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참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이 얼마나 어쭙잖고 가당찮은 말인가? 생이 이 세상을 보는 시간은 세상의 특성상 너무 밝은 빛의 산란으로 앞뒤가 잘 보이지 않는 시간이거나, 너무 어두워 앞뒤를 분간하기 힘든 불분명한 시간이 대부분이다.
우리에게 그렇지 않은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도래하는 때마다 생은 애석하게도 그런 잘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한 피곤함으로, 세상의 선명함이 나타나는 시간에는 그것을 볼 눈을 잃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핏빛 노을이 온 세상을 잠식하고도 남음이 있어, 세상의 모든 강물이 생의 투쟁에서 발현된 피비린내를 풍기는 오늘 생의 마지막 저녁시간이 찾아오고, 나는 그 제서야 죽어라 안으로만 굽혀지는 애꿎은 내 팔뚝에 달린 피 묻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는다.
어쨌든 사랑해야 한다고 앞뒤 근거 없이 주제넘게 말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겪는 생의 본질이 아니다. 생은 오로지 나 혹은 나 아닌 다른 것과 싸워서 이기거나 패배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유가무가만 있는 것이고, 무엇을 양보한다는 그것부터는 다 허위일 따름이다.
그것은 패배가 죽도록 싫어서 그것을 자기합리화하거나, 싸우기 싫어서 찾아낸 저 수만 가지 핑계의 말장난일 뿐, 싸우는 방법론에 비하면 그것은 최하위 싸움의 방법론 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패배하여 꽁무니를 보이며 도망가는 최후의 방법론보다도 훨씬 더 비겁한 일일 뿐이다.
왜 그런가? 어디서 결코 여물지 못하고 소멸될 바람 같은 말 듣고 현혹되지 말고, 제발 저 물리화학의 현상을 눈여겨 자세히 잘 보라. 사람뿐 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은 잉태 시점부터 수억을 처치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절대불변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왜냐고 묻지마라.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럴 뿐이다. 그러니 싸워서 이긴다는 그 일의 실상이 대상을 기필코 처치한다는 그 말과 하등의 다름없음에도, 우리는 그것에 가당치 않은 자격지심을 내세워 진실을 호도하고 하등의 무가치한 허위를 양산하여 그것을 비난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그런 생의, 적당하게 어둡고 적당하게 서늘하며 적당한 배고픔에 어디선가 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적당하게 슬픈 저녁이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이런 평화는 숱한 죽음을 깔고 앉은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제 나 먼저 죽은 자들이여. 오늘 생의 시간엔 어쨌든 샨티 샨티 또 샨티!
音 영화 트로이의 OST 중 ‘헥토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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