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종교인 세금부과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다. 그동안 교계 내에서도 찬반양론이 들끓었다. 수년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층, 또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비양심적인 인사들이라는 질타가 이어졌다. 모든 종교인에 대한 것이지만 목회자에게 집중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양분된 이론이 타종교에 비해 뜨거운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금문제에 대하여 나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세금을 고민할 만큼의 사례금을 받아본 기억도 없지만 목회자의 사례금은 결코 ‘노동의 삯’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의 댓가를 위하여 일하는 ‘삯꾼’은 목회자에겐 가장 치명적인 욕이다. 만일 이를 위하여 목회를 하고 있다면 진작에 집어치웠을 것이 분명하다. 항상 밑지는 장사만 해왔기 때문이다. 목회하면서 신용 불량자가 된 것은 단지 나만의 일이 아니다. 내 주변을 보아도 수두룩하다. ‘목회 10년 만에 빚만 일억’이라는 말이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에겐 공공연한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목회흑자로 인한 풍요를 꿈꾸는 목회자는 없다. 이런 목회자일수록 상업주의,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세속화에 대하여 더없이 단호한 태도를 지닌다. 노동의 댓가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에 암이 찾아오고 체력적으로 한계가 느껴졌을 때에도 목회를 그만두지 못한 것은 노동이 아닌 나의 생명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목회자의 세금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세금납부문제가 사회의 이슈로 떠올랐고 법으로 제정되어 곧 시행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이제 부딪혀야 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목회자 세금납부에 반대이론은 대충 이렇다. 첫째는 위에 거론했던 것처럼 목회자는 ‘노동의 댓가’로 사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근로가 아니기에 근로소득세 또는 종합 소득세는 목회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중납세문제를 말한다. 헌금 또는 기부금은 이미 모든 세금을 낸 성도들이 기부하는 것이기에 그 헌금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세금부과라는 것이다. 이는 법적인 문제로 유권해석이 분분한 모양이다.
찬성이론으로 대두된 것은 ‘교회는 하늘나라의 시민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에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한다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이사 통치아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가이사에게 납부해야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말씀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세우신 권세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복종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찬반양론이 비등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은 목회자와 교회를 이상한 쪽으로 몰고 나갔다. 주로 특권층, 비양심적이며 반사회적 인사들이라고 몰아 세웠다. 과연 그런가? 세간의 그런 조롱에 대하여는 대답해야할 일고의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민의 의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성실했노라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공격의 틈을 열어준 것에 관하여는 영 뒷맛이 찜찜하다. 언제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것을...지혜롭지 못했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찬반양론의 틈바구니에서 세상은 교회를 오해했고 비판으로 들끓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영원히 버릴 수 있다고 했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대할 것이라고 천명한 사실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복음의 기회를 위해서라면 목회자의 세금이 문제가 될 수 없다. 주님은 이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버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세금부과문제로 인한 교회와 정부 간 ‘일만 악의 뿌리’인 돈이 오갈 때, 여기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이 복음의 문을 막아 버릴 것 같은 염려이다. 사단의 맹공격 속에 더욱 더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함을 느낀다. “아이고! 주여 도와 주소서!”<김상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