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텐트를 철수합니다. 어제 남해 금산 등반과 야간 공연으로 몸이 피곤하였지만 오늘이 도보여행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 전몰 유허가 있는 관음포를 순방하고 진주성과 국립진주박물관을 둘러보도록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 관음포에 도착하여 영상 상영 시간이 급박하여 바로 '이순신 영상관'으로 들어섭니다.
↑영상관 내부. 임진왜란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영상관에는 해설사가 있어서 영상 상영 전에 임진란과 노량해전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영상 관람을 마치고 영상관으로 뒤편으로 나와서 관음포 앞 바다를 바라봅니다. 저 앞바다에서 1598년 11월 19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왜군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이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고 숨을 거둔 시각이 오전 9시경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 오늘도 변함 없이 날이 덥습니다. 관음포 앞바다를 둘러보고 영상관 내부로 들어온 아이들이 정수기 앞에 줄을 섭니다.
↑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영상관 내부 전시실 작은 탁자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 시간이 늦어서 이락사는 둘러보지 못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이락사(李落祠)는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곳에 세운 사당입니다. 이락사 입구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유언석. '바야흐로 싸움이 급박해지니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2011년도 새움풍물학교에서 남해로 갯벌체험을 왔을 당시의 사진입니다.
↑ 이락사 사당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8세손인 통제사 이항권이 세운 비가 있습니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처음 육지로 운구된 곳이 이곳이어서 후손들이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해방 후에는 남해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참배도와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웠습니다. 편액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성운해(大星隕海) '큰별이 바다로 떨어지다'는 뜻입니다.
↑ 이락사에서 10여 분을 걸어가면 '첨망대'라는 누각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관음포 앞바다가 잘 보입니다. 이락사와 첨망대 코스는 아이들에게 숙제로 남기고 차에 오릅니다.
↑ 이제 남해대교를 건너 육지로 들어섭니다.
↑ 점심을 먹기 위하여 들린 진주 맛집 진양호. 밀면 가격도 비쌀뿐더러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다 먹었습니다. 경주에서 먹은 밀면과 비교하면 맛은 그리 좋은 줄 모르겠다는 아이들의 식후 평가가 있었습니다. 만두는 맛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 진주성 북쪽 입구인 공북문에서 매표를 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북문은 1975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공북문을 지나 촉석루로 가는 길. 입구에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김시민은 당시 진주목사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 11월(음력 10월) 3,800여 명의 군사와 민간인으로 3만이 넘는 왜적을 상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전투로 왜군들은 호남지방으로 진출할 수가 없어 군량을 조달하는데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면서 전력이 크게 손실이 되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진주성 싸움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임진왜란 끝난 후 진주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병영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경상우도 지역의 생원시와 진사시 등 향시를 보는 과거장이 되었습니다.
↑ 이 둘은 틈만 나면 장난을 합니다. 차 안에서도 잠을 자지 않으면 둘을 투닥거립니다.
↑ 방향을 틀어서 촉석루로 향합니다.
↑남강 북쪽 언덕 절벽 위로 세워진 성벽. 이 성벽을 따라가면 촉석루에 이릅니다.
↑ 두 사진. 신기하게도 고개를 돌린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 촉석루에 도착하니 경상남도 지방무형문화재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누 아래에서는 방문객들에게 시원한 차와 떡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 차를 마시면서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습니다.
↑ 다식으로 떡도 예쁘게 빚었습니다.
↑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이층 누마루에 올라섰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더운 줄 모르고 구경을 했습니다.
↑ 마루바닥에 앉아 보면 왜 여름에 누마루를 만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바닥 아래가 비어 있어서 나무가 습기가 묻어 있지 않아 시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지금 포구락무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춤을 추면서 풍류안이라는 구멍으로 공을 집어넣는 놀이입니다. 공을 넣으면 꽃을 받고, 못 넣으면 벌칙으로 눈 주위에 먹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립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무희는 두 손에 꽃을 잡고 있고, 뒤에 서 있는 무희는 눈에 먹칠을 했습니다.
↑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도 각각입니다.
↑ 포구락무를 마치고 신나는 '밀양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함께 춤을 추자고 손으로 끌고 있습니다.
↑ 이 난리 가운데서도 가솔이는 잠이 오는가 봅니다.
↑ 공연을 마치고 촉석루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을 합니다. 촉석은 '뽀족한 돌'이라는 뜻입니다. 촉석루는 진주성이 병마절도영이었을 때 남장대(南將臺)였습니다. 성을 방어하는 남쪽 지휘소인데 실제로는 연회나 시회를 여는 장소 등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촉석루는 6.25때 소실된 것을 1960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일갑자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 촉석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힙니다. 그만큼 경치가 뛰어납니다. 누각 안에는 '영남제일형승'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습니다.
↑ 촉석루는 장원루라고도 불렸는데 그것은 이곳에서 경상우도의 인재들이 모여 과거시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 촉석루를 내려서서 의암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 성벽에 조그만 문을 만들어서 통과하게 하였습니다.
↑ 의암 앞에서 논개와 진주성싸움에 대하여 설명을 듣습니다.
↑ 1592년 11월에 진주성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들은 다음해 7월(음력 6월) 십만여 대군을 모아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진주성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최경창, 김천일 등이 결사 항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성안의 군사와 주민들은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 왜군들은 바로 위 촉석루에서 승전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논개가 왜장을 끌고 이곳 의암에서 남강으로 투신합니다.
↑ 촉석루 옆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는 논개의 영정. 논개가 기생이었는가 아니면 진주성 싸움 당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던 최경회 장군의 소실이었는가 하는 역사적 논쟁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 의기사 앞의 지수문. '물을 가리키다'라는 의미로 이때 물은 청사(靑史) 혹은 푸른 절개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의기사를 나와서 진주박물관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박물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견학을 대신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는 경주로 출발하는 것을 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이제 5박 6일의 국토순례 도보여행의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