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가루에서 추억이
한지에 쌓인 한줌 가루에서 아릿한 추억 꽃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온기라곤 있을 턱이 없건만, 감싸 쥔 손끝에 달구어진 심장이 뜨거워진다. 26년 전,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도, 친정엄마와 1년 뒤 엄마를 뒤쫓아 가신 아버지의 부음 앞에서도 지금처럼 명치끝이 아리는 통증이 있었다.
댄디와 우리 가족의 인연이 시작된 시점은 아버지 가신 후 첫 생신을 제사로 모시던 날이었으니 15년 전이다. 그날 남동생은 지인에게 얻어 키우던 생후 3∼4개월 된 강아지를 키우기 힘들어 동네 슈퍼에 주기로 했다면서 짐을 싸두었다. 그것을 본 작은애가 우리가 키우자고 했지만 나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팔아도 35만원은 되고 최하 15만원은 받는다면서 일주일만 봐달라기에 ‘딱 일주일만!’이라고 못 박은 뒤 데리고 왔던 강아지가 바로 댄디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가족이 된 댄디는 마치 천사처럼 메마른 집안에 웃음꽃을 뿌리고, 귀여운 몸짓과 영특함으로 가족 간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바라만 봐도 즐거움이 샘솟는, ‘엔돌핀’자체였다.
큰 일이 많았던 올해, 두 번째 수필집 출간과 거의 동시에 이뤄진 큰애의 혼사, 이후 채 한 달도 안 되어 이사까지 했다. 긴장감으로 아플 시간조차 없었지만 짐 정리가 대충 끝날 무렵 한 번에 밀려든 피로로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온 몸이 부서져 내리듯 아팠다.
나의 상황을 공유했던지 댄디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 내 몸을 추스린 후, 댄디에게 기력과 면역력을 증진 시키는 주사라도 맞힐 요량에 댄디가 다니던 K구의 동물병원을 가기위해 여의도 근방을 지날 때였다.
7월 말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을 냄새 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가을 우체국 앞에서’란 노래였다.
왼손은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조수석의 댄디 몸을 만지작거리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있음에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스함도 머잖아 가을 은행잎처럼 바람에 날려 사라질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조금씩 댄디와의 이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댄디야! 이제 그만 자는 듯이 편히 가거라.”라고 말할 때마다 남편은 댄디가 듣는데 그런 모진 말을 한다며 “무슨 소리야? 앞으로 십년은 더 살텐데…, 댄디야! 넌 최소한 오년은 더 살다가 아빠랑 가는 날을 합의해보고 가야 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영양제와 아미노산을 넣은 수액을 맞히고 다음날 보름치 심장 약도 타왔다. 이후 댄디의 기력과 식욕이 회복되고 컨디션이 꽤 좋아졌지만 약이 떨어진 후 방심했던 일주일이 큰 화근 이었다. 그 일주일동안 극도로 부실해진 심장기능이 다른 장기에까지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돌맹이도 삼킬 정도의 왕성하던 식욕은 어디가고 좋아하던 음식도, 평소엔 없어서 못 먹던 간식도, 인삼과 대추를 넣어 끓인 닭죽도 … 아예 입술을 꽉 깨물고 한사코 먹기를 거부하기에 주사기에 죽을 넣어 강제로 주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수액(강아지는 24시간 정도 수액을 맞아야함)을 맞힌 뒤 아예 한 달 치 약을 타왔다. 허나 기관지 폐쇄증으로 호흡이 곤란해지자 떠나기 이틀 정도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1∼2초 정도 졸다가도 금방 숨이 막혀 쌕쌕거렸다. 순환기 계통의 지병 탓에 평생 거르지 않고 내가 약을 먹어야 되듯이 댄디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극기야 가는 날 새벽, 단말마 같은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갔더니 몸이 뻣뻣해지며 눈이 풀리고 숨소리마저 잠잠해지기에, 남편과 나는 댄디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허나 무슨 미련이 남았던지, 가던 길 되돌아 온 댄디는 깨어나 걸어 다니기까지 하기에 잠시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아침에 다시 일어난 심장 쇼크를 보고 그만 댄디를 편히 보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댄디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 같았다. 의사와 통화한 뒤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심하게 버둥거리며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댄디를 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이야기하며 보여준 뒤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도 대부분 젊잖게 몸을 맡기는 편인데, 떠나기 전 10여분 정도는 달랐다. 눈빛이 빛나고 아프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꾸만 우리 부부 품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을 보내기위해 데려온 줄도 모르고 품속을 파고드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한참을 붙들고 꺼이꺼이 울다가 의사에게 댄디를 넘겨줬다.
잠시 후 의사가 불러 들어간 방에서 댄디가 오랜만에 편안하게 숨 쉬며 자고 있었다. 의사는 의식이 거의 없다고 했지만, 어쩌면 엄마 아빠를 계속 찾을 것만 같아서 심장이 멎는 마지막 주사를 투여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주사액을 투여하면 일이 분 안에 영원히 잠든다고 했다.
댄디에게 그동안 정말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었다. 심전도기의 그래프가 일직선을 그리는 순간, 남편의 손바닥으로 심장이 덜컥 멈추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2014년 8월 28일 정오에 천년둥이 댄디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김포의 반려동물 화장장에서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기 전, 제단에 올려 진 댄디를 한 번 더 보았는데 그때까지 댄디의 몸은 말랑말랑하며 온기도 남아있어 꼭 편히 잠자는 것 같았다. 허나 잠시 후 부드러운 육신의 탈을 벗어던진 부서진 뼈에서 다시 한줌의 가루로 돌아온 댄디!
지난 주말엔 댄디와 함께 열댓 번 정도는 갔을 돌심방(내 등단작의 배경지이자 첫 번째 수필집 제목)과 뒷편의 청량산을 올랐다. 저만치 토끼처럼 깡충깡충 산을 오르던 댄디와의 추억을 그리며. 어디 돌심방 뿐인가, 제주도, 설악산, 해운대, 거제도… 여행을 갈 때면 우리 곁에는 늘 댄디가 있었다.
내방엔 아직도 보내지 못한 댄디가 있다. 조만간 11층 내 방문 베란다 창 아래, 스물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햇볕 잘 드는 곳, 그 중 곧고 튼튼한 나무 아래에 댄디를 영원히 놀게 해 줄 생각이다.
오늘 아침에도 한줌 남짓한 댄디의 흔적을 가슴에 안고 추억 길을 걸으며 속삭였다. “댄디야! 우리 가족 모두는 널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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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댄디가 간지 이제 12일 째 접어드는군요.
한동안 가슴이 참 많이 먹먹하고 슬펐는데... 이제 어느정도 감정을 가라 앉히고 댄디를 생각하며 며칠 전 글을 한편 썼었지요.
좀 전에 대충 퇴고를 보았습니다. 아직 완전한 퇴고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정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봅니다. 어느새 댄디는 강아지가 아닌 막내 아들로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석은잘보냈셨는지요 이젠 완연한가을햇빛입니다 이제 사랑했던가족을두고 댄디의또다른안식처로떠났군요 많이그리위지겠지요 저도 곧.언제떠날지모르지만 18살아들재돌이라는놈이있답니다 요즘은조금씩다르다는느낌이온답니다 그래도 앞으로30년은같이지낼것라생각하고지내고있답니다 마음
아이구 재돌이는 건강관리를 무척 잘하셨나보다. 오늘 김포의 덕포진이란 곳을 남편과 함께 갔다왔습니다.
어딜가든 모두 댄디와 함께간 곳이라...이곳 저곳 댄디 추억이 먾이 흩어져 있답니다. 건강하시고 재돌이 건강도 빌께요. ㅎㅎㅎㅎ
이마음을낳는답니다 좋은마음가지고계셨야가슴이편안해지실것으로믿습니다 그게 댄디가바라는마음이아닐까요?
문선배가 사랑하는 저 녀석은 빨간티를 좋아 하네. ㅎㅎ 빨간색의 스타일은 외향적이고 적극적인데
그래서 활동력이 강하고 문선배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쫄쫄 따라 다니는구나. ㅎㅎㅎㅎㅎ
ㅎㅎㅎ 성환후배 말 들으니 진짜 그러것 같네요. 내가 빨간 색을 좋아하다봉께 녀석 옷도 빨간색이 많아요. ㅎㅎㅎ
그래도 이제는 마음이 좀 차분해 졌어요. 이글 쓰고 난뒤... 아주 일주일 정도는 전화도 받기 싫고 글도 쓰기 싫더라구요.
암것도 하기 싫었다우. 내 마음을 앗아간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