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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거대한 나무의 수령樹齡은 무려 40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무려 열네 번이나 번개를 맞았습니다. 눈사태, 폭풍우, 뜨거운 더위, 혹한의 추위 등 무수히 많은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뎠습니다. 어느 날, 허무하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얼마든지 눌러 죽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딱정벌레들이 오랫동안 쉬지 않고 나무껍질을 갉아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제주도 면적의 열배가 넘는 엄청난 숲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생각은 거대한 나무를 주저앉힌 지극히 작은 딱정벌레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굳어져 있는 생각이 저와 여러분을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의 주인이 아니라, 생각이 저와 여러분의 주인입니다. 생각이 저와 여러분을 매개로 사용합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생각이 어떤 지시를 내리면 그대로 움직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신적이며 탐욕적이기까지 한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광화문에 위치한 교보문고 현판에는 “있지도 않은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정신을 산만하게 흔들어 놓고, 뜨거운 삶의 열정을 차갑게 식혀버리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한 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의 철학자,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인 동시에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그Seneca는 당대의 풍자諷刺 시인으로 유명했던 친구Lucilius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문제가 벌어진) 현실 속에서보다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결과,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상상 속에서 훨씬 더 많은 (실제로는 겪을 필요가 전혀 없는) 고통을 겪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가!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설령 불행이 정해졌다 하더라도...만나기 위해서 미리 달려갈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은 닥치면 겪게 될 것이니 그동안은 더 나은 것을 기대하라. 불운조차도 변덕스럽다. 아마도 그것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동안에는 아직 불운이 아니다. 그러니 더 좋은 일을 기대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불행이든 이미 정해진 불행이든 미리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현실로 닥쳤을 때 고통스러워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소중한 시간을 앞으로 주어지게 될 불행을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허비虛費하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한 시사주간지TIME에 실린 일화입니다. 한 병사가 폭탄 파편에 맞았습니다. 목 주변을 크게 다쳤습니다. 대수술을 여러 번 해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수술 뒤 깨어난 병사는 산소호흡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쪽지로 살 가능성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성공적이고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병사는 다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내용의 쪽지를 의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의사는 목소리도 문제없이 돌아올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병사는 다시 쪽지에 “그렇다면 제가 걱정해야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까?”라는 글을 적어 의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자신이 당한 부상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병사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의사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극히 적어보이는 생각이 저와 여러분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139:17a)라고 고백합니다.
“생각רָעָה라아”은 “(양을) 먹이다, 보살피다, 양육하다, 관계를 맺다.” 등의 뜻입니다. “나의 목자”(시23:1a)라고 번역 될 때도 있습니다. 양과 관련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겁이 많습니다. 대단히 연약합니다. 반면, 대단히 완고합니다. 고집은 대단합니다. 눈은 사물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나쁩니다. 걸핏하면 길을 헤맵니다. 방황합니다. 이런 양을 제대로 먹이기 위해서는 생각이 있어야합니다. 제대로 보살피기 위해서는 생각이 있어야합니다.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있어야합니다.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생각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a)라는 증거에 따르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양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지 않으면, 보살펴 주시지 않으면, 양육해 주시지 않으면, 관계를 온전히 맺어주시지 않으면, 순간순간 세밀하게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갈 바를 모른 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아니 죽을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붙이게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사나운 짐승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그야말로 무기력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평안하고,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값없이 선물로 부어주고 계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생각은 절대로 가볍지 않습니다. 별 볼일 없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보배טוב(토브)롭습니다. 곧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희귀稀貴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값집니다. 더할 나위 없이 복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무겁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선GOOD합니다. 시인의 고백은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b-18)라고 이어집니다. “수רֹאשׁ(로쉬)”는 “머리, 우두머리, 봉우리, 꼭대기, 최고의 것, 수석, 으뜸” 등의 뜻입니다. 하나, 둘, 셋 같이 헤아리는 수數가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과 방책 등을 말하는 수手도 아닙니다. 최고를 가리킵니다. 거기다 종류와 횟수와 양은 누구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많습니다. 세고 또 세다가 잠이 들 정도로 많습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 또 다시 세어보아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생각을 바탕으로 저와 여러분을 먹여주십니다. 보살펴주십니다. 양육해주십니다. 관계를 유지해주십니다. 호흡하는 모든 순간 인도해주십니다. 한편,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의 설명이나 답을 요구하는 반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입니다. 도저히 감출 수 없어서 쏟아낼 수밖에 없는 감탄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입니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솟구쳐 오르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아니 반드시 드려야하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드리는 간증입니다. 사실 시인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째서 나를 돕지 않으시고 내가 신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까?”(시22:1)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굴곡진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원수들은 그를 사람이 아니라 벌레처럼 여겼습니다. 멸시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 부었습니다.
으르렁거리며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사자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습니다. 개떼처럼 둘러싸고 거침없이 손발을 물어뜯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여호와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여, 속히 와서 나를 도우소서. 나를 칼날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생명을 개와 같은 저 원수들의 세력에서 구해 주소서. 나를 사자들의 입에서 건지시고 들소들의 뿔에서 구하소서.”(시22:17-19)라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하는 그를 철저히 외면하셨습니다. “죽음의 진토”(시22:15b) 속에 아무렇게나 버려두셨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날을 눈물과 통곡과 갈등과 고민과 번민으로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롭고 많은지 모르겠다며 찬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당했던 무수히 많은 사건사고들을 통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보배롭습니다.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환난과 시험이 다가오고 끝없이 이어지기만할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아야합니다. 무턱대고 원망과 불평부터 쏟아놓지 말아야합니다. 당신만의 방법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고난이 고난이 아니었고, 시험이 시험이 아니었고, 손해가 손해가 아니었고 오히려 꼭 필요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처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모르겠다고,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봄 농사를 시작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밭갈 쟁기가 고장 났습니다. 농부는 서너 개의 밭 건너편에 위치한 농장 주인에게 부탁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좋은 이웃이니 기꺼이 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밭을 지나가는데 농장 주인이 밭갈이를 다 마쳤으면 좋겠지만, 혹 그렇지 않았다면 쟁기를 빌려주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밭을 지날 때는 만약 쟁기가 낡아서 수명이 다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자신에게 빌려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밭을 지날 때는 농장 주인은 지금까지 별로 도움이 되는 이웃이 아니었으며, 설령 쟁기가 잘 작동하고 자신의 밭갈이를 끝냈다 할지라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모든 밭을 지나 농장 주인의 현관을 향해 걸어갈 때는 정말로 못 된 노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쟁기질이 다 끝나고 쟁기가 놀고 있어도 자신이 망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절대로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관문을 두드릴 때가 되었을 때는 생각이라는 블랙홀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웃으로 지냈던 사람이 밝은 얼굴로 문을 열고 “좋은 아침이야. 무슨 일로 왔는가?”라고 말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쟁기를 네 놈 똥구멍에나 처박아 두라고!”라고 외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생각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지극히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을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엄청난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There is a way that seems right to a man, but in the end it leads to death.”(잠14:12)라고 외쳤습니다. 쉬운 성경GNT은 이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What you think is the right road may lead to death.”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Let evil man his thoughts. Let him turn to the LORD”(사5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 돌아오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사55:8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생활 번역NLT은 이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전혀 같지 않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says the LORD.”라고 번역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너희가 할 수 있는 상상을 훨씬 능가한다. 곧 상상을 초월한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생각”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신다
제발 내 생각 좀 하라고
이 생각 저 생각 다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간다
엄마생각 아빠생각
오빠생각 동생생각 등
무수한 생각 속에 살아가지만
영혼의 부모이신
하나님 생각은 잊고 살아간다
우리의 생각마저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생각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저와 여러분의 생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좀 생각하며 살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도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라고 외쳤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을 만나 힘들고 어려울 때 당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외쳤습니다.
사도는 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라고 외쳤습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각양각색의 문제들 앞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기도 곧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외쳤습니다. 간구 곧 하나님을 구하라고 외쳤습니다. 감사 곧 각양각색의 문제들이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곧 영원하며 본질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평강이 가장 탁월한 수비대가 되어서 마치 호위 하듯이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마음과 생각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서 완벽하게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살게 할 것 같지만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고 또 화목케 하기보다는 서로 다투며 싸우게 만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는 복된 삶,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복된 삶,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호위를 받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각은 지극히 보배로우며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많다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