고 믿음 생활을 숭리로 이끌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즉 그 제자들은 기도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 신앙인들의 배움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어떠한 사람들이 어떠한 내용으로 어떠한 분에게 드려야 하는 것인지를 배움으로써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투자하라
기도를 배울 사람은 기도의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들이 지식적으로만 배운다고 해서 그 기도에 관해서 다 알고 있다거나 자신있어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들 들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대학교수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지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이론적으로 배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내가 몸소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경험하는 것인데 어린 자녀가 피아노를 배운다고 할 때에도 하루 아침에 다 마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려 1~2년 동안에도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집 딸애가 근 5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가 딸애한테 이제 5년동안을 배웠으니 이제 마쳐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빠 끝이 없어요"
피아노도 5년 동안을 배워도 부족한 데 하물며 기도에 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기도도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루 한 시간씩 3년동안 투자한다고 해도 기도를 다 배우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전 생애를 걸고 배워야하는 것이 기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루 30분도 기도를 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기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데 겉치례적인 기도를 합니다마는 깊은 기도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시간을 많이 투자하여 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시간을 투자해야 함은 물론 기도에 관한 교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기도원 목사가 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기도원을 다 가 보았습니다. 왜 갔느냐면 기도하는 것은 물론 기도원 운영 등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기도원 목사님의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들이었습니다.
저가 앞으로 기도원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에 관한 교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 기도에 관한 교재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사람들과 접하라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기도를 잘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다 보면 기도를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가 신학교에 진학할 때부터 저 주변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기도를 밤새워 철야하며 기도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진학해서 보니까 주변에 있는 전도사님이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부러워했습니다. 그때 저가 기도를 하고 나서 눈을 떠 보면 겨우 2~3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전도사님들은 한번 업드려 기도하면 그 자리에서 3~4시간동안 꼬박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을 따라 다니면서 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과 같이 일곱 명이 계속 기도의 팀을 구성해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경과 될수록 기도의 실력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소위 기도의 능력이 싹트기 시작하게 됨을 저 스스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 충현기도원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도하는 곳에 들어와 혹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들어와 기도를 하고 기도를 배울 때 기도의 실력이 쌓일 줄 믿습니다. 결국 우리가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좋은 교재를 가져야 하고 또한 좋은 선생님 내지는 좋은 기도의 동역자를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내가 나약할 때 서로 기도해 줄 수 있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기도를 해 주면 기도에 약한 사람도 새 힘을 얻게 됨니다.
기도는 귀신을 좇아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기도를 배워야 되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를 배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마귀와 싸워서 이길려면 기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살아 역사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외식하는 기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씀에 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가 어려서 장로교 보수교단에서 보면 "말씀이다 말씀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씀도 기도가 없으면 안됩니다. 그저 어떤 정보의 습득으로서의 지식의 수준에 멎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아무런 생명을 잉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받을 때 바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 버리면 전혀 다른 기독교로 변질되어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더불어 말씀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더불어 기도를 통하여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으며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는 데 고쳐주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귀신은 주사를 맞는다고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귀신들었다고 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눈을 때려서 눈이 멍들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때려서 귀신이 나갈 것 같으면 몽둥이로 치면 나가겠네요
여러분 때려서 귀신이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혹 귀신들린 사람을 만난다고 할찌라도 때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귀신 쫓아낸다고 하다가 죽는 경우도 종종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지 않습니까? 분명한 것은 기도외에는 전혀 쫓아내지 못합니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정일획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왜 귀신을 좇아내지 못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도 기도를 하면(기도를 배우면)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르게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직분자에게 표적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른다고 했지, 어떤 교회의 직분에 귀신이 도망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몇년 믿어야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태 신앙이어야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자에게 귀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선교를 하다가 교회 당회장을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버지여 당회장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 다하는 데 저도 한번시켜 달라고 그러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이후 대구에서도 청빙이 있었고 서울에서도 '유목사 우리 교회에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러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에 가서 제일 먼저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나면 다른 것 전혀 묻지 않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 와서 주일날만 이 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 대신 저는 기도원을 만들어서 월요일에 기도원에 갔다가 토요일에 내려오기를 원하는 데 장로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장로님들은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가 기도원 욕심 때문에 좋은 교회임에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충남에 어떤 교회에서 청빙이 있어서 가서 장로님을 뵈었는 데 그 때 저가 "장로님, 저가 이 교회에 오게 되면 저는 기도원을 해야 되고 저는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저가 전국 부흥회를 다녀도 좋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을 해도 좋다고 하기에 그 교회에 갔습니다.
그 교회에 가서 처음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주일에 귀신들린 어떤 처녀 하나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 여자는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셈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상담을 하는 데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온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은 기도원에 계시다가 오셨다는데 우리 딸 귀신을 좇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저가 "그럼요, 귀신을 좇을 수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대답을 하면서 저의 마음 한쪽 구석에 행여나 좇아서 나가지 않으면 챙피해서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솔직하게 그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다는 말이 "몇 번 교회에 나오면 귀신을 좇아 줍니까?"라는 얘기를 한 겁니다. 그때 저가 "세 번 나오면 된다"고 했다가 못 좇아내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그때마다 지혜를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왕 잡을 것 넉넉하게 잡기로 하고 육개월 나오라고 했습니다.
육개월 동안 나오면 귀신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마음은 콩알만해집니다. 만약에 "육개월 동안 나와도 귀신이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고민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매 주일마다 안수기도를 하는 중에 언제 귀신이 도망갔는지 모르게 깨끗하게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왜 육 개월을 잡았느냐면 이 귀신이 들어 있는 사람은 마치 불꺼진 방과 같이 컴컴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개월 동안 말씀의 빛이 들어가면 결국에는 어둠이 물러가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지혜가 왔습니다. 결국 이 처녀에게 말씀이 들어가게 되자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처녀가 25살을 먹었는 데 얼굴도 예쁘게 생겼는데 중매가 들어 왔습니다. 그 남자는 총각 집사였는 데 그 중매보는 자리에서 그 처녀가 하는 말이 "나는 귀신들렸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총각 집사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귀신들린 것은 병도 아닙니다"라고 했답니다.
옳습니다. 그 귀신은 빛이신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또 한 번의 체험을 하게 되었는 데 교회에 잘 나오는 어떤 집사님에게 귀신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도 잘 나오시고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헌신적으로 봉사도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멀쩡한 집사님이 어느날 갑자기 눈알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때 굉장히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십일조 생활도 잘하는 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체념적인 생각이 교회에 퍼질 때 그것은 말씀전도의 길을 막기 때문에 그것은 목회자로서는 고민거리가 됩니다.
저가 그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더러운 귀신아 물러날 찌어다"라고 기도를 하면 그때는 나갑니다. 그래서 좋은 기분으로 집에 갑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다시 금방 들어갑니다. 집에서 잠을 자고 있으면 "목사님 목사님"하고 옵니다. 그래서 그 남자 집사님과 함께 저의 방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잠을 자다가 귀신이 목을 누른가 봅니다. 헐떡거리면서 뒤둥거립니다.
저는 그때 너무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때 성경에 나와있는 마귀와 귀신과 사탄에 관해서 다 뽑아 보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목회를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능력있는 목회는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종은 악령의 허리를 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면 곤란합니다.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한가지 한가지를 깨닫게 해 주셨는 데 그렇다고 해서 저가 완전하게 깨달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이 다니는 것이 마귀나 귀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귀와 사람의 영혼은 창조 당시부터 구분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천사가 사람 영혼 될 수 없습니다. 사람 영혼이 천사가 될 수 없습니다.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귀신이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그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는 승리하게 한다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하는 자에게 어떠한 유익이 있느냐면 승리의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다니엘에게 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와 싸워 승리를 했습니다. 그 다니엘이 칼을 가지고 승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이겼습니다. 나도 기도하면 이길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를 들어 한 30분 동안 기도를 했으니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데 다니엘처럼 기도를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에 목숨을 걸 때 승리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목숨을 거는 자에게 승리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엘리야도 기도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바알신과 아세라 우상과 싸울 때에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야가 혼자 싸웠지만 승리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
기도를 배우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에스더의 소원은 유다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한나의 소원은 아들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기도의 소원은 병낫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떤 소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저의 소원은 기도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다 알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충현기도원이 78년도에 개원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 기도원 목사님이 한영철 목사님이 기도원에 들어 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충현교회 평신도로 들어왔습니다.
옛날에 퇴계로 5가에 교회가 있을 때 수요일이나 주일예배가 마치면 차가 기도원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원에 자주들어왔습니다. 지하실에서 한영철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실 때 저는 맨 앞에 앉아서 기도하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이곳에 세워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84년도에 저가 총신을 졸업하고 두달 정도 있으니까 기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때 충남 아주 작은 교회에 가 있었습니다. 그 적은 교회에서 이 큰 충현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 시골 교회에 가서도 기도원 할 수 있도록 새벽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또한 만리포에서 해변기도원을 한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해변가에서 기도원 한다고 여름 수양회 하는 데 사람들은 밀어 닥치는 데 도와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원에 대한 기도를 늘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저가 기도원에서 기도론을 가르쳐 보고 싶었는 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충현기도원도 3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단이 들어 설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충만 받을 수 있다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하게 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배우면 성령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배워서 기도를 하게 되면 침체에 빠진 신앙생활이 활기를 되찾게 되고 새롭게 교회에 나가서 봉사생활하는 것이 은혜 가운데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으면 낙심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배운 기도의 사람들은 영적인 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게 됩니다. 내가 이대로 가다보면 얼음장이 되겠다고 한다거나 미지근하다거나 이렇게 가다가는 곤란하게 되겠구나하는 진단이 서질 때 스스로 알아서 기도를 하고 또한 기도원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하나님께 은밀한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기도를 배운 사람만이 가능할 줄 압니다. 그러나 뜨거운 신앙의 상태가 되다가도 침체가 되면 그것이 어떤 정상적인 신앙생활인 줄 착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미지근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면 이 기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배우게 되면 항상 가슴이 뜨거워 질 수 있고 놀랍고 기쁜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남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 감격과 기쁨을 맛볼 줄 믿습니다.
시편 30:5절에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으로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한다는 말은 곧 우리들에게 울음으로 인한 고통이 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얼마가지 않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녁에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들로 인하여 눈물을 홀리며 울면서 밤을 지새울찌라도 새벽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맛을 본 사람은 그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목요일날마다 철야기도회를 갖게 될 텐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든 분은 기도원에 올라와서 이러한 기쁨의 은총과 축복을 맛보시게 되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녁에 와서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나면 돌아갈 때에는 기쁨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
다음으로 기도를 배우게 되면 어떤 유익이 있게 되느냐면 기도를 배운 자에게는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3:1,2절에 보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고 있는 데 앉은뱅이가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푼 보태달라고 구걸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라는 기도를 하자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앉은뱅이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가 부산에 어떤 여전도회 연합집회를 인도했습니다. 90분 90분 두 시간을 기도에 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두 다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식사는 하지 않고 전부 기도에 열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기도의 문을 열어줍니다. 말씀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완악한 자도 말씀의 불방망이로 치면 안깨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배워서 유익한 신앙생활과 풍성한 생활을 추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를 할 때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민족이 전쟁에 패하고 손이 올라가면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에 이스라엘이 이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보편적으로 보면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중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이 한사람의 기도만 살아 있어도 그 가정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도 저희 가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저희 가정에 기도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우리 가정이 완전히 망하게 되었는데 제가 78년도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울면서 "주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손들고 기도했습니
다.
완전히 하나님 앞에 손들었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손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손을 들므로서 내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데 회개하고 나니까 저희 가정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두 아들은 목사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했는 데 제 동생이 총신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역사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두 남동생들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여동생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는 데 교회를 전혀 나가지 알았는 데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다가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를 나가고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고 지금은 구역장이 되어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 굉장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파숫꾼이 중요합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 이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고넬료가 기도를 할때 그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면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비록 내 한 사람이지만 여러 사람의 몫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기도해서 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도를 안해서 망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교회도 기도를 하다가 망한 교회는 한 교회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다가 교회가 분열되고 시험드는 그러한 경우는 많이 있지만 기도 많이 하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도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각자의 가정과 개인과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된다
기도를 배우게 되면 교회가 부흥됩니다. 초대교회가 기도를 배울 때 삼 천명 오 천명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도서실은 책을 보라고 만들었습니다. 도서실에서 음악을 들으면 않됩니다. 도서실은 책보라고 만드는 것과 같이 교회는 기도하라고 만들었습니다. 만든 목적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차를 만든 것은 타고 다니라고 했는 데 밀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교회에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매일같이 텅텅비어 두는데 그러지 말고 서로 돌아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교회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교회는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성령께서 부흥되게 해 주십니다.
인간의 잔재주 안부려도 자연스럽게 부흥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로는 도저이 이해가 되지 않는 신비한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에 관해서 잘 배워서 모두 기도의 용사들이 됩시다.
7 기도의 기회를 잡자(누가복음 23:39~43)
□ 누가복음 23:39~43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본문 말씀은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을 간절히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되었고 하나는 영원한 천국행 열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학력의 차이가 있다거나 무슨 선행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기도의 기회를 잡았고 한 사람은 기도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하나는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되었고 한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기회들이 있지만 특별히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여러분이 기도의 기회를 잘 잡아서 천국의 합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망하는 사람들과 성공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여러면이 있겠지만 특별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우리가 달리기 경주에서 기회를 잘 잡아서 빨리 출발하게 되면 금메달을 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달리기 경주하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경주를 하고 있는 데 먼 산 보다가 넘어지고 엉뚱한 것 생각하다가 출발이 늦어져서 놓쳐버리는 사람들 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기회를 놓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러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인생의 날을 잘못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기자는 나의 인생에 이 땅에 사는 날을 계수하게 하옵소서. 자기가 언제 얼마만큼 살다가 이 땅을 떠날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할 일을 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보람되게 일하다가 가기를 원해서 나의 인생을 계수하게 해 달라고 그러한 간절한 바램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1 년은 365일입니다. 1년은 52주입니다. 10년은 520주만 지나면 10년이 순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천 주일만 지나면 저가 60이 훨씬 넘어 서버립니다. 빨리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새벽에 기도의 기회를 잡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의 기회를 언제 잡아야 합니까?
그것은 "새벽에 기도의 기회를 잡자"입니다.
우리 인생의 새벽, 하루의 새벽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새벽미명에 일어나서 예수님의 기도했던 것 처럼 기도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들은 좀더 자면 피곤이 풀릴 줄 알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곤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법칙대로 살아갈 때에 피곤이 풀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새힘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영도 죽고 육도 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해서 새벽기도의 기회를 헌신짝처럼 던저 버리고 하루를 실패의 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마지막 인생의 황혼기에 가서 "주여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해야 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이 새벽기도에 줄을 잡고 새벽기도를 놓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그러한 생활이 당연시되어 있는 데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할 때 영력이 올라갑니다. 영의 분별력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고 무릎이 저려오면 그때서나 교회에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 이미 때는 늦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생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학생은 실력이 올라갑니다. 영어 실력이 올라가고 수학실력이 올라갑니다. 새벽에 늦도록 잠만 자는 학생은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없이 믿음생활이 잘한다고 할지라도 새벽기도 안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믿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새벽에 기도하지 않고 실컷 잠만 자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새벽기도에 한 사람도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리 기도로 준비하라
목회자들이 주일 설교를 위해서 월요일부터 기도로 준비하면 설교가 힘이 있고 설교 준비가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다급해서 준비를 하면 설교가 무거운 짐이 되듯이 우리 성도들도 무슨 일을 할 때에 미리부터 기도로 충분히 준비하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충분히 기도를 하고 강단에 서면 설교가 힘이 있고 사모님도 은혜를 받고, 권사님도 은혜를 받고, 집사님도 은혜를 받고, 청년들도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때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 오늘 설교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구나"라고 다 압니다. "우리 목사님, 오늘 설교를 위해 기도를 안하셨구나"라고 다 압니다.
요즈음 우리 성도들이 더 민감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강단에 올라가서 엎드려 후회하면서 기도합니다.
"주여, 다음 주일부터 기도로 준비하겠습니다."
본인이 준비가 미숙한 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저가 설교를 할 때 자주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목회자들은 다 동일한 줄로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여유를 두고 기도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부흥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이 나타나고 신앙이 성숙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공과 준비를 할 때 기도로 준비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여러분들이 다 경험한 줄로 압니다. 아무리 쉬운 성경 이야기일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시간을 때우는 데 급급합니다. 단 몇 분의 시간도 진땀이 나게 되는 당황함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것과 준비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엄청납니다.
구역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장이 되어서 구역예배를 인도할 때에 충분히 준비할 때와 준비하지 않을 때는 다릅니다. 구역장도 귀중한 사명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작은 가정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역징은 그 작은 교회 목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데 그것을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발등에 불떨어지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자
다음으로 "발등에 불떨어지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고 터집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의지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손봅니다.
왜 손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7,8절에 보면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일환으로 사고가 터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물질에 독수리 날개 달아 버리면 하루 아침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됩니다.
또한 기도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대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아주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이 비겁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제자일찌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담대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공식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기회를 놓치고 문제가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 후회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발 잠자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와 가까이 있을 때 기도 좀 하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돈 저축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필요하다면 다 주십니다. 먹고 살아갈 쌀 준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를 저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믿은 처녀 총각들이 많이 있는 데 결혼하기 전에 기도 저축 많이 해야 합니다. 결혼해서 살림살이 하다보면 처녀 총각 때처럼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처녀 총각 때 열심히 기도를 저축해 놓으면 결혼하고 나면 그 영향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젊어서 기도 기회 놓치지 맙시다." 매 순간순간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호와께 묻자온데"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물어보고 상황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실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이기도록 역사해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루 저녁 철야기도 나가지 말지"라고 하면
그 다음 날부터 한 주일 동안을 살아보면 영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한 주간과 기도하지 않는 주간이 다릅니다. 두 주간만 기도의 줄을 놔버리면 그 영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엄청난 차이가 날뿐만 아니라 그 때 기도를 하게 되면 정상적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어려워집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페달을 계속 밟아야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 중간에 섰다가 나가면 힘들어 집니다. 운전을 해도 오르막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섰다가 올라가려면 힘이 듭니다. 아예 올라가려면 올라가는 탄력으로 계속 올라가야 쉽습니다.
기도도 탄력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잘 될 때에 계속하면 계속 기도가 잘 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변덕이 심하면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매사가 힘들어 집니다. 괜히 짜증이 나고, 그 짜증을 남편에게 혹은 아내에게 자식에게 발산합니다.
그러다 보면 항상 집안이 분쟁이 있게 되고 결국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으로까지 가고 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라도 기도로 충만한 사람이 있다면 짜증 부리는 아내, 혹은 남편, 혹은 자식을 사람의 포로로, 기도의 포로로 만들고 맙니다. 양쪽 다 기도로 충만하다면 좋은 날들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여 불행의 틈을 사탄에게 넘기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분명히 당부합니다. 1년 52주 특별히 철야기도의 찬스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켜보십시오. 남이 가니까 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회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그 때 그 설교를 들을 때,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설교 할 때 들었으면"하고 후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설교를 듣게 하시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받게 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려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을 사람이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기도의 기회를 잡는 사람들에게 살길이 활짝 열려집니다. 요나가 기도하지 못하고 고기 뱃속에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아직도 안늦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기 뱃속에 들어갔지만 아직도 나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하시면 나에게는 또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가 기도할 때 사명을 감당할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기도해서 열렸습니다.
"나도 기도의 기회를 잡으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사업의 길이 열려지게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공부하는 길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 하는 사람들에게 목회의 길이 열려지게 됩니다.
저의 경험인데 신학교 동기들 중에 기도 많이 하던 사람들 치고 목회길이 안열린 사람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기도할 때 죽겠다는 각오로 기도하는 사람치고 외면당하는 것을 못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면 길이 열리는 데 인간적으로 요나같이 인생의 막이 내려졌는 데도 기도하면 길이 열려졌는 데 우리에게 왜 길이 안 열리겠습니까? 누가 나를 아무도 안도와 주고 외면해도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틀림없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기회를 잡으면 사명을 멋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기회를 잘 잡은 사람은 사명을 죽지 못해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멋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의 기회를 잡았을 때 혼자 나가서 850명을 간단하게 해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주 멋있는 일이 아닙니까? 기도를 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바알신을 다 잡아라"
잡아죽이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기도했을 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명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명이 있으면 있을수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승리하는 역사가 있다
기도의 기회를 잡으면 이기는 역사가 있습니다. 승리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의 음모에 의해서 유다인을 다 잡아 죽이라는 왕의 어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르드개가 살아남기 위해 야산도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문제의 해결을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드개가 확신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만이 유다인을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자기가 달려서 죽게 되는 상황으로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기회를 잡으면 게임이 완전 역전되는 승리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저는 선배 목사님들께만 잘 보이면 목회길이 열리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충동에 있는 큰 교회 당회장 목사님께서 저의 이력서를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큰 교회에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구나"라는 설레임으로 기다렸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이 받아 갔으니 틀림없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 데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위해 금식을 했다고 하니 저는 낙동강 오리알로 떨어져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화여대 앞에 있는 어떤 큰교회 당회장 목사님이 저를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충동에 있는 교회보다 더 크므로 더 잘되었다고 위로를 받으며 이력서를 드렸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이 다 되었다고 했는 데 가서 보니까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가 깨달은 것이 "아하, 당회장 목사님이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하나님이 안세우면 않되는게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제가 두 번이나 경험하고 나서 "인간적인 방법은 버리자"라고 각오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주셔야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다 된 것 같지만 틀림없이 파선을 당하고 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가 배를 타면서 얼마나 할렐루야 하고 탔겠습니까? 그러나 그 할렐루야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마가지 못해서 풍랑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사업에 실패를 합니까? 밑바닥에 기도가 깔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좋은 신학교 졸업장 있으니 된다고 하거나 어떤 교회에서 도와준다고 했으니 되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하 어떤 교회에서 밀어준다고 해도 기도의 바닥이 깔려지지 않을 때는 결코 부흥되는 법이 없습니다. 부흥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얼마안가서 실패하고 맙니다.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경주장에서 출발할 때 긴장과 힘있게 출발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기도의 시작과 출발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쓰임을 받게 된다
기도의 기회를 잘 잡으면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게 하실 때에는 쓰실 때가 있습니다.
권투 선수가 링에 올라가서 자기의 평소 닦은 실력을 발휘한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기도를 충분히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그 어떠한 곳에 있을찌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부르셔서 사용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배울 기회도 있고 돈을 벌 기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들에게 주신 기도의 기회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들에게 주셨는데 그 기회를 잘 잡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있어도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너무나 좋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명심할 것은 "기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옵소서"라고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한 사람이 열 몫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들에게 저금통장도 중요하고 인감도장도 중요하고 토지대장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요성, 기도의 기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을 잘 잡게 될 때에 여러분의 장래가 하나님 앞에서 시온의 대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나중에 버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켜 기도해야 제대로 쓰임을 받습니다.
8 기도의 힘(사도행전 12:1~12)
□ 사도행전 12:1~12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안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6 혜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틈에 서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 데 파숫꾼들이 몸 밖에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용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요즈음 살아가는 세상은 힘의 대결입니다. 그의 힘의 대결에서 지면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고 권세를 가지고 사는 축복이 있습니다. 실력의 대결에서 패하게 되면 대학도 못들어가고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력있는 사람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힘을 주옵소서
"주여 나에게도 힘을 주옵소서"라는 우리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상상 못할 힘을 체험하시기를 바람니다.
차가 고장이 나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레카차가 와서 끌고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끌려가는 사람이 있고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그러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는 데 왜 끌려갑니까? 그 근본을 추적을 해보면 힘이 없기 때문에 끌려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힘만 있으면 제발로 굴러가면 되는 데 힘이 없어서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기도의 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데 역사는 옥중에 있는 베드로에게 힘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힘이 있으므로 굴리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처럼 범사가 풀려지는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묶여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심 걱정에 묶여 꼼짝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기도의 권세를 주셨는데 그것을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얼마나 나약하게 혹은 힘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가 어떤 목장에 갔는 데 그 목장에는 많은 철조장을 쳐놓지 않습니다. 겨우 철사로 몇 줄 쳐 놓습니다. 그러면 등치 큰 젖소가 도망을 가지 못하고 그곳에 갇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줄에 전기를 넣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젖소가 그 전기줄에 감전이 되면 감짝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기를 넣어 놓지 않아도 그 젖소는 밖으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얽매여 묶여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를 묶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근심걱정의 줄을 가지고 우리를 묶으려고 합니다.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라고 합니다.
이렇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들에게 접근하여 우리를 올무에 집어 넣습니다. 우리를 묶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풀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기도로 풀어야 합니다.
합심기도할 때 기도의 위력이 나타난다
우리가 합심기도를 할 때 기도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즉 기도의 힘입니다.
한사람이 중풍 걸려있다고 한다면 혼자 업고 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들고 가면 쉽습니다. 기도도 혼자 하면 힘들지만 여러 사람이 합심기도를 하면 힘들지 않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여서 합심기도를 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좋은 동역자들을 많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동역자들과 합심하여 기도하면 한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옆에서 함께 기도를 해 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 붙잡혀간 사람은 붙잡혀 갔고 우리나 도망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갇힘이 곧 내 갇힘이라고 생각하여 모두가 합심하여 온 진액을 짜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이길 줄 믿기 때문에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박멸됩니다.
왜 병이 걸립니까 ? 우리들의 모든 몸의 부분들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자꾸 새로운 세포로 바꿔지고 늙은 세포는 파괴되어 몸밖으로 내보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늙은 세포의 기능이 더 이상 살아서 움직이지 못하게된 부분에 병이 발생하고 끝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기도의 약효가 다 떨어지면 우리들의 신앙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온갖 시험이 들어오게 됩니다. 별것 아닌것도 시험을 받아 상처를 받습니다. 무슨 얘기를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과 무슨 일을 합니까?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그러한 시험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낭패를 보게 하고 피차 상처를 주어서 낙심케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자꾸 기도를 하면 할 수록 힘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철야기도를 인도하면 인도할수록 영력이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싸움도 자주하다보면 잘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기도도 자주 하다 보면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된 병사는 총을 잘 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쏘지 못하고 명중율이 10%라고 한다면 자주 사격을 한다든지 훈련을 받으면 명중율이 50%에서 60% 점점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자주 한다든지 훈련을 잘 받으면 기도를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신, 명중율이 높게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마귀를 잡는 힘입니다. 마귀가 혼비백산하면서 도망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시기, 질투, 미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는 잘합니다. 이러한 말씀를 잘 암기하는 하는 데 멎어질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대로 기도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기도는 국력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위력입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국력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는 국력이었습니다. 왜 소련이 우리에게 구걸합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애국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애국애국 말로만 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평안을 위해서 나라와 그 나라 왕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이길 수 있는 축복을 주셔서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꾀꼬리처럼 목소리에서 소리는 나오는 데 속은 허탕입니다. 곡조는 안맞아도 가슴에 뜨거움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훈련소에 입소하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은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것만 있으면 됩니다. 시설 좋은 곳에 가면 그곳에 안주하고 쉬는 곳은 좋을지 모르지만 기도하기에는 결코 좋은 곳은 못됩니다.
원래 훈련소에는 유격장이 있고 훈련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만이지 훈련소에 침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훈련소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훈련소에 입소해야 합니다. 그 훈련소에 들어가서 나의 육신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아우성을 치면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바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의 훈련소에서는 기도의 영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굴복케 하는 기도의 힘
기도의 힘을 공급받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힘이 있으면 구역을 잘 이끌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장로는 당회를 잘 이끌 수 있습니다. 당회원권을 가지고 이끌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제직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직회를 통하여 마치 지출권한이 자신에게 있는줄 알고 권세를 부리며 교만합니다. 가관입니다. 바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좀 부족하다고 할찌라도 기도에 대해서만큼은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승부를 가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원수까지라도 와서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내 욕심으로 원수를 이길려고 하면 않됩니다. 기도하면 그 억울했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뭘 그리 걱정하고 고민합니까?
세상에 고민으로 철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라는 철야기도는 하지 않고 고민걱정철야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한 가불해다가 고민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일 일까지 오늘 가불해다가 걱정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고민과 걱정
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괴로움 그 자체를 인정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괴로움과 고민과 근심 걱정을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고 아버지가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 때 아버지가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애굽 군대를 이스라엘 뒤를 따라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오게 해서 홍해에서 다 매장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팍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따라오게 해서 멸망시켰습니다.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기도는 우리를 온유하게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온유한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딱딱하고 강팍하는 마음은 부모도 어떻게 못합니다. 목사님이 그러한 강팍한 마음을 건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11: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요.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에게 마음이 강팍해서 이스라엘을 따라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홍해에서 다 장사지내게 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간단하게 처치해 버립니다.
북한에서 핵으로 장난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숫꾼이 아무리 새벽부터 깨어서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시고 자식들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오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병인 에이즈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에이즈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우리들의 남편들을,아내들을 지켜 주셔야합니다. 지켜 주신다는 것은 못된 짓을 해도 에이즈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못된 짓을 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에베소서 5:3절에 보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너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나도 기도하면 기도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내 자신을 볼 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복음성가중에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라고 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동서남북은 다 막혔지만 하늘문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을 각오로 기도를 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만큼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 86:3절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16 절에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서 이러한 새힘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 57:7~11)
□ 시편 57:7~11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틀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새벽'이 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됩니다. 새벽이라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별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신앙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이 단어처럼 확신과 소망을 가져다주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이같은 단어는 우리에게 희망과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해 주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힘을 주기도 합니다.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게 해줍니다.
새벽,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부풀게 하는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얼마나 멋있고 힘있는 말입니까? "새벽을 깨운다"는 말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새벽을 가져온다'라는 말로 해석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들의 힘으로는 그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실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이라야 새벽을 깨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은 굴로 피신하였습니다. 그 굴속에 피신하여 있을 때를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한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 지은 찬송시입니다.
오늘 이 밤을 무사히 보내고, 내일 새벽을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가운데서도, 다윗은 담대히 '새벽을 깨울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이 절대절명의 순간은 결국 극복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새벽이라는 단어가 마음속에 없거나, 사라져 버린 사람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새벽 시간을 소유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도 남보다 한발 앞서 가거나, 앞서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시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은 신앙의 선두 주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믿음이 앞서가기를 원하시면 새벽 고요한 시간에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하면 나의 무디어진 영혼이 깨어지고, 깨어진 내 영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잠자는 영혼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새벽시간에 잠만 자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로 보내고 있습니까? 새벽시간을 기도로 보낸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출세도 새벽시간에 결정 되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나 운동 선수들에게는 새벽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승리와 패배가 거의 결정이 됩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잠깐 본문 말씀을 통해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7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주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두번씩이나 '확정되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을 믿는 마음이 확고 부동하여, 고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주님에 대한 신앙이 확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새벽을 깨울 수가 없습니다.
기도의 불을 붙이는 사람들이나 기도의 일꾼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확고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한 확신속에 있는 자들이 새벽을 깨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새벽을 깨운다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새벽에 일어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척추 동물이기 때문에 누울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는 데, 새벽에 눈을 떠 일어난다는 것은 신체의 의지와 역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씁니까? 최후의 순간까지 누워있으려고 10분만 더 누워있자, 10분이 지나면 5분만, 3분만, 단 1분이라도 그 자유를 누려 보려고 하다가, 더 이상 피할수 없는 시간에 다다르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일어섭니다.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잠자는 사람을 깨워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깨워 달래서 깨워 줘도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욕도 듣고, 더 심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 데,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자는 영혼들을 깨운다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때로는 좋지 않은 말을 들을때도 있고, 핍박을 당할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영혼이 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8 절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는 말은 "내 영혼아 깰지어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먼저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새벽을 깨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깨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고는 일꾼이 된다거나 신앙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분명한 목적의식
두 번째 조건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를만이 새벽을 깨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11절).
11 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의 분명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의 분명한 목적이나 꿈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되는 대로 살지' 하는 사람과 '나는 꼭 무엇이 되고 말테야' 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방법이 똑 같겠습니까?
'나는 꼭 세계 참피언이 되야지'하는 선수와 '그냥 한번 해 보다가 안되면 그만두지 뭐'하는 권투 선수가 있다면 그들의 훈련 방법이나, 훈련에 임하는 각오는 굉장히 다를 것입니다. 꼭 세계 참피언이 되겠다는 선수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뼈와 살을 깎는 고된 훈련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속에도 그 머리 속에는 '나는 세계 참피언이 반드시 되고 말테야'하는 생각이 항상 자리를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 해보지 뭐'하는 선수는 뚜렷한 목표가 없으니까 훈련에도 열의가 없고, 꼭 권투로 성공하겠다는 결심도 약합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우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위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고, 살아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조금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고후 5:10).
새벽을 깨우는 시람들
그러면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란 어떠한 사람들인지 성경속에 나타난 신앙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4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들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내릴 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창세기 22장을 읽을 때 특별히 3절의 '아침에 일찍이'라는 이 말이 마음에 크게 부딪쳐 옴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운다는 뜻은 물론 영적인 의미이지만, 물리적인 새벽도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살만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각을 떠서, 그리고 불에 태워 죽이라는 번제의 명령을 하나님이 내리십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명령입니까? 하나님이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그 아들을 데리고 가시겠다니, 보통 사람들 같으면 분노하거나,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믿음의 조상답게 달라도 철저하게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적인 순종이 바로 22장 3절의 "아침에 일찌기"라는 말이 가르쳐 줍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조금이라도 오래있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헤어질 때 얼마나 아쉬워하면서, 발걸음을 돌립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단 1분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은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한이 없고 끝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이삭과 같이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때 이삭의 나이를 15, 16세쯤 된 것으로 보는 데, 이제 이삭은 의젓하고 늠늠한 청년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이삭과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라는 믿음으로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보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침에 일찌기'라는 말속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아침 일찌기'라는 말은 새벽이나 같은 말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막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 하는 때'에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창 15:22).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새벽을 깨울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순종의 믿음으로 자신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 땅의 잠자는 영혼들을 얼마나 많이 깨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던져주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새벽의 인물을 이야기 할 때 여호수아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서 3장부터 8장까지 보면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라는 말이 4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중에 한번 3장부터 8장까지 여호수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3장에서 요단강을 향해 싯딤을 떠나는 데 아침일찍 일어나 떠납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 데,아침 일찍, 즉 새벽같이 싯딤을 떠나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6 장에서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일어나서 제사장과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돌게 합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7일동안 매일같이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드디어 제 칠 일째 새벽에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맙니다.
7 장에서도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범죄한 아간을 제비뽑아 냅니다.
8 장에서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아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킵니다. 여호수아야 말로 새벽을 확실히 깨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 새벽과 함께 산 인물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만, 우리는 인간이 해야할 준비를 다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일들을 온전히 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고 그 새벽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다 잘 하기 위해서 기도로, 찬양으로, 지식으로, 건강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은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들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마리아 중에서도 이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거나, 따르는 데 있어 보다 열심이었습니다.
부활 후에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새벽같이 찾아 온 사람 중에 첫번째로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으로서 광명한 새벽별(계 22:16)이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사람이 제자들이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 아닌,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받은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단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새벽 미명에 여자의 신분으로 겪게 될지도 모를 모든 위험을 무릎쓰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데 열심이었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 새벽을 깨우는 복음의 빛을 발하는 여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에는 누가 나옵니까? 주님을 만나기를 보다 사모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주님을 만나는 데 열심인 사람들만이 새벽을 깨우고 복음의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새벽을 잠재우는 데 열심부리지 마시고, 새벽을 깨우는 데 열심이시기 바람니다. 그런데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열심히 만나기에 힘써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은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새벽 조용한 시간에 기도로 능력을 쌓아야 합니다. 신앙의 인물치고 새벽에 기도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볼 때도 새벽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난 것을보게 됩니다. 새벽에 홍해 바다가 갈라졌으며(출 14장), 새벽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수 6장), 시편 46편 5절에 보면 "새벽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보화를 캐는 시간으로, 너무도 소중한 시간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주에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유다 백성들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새벽부터 오정까지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느헤미야 8장에서 보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새벽부터 그들을 수문 앞 광장으로 나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새벽기도를 드린다는 점입니다. 이 새벽기도의 좋은 전통은 길선주 목사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 데, 초대 교부중에 이그나티우스라는 감독은 '하나님은 고요한 중에 계시므로 새벽에 잘 만나 주신다'고 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체험하시기를 원한다면 새벽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일이나 신앙에 있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벽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새벽의 캄캄속에서, 그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청소를 하는 청소부 아저씨나 신문을 돌리는 소년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면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새벽을 깨우기를 진정 원한다면 새벽 시간에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셔서, 이 어두움의 세상에 빛이 되어잠자는 영혼들을 깨우고 또 깨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 전심으로 여호와께 구하자(역대하 16:7~14)
□ 역대하 16:7~14
7 때에 선견자 하나터가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랑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11 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12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에게 구하였더라.
13 아사가 위에 있은지 사십일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14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성경은 우리가 의지하고 경배드려야 할 분은 하나님 여호와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피조물 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는 그분만을 섬겨야 하고 경배드려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8:60절에 보면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만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61절 말씀은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려야 하는 데 우리는 세상 것들에게 얼마나 존경어린 눈초리로 보내고 있습니까? 마치 그러한 세상것들이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내 사정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면 좋고 안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꼭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이냐, 사망이냐라는 갈림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우리들의 진액을 짜서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전후 배경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때는 남쪽 유다에 아사가 왕으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때까지 통일왕국으로 있다가 솔로몬 왕 이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분열될 때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 9지파 반을 이끌고 북쪽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나라 이름을 북쪽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혹은 그 북쪽 수도가 사마리아이기 때문에 그냥 사마리야라고도 합니다. 또한 그 북쪽 이스라엘에 실권지파가 에브라임이라고 해서 그 국호를 그냥 에브라임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남쪽은 르호보암에 의해서 두 지파 반을 이끌고 국호를 그냥 남쪽 유다라고도 합니다. 혹은 수도가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그냥 예루살렘이라고도 지칭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49:10절의 예언의 말씀 따라 이 남쪽 유다를 통하여 오시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계열은 북쪽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쪽 유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북쪽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경에 앗수르(앗시리아)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가서 멸망을 당합니다. 물론 포로로 잡혀가서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 수도 니느웨도 결국은 주전 607년 경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주전 587년 경에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러나 포로생활 70년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만듭니다. 돌아오게 해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케 하시고 성곽을 중건케 하여 유다 나라를 회복해 주십니다. 그것이 에스라 느헤미야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남쪽 유다를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은 주전 335~331년경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를 남쪽 유다는 결국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그 계열을 통하여 신약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됩니다.
유다 왕 아사가 하니님을 의지함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남쪽 유다에 아사가 왕으로 있을 때고 북쪽은 바아사가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14:1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년을 평안하니라 아사가 그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아사가 자기 아버지 아비야가 했던 것처럼 왕이 되어 이방신상을 다 없애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정치를 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아사 왕이 유다 백성들에게 조상들이 믿었던 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도록 공포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유다 나라에 평안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 우리들에게 평안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해 동안 전쟁이 없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방 신상에게 절하고 그것들을 섬길 때 평안은 사라지고 전쟁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여호와께서 평안을 주셨으므로 전쟁이 없었더라
우리에게 몇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안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전쟁을 불러들이는 일이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공포해야 합니다.
정치를 해도, 사업을 해도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가식적으로 해서도 안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가정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지나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사업 때문에, 병 때문에 가정의 단란한 평화가 사라져 버리고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한번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으로부터 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몰래 침투해 온 아간을 찾아내야 합니다. 불순종의 원인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사왕이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우상들을 제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 해 주셨습니다. 왜 축복 해 주셨느냐면 하나님을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4:8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구스 사람 세차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 데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남쪽 유다는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이래야 합쳐서 오십 팔만입니다. 그러나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아사가 왕으로 있는 남쪽 유다를 쳐들어 옵니다.
남쪽 유다가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어떤 세상적인 조건은 없었습니다. 무기와 군사가 월등히 부족합니다. 먼저 싸워보지도 못하고 심리전에서 일단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여기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습니까?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 기도를 간만히 살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말이 필요없습니다. 남쪽 유다가 강한 자 앞에서 약한자 아닙니까? 구스가 강하다고 유다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야 이기고 패하게 하면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그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전쟁과 평화의 열쇠를 가지신 하나님께 기도하자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좀 어딘가 모르게 좀 부족한 사람같이 생각하는 데 그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사업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 민족을 도와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북한이 제아무리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막아 주십니다.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도와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사가 그렇게 기도할 때에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14:12 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왕과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사왕과 유다를 이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패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전쟁에서 승리합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제아무리 현대식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좋은 군사작전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 할 것이요, 패하게 하면 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전쟁과 평화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 우리는 의지할 때만이 우리들에게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너회가 하나님을 버리면 히나님도 너회를 버리리라
하나님의 신이 아사랴에 임하자 아사랴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사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5:1,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오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알고 찾지도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외면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아사랴의 이야기를 듣고 아사왕이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믿음은 들음에
15:8 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예언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었다고 하는 분들이 예배 시간만 되면 졸음이 온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데 그 축복의 시간에 졸음으로 보내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한번 심각하게 자신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차단 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 데 졸고 있다는 것은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의욕과 열정을 무너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들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 않됩니다. 그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졸리게 됩니다. 긴장해 보십시오. 지금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는 현장에서 졸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물며 일개 나라의 왕 앞에서도 긴장이 되어서 조는 일이 없는 데 만왕의 왕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현장에서 존다는 것은 하나님앞에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예배만 마치면 또 기가 막히게 졸음이 도망간다고 합니다. 마귀에게 빌미를 제공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자가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또한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자가 육신적으로 깨어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한 우리들의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평안을 주심
아사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는 일을 단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받은 비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쪽 유다 아사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다 모이게 합니다(15:10).
모여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에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15:11~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드릴 것은 드리고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혹은 하나님을 간절히 전심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남쪽 유다의 온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기독교는 평안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요, 자유의 복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왠지 모드는 것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평안치 못할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사가 사람을 의지함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했던 유다 왕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대적을 의지하게됩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언제나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스스로 섰다고 자고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언제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려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는 이러한 실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 왕에게 평안을 주셔서 15:19절에 보면 "이때부터 아사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축복해 주시니까 그 땅에 전쟁이 없습니다. 전쟁이 없이 태평하니까 아사가 마음과 정신을 다른데로 돌립니다. 하나님을 의지 할 생각이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좀 평안하다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좀 먹고 살만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그럴 때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남쪽 유다에 북쪽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쳐들어 옵니다(16:1). 이때 남쪽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남쪽 유다를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 출현하게 되는 구원의 라인이 북쪽이 아니라 남쪽입니다.
그래서 북쪽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가서 끝나버리지만 남쪽 유다는 주전 587년 경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다시 귀환하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유다를 통하여 성전을 다시 재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가 포로에서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곽을 다시 중건하여 유다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는 사건이 느헤미야 에스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남쪽 유다에 북쪽이 쳐들어 왔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아사왕은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아사왕에 대한 선견자의 책망
그런데 16:2절에 보면 "아사왕이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사람을 보내어 뇌물을 보내면서 좀 도와 달라고 합니다.
이때 7~10절 말씀에 보면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을 학대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14:8~11절에서 살펴 본 대로 아사의 군대는 오십 팔만이었고 구스 사람 세라의 군대는 유다보다 배가 많은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유다를 쳐들어 왔지만 아사가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전쟁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쟁을 거두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왕을 책망하니까 선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얼마나 큰 죄를 범하고 있습니까? 아사가 선견자의 말을 듣고 회개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는 데도 그는 오히려 성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옥에 가둘 뿐만 아니라 백성을 학대합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제 정신이 아닙니다. 독제 자들의 말로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아사왕에게 하나님께서 징계로 발에 병을 주십니다. 이때 아사가 그 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회개하면 되는 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누구에게 먼저 찾아 갑니까?
병들었을 때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함
16:12 절을 보게겠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합니다.
물론 병이 걸렸을 때에 의원에게 찾아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의원도 의술도 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의원에게 가서 병을 치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에게 가서 치료되지 않는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돌아오도록 하시려고 병을 주시는 경우가 있는 데 그때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치료되는 병이 있습니다.
바로 아사왕이 그러했습디다.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데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합니다.
그가 병이 걸린지 2~3년 만에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찾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다시 한번 우리 자신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1 권능을 받자(사도행전 1 : 8)
□ 사도행전 1 : 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밤에 "권능을 받자"라는 말씀을 증거할 때에 여러분들에게 큰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권능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백명, 천명, 만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꼭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토끼 새끼 한마리만 쫓아가면 전부 다 놀래가지고 도망가는 것처럼 다 도망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쥐 새끼들이 이 예배실에 꽉찼다고 하십시다. 그러나 고양이가 야옹야옹하면 전부 다 도망갈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고양이 앞에 이길 수 엾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힘이 없으니까 다 도망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권능을 받아야 일할 수 있다
성도들 가운데 말만 성도지 권능없는 성도들 쥐새끼처럼 도망갈 구멍만 찾고 있는 그런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권능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신학교 나와야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교를 무시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체계있는 신학공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알고 배웠다고 해도 권능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구역장들도, 찬양대도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닌다고 해도 권능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권능이 없으면 구경꾼의 입장에 있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직분자라고 할지라도 잠자고 있으면 않됩니다. 권능을 받게 되면 나태하지 않습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깨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우리 기도원이 권능을 받는 기도원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세우신 기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구국기도회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국기도를 하는 데 동네를 위한 기도와 다릅니다. 작은 회사를 위한 기도와 다릅니다. 힘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권능 받는 길은 오직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매달려야 됩니다.
시편 62:1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한 두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씀합니다.
전력의 힘을 받으려면 전기코드에 꽂아야 하듯이 우리가 권능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나와야만 됩니다.
"여호와가 그 성전에 계시니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강대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하없는 장사라도 기도 안하면 권능은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위대한 권능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 액운이 생기는 것은 운이 없어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권능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권능을 받으면 모든 만사가 쉽게 해결됩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되다
스가랴 4:6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늘로부터 권능을 받은 사람은 산덩어리와 같은 큰 산이라 할지라도 평지처럼 해결됩니다.
탱크는 경사진데도 올라가고 자갈이 있든지 뭐가 있든지 승용차 못가는 길도 탱크는 그냥 밀고 나갑니다. 그런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탱크 100대 보다도 더 큰 힘을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힘 없으면 우리들에게 많은 축복을 주신다고 해도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권능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사는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혜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학교 분반 공부할 때 어린이들이 없다고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권능만 받으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권능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빈 도라무통만 있다고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속에 기름이 차있어야 합니다. 빈 전선줄만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기가 들어 와야합니다. 천하없는 트럭이 있다한들 기름없는 차가 무슨 소용있고 밧데리 나간 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믿음이 권능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권능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역사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계산하지 말고 믿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권능입니다.
착각하면 다윗이 물매를 가지고 해치운 것 같습니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나에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노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양을 칠때에 때로는 사자가 와서 찢을 때에 아버지께서 사자의 입에서 곰의 발톱에서 양을 빼앗게 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미국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미국을 의지하면 않됩니다. 누가우리를 책임져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책임져 주겠습니까? 권능은 여호와께 속했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화기 전쟁인데 요사이는 산업 전쟁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계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핸들대를 어디를 돌리는지 두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핸들대, 하나님의 촛대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입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리면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했습니다.
촛대가 가는 곳에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아버지께서 촛대를 우리쪽으로 옮겨주실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외형적으로 든든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첫사랑을 잊어 버리면 권능은 물러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 공로를 의지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이 애굽 백성들에게 사망의 신으로 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너희는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때에 피가 있는 가정마다 넘어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망의 신이 넘어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집을 지으면서 그냥 짖지 아니하고 양의 가죽을 잘라 문설주에다가 붙여서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 은혜에 너무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죄송하지만 양을 10마리를 잡아서 걸어 놓는다고 할지라도 형식적인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시원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 근심, 걱정 물러가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의 구속의 보혈이 능력입니다. 모세가 여러분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우리들의 힘의 원동력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피가 강단에서 흘러야 합니다. 예수의 피가 여러분의 마음속을 사로잡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나의 결심 가지고는 얼마 갈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전에는(구약) 양과 염소의 피로 너희의 죄를 대속했거든 하물며 예수의 피로 너희 죄를 대속할 수 없겠느냐고 하십니다.
구약에는 죄 지으면 양을 잡아다가 바치면 되었습니다. 그 피를 뿌리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 가지고 안됩니다. 이제 예수의 피라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 예수의 피가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예수의 피로 적시기 바랍니다. 희생적인 정신으로 적시기를 바랍니다. 달라질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권능은 성령입니다. 폭탄과 같은 역사가 나타납니다.
권능을 받으면 달라진다
성령이 가시는 곳에는 교만한 자가 산산조각 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약한자에게 역사하면 강하게 됩니다. 비겁한자, 약한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시면 자기도 모르게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도 비겁했었지만 권능을 받고 달라졌습니다. 달라져도 확실하게 달라졌습니다. 권능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 지느냐면 증거가 달라집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녁 믿음의 확증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받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증조 할아버지가 어디있습니까 ? 지금 자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증조 할아버지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우리 눈에 보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령으로 우리들이 있는 곳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도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권능이 임하시면 열사람의 몫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열 사람이 있어도 권능이 없으면 아무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패잔병들처럼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권능이 없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권능이 임하면 열 사람이 백 사람 몫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에게 권능이 임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을 때에, 죽을 각오로 기도할 때에 권능은 역사했습니다.
겸손히 기도할 때 권능이 임한다
과거에 북한 선교원에서 있었던 일인 데 성서교회에 다니는 어떤 분이 기도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교단이 성서교단인 데 거기는 아무 직분이 없습니다.
그분이 감기가 많이 걸려서 왔는데 저가 볼 때에 목이 쉬어가지고 입원해야 할 사람인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오셨느냐고 하니까 이분이 집에 있는 것 보다 기도원에 올라오면 나을것 같으니까 믿음으로 올라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참 놀라운 것은 이 집은 음악하는 집안인 데 남편도 음대 교수, 며느리도 아들도 전부 음악박사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심방 좀 오라고 해서 제가 걱정하기를 박사들 집안에 가서 무슨 설교를 해야 하나 하고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집들은 별로 심방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꾸 팥이냐, 콩이냐, 하면서 따질 것 같아서 가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런 곳에 설교할 맛이 나겠습니까. 기도원처럼 손들고 아멘 해야지 뭔가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부흥회 가도 아멘 안하면 아멘하는 훈련부터 시킵니다. 아멘 아멘 해야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집에 갔는 데 음악하는 집안답게 차분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 때 저가 저 자신도 모르게 주여,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사들이 네명, 다섯명이 앉아 있는 데 전부가 다 겸손 합
니다.
저 설교가 언제 노트 펴놓고 하는 것 봤습니까? 그냥 믿는 대로 주시는 대로하다 보니까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책 펼쳐놓고 하는 데 아멘 아멘으로 말씀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역사 하셨습니다.
그분이 감기가 걸려서 기도원에 오신 것입니다. 그날따라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정말 천둥 벼락 치다가 햇볕이 드는 것처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것은 죽을 각오로 기도하면 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원 올라 올 때 차를 기도원 방향으로 틀면 그 자리에서 눈이 뒤집혀 버립니다. 귀신의 역사입니다. 차를 기도원 방향으로 돌리면 그 사람은 퍼지는 것입니다. 다른데 가면 괜찮고 기도원 쪽으로 돌리면 그렇게 귀신이 장난을 합니다. 이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느냐면 잠못 자는 귀신에게 짓눌려 가지고 시계바늘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 잠 잘오는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잠은 잘 자게 되었는데 귀신이 그를 풀어 놓지를 않는 겁니다. 기도원을 와서 때로는 앞자리에서 또는 뒷자리에서 엎드려 가지고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죽을 각오를 하고 계속 기도원에 올라 와서 기도할 때 마귀는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몸이 좀 이상하다고 기도의 대열에서 탈락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죽을 각오로 기도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때는 사자도 해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를 보내서 그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가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권능은 지금도 임합니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임합니다. 이 시간도 임합니다. 권능은 지금도 임합니다.
저는 여러분들 자신을 이기고 권능을 받기를 바랍니다.
12 기도하면 기쁜일이 생긴다(삼상 2:1)
□ 삼상 2:1
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슬픈일도 많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남모르는 고통때문에 괴로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라는 사람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좋은 옷을 해줘도 브닌나 보다 돈을 많이 주어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뻐질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난 다음에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기쁜일이 생깁니다. 어떤 기쁜일이 생기느냐 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기도하면 유쾌하고 기쁜일이 생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기쁨은 체험해 본 사람만 알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기쁨을 알고는 창으로 위협해도, 감옥에 넣어도 "기뻐하고 기뻐하노라"라고 합니다.
성령을 제대로 충만히 받고 나면 이 기쁨을 빼앗을 수도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도하면 자기소원이 이루어집니다. 한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작은 소원을 가지고 삼년만 기도해 보세요. 꼭 이루어 질 것입니다. 중간에 중단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한나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 삼상 1장 12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하고 말씀합니다.
한나가 오래도록 기도한즉 뿔이 높아지고 원수들을 향하여 입이 크게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말씀하시니 이제는 울던 울음이 없어졌습니다. 평생에 다시는 근심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병을 고침받는다
기도하면 병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문둥병도 기도하는 가운데 치료받았습니다. 치료받아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예수님께 인사할 여가도 없이 아홉명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너무 기쁘니까 그러했겠지만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너무 기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고난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응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치료의 역사로 나타날 때에는 소경이 춤을 추면서 뛰어가고 앉은뱅이가 춤을 추면서 기뻐하는 역사가 나타나고 암병에 걸렸던 사람이 기뻐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것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데 결사적으로 할 때 이러한 체험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원수의 입을 막아주신다
기도하면 원수가 입이 막힙니다. 여기 한나가 원수를 향해서 입이 막힌 것이 아니라 넓게 열렸습니다.
다니엘의 원수들이 다니엘을 괴롭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굶은 사자를 준비해 놓으셨다가 다니엘을 건져내고 난 다음에 그들을 떨어뜨려 뼈가 부서지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간섭하여 주실 때 다니엘은 살게 하시고 원수들은 죽게 했습니다.
여러분 원수가 생기면 왜 원수가 생겼나 내가 왜 이런가 생각하지말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화를 복으로 만들어 주실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영력은 원수가 많을 때 생기는 겁니다. 원수가 없으면 영력이 안생깁니다.
엘리야가 왜 영력을 크게 받게 되었는가 하면 바알신 아세라가 팔백오십명이나 되니까 그것 대결하려고 기도하므로 강한 영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원수가 많은 것은 우리들에게 강한 영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윗도 골리앗 때문에 큰 영력을 받았고, 자식들과 사울왕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영력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천만인이 나를 둘러 진친다고 할지라도 내가 기도하면서 안 연한 것은 기도하는 자의 편에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 것을 내가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있는 것도 은혜 나에게는 은혜이며, 고난이 내
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구원의 역사가 있다
기도하면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우편에 있는 강도에게 너도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했을 때 그 강도는 정말 자비의 하나님이시구나 정말 사랑의 주님이시구나 지옥갈 그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여러분 스데반이 돌에 맞았을 때에도 구원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셔서 스데반을 향해서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이제 이곳으로 올라온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더라 했습니다.
이것은 최대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강물처럼 밀려 여러분들이 기뻐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항상 좋은 일들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3 기도의 장군이 되자(왕상 18:30~40)
□ 왕상 18:30~40
30 엘리아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34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는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40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여러분들도 자녀를 군대에 보냈다면 자녀가 쫄병 생활 하다가 그냥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장부가 되어서 돌아오기를 원할 것입니다.
자녀가 지도자가 되고 장성하기를 바라는 것이 여러분들 마음일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이 영적인 쫄병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장군들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적 장군이 되려면 영적 시험을 통과하라
성경에도 보면 영적인 지도자들이 있는 데 가만히 앉아서 지도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영적인 장군이 되려면 영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나오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다 영적인 장군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은 바알신들 중에서 제일 센사람들 아세라신들 가운데 제일 센사람들 팔백오십명을 혼자서 해치울 수 있는 그런 장군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도 엘리야와 같이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엘리야와 같은 영적인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장군이 되려면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장군이 될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대충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비도 주시고 하늘에서 불도 주시고 아세라들을 잡아 죽이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했을 때 그는 갔습니다. 그는 아마 이슬을 맞고 바위틈에서 자고 형편없는 떡으로 어렵게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시키신 훈련입니다.
여러분 훈련이 있을 때에 영적인 눈을 뜨고 보고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훈련시켜서 계급을 올려 주려고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장군이 되려면 순종 훈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또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 집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는 갔습니다. 처가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닌 그 집에서 사지 멀쩡한 사람이 얹혀 살라니 도저히 못할짓이지만 순종하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훈련중에 가장 힘든 훈련이 순종의 훈련입니다. 순종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잘난 사람도 쓸모가 없습니다. 순종해야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머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이해가 안되고 체면이 안서도 온갖 창피를 당한다 해도 아멘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훈련시킬 때 때로는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적 장군을 시킬 사람은 고난을 주시고 훈련을 시키시지만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이 있는 사람은 이모양 저모양으로 훈련을 시키시는 데 가장 중요한 훈련이 무엇이냐하면 순종의 훈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눈에 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훈련을 달게 받으셔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앞에 통과 하다가 마지막에는 일대 팔백 오십명을 상대했지만 이것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단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나와 여러분을 의지 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루기는 커녕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잡기도 곤란합니다.
아침에 먹은 마음이 저녁에 가면 변하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와 하나가 될 때에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말씀속으로 들어가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의지할 때 영적 장군이 될 수 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갈 때에 영적인 장군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맞섰을 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의 권능을 신약에 와서는 예수의 이름에 그 권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이 그렇게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기전 다른 어떤 것도 주시지 않고 너희는 내 이름을 사용하라 하셨습니다.
장군은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장군은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판단력이 있기를 바라고 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솔로몬도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장군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테스트해 보시는 것입니다.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쓰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고난을 주시느냐고 고민할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다 알게 됩니다. 문제는여러분 마음에 포부를 가지셔야 합니다. 나는 영적인 장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십시다.
기도하는 것은 생명의 길이다
여러분 큰 일을 하려면 영적인 위치에 올라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다른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시험도 많이 거쳐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은 사실 좁은 길입니다.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을 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좁은 길을 간 것 만큼 영광도 받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학력으로 영적인 장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문으로 영적인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기도로 영적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훈련시키고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의 실력자가 되어서 혼자 기도하는 데도 수십 수백 이나 팔백명도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이 먼데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너도 기도하라"말씀하십니다.
오르막이 높으면 내리막은 길다
오르막이 높으면 내리막이 긴것처럼 훈련이 길고 고난이 길면 작은 고난들에는 끄덕없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집안이 다 망해 버렸습니다. 온몸이 병들었습니다. 자녀들은 다 죽었습니다. 다 죽고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했습니다.
나의 친구들은 나를 조롱하나 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면서 해결을 받겠습니다고 할 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장군으로 계급을 달아주시고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우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혼자라도 바르게 서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여러분, 나도 영적인 장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부여잡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영적인 장군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4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편 119:71)
□ 시편 119:71
71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매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면 고통이 없어야 할텐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자도 고통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내가 왜이리 고통을 당할까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럴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고통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좁은문이란 고통의 길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도 예수님도 고통의 길을 가셨고,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 믿음의 선조들이 전부 다 고난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고통을 당할 때 성경을 통해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즉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데 크게 네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한 사람도 없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모두가 다 고통이 있습니다.
교회도 고통이 없는 교회는 한 교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바울이 목회하는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목회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천하없는 목사가 목회를 한다고 해도 문제는 있습니다.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있고 방해꾼이 있기 때문에 이 충현교회에 바울이 와서 목회를 한다해도 문제는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고통이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러한 고통이 오게 됩니까?
왜 우리들에게 고통이 있는가
성경은 말씀하기를 고통은 첫째 죄 값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고통이 죄 값인 줄 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고통는 하나님께서 복주시기 위하여 주시기도 합니다. 요셉이 죄가 많아 팔려간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게 하려고 주십니다. 고통 당하는 이웃을 볼 때에 죄값 때문에 고통당한다고 함부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할 때에는 믿는 사람들은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십니다. 고통을 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욥기를 읽어보시면 욥이 당하는 고통에 내가 당하는 고통을 비하면 내가 당하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도 말하기를 "주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병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욥은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해야 할 처신중에 둘째는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반드시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세째 고난은 나쁜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 당함이 나에게 유익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우리에게 복덩어리가 굴러오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영안을 밝힙니다. 너무 평안한 사람들은 영안이 어둡숩니다.
고난을 통하여 왜 밝아지게 되느냐하면 한번 고통을 당하고 두번 고통을 당해 보고 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래서 고통 당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사람은 고난을 안당하게되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고로 하나님이 헤롯을 치시되 충이 먹어 죽으니라 말씀합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겸손하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서 돌아오는 역사가 있습니다.
탕자가 고통이 없었다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고난을 당해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 왔지 고난이 없었으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한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성스러운 찬양을 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열매맺는 성도가 됩시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고난이 요합니다. 고난을 겪어야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사가 잘 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식이 죽이려는 고통을, 신하가 죽이려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서 이스라엘 왕으로서 정치를 잘할 수 있도록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합니다. 독수리는 바람을 이용해서 올라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통을 통해서 믿음이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 대화이다
현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과학 문명이 발달되어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사는 시대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말세이다. 사단이 더욱 극성을 부리는 시대이다.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삼킬 수 있는가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시대이다. 이런 사단의 세력을 우리는 물리쳐야 한다.
어떻게 해야 물리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능력을 갖고 살 수 있는가?
역사상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도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람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고, 솔로몬이 그러했다. 교회사를 보아도 종교개혁가인 루터나 칼빈이나 존 낙스나 요한 웨슬리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두세 시간씩 기도를 했다.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시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도는 바로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산다. 그러므로 바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핑계 삼으려고 한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하지 않고 산다. 하나님 앞에서 축복된 삶을 사는 중요한 비결의 하나가 바로 기도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해야 할 것이 기도이다.
사람은 7분 동안 호흡을 하지 않으면 뇌가 썩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날 7분이 아니라 7시간 혹은 7일동안 영적인 호흡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잘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기적중의 기적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대화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도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대화를 단절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산다.
마치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서도 거지처럼 사는 것과 같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들에게 주신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지 않거나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의 창고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넣어두시고 우리에게 열쇠를 주셨다.
이 열쇠가 바로 기도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는 자에게 다 주시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생명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생명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힘써야 한다.
본서를 통하여 기도가 식어진 영혼들에게는 다시 심령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힙입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시기를 원한다. 따라서 다시 한번 이 나라, 이 민족 안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잊어버린 기도가 살아나고, 기도함으로 예수의 능력을 받는 기도의 장군들이 되기를 바란다.
본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게 나타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