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2013년 여름호
대학강사무(舞)
- 신경림의 「파장(罷場)」조로
이동재
못난 놈들은 서로 가방만 봐도 안다
복도나 휴게실 앞에 서서 얼쩡거리고
그늘 벤치에나 앉아 애매한 시간을 죽이다 보면
어느새 남 같지 않은 얼굴들
얼굴 좀 안다고 이 학교 저 학교 수업 분위기
들쭉날쭉 강사료에 교수들 얘기하다보면
왜 자꾸 세상이 좆같아지는지
지나가는 정규직 교수나 잡고 시비나 걸까
반반한 여학생 앞길이나 막고 히야까시나 할까
도서관 옥상에 올라가 고함이나 지를까
쥐꼬리만한 강사료에 끌려 이 학교 저 학교 뛰다보면 또 저무는 하루
어떤 인간은 총장처럼 허허거리고
또 어떤 인간은 거지처럼 굽실거리지만
이까짓 차비도 안 나오는 강사질이야 자꾸 해 무엇하랴
박사들도 일용직 잡부처럼 부려먹는 통 큰 나라
하늘에 대고 연신 엿이나 먹일꺼나
정말 아무 여자나 잡고 한번 달라고 할꺼나
두루두루 쪽팔리다보면 코앞이 종강
방학 좋다만 무보수 적빈의 세월
너도 알고 나도 다 안다
못난 놈들은 가방끈만 봐도 서로 숨소리만 들어도 안다
말 안 해도 다 안다 안다 안 다 안 ㅎ ㅎ ㅎ
(『시안』 2011년 봄호)
대학 강사들의 슬픈 춤
맹문재
우리나라의 대학에는 인생을 걸고 전공한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자신을 “못난 놈”이라고 비하하는 교수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소위 시간 강사로 불리는 대학 강사들이다. 대학 강사들은 강의를 하는 대학에서 대부분 연구실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복도나 휴게실 앞에 서서 얼쩡거리”거나 “그늘 벤치에나 앉아 애매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리하여 수업 준비를 차분하게 하거나 연구 활동을 할 수 없고 “이 학교 저 학교 수업 분위기”나 “들쭉날쭉 강사료” 등을 동료들과 신세한탄 삼아 나누기가 일쑤다. 심지어 비위에 거슬리는 “교수들”에 대해서 흉을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괴감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좇같”다고 원망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강사들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학 강사는 개설된 강좌의 40% 정도를 담당할 만큼 대학 교육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학문을 이끌어갈 신진 인재들로 그야말로 소중히 지켜야 할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처한 현실은 생계의 유지 자체가 힘들 정도로 열악하기만 하다. 2004년 서울대에서 한 연구 교수가, 2008년 건국대에서 한 강의 전담 교수가, 그리고 2010년 조선대에서 한 시간 강사가 생활고와 차별 대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그 여실한 예이다.
그동안 대학 강사의 열악한 처지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될 때마다 개선안이 논의되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가령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학 강사의 임금이 전임 교수에 비해 월등히 낮아 평등권을 침해받고,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의 질이 떨어지고 있므로 신분을 보장하라고 교육부에 권고했지만, 아직까지 실질적인 대책은 없다. 대학 당국 역시 방관하거나 회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학 강사의 노동법적인 보호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 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로서의 지위가 인정되면서도 비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단시간 및 기간제 근로자 보호법 등에 관한 법률’(속칭 비정규직 보호법)에서는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 전문직 예외 규정은 대학 강사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임의적으로 적용해 당사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대학 강사는 학기 단위로 계약되므로 사실상 기간제 근로자이다. 또한 대부분 주당 15시간 이내의 강좌를 담당하므로 단시간 근로자이다. 따라서 대학 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비록 사용자로부터 구체적인 지휘나 감독을 받지 않으면서 업무를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비정규직 근로자의 신분인 것은 분명하다.
대학 강사는 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엄연한 교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고의 불안에 시달리고,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하고,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교원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대학 강사의 문제는 비리 사학의 문제, 대학의 서열화 문제, 학벌 문제 등의 사회 문제와 함께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
모순되게도 해방 후 건국 초에는 대학 강사와 교수의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 교육법에는 시간 강사도 교수와 같이 학생을 지도하는 교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가 교육공무원의 대상을 전임강사까지 국한시키는 바람에 대학 강사의 지위가 급락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 신군부가 중산층의 교육에 대한 욕구를 정권의 유지의 차원으로 활용해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크게 늘려주면서도 전임 교원의 충원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아 대학 강사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인건비를 줄이려는 대학의 입장에서 당연히 전임 교수보다는 대학 강사를 활용했던 것이다.
어느덧 대학은 비영리 조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을 교육시키는 기관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은 적립금을 펀드에 투자하고, 부동산 사업을 하고, 쇼핑센터를 짓고, 시설 관리원이나 환경 미화원 등을 외주 방식으로 고용할 정도로 자본주의화 되어 있다. 소위 대학주식회사 또는 교육 회사로 변질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학은 앞으로도 대학 강사를 많이 활용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 강사들에 대한 처우 역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대학은 전망이 없다. “차비도 안 나오는 강사질”이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대학 강사들로부터 활발한 교육과 연구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에는 정년이 보장되는 전임 교원과 그렇지 못한 대학 강사를 비롯한 비전임 교원이 존재한다. 전임 교원은 소위 정규직이고 비전임 교원은 비정규직이다. 대학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일반 회사의 경우보다 크다. 그리하여 “지나가는 정규직 교수나 잡고 시비나 걸까”와 같은 데서 볼 수 있듯이 노노간의 갈등이 깊다. 같은 대학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지만 법률적 지위를 비롯해 임금과 퇴직금, 사회적 평판, 부가 수입 등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대학 당국은 대학 강사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동안 ‘전국 대학 강사 노동조합’이 나름대로 분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학강사무”를, 즉 대학 강사들의 슬픈 춤을 봐서는 안 된다. 정부나 대학은 대학 강사들의 요구에 마지못해 움직일 것이 아니라 먼저 나서야 한다. 대학 강사와 같은 인재들과 함께해야만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를 주도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 등.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 푸른사상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