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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은 1914년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통합되어 생긴 고을인데, 고창읍성은 순천 낙안읍성, 서산 해미읍성과 함께 잘 보존된 조선시대 3대 읍성 중 하나이다(2013.09.11. 순천 낙안읍성 참조).
하지만, 고창 주민들은 고창읍성을 모양성(牟陽城)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창 지역이 백제시대에 모량부리(牟良夫里) 혹은 모양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 고창읍성이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는가에 대하여는 의심이 들고,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읍성의 성벽에 새긴 각명(刻銘) 등으로 읍성의 축성시기를 추정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7년(1486)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을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각 고을에서 동원한 주민들이 성을 쌓으면서 성벽 곳곳에 ‘濟州始(제주시)· 和順始(화순시)· 羅州始(나주시)· 癸酉所築宋芝政(계유소축송지정)’이라는 구역표시를 한 각명이 있는데, 특히 동문 옹성 성벽의 ‘계유소축감동송지민’이라는 각명은 의미가 있다. 또, 성을 쌓은 구간을 표시한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각명에서 무장현(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통합된 지명이어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1486년 사이의 계유년 즉 단종 원년(1453)인 계유년에 쌓은 것이 확실하다(사적 제145호).
고창읍성은 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을 빠져나와 고창군청 앞 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고창읍사무소 앞 다리를 건너면 건너편 산기슭이 읍성이다. 군립도서관 일대는 무료주차장이고, 읍성 입장료도 어른 1천원, 어린이 400원이다. 조금은 촌스러운 읍성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읍성 입구 오른쪽에 고창읍성을 거쳐 간 수령들의 공덕비가 한 줄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고창읍성 성곽 밟기를 형상화한 아낙네 3명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읍성은 다른 읍성 대부분이 평지에 양면을 돌로 쌓고, 성문 위에 누각을 지어서 적이나 외부를 감시한 것과 달리 국경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옹성(甕城)이다.
옹성 |
공북루 왼쪽 성곽 |
옹성은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벽에 반달처럼 덧쌓아서 마치 항아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서 남해 바닷가인 낙안읍성도 옹성으로 쌓았지만, 고창읍성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다. 읍성에 옹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이 외적을 방어할만한 중요한 읍성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데,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장성 갈재를 넘어가는 길목에 쌓은 장성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침입을 맡았으며, 고창읍성은 입암산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축성에 쓰인 석재 중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은 높이가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묻힌 것 등 잘 다듬어지지 않고 투박하다. 아무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3,008척(1,684m)이고, 높이는 12척(4~6m)으로 약5만평으로서 읍성에는 동. 서. 북에 3개의 문, 3곳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만들었으며, 성 안에는 연못 3개와 우물 네 곳(三池四泉)이 있고, 성 밖에 해자(垓字), 동헌, 객사 등 22동의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에 나서서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했다.
성곽에서 바라본 공북루 |
정문인 공북루(拱北樓)에 들어서면 원시림 같은 성안이 펼쳐지는데, 공북루란 임금이 계신 북쪽에 두 손을 모으고 경배한다는 누각이란 의미로서 전국 대부분의 관아 북문의 명칭이다.
읍성의 메인스트리트 가운데에 2층 누각인 풍화루(豊和樓)를 중심으로 오른쪽 높은 지대에는 동헌이 있고, 동헌 옆에는 ㄱ자형 누각이 있다. 동헌 위쪽에 객사 모양지관(茅陽之館) 중 지붕이 높은 가운데 건물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린 곳이고, 왼쪽과 오른쪽의 방은 출장 온 관리들의 숙소다.
풍화루 왼쪽 성벽 밑에는 관아의 음식을 공급하던 관청(官廳)과 작청(作廳)이 각각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대체로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으나,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고 해자(垓字)를 판 고창읍성의 성안에는 관아만 있고 평소 주민들은 성 밖에서 살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도록 만든 구조이다. 이것은 아마도 서해안을 통해서 전라도 내륙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전형적인 관리들 위주의 고창읍성은 풀밭에 덩그마니 관아만 복원(?)해 둔 것은 너무 무성의해 보인다. 고창군에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성벽과 관아들만 복원할 것이 아니라, 제초작업 경진대회라도 열어서 성안을 단정하게 가꾸는 일도 급선무일 것 같다.
공북루 오른쪽 언덕에는 수령을 돕는 전직관리들의 모임인 향청이 있고, 공북루에서 왼편의 감옥 앞에서부터는 고창읍성의 자랑인 성벽 밟기가 시작된다.
성 밟기는 1778년 윤삼월에 고창현감 이항(李恒)이 성곽의 안전과 고을의 안녕을 위하여 불교의 탑돌이와 다리 밟기를 모방해서 주민들에게 권한 것이 기원인데, 여인네들이 작은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 승천한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성곽의 보수에 여인네들까지 동원한 고역을 미화시킨 풍습이 아닌가 싶다.
고창읍성은 이른 봄이면 붉은 영산홍과 철쭉이 만발한 성곽 길을 걷는 것이 매우 아름다워서 2007년 한국도로교통협회에서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고창은 매년 3~4월이면 선운사의 붉은 동백을 보러, 8~ 9월에는 마애불이 있는 도솔암까지 올라가는 약3㎞의 산길에 동백보다 더 붉은 꽃무릇을 보러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수선화과 꽃의 일종인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었다가 시들면 그제야 잎이 피어나서 꽃과 잎은 평생 서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상사화(相思花)라고도 하지만, 6월의 고창은 외국에서 수입한 블루 벨리나 아사이 베리 보다 몇 곱절 성인병예방과 노화방지에 좋은 복분자와 수박이 가득하다(2014.06.04. 고창 선운사 참조).
읍성 매표소 옆에 있는 고창이 낳은 판소리 대가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생가와 고창판소리기념관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다. 신재효는 부친의 한약상을 이어받아 부를 축적한 중인출신으로서 35세 때 이방이 되었다가 호장(戶長)이 되었다. 그가 이방이던 40세 전후에 이미 1천 석을 가진 부호였는데, 그는 신분상승을 노리고 55세 되던 1876년(고종 13) 삼남지방의 한재민(旱災民) 구제에 돈을 기부하고, 이듬해 경복궁 중건 때에도 거액의 원납전을 내서 1877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품계와 절충장군(折衝將軍)직을 제수 받았다.
그 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지만, 그의 업적은 관직이 아니라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광대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판소리가 한문학과 견줄만한 예술임을 강조하면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을 개작하여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민족문학으로 성장시킨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생가는 재력가라는 명성을 생각할 때 매우 비좁고 옹색한데, 더욱 가소로운 것은 생가의 초가지붕에 이엉을 긁어내리지 않고 두터운 솜이불을 덧씌우듯이 올리기만 한 엉터리 지붕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