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당회 장로선출방식 바꿔야한다.
요약
장로의 자질기준에 맞는 교인이면 누구나 후보자로 올려서 교인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장로선출방식을 고쳐야한다. 성령의 인도는 일부 장로나 소수의 목회자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로의 선택은 전체 교인의 뜻을 물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한다는 취지이다.
올 2012년도도 특별한 변동사항이 없는 한 당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2008년 현 담임목회자가 부임하면서 장로의 선출은 기획위원회의 일부 장로들과 담임목회자간의 협의에 의해서 후보자가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기획위원회의 전체 장로와의 협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종전 선출 방식의 문제점으로는
첫째, 전체 성도의 의견이 반영이 잘 안 된다,
둘째, 기획위원회와 목회자 그룹이 장로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에게 합당한지의 여부 만을 묻는 결정 기관이 되었다.
셋째. 장로가 되었을 시 의사결정에 대한 자유로움보다는 종속화 경향을 보 인다.
넷째, 성도의 의견을 반영하는 위원회가 아니라 장로 본인들의 의견을 주로 반영하는 사모임으 로의 성향을 보인다.
다섯째, 장로의 서열화를 부추김으로써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 한다.
여섯째, 장로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줄 대기 경향을 보이며, 교인들에 대한 봉사와 섬김보다는 정치성을 띤다.
일곱째, 대다수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가족 중에서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이외에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성도들의 직접 선출 방식을 택하자는 것이다.
혹자는 교회의 결정은 민주적인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럼 초기 기독교의 모습들이 현재에도 존재하는가? 현재의 개신교의 모습은, 감리교의 모습은 담임목회자가 주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세속화가 너무 많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 성도의 의견을 물어 성령의 인도를 받자는 것이다. 인간이 모이는 곳에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듯이 기독교인이라면 “합하여 선을 이루는”곳이라야 하는데 보통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으로 인해서 다툼, 시기, 음모, 아부 등이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본래 장로란 구약성서의 ‘자켄’이든 신약성서의 ‘프레스뷔테로스’이든 모두 ‘백발의 노인’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들은 경제적 생활력을 중심으로 장로를 선택하기 때문에 오랜 경륜으로서의 심오한 지혜와 온유한 덕성과 원숙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정도가 되면 은퇴를 바라보거나 아니면 원로장로가 되어있기 십상이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장로들은 교회생활에 대한 활력과 열심은 있으나 일반적으로 지혜가 부족하고 혈기와 교회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판단과 성향을 같이하는 그룹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교인들을 덕스럽게 돌보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장로의 주요한 임무로는 교인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치리 한다’, ‘감독 한다’, ‘다스린다’ 표현이 세속적 사고에서는 ‘지배 한다’, ‘군림 한다’라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성경적 의미로는 ‘형편을 살핀다’, ‘관심을 가진다’, ‘돌보아준다’, ‘사랑으로 이끌어준다’라는 뜻이다.
장로는 목사를 도와서 교인들을 심방하고 관심을 베풀며 대화하고 도움을 주는 봉사자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하려면 일반적인 성도들보다 덕성이나 신앙에서 원숙해야 한다. 덕성이나 신앙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교회에서 상시로 접촉하는 교인들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장로에 대해서 일거수일투족을 잘 아는 그룹이 교인들이다. 현재의 장로들 대부분은 교인들을 돌보는 자상한 일보다는 교회사업과 조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장로 본연의 임무보다는 회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어떠한 경우에는 교회와 목사에 대한 단순한 열심으로 인하여 교인들에게 유형, 무형의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장로교합동 측과 성결교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인정하지만 장로교통합 측과 감리교는 대표로 보지 않는다. 장로가 교인 수 30명을 묶어서 한 사람을 선출되어서 30명의 대표라고 하지만 교회 전체적인 측면에서 전체적인 장로의 숫자를 제한하려는 의도이지 선출구역이나 교인들을 분리하여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재 용두동교회의 선출방식은 장로로써 당연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져야 하지만 권력의식을 가지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겸손한 성경적 사고에서 이탈을 하고 있다. ‘섬기는 종’의 의식이 가득차야 온당하나 쓸데없는 ‘주인의식’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장로가 교인에게 ‘건방지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웃지 못하는 코미디를 연출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는 장로에게 경제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장로에게 경제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거대한 예산을 집행하며 모든 교인의 헌금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에는 경제적인 능력은 불가피한 조건으로 인시되고 있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장로는 예산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소외당하거나 침묵하기가 다반사다. 이런 경향은 교회를 자연히 회사와 같이 생각하고 소수 장로는 대주주와 같은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며, 무의식적으로 교회에 대한 ‘소유의식’까지 가지게 만든다. 따라서 교회의 재정을 조종하며 장로의 선출 문제 등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제 자신이 2년 동안 교회 재정부에서 봉사를 하여 본 결과로는 교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장로들이 재정적인 많은 부분은 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로 분 중에서도 자유업보다는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봉급으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더 충실하신 것도 볼 수 있으며, 이름도 드러나지 않는 많은 집사, 권사 분들이 헌금에 대해서 충실하신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의 장로 선출은 재력과 무관하다. 세상의 것을 따라하고 교회의 담임목사가 세상적인 마케팅을 하지 않으면 일반 교인들의 헌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현 담임목사께서 자신은 세상 적이지 않다고 설교를 하지만 조만간에 그에 대한 담임목사의 목회 궤적에 대해서 이 자유게시판을 통하여 설명을 하겠다.
우리 성도들은 마가복음을 잘 읽어보고 숙고하시길 바란다. 마가복음에는 이름이 남겨진 자나 여인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사를 놓고 볼 때 이름 없는 성도들의 믿음으로 기독교역사가 이어져 옴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구속사가 실현되기 위해서 그의 몸 된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힘차게 전진하여야 되는데, 장로는 교회를 세우는데 중심적인 직분이다.
올바른 장로는 많은 성도들의 이상이며 교회의 기둥으로서 영광이 약속되어있다. 장로는 세상적인 지배자나 권력을 잡은 자와는 달라서 덕과 사랑으로 교인을 감화시키고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며 형제들을 돌보고 세워나가는, 겸손하고 온유한 봉사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과 수고를 자청하는 충성스럽고 헌신된 자들인 것이다.
성경과 교회사가 증언하는 대로 바르지 못한 장로는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덕스러운 장로는 교회의 평화와 영적 성장을 가져온다. 장로들은 세상적인 직업과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적 상식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쉽다. 이를 극복하고 이 세상의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장로의 길이다. 하긴 요즘 세상에는 목사가 세상 사람보다 주판알을 사모와 함께 더 잘 튕기는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세속적인 상황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심에 장로들의 역할이 중심이 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교회는 항상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 자신을 세속적 지배 하에서의 위치를 돌이켜보고 개혁해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