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폭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단 열흘간 지속된 사건이었음에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폭동이 왜,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는바 아마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람들이 혼동하며 가장 어려워하는 사건일 것이다. 사실, 이 사건처럼 자료가 많이 공개된 사건도 드물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국민은 이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 모르는 것이 무리도 아닌 이유는 많은 518단체 사이트에 있는 자료들은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혼동을 가져다 주려는 의도로 게시되었기 때문이다. 518단체의 주장과 자료들이 주는 착각 중의 하나가 전남대 학생들이 518시민군 주축이었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당당하게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고3학생으로 신분 위조하여 등장시키며,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였다는 시민군 대장의 학력과 신문을 위조하여 육사 출신 예비역 대령으로 등장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518단체가 감추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박관현과 전남대 운동권 및 학생간부들은 5월 17일 야간과 5월 18일 아침 사이에 한명만 남고 모두 광주 외곽 산장에 가있었으며,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광주사태의 전개 과정을 알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가 시민군의 총기 무장 시점이다. 그럼에도 518단체들은 시민군의 총기 무장 시점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5월 21일 오후라고 우기기에 사람들이 혼동하게 된다. 그러나, 조총련이 데리고 온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영상물도 시민군이 이미 5월 20일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증거하지 않는가.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라고 치켜 세우는 힌츠페터는 단지 5월 20일 오후~21일 아침, 5월 26일 오후~27일 아침의 광주를 보았을 뿐이다. 518 단체들은 힌츠페터의 영상물을 홍보해 왔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영상물도 518 단체가 감추는 사실을 폭로한다. 518 사이트 자료들에는 영상물과 사진의 사건 일자를 밝혀있지 않으며, 시위대가 금남로 일대에서 평화시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영상물과 사진은 무장시민군이 광주외곽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디서 수천 정의 총기와 군용 트럭 등의 장비를 확보하였는가? KBS는 영상물 배경 음악으로 애국가를 넣었지만 조총련의 부추김으로 난생 처음 한국에 온 힌츠페터가 그 노래가 애국가였는지 알 수 있었겠는가? 위의 동영상은 5월 20일 오후에 광주 시내로 무장시민군이 진입하는 장면에 이어 5월 21일 아침 무장시민군이 실탄을 장진하고 도청을 향해 집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를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5월 21일과 비교해 보라. 영화는 마치 시민이 도청광장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준다. 518단체들이 진실을 숨기고 국민을 속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시민군 간부들이 12.12-5.18 재판 고소인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총탄에 여러 군경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은 군인들에게 누명을 씌우지만 상당 수의 시민군이 시민군 총탄에 희생당하였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들추어낼 수 있다. 언제나 시민군 편에서 먼저 발포하며 선제 공격하였다는 사실도 분명한데도 시민군 발포 명령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나라의 법에는 공정성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518단체 관련자들은 그들이 법리에서 패배하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듯이 보인다는데도 그들이 어떻게 고소인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법리에서 패배하였으며, 판결에서도 이긴 것이 아니다. 어차피 판결은 문민 독재자 영삼이 아저씨가 정해 놓은 것이었다. 시대정신에 실린 영삼이 아저씨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경남 합천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잡아들일 때 "하루 종일 (방송이) 생중계를 하고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그 때 내 생각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대법원 판결까지 받게 한 뒤 1년 동안 감옥에 보내놓고 내가 퇴임하기 전에 풀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년 뒤 석방했다."> 518측 고소 사유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18일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삼이 아저씨 검찰은 전혀 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12.12-5.18 재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누명을 오히려 상당히 벗겨주었다. 여전히 518측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그러나, 이제는 그런 악성유언비어가 잘 먹히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하에서 10년간 좌익 세력이 과거사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막대한 혈세를 펑펑 쓰면서 전국을 뒤지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폭동진압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증거를 초조하게 찾았는가? 만약 찾아내지 못하면 유언비어를 퍼뜨린 쪽이 명분을 잃기 때문이다. "전두환 광주학살"은 사실이든가 유언비어인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유언비어이다.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주장은 유언비어요, 법리로 따지면 유언비어를 퍼뜨린 쪽이 사기꾼이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어떤 이를 고소할 적에는 고소한 쪽에서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야 하며 만약 그러지 못하면 무고죄에 해당할 것이다. 고소하는 쪽에서 이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이들이 많고, 우리 목소리가 크니 이 유언비어를 맹신하여 달라고 우긴다 해서 법리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은 어디서 왔는가? 직접 듣거나 확이된 정보인가? 아니면 사기꾼들이 마구 지어낸 유언비어였는가? 그리고, 아무런 근거없이 유언비어에 근거하여 고소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었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고 지시했다는 유언비어는 광주사태 당시 유언비어였는데, 광주사태 당시 유언비어 퍼뜨린 사기꾼들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는지조차 모르고 공수부대 대장이라고 했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고, 전두환 장군으로만 언급하여 공수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이었다는 착각을 국민에게 주고 있음에 주목하라.) 그런데, 그 유언비어가 12.12-5.18 재판 당시에는 "12 · 12사건으로 군부를 장악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사전계획 하에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했다"는 주장으로 바뀌어 시민군 간부들이 518단체들 대표 자격으로 그 주장을 고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컸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주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민군 간부 역시 광주사태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혀 시민군이 아닌 한홍구가 광주사태 박사 행세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라. 김대중이 한화갑과 이해찬 등 시민군과는 거리가 아주 먼 수십 명의 동교동 정치인들에게 추가 유공자 포상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이것은 서울에서 5월 중순에 있었던 사건들과 광주사태는 한 묶음이었음을 김대중이 자신도 알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김대중이 유혈폭동을 선동하며 다니던 5월 중순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5월 10~11일경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괴전화가 걸려왔다. 요즘 광우병 괴담이 돌듯이 그때도 군부 쿠데타 괴담이 돌았다.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은 그때 그 괴전화 유언비어를 맹신하고 서울의 각대학교에 그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5월 15일 서울역 집회 때 십만 명이 모였는데, 민주화 운동 이슈가 있어서가 아니라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미개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시위구호는 실로 이율배반적이었다. 만약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기에 하는 시위라면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위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신현확 내각 총사퇴" "(직선제) 개헌 반대" 등이었다. 왜 "최규하 물러가라"고 외치는지 심재철이 알았을까? 그는 시위구호의 의미도 몰랐을 것이다. 단지, 김대중이 이해찬 시켜 배후 조정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이니깐. 유시민에게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였던 이유를 설명하라면 할 수 있을까? 한홍구는 김대중이 "제2의 동학란이 일어나야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월남처럼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민주화가 된다" 등의 선동적 연설을 하며 돌아다녔을 때 그것이 바로 무장유혈폭동을 선동하는 것이었음을 알았을까? 동교동이 괴전화 자작극으로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던 5월 10일경 이미 김대중의 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은 광주에서 무기탈취조를 조직하고 있었다. 김대중이 말하는 "제2의 동학란"이 바로 유혈폭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마 운동권이 제작한 교과서는 1980년 5월의 시위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였다는 착각을 주려고 제작된 듯하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였다. 그리고 김대중이 그토록 격렬하게 직선제 반대 시위를 선동하였던 것은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밀릴 것이 뻔하니깐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고 스스로 대통령 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 공작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북한도 전국적 민중봉기 공작을 할 간첩과 공작원들을 남파하고 있었다. 김대중이 "월남처럼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민주화가 된다"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1975년 3월 월맹이 월남 중부지방 다낭에 창군한 시민군이 봉기를 일으켜 4월 월남을 패망시킨 것을 모방하자는 의미였다. 광주시민군은 시민군 용어의 유래를 아는지 모르지만 월맹이 미국의 참전을 막는 수단으로 월남 중부 지방에서 창군하여 수도 사이공까지 민중봉기를 확산시키는데 활용한 군대를 말한다. 월남식의 민중봉기가 김대중의 집권 전략이었으며, 김일성의 적화통일 전략이었다. 518자료들은 김대중이 그 당시 감옥에 있었기에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광주사태가 일어난 것이라는 착각을 국민에 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월 17일까지도 김대중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5월 19일까지 하야할 것을, 신현확 총리 내각이 5월 19일까지 총사퇴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에도 518단체들은 이 사실을 모르거나 감춘다. 김대중은 5월 22일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새 내각을 임명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으며, 학생운동권 거사를 위해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총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5월 19일 전국대학교 벽보에 대자보로 붙이도록 김대중이 보낸 유인물이 그날 운동권에 전달되었는데, 5월 19일 서울 몇몇 대학교 벽보에 붙었다. 서울의 운동권조차 김대중이 5월 17일 밤 김대중이 연행되었음을 까맣게 모른채 5월 19일 대자보를 돌렸던 것이다. 하물며, 5월 18일 아침에 깨자마자 광주시민이 그 사실을 알았을리 만무하다. 단지,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알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김대중 연행을 지휘한 이종찬을 김대중이 훗날 김대중 후보 선거위원장, 김대중 정부 인수위위원장, 초대 국정원장 등으로 등용한 것은 김대중 연행이 김대중에게 유리하였기 때문인데, 김대중이 고맙게 여기는 일에 광주시민이 분노하였을 리 만무다. 5월 10일경 서울대 운동권에 걸려온 괴전화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제보였다. 즉. 군부 쿠데타가 완료되었다는 제보였다. 그것이 동교동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은 그 괴담의 자극으로 5월 15일 일명 "서울역 집회" 시위가 있었을 때 동교동이 경호원까지 총출동해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런데, 5월 19일 대자보에서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 "전두환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다" "전두환은 유신잔당이다" 등의 선동적인 문구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김대중의 전두환 거세 전략은 학생들에게 "전두환은 유신잔당이다"라는 인식을 주어 적개심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당시의 그들의 주장과 12.12-5.18 재판 당시의 그들의 주장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에는 김대중 일당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 "전두환은 유신잔당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었다. 만약 12.12사태가 쿠데타였다면 그런 주장을 하였을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12.12-5.18 재판 때는 김대중 일당의 주장이 확바뀌어 12.12사태가 쿠데타였다는 주장을 하였다. 판결문 역시 마치 전두환이 유신헌정을 무너뜨리는 반란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김대중은 5월 22일을 기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으며, 그 준비과정으로서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대학생 중 몇명이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넘겨주었다. 김대중의 내란 음모에 참여한 운동권 중 서울에서 노동계가 없었으나, 광주에서는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노동계와 청소년들 동원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주동자 명단이 몇몇 학생들에 의해 폭로되었을 때 두가지 반응이 있었다. 비교적 김대중 내란 음모의 소극적 가담자였던 서울 학생층 주동자들의 반응은 은신하라는 것이었으며, 5월 17일 밤에 전남대 학생회 사무실에 전화걸어 전남대 운동권과 학생회 임원들도 속히 도주하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광주사태 때 전남대 운동권은 광주에 없었으며,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5월 26일 이전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유혈폭동 선동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던 윤상원은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으며, 서울의 운동권도 참려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시위 선동 유언비어를 서울 운동권쪽에 계속 전했으며, 서울의 운동권은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와 삐라 등을 제작하여 대학가 벽보에 붙이거나 시가지에 뿌렸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윤상원은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는 구호 선창함과 더불어 폭동 선동을 시작했다. (그는 5월 25일 무기 반납을 호소하러 광주에 방문하신 최규하 대통령께 무기 반납 조건 중 하나로 전두환 사형을 요구하였음.) 윤상원이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을 때 그 의미는 고려의 정몽주처럼 유신헌정 질서를 수호하려 하는 윤상원은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였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여 곧 무너지려하는 유신정권을 김재규를 체포함으로 수호한 전두환을, 김대중과 좌익 운동권이 민중봉기 일으켜 전복시키려 하는 4공화국을 수호하려 할 것이 분명한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12.12-5.18 재판 때는 518단체들이 전두환이 유신정권 반역자라고 주장하며 고발하였으니,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자라고, (김대중 재야세력이 전복시키려 하는 4공화국을 끝까지 수호하려 할 인물이라고) 했던 광주사태 당시의 주장과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따라서, 518단체들이 12.12-5.18 재판 판결을 지지할 때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고 주장할 때)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라던 광주사태 당시의 그들의 주장은 허위사실 유포였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이렇듯 그들의 주장이 일관성이 없기에 법리상으로 그들이 승자가 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http://cafe182.daum.net/_c21_/bbs_list?grpid=rUoh&fldid=3IBb 에서 237, 240, 241, 242 번 글들을 열어 첨부 파일을 클릭하시면 <검찰질의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의 소견 및 논평>을 그림 파일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study21.org/518/document/president_reply.htm http://study21.org/518/discuss/index.htm
첫댓글 님께서는 힌츠펜터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 그가 5-20일 오후부터 취재하다가 21일 아침에 광주를 떠났다는)-- 님의 주장에 대해서
광주여 무등산님, 혹시 힌츠페터가 5월 21일 아침 광주를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시지요? KBS의 "푸른 눈의 목격자" 동영상 전체를 보셨는지요? 보시면 위의 동영상 다음 장면이 힌츠펜터 일행이 빠르게 광주를 빠져나가 서울에서 비행기타고 일본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26일 오후에야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힌츠펜터기 5월 21일 오전 11시 이후부터는 광주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518단체에 문의하여 확인해 보세요. 만약 끝까지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라면 시인할 것입니다.
이곳에 지금 제가 댓글을 다는 내용은 상기 논의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역사학도의 거짓말은 제가 이글 본문 바로밑에 새로이 덧글로 본문을 달아놓았으니 꼭 읽어보시길 바라구요. 당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글 본문의 첫번째 동영상을 봐달라는 겁니다. 그 동영상을 보시면 역사학도가 얼마나 가증스럽게 조작을 해대고 있는가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번째 동영상은 KBS일요스페셜 "푸른눈의 목격자"라는 프로그램의 일부분입니다. 역사학도가 따온 부분은 힌츠페터가 5월 20일 광주에서 촬영한 부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1분 54초쯤에서 갑지기 5월 21일 오후 장면으로 건너뛰는군요.
5월 20일 장면과 5월 21일 오후 장면을 이어붙여 놓고 마치 5월 20일부터 시민들이 총기를 들고 있었던양 사기를 치는 후안무치한 역사학도가 불쌍하게 느껴지네요. 다음 검색창에 "푸른눈의 목격자"를 치시고 엔터 누르시면 제일 상위에 제시되는 곳에 들어가시면 "푸른눈의 목격자" 전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학도가 얼마나 어이없게 속이려고 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역사학도님 님의 주장이 맞다면 5-18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당연히 도출됩니다.. 공수대가 발포하기전 부터 그러니까 20일 이후부터 시민군이 무장한게 힌츠펜터의 동영상에 의해 확실히 증명된다면 말입니다... 관련 증빙기록( 힌츠펜터의 알리바이를 확실히 해줄 확실한 증거)를 올려 주세요...
확실한 증거를 제시못하면 역사학도님의 논리는 100 %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 것인지 요즘 다음 카페 접속하려면 수십 분 걸리네요. 저는 언제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무기가 나주경찰서에서 탈취된 날자는 5월 19일이며, 5월 20일 시민군에게 지급되었습니다. 드라마 5공화국에서도 5월 20일에 광주 시내에 총기 5천정이 돌아다닌다는 대사가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기고가 털린 경찰서 기록에는 5월 19일로 기록되어 있고, 31사 상황병은 보고일과 실제 탈취일을 혼동하여 5월 20일로 기록하였는데, 518측에서는 5월 21일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나주경찰서 금성동 파출소 ) 앞 인도에 세워진'민중항쟁 사적비 1호'가 증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인구 80만의 광주 시민 중 대다수는 21일에야 뭔가 심상치 않다 느끼고, 시민군이 경찰을 지배하며 도청 궐기대회가 소집되는 5월 22일 이후의 해방구 시절에야 비로서 광주사태를 몸으로 겪기 시작하였지만 나주에서는 시민군이 경찰서에서 무기를, 그리고 주민에게서 김밥을 탈취해간 19일부터 철시하였습니다. 지금도 나주 분들 중에는 5월 19일 낳모르는 청년들이 몰려와 무기, 탄약 등을 약탈해갔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날 이 5월 19일이었다는 당시 신문사 나주지사 기자 증언은 그날 나주경찰서 무기 탈취후 영암으로 가 무기탈취한 후 남긴 항쟁사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물론, 영암항쟁사는 518측 자료입니다.
http://www.friendsofliberty.com/modules.php?name=News&file=article&sid=612 에 가시면 KBS가 나테이션을 위해 인용한 힌츠펜터의 기록 원문이 있습니다. 보시면 KBS 나레이션이 518측에 불리한 것은 쏙 빼놓았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힌츠펜터의 광주방문기 한국 사이트들도 있지만 여기 원본에 보시면 한국 사이트들에서 빠뜨린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시민군 사령부로 사용하기 위해 전남도청을 점령한 장면. 힌츠펜터는 전투 총성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도청이 시민군에 점령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언비어 대로 오천 명이 죽었거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집단 발포가 있었다면 못들었을리가
힌츠펜터가 5월 20일 아침 광주를 떠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한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5월 26일 오후 다시 한국에 오기 전까지에는 광주는커녕 한국에도 있지 않았고, 광주사태를 목격한 적도 없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이준형님더러 힌츠펜터의 입국일자와 출국일자를 알아보아 달라고 하시면 전남대 518연구소같은 곳에 문의하여 정확하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준형님도 힌츠펜터의 영상물에 대해서는 해박하게 알고 계시니깐 그분에게 물어 보세요.
우선 제가 반박한 아래 새 글을 보시구요. 이 곳 댓글에는 간단하게만 적겠습니다. 역사학도가 확실한 증거라고 드는게 드라마 5공화국 대사라는게 웃기고, 그것 또한 거짓말이 확실합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31사단 상황병이 날짜를 혼동했네 마네 하는 개소리를 하는데 31사단 기록에는 19일은 물론 20일에도 무기탈취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무기탈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에 있습니다. 거기에 21일 새벽 2시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이 탈취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실탄은 그곳에서 보관하지 않고 31사단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 "2군 계엄상황 일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21일 새벽에 탈취된 칼빈 17정에는 실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역사학도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총과 실탄이 최초 피탈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맞습니다. 다만, 육군본부가 81년에 80년 5월 당시의 모든 부대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소요진압과 교훈"이라는 책에 나주경찰서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무기고 피탈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민중항쟁사적비가 19일 무기 탈취를 증언하고 있다는 개소리를 하고 있는데 민중항쟁사적비 내용 그대로 옮겨드립니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시민학살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다수의 시민들이 군용차량을 이용하여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M1소총, 칼빈소총 그리고 다수의 수류탄등을 획득하여 무장하고 획득한 무기의 상당수를 광주로 이송하여 광주항쟁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다."===>이것이 비문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19일이 아니라 21일이라고 명백히 젹혀 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사 발간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20일 이전에 나주 무기고 탈취는 없었다는 전남 경찰국 주상섭 통신과장 증언" 전남 경찰국 주상섭 통신과장을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들어보았다. "20일 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 사건은 없었습니다. 특히 나주에서 있었다는 것은 그때 통신을 맡고 있었던 나로서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주경찰서장도 광주에 와 있었는데 서장이 모를리 있겠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나주경찰서뿐 아니라 경찰국 전체가 비상이 걸릴 만큼 큰 사건이었지요. <== 이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 파악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해드린 내용들은 이미 제가 예전에 이 곳 까페에 글로 다 남긴 내용들입니다.
비문 내용은 소설이고, 5월 21일이 처음이 아니라, 19일에 나주에서 1차로 무기 탈취 사건이 있었기에 김대중이 세운 그 기념비가 오히려 5월 19일의 무기 탈취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날자를 21일로 적다 보니 비문의 내용은 소설입니다. (1) 5월 20일 시민군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죽은 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2)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죽은 시민군 4명 모두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죽었습니다 [한 명은 군인들을 시민군 장갑차로 깔아죽이다가 일어난 사고로] (3) 21일에도 나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간 폭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날의 도청 충돌 때 광주에 없었습니다.
그 무장폭도들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후에야 도청에 도착하였습니다. 더구나, 21일 그 폭도들은 도청광장 충돌이 있기 전에 나주로 출발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대로라면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가 도청광장에서 시민군을 지휘했어야 하는데, 그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후에야, 즉 그날 저녁 늦게서야 도청에 도착하였습니다.
세워진'민중항쟁 사적비 1호'가 증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역사학도 니 입으로 씨부려놓고 이제 그게 소설이라고? 아침부터 가지가지로 웃겨주시는구나. 그리고 뒤에 왠 헛소리를 장황하게 써놓았니? 왜 거짓말한 것이 들키니까 당황스럽니?
역사학도야 진짜 이토록 뻔뻔하게 거짓말을 줄창할 수 있는 너의 뻔뻔함이 부럽구나. 니가 나에게 물어보라며 글을 남겼으니 그 부탁을 들어주마. 니가 거짓말 한 사건에 대해 또 이야기를 이곳에서 다시 해야겠구나. 밑에 새로 댓글로 니가 전에 했던 거짓말에 대해 다시 써줄테니 눈 씻고 잘 쳐보세요. 귀찮기는 하다만 니가 백번 거짓말을 하면 백번 내가 바로 잡아주마. ^^
첫댓글 님께서는 힌츠펜터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 그가 5-20일 오후부터 취재하다가 21일 아침에 광주를 떠났다는)-- 님의 주장에 대해서
광주여 무등산님, 혹시 힌츠페터가 5월 21일 아침 광주를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시지요? KBS의 "푸른 눈의 목격자" 동영상 전체를 보셨는지요? 보시면 위의 동영상 다음 장면이 힌츠펜터 일행이 빠르게 광주를 빠져나가 서울에서 비행기타고 일본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26일 오후에야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힌츠펜터기 5월 21일 오전 11시 이후부터는 광주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인터넷에 올린 글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518단체에 문의하여 확인해 보세요. 만약 끝까지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라면 시인할 것입니다.
이곳에 지금 제가 댓글을 다는 내용은 상기 논의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역사학도의 거짓말은 제가 이글 본문 바로밑에 새로이 덧글로 본문을 달아놓았으니 꼭 읽어보시길 바라구요. 당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글 본문의 첫번째 동영상을 봐달라는 겁니다. 그 동영상을 보시면 역사학도가 얼마나 가증스럽게 조작을 해대고 있는가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첫번째 동영상은 KBS일요스페셜 "푸른눈의 목격자"라는 프로그램의 일부분입니다. 역사학도가 따온 부분은 힌츠페터가 5월 20일 광주에서 촬영한 부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1분 54초쯤에서 갑지기 5월 21일 오후 장면으로 건너뛰는군요.
5월 20일 장면과 5월 21일 오후 장면을 이어붙여 놓고 마치 5월 20일부터 시민들이 총기를 들고 있었던양 사기를 치는 후안무치한 역사학도가 불쌍하게 느껴지네요. 다음 검색창에 "푸른눈의 목격자"를 치시고 엔터 누르시면 제일 상위에 제시되는 곳에 들어가시면 "푸른눈의 목격자" 전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학도가 얼마나 어이없게 속이려고 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역사학도님 님의 주장이 맞다면 5-18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당연히 도출됩니다.. 공수대가 발포하기전 부터 그러니까 20일 이후부터 시민군이 무장한게 힌츠펜터의 동영상에 의해 확실히 증명된다면 말입니다... 관련 증빙기록( 힌츠펜터의 알리바이를 확실히 해줄 확실한 증거)를 올려 주세요...
확실한 증거를 제시못하면 역사학도님의 논리는 100 %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 것인지 요즘 다음 카페 접속하려면 수십 분 걸리네요. 저는 언제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무기가 나주경찰서에서 탈취된 날자는 5월 19일이며, 5월 20일 시민군에게 지급되었습니다. 드라마 5공화국에서도 5월 20일에 광주 시내에 총기 5천정이 돌아다닌다는 대사가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기고가 털린 경찰서 기록에는 5월 19일로 기록되어 있고, 31사 상황병은 보고일과 실제 탈취일을 혼동하여 5월 20일로 기록하였는데, 518측에서는 5월 21일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나주경찰서 금성동 파출소 ) 앞 인도에 세워진'민중항쟁 사적비 1호'가 증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인구 80만의 광주 시민 중 대다수는 21일에야 뭔가 심상치 않다 느끼고, 시민군이 경찰을 지배하며 도청 궐기대회가 소집되는 5월 22일 이후의 해방구 시절에야 비로서 광주사태를 몸으로 겪기 시작하였지만 나주에서는 시민군이 경찰서에서 무기를, 그리고 주민에게서 김밥을 탈취해간 19일부터 철시하였습니다. 지금도 나주 분들 중에는 5월 19일 낳모르는 청년들이 몰려와 무기, 탄약 등을 약탈해갔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날 이 5월 19일이었다는 당시 신문사 나주지사 기자 증언은 그날 나주경찰서 무기 탈취후 영암으로 가 무기탈취한 후 남긴 항쟁사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물론, 영암항쟁사는 518측 자료입니다.
http://www.friendsofliberty.com/modules.php?name=News&file=article&sid=612 에 가시면 KBS가 나테이션을 위해 인용한 힌츠펜터의 기록 원문이 있습니다. 보시면 KBS 나레이션이 518측에 불리한 것은 쏙 빼놓았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힌츠펜터의 광주방문기 한국 사이트들도 있지만 여기 원본에 보시면 한국 사이트들에서 빠뜨린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시민군 사령부로 사용하기 위해 전남도청을 점령한 장면. 힌츠펜터는 전투 총성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도청이 시민군에 점령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언비어 대로 오천 명이 죽었거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집단 발포가 있었다면 못들었을리가
힌츠펜터가 5월 20일 아침 광주를 떠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한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5월 26일 오후 다시 한국에 오기 전까지에는 광주는커녕 한국에도 있지 않았고, 광주사태를 목격한 적도 없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이준형님더러 힌츠펜터의 입국일자와 출국일자를 알아보아 달라고 하시면 전남대 518연구소같은 곳에 문의하여 정확하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준형님도 힌츠펜터의 영상물에 대해서는 해박하게 알고 계시니깐 그분에게 물어 보세요.
우선 제가 반박한 아래 새 글을 보시구요. 이 곳 댓글에는 간단하게만 적겠습니다. 역사학도가 확실한 증거라고 드는게 드라마 5공화국 대사라는게 웃기고, 그것 또한 거짓말이 확실합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31사단 상황병이 날짜를 혼동했네 마네 하는 개소리를 하는데 31사단 기록에는 19일은 물론 20일에도 무기탈취 사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무기탈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에 있습니다. 거기에 21일 새벽 2시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이 탈취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실탄은 그곳에서 보관하지 않고 31사단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 "2군 계엄상황 일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21일 새벽에 탈취된 칼빈 17정에는 실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역사학도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총과 실탄이 최초 피탈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맞습니다. 다만, 육군본부가 81년에 80년 5월 당시의 모든 부대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소요진압과 교훈"이라는 책에 나주경찰서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무기고 피탈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민중항쟁사적비가 19일 무기 탈취를 증언하고 있다는 개소리를 하고 있는데 민중항쟁사적비 내용 그대로 옮겨드립니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시민학살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다수의 시민들이 군용차량을 이용하여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M1소총, 칼빈소총 그리고 다수의 수류탄등을 획득하여 무장하고 획득한 무기의 상당수를 광주로 이송하여 광주항쟁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다."===>이것이 비문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19일이 아니라 21일이라고 명백히 젹혀 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사 발간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20일 이전에 나주 무기고 탈취는 없었다는 전남 경찰국 주상섭 통신과장 증언" 전남 경찰국 주상섭 통신과장을 만나 그때의 상황을 들어보았다. "20일 밤 시위대원의 무기탈취 사건은 없었습니다. 특히 나주에서 있었다는 것은 그때 통신을 맡고 있었던 나로서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주경찰서장도 광주에 와 있었는데 서장이 모를리 있겠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나주경찰서뿐 아니라 경찰국 전체가 비상이 걸릴 만큼 큰 사건이었지요. <== 이제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 파악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해드린 내용들은 이미 제가 예전에 이 곳 까페에 글로 다 남긴 내용들입니다.
비문 내용은 소설이고, 5월 21일이 처음이 아니라, 19일에 나주에서 1차로 무기 탈취 사건이 있었기에 김대중이 세운 그 기념비가 오히려 5월 19일의 무기 탈취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날자를 21일로 적다 보니 비문의 내용은 소설입니다. (1) 5월 20일 시민군 버스에 경찰 4명이 깔려죽은 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2)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죽은 시민군 4명 모두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죽었습니다 [한 명은 군인들을 시민군 장갑차로 깔아죽이다가 일어난 사고로] (3) 21일에도 나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간 폭도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날의 도청 충돌 때 광주에 없었습니다.
그 무장폭도들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후에야 도청에 도착하였습니다. 더구나, 21일 그 폭도들은 도청광장 충돌이 있기 전에 나주로 출발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대로라면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가 도청광장에서 시민군을 지휘했어야 하는데, 그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한 후에야, 즉 그날 저녁 늦게서야 도청에 도착하였습니다.
세워진'민중항쟁 사적비 1호'가 증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역사학도 니 입으로 씨부려놓고 이제 그게 소설이라고? 아침부터 가지가지로 웃겨주시는구나. 그리고 뒤에 왠 헛소리를 장황하게 써놓았니? 왜 거짓말한 것이 들키니까 당황스럽니?
역사학도야 진짜 이토록 뻔뻔하게 거짓말을 줄창할 수 있는 너의 뻔뻔함이 부럽구나. 니가 나에게 물어보라며 글을 남겼으니 그 부탁을 들어주마. 니가 거짓말 한 사건에 대해 또 이야기를 이곳에서 다시 해야겠구나. 밑에 새로 댓글로 니가 전에 했던 거짓말에 대해 다시 써줄테니 눈 씻고 잘 쳐보세요. 귀찮기는 하다만 니가 백번 거짓말을 하면 백번 내가 바로 잡아주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