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중고서점에서 여러 권의 책을 구입했다. 먼저 읽고 싶은 책의 첫장을 넘기며 마음이 쿵 내려앉는 듯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게서 선물받은 책이었다. 왜 그랬을까. 전하는 이의 서명이 든 이 책을 내다파는 이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괜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고 3때의 일이다. 학교가는 버스비를 빌릴만큼 가난했던 무렵이다. 새학년 교과서를 구입하지 못해 시간마다 다른 반 아이의 책을 빌려 공부하며 근 한달을 보냈다. 사정도 모르는 어떤 과목 선생님은 어떨 땐 책을 빌리지 못해 노트만 꺼내놓은 나를 나무라셨다. 학생이 공부할 책도 안가져오고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며 호통을 치셨다. 억울하긴 했지만 너무나 부끄러워 교과서를 못사서 그렇다는 말을 하진 못했다. 한달 여가 지나고 청계천에서 헌 책으로 교과서를 구입했다. 겉표지가 낡아 초라해진 책을 지나간 달력으로 감쌌다. 헌 책임을 결코 숨길 수는 없었다.
다른 책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국어책의 첫장을 넘기면 서명이 있었다. 마광호, 실명을 밝혀 그분께는 죄송하다. 암튼 만난 적도 없는 그분 덕분에 나의 고삼 시절이 조금은 고달팠다. 친구들은 국어시간만 되면 누구냐며 놀렸다. 못된 친구들 같으니라고. 그 아이들이야 재미로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진심 상처받곤 했다. 그때의 모든 상황이 녹록치 않았으므로.
헌 책 같지 않은 중고책 서명이 든 첫 페이지를 펼치며 잊었던 그날들이 떠올랐다. 어수선했던 그 시간들이.
마음을 저버리기란 쉽지 않을 텐데 이 책은 왜 나에게까지 왔을까. 무슨 안타까운 일들이 그들 사이에 있었을까. 선물을 내다버린 그 심정은 또 어땠을지. 짐작하기 힘든 일들을 상상하며 책장을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