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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속의 인물 "손돌" 실존인물 가능성 높다
"손돌바람"과 "손돌목"으로 전해오는 뱃사공 ‘손돌’이 전설속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 그의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닌 지명에서 유래돼 역사적 변이를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영수 인하대 교수는 11월 30일 김포시민회관 다목적홀에서 '손돌목 전설의 역사적 재조명과 이해'를 주제로 김포포럼이 주최한 '내 고장 정체성 찾기 학술 세미나'에서 "손돌목의 전설은 손돌이란 지명에 배를 몰고 손돌목을 지나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죽음을 측은 하게 여긴 설화전승 집단에 의해 생성된 구전전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을 보면 전설의 배경이 된, 고려 때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난길에 오른 왕은 고종으로 7월경에 강화에 입어한 것으로 기록 돼 있지만 손돌이 목숨을 잃은 음력 10월 20일 제를 올리고 있어 3개월가량 차이가 난다"며 이를 근거로 제시했다.
또, "손돌이란 지명 또한 고려가 아닌 조선 후기에 생긴 지명으로 고려왕과 연계시키기는 어렵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손돌묘가 실제했으며 사람들이 묘의 주인을 손돌로 인식하고 있어 손돌이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 지역에 살았던 뱃사공이 전란에 비교되는 위급한 상황에 배를 몰고 손돌목을 지나다 그 곳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기에 '손돌목의 전설'이 생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땅이름학회명예회장인 배우리 교수는 "손돌이란 사람이 죽은 바닷목이어서 손돌목이라는 전설은 역사적 사건과 얽혀 사실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손돌목을 '좁은 물목'의 뜻으로 전설과 상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손은 좁을 착(窄)과 돌(梁), 즉 착량(窄梁)으로 물길이 좁고 심한 굴곡을 가진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명랑대첩으로 잘 알려진 곳도 옛 이름이 울돌목으로 불려왔고 서울 노량진도 과거에는 노돌로 불리는 등 돌은 좁은 물목으로 우리나라 여러 지명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배교수는 "목은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전설속에나오는 손돌이라는 인물이 비록 뱃사공이기는 하지만 왕을 모실만한 신분이었다면 당시에도 땅이름으로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손돌목의 주인공 손돌의 이름이 실제 이름이 아닌 지명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토론자로 나선 김포대학 육재용 교수는 "손돌이 전설속의 주인공이 아닌 손돌목과 관련 있는 실존인물이었다고 추론한다면 김포지역이 손돌 설화의 발생지임을 알리고 이를 문화자산으로 부각, 관광콘테츠로 개발하는 적극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손돌목의 설화내용을 보충하고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대표적 캐릭터로 개발하거 손돌목의 얼이 깃든 손돌목 주변을 관광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현재 매년 실시되는 손돌공 진혼제를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포와 강화지역에 전해지는 손돌목의 전설은 고려 때 몽고란을 피하기 위해 음력 10월 20일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배를 탔던 왕이 용두돈대 밑에 이르러 사공이 물살이 센 곳으로 배를 저어가자 왕이 사공 손돌을 역적으로 의심해 목을 베었지만 사공이 죽기 전에 왕에게 '바가지를 띄워서 바가지가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바다가 트일 것'이라고 일러 주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그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이곳을 통과한 왕은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손돌을 김포쪽 강가 야산에 묻어주고 제사를 올려 주게 됐고 음력 10월이면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불어 이후 이를 ‘손돌추위’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