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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영성⌟ – 팀 켈러
*성경은 입을 떼자마자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창세기 저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일로 묘사한다 우주를 빚어내는 광대한 프로젝트를 일주일 동안 진행된 규칙적인 노동으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최초의 인류가 낙원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질서정연한 주님의 창조 사역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뿌리를 두는 이러한 노동관은 세상의 온갖 종교나 신앙 체계들과 명확히 구별된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고대 설화 가운데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대다수 문화와 설화들은 세계사와 인간사의 출발점을 우주적인 세력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투쟁의 결과로 그려 낸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만 하더라도 마르둑(Marduk) 신이 티아맛(Tiamat) 여신을 쓰러트리고 그 주검에서 세상을 빚어냈다고 풀이한다. 이런 부류의 설명에 따르자면 눈에 보이는 우주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세력들이 불안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창조는 갈등의 결과물이 아니다. 하나님에겐 적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와 그 권세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수중에 있다.' 그러므로 창조는 전투의 후유증이 아니라 장인의 계획에 가깝다. 하나님은 참호를 파는 전사가 아니라 명품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
그리스인들은 황금시대에서 시작되어 '인간의 시대'로 넘어오는 전이의 개념으로 창조를 설명한다. 이 시기에는 인류가 신들과 땅 위에서 화목하게 어울려 살았다. 언뜻 들으면 에덴동산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한가지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시인 헤시오도스(Hesiod)는 인간이든 신이든 황금시대 동안에는 일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최초의 낙원에서는 땅이 먹거리를 넘치도록 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천지 차이다.
창세기는 첫 장부터 멜라카 (mikh)란 표현을 써 가며 거듭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낸다. 멜라카(mikh)는 인간의 노동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의 어원이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하늘과 땅을 짓는 걸 포함한 말할 수 없이 거룩한 신의 행위를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건 정말 뜻밖이다.'
그처럼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셨다. 뒤늦게 추가된 필요악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가 아니라 창조주가 그리신 밑그림이었다. 주님은 순전한 기쁨을 얻도록 일을 지으셨다. 이쯤 되면 일보다 더 행복하고 축하해야 할 게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하나님은 일하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 그 일을 맡기기도 하신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주님은 인류를 향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다. 정복하라'는 말은 비록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개발되어야 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피조 세계에 아직 손이 닿지 않아 차츰 가꿔 가야 할 여지를 남기셔서 인류가 노동을 통해 그 빗장을 열어 가게 하신 것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주님은 사람을 데려다가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지만 우리 또한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은 실제로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시편 27편 1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세우는 사람들'을 통해 집을 지으신다(공급), 마르틴 루터가 지적하듯,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먹이신다는 말씀은 농부와 다른 일꾼들의 수고를 통해 인류에게 먹을거리를 베풀어 주신다는 뜻이다.‘
*창세기가 전해 주는 일은 낙원의 일부라는 진리는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다. 어느 성경학자는 그걸 이렇게 정리했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늘 일하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과 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보다 더 선명하게 다른 종교나 문화와 구별되는 차이점이 또 있을까? 일은 무위도식하는 황금시대가 지난 뒤에 역사에 끼어든 재앙이 아니다. 주님이 인생을 염두에 두고 마련하신 완벽한 설계의 일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독생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일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다.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일은 음식, 아름다움, 쉼, 우정, 기도, 섹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영혼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밥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내면적으로 심각한 상실감과 공허감에 시달린다. 건강 문제를 비롯해 여러 요인으로 일터에서 밀려난 이들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데 일이 얼마나 긴요한지 금방 알게 된다.
*사실, 일이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대단히 근본적인 요소여서 해를 입지 않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에 속한다. 실제로 성경은 하루 동안 일하고 엿새를 쉬라거나 일과 쉼이 정확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여가를 누리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나쁠리 없지만 자칫하면 도를 넘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양원이나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즘 어떠냐고 물어보면, 무슨 일이든 해서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게 가장 유감스럽다는 대답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스스로 너무 많이 쉬고 충분히 일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은 일을 하도록 설계된 터라 일거리를 잃으면 적잖이 불안해진다. 이런 자각은 '생존하기 위해 일한다는 통념에 더 깊고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 성경에 따르면, 생존을 위해서는 일해서 버는 돈만 필요한게 아니다. 하루하루 연명할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생을 살자면 일자체가 필수적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립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이렇게 썼다. “일을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이의 능력을 최대로 표현하는 게 곧 …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주님은 굳이 쉬지 않아도 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비우셨다(창 2:1-3). 인간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쉼, 그리고 쉬면서 하는 일들 자체가 생기를 불어넣는 선한 요소로 볼 수 있다. 삶에는 일만 필요한 게 아니다. 일이 없으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지만 일만이 삶의 유일한 의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설령 교회 사역일지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삶의 으뜸가는 토대는 주님과의 관계다.
주님과의 관계는 삶의 으뜸가는 토대이자 다른 모든 요소들(일, 우정, 가족, 여가, 행복)을 비롯해 값지게 여기고, 중독과 왜곡에 이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예방약이다.
20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제프 피퍼(Josef Pieper)는 '여가, 문화의 기반'(Leisure, the Basis of Culture)이란 유명한 논문을 썼다. 글쓴이는 여기서 여가란 그저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나 눈앞의 쓰임새를 떠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묵상하고 즐길 수 있는 정신적, 영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서구 문화에서 흔히 보듯, 일을 앞세우는 태도는 만사를 효용, 가치, 속도 등을 기준으로 인생의 가치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하고 평범한, 더 나아가 엄밀히 말해 유용하지는 않지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인생의 국면들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놀랍게도 무뚝뚝하기로 정평이 난 종교개혁가 장 칼뱅도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크리스천의 삶을 정리한 책에서 무엇이든 '쓸모'로만 평가하는 행위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하나님이 오로지 필요(영양)를 채우시려고 음식을 지으셨겠는가? 즐겁고 유쾌한 기분을 위해서는 아니겠는가? 옷을 주신 목적 또한 필요(보호)에 그치지 않고 단정함과 품위를 지키게 하시려는 게 아니겠는가? 풀과 나무, 과일들 역시 다양한 용도를 넘어 아름다운 생김새와 상쾌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꼭 필요한 쓰임새와 별개로 매력적인 구석들을 넣어 만물을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보든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만물들.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 지혜롭고 경이로운 만물들, 하나같이 주 하나님이 만드셨네.
일을 정기적으로 멈춘 뒤 예배하고 (여가, 문화의 기반에서 피퍼는 이를 중요한 활동으로 꼽았다) 세상을(노동의 열매들을 포함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 피퍼는 이렇게 적었다.
“여가는 찬양하는 심령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여가는 긍정을 먹고 산다. 단순히 활동을 멈추는 것과는다르다.. 오히려 연인들의 대화에 문득 끼어든 침묵과 같다. 일체감에서 비롯된 정적이 다. 성경에 적혀 있듯,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쉬실 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보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창 1:31).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여가 역시 찬양, 지지, 내면의 눈으로 창조의 실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시선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사안들에 관한 성경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손으로 하든, 머리로 하든 일이란 일은 죄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증표로 인식한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학자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는 내용을 다루는 창세기 1장에서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오로지 사람만이 일,곧 직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식물과 짐승들은 그저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따름인데 유독 인간은 명확하게 일을 부여받았다. 정복하고 지배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할 일을 구체적으로 받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고대 근동의 통치자들은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력 행사를 요구받는 자리에 자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형물을 세웠다. 지배자의 이런 이미지들은 직접 그 자리에 머물며 다스린다는 상징이었다. 창세기 1장 26절이 다스리라는 명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런 통치 행위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vice-regent)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주님이 창조 과정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 본성을 사용하여 창의적으로 문명을 세우고, 친히 지으신 만물을 보살피는 일들을 나눠 맡게 된 것이다. 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며 기대하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
일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고 인간이 주님을 대신해서 하는 행위이기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일 자체가 존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고귀하다. 창세기 1-2장에서 창조주가 하신 일은 흙으로 인간을 빚어내고, 신중하게 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정원을 만드는(창 2:8) '육체노동'이었다. 현대인로서는 인류의 사상사를 통틀어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회자이자 작가인 필립 젠센 (Phillip Jensen)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자-왕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정의롭고 고상한 정치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땅에 임하신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목수로 오셨다.
*캐서린 알스도의 친구 마이크(Mike)는 뉴욕시에서 경비원으로 일한다. 맨해튼의 커다란 조합주택에서 일하는 열다섯 명의 경비원 가운데 하나다. 담당하는 아파트 한 채만 하더라도 백 여 가족이 보금자리를 꾸리고 있다. 이제 갓 육십 줄에 들어선 마이크는 어린 시절 크로아티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식당 종업원 노릇부터 막노동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지금 일하는 빌딩의 경비원이 된 지는 20년 됐는데, 일을 대하는 태도에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다. 마이크에게 이 일은 직업 그 이상이다. 건물에 사는 이들을 진심으로 염려할 뿐만 아니라 짐을 실어 주고, 주차 공간을 찾고, 손님을 맞이하는 업무에 자부심을 느낀다. 나름대로 표준을 세워서 건물 로비와 앞쪽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관리한다.
주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민이 보일 때마다 얼른 길가로 달려가서 짐 내리는 걸 돕는 까닭을 물으면 "그게 내 일이니까요"라든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란 답이 돌아온다. 아파트 아이들의 이름을 죄다 기억하는 이유를 물으면 "여기 사는 친구들이니까요"라고 대꾸한다.
누군가 "구석구석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까닭이 뭡니까?"라고 질문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냥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떳떳하게 마주보고 싶어서요. 날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스스로 못 견딜 것 같아요." 마이크는 평생 자신이 하는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출근한다. 아울러 이 나라에 살며 거기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된 걸 늘 기쁘게 생각한다.
마이크가 섬기는 이들은 대부분 경비원에게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을 법한 전문 종사자들이나 기업인들이다. 경비원이 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며 직접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마이크의 자세를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내재된 존엄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이점과 가치를 최대한 끄집어내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인간은 일하도록 설계되었고 일을 통해 존엄하게 되며, 일은 창의성, 특히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이기도 하다.
창조주는 첫 인류를 동산에 두셨다. 히브리 학자 데렉 키드너는 그
곳에 온갖 즐거운 것들이 가득했지만, 그중에서 일하는 기쁨이 가장 두드려졌다고 말한다. 에덴이라는 지상낙원은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보살핌의 모델이다. 안전하게 지키시되 숨 막히게 통제하지 않는 양육 방식이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분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심어 주기 위해 어디를 가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고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심미적, 신체적, 영적 미각을 충족시킬 만한 양식이 무궁무진했을 뿐 아니라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질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순종해야 할 말씀을 주셨다(16-17절). 문화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개발하도록 정원을 돌보는 육체노동을 시키시는 한편 (15절),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작업에 참여시키셔서 정신적인 역량과 통찰력을 키우게 하셨다 (19절). 마지막으로 하와를 지으시고 짝으로 맺어 주셔서 인류가 성장해서 세상에 가득하게 될 길을 열어 두셨다(19-24절).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막중한 직무를 맡기시기 위해 그처럼 공을 들이신 것이다. 흔히 이 말씀을 가리켜 '문화 명령'이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첫째로,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즉 수를 늘이라고 명령하신다. 동식물에게는 단순히 "번성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반면,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할 명령(28절 전반)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사항까지 주셨다(28절 후반-29절). 다시 말해, 오로지 인간만이 번성을 의지적으로 완수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걸 일로 지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과정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인간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건 동식물이 세상에 가득해지는 것과는 의미가 생판 다르다. '출산'이 아니라 '문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개체수가 증가되길 원하신 게 아니라 세상에 인간 사회가 가득하길 기대하셨다. 창조주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수많은 주거지에 인간이 득실거리게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인류에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세워 가는 걸로 일을 삼게 하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더 나아가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이건 무슨 뜻일까? '정복'이라는 표현은 자칫 자연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어떤 식으로든 싸워 이겨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쉽다. 개중에는 이 구절이 자연 파괴의 면허를 내주었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다.' 본문의 명령은 타락, 그러니까 '썩어짐에 종살이'하기 (롬 8:17-27) 전, 열매와 더불어 가시덤불이 생기기(창 3:17-19) 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죄를 짓는 바람에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피조물 사이의 원시적인 조화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에는 폭력적인 의도가 눈곱만큼도 섞여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건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경작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정복하라는 분부는 명백히 온 천지와 거기에 속한 자원들을 사용하고 착취하고 폐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으로 번역된 단어는 의지를 진심으로 내비치는 강력한 표현으로 피조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준다. 태초에 물질계를 지으실 당시, 창조주는 이미 준비해 둔 기성품을 꺼내 놓으신 게 아니다. 세상은 온통 "혼돈하고 공허했다(창 1:2). 주님은 꾸준히 일하시면서 창세기 1장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상태를 바꿔 놓으셨다. 우선 세상에 뼈대를 세우셨다. 형태도 없고 구분되지도 않는 세계를 나누고 정교하게 다듬으셨다. 뭉뚱그려진 덩어리를 분리해서 특정한 개체들로 만드셨다. 예를 들어, 하늘과 바다를 떼어 놓으시고(창 1:7), 어둠과 밤을 구별하셨다(창 1:4).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하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한 가지 형태로 인류를 빚는 쪽이 훨씬 쉽고 편리하겠지만 주님은 서로 다르면서 보완적이며 완전히 평등한 두 가지 성으로 만드셨다. 아담과 하와라는 별개의 성을 가진 인간은 생물학적인 출산을 통해 자손을 낳게 되었다.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그분이 태초에 시작하신 일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서신을 읽는 독자들에게 일단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생활 방식, 곧 결혼 생활이나 일, 사회적인 입장 같은 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권면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여기서 바울은 두가지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용어를 동원해서 통상적인 일을 설명한다. 사도는 다른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백성들을
계속으로 '부르시며'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한편, 크리스천의 공동체를 세워 가게 하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주님이 나누어 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이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에서도 그 두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바울은 교회 사역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이른바 세속적인) 일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위임을 말하고 있다.
의미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크리스천들을 준비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는 것처럼 거룩한 백성들 모두에게 갖가지 달란트와 은사를 주셔서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목표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경학자 앤서니 티슬턴은 이 본문을 이렇게 풀이했다.
"부르심과 섬김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자율성'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던 세속적 모더니티와, 자기실현과 권력 관계를 앞세우던 대중적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바울서신의) 이 대목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타당성을 갖는다."
티슬턴의 이런 해석은 프롤로그에서 인용했던 로버트 벨라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벨라는 일에 담긴 '소명'이라든지 '부르심'의 개념을 회복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이나 권력욕이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억할 게 있다. 한쪽에서 명령하고 이편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 일을 해낼 때에 비로소 소명이나 부르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노동관이다.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불러서 과업을 맡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힘을 주므로 자아를 실현하고 권력을 얻을 속셈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일을 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직관에 어긋나는 게 있음을 감
지했는가? 실력을 갈고 닦아서 해당 분야의 일인자가 되고자 하는 동기를 지속적으로 불어넣어 주는 건 후자다. 제 잇속을 채우고 높아지는 데 초점을 맞추면 어쩔 수 없이 일은 뒷전이고 자신을 앞세우게 된다. 왕성한 의욕은 과욕으로 변하고, 강력한 추진력은 탈진으로 이어지며, 자족하는 마음가짐은 자기혐오의 감정이 된다. 그러나 일의 목적을 자신을 넘어선 무언가를 섬기고 높이는 데 둔다면 달란트와 포부, 직업적인 열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더 확고한 이유가 생기게 마련이며 세상적인 기준에서도 장기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까닭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도록 루터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의 소원을 무엇이든 다 들어주길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책임질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아들딸들에게 일을 시킨다. 직접하면 더 잘할 수 있지만 자식들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쪽을 택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해낼 수 있는 일을 맡겨서 평생에 긴요한 자질을 심어 주려는 뜻이다. 루터는 똑같은 이유에서 하나님도 거룩한 자녀들이 행하는 일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을 좇기 위해 우리가 하는(밭에서, 정원에서, 시내에서, 집에서, 전쟁터에서, 정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선가) 일은 하나같이 어린아이가 하는 것 같아서 밭에서, 집에서, 그밖에 어디서든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 친히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가면인 셈이어서 주님은 뒤에 숨은 채로 사실상 모든 일을 다 하신다."
시편 147편 14절 주석에서 루터는 질문을 계속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어깨를 마주대고 사는 이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시는가?" 답변의 맥락은 한결같다.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가운데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시민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선량한 이웃들을 통해서다.' 심지어 결혼한 이들의 성적인 관계까지도 루터는 같은 패턴으로 설명했다.
하나님은 번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자녀를 주실 수도 있었다. "주님은 남자와 여자 없이도 자녀를 갖게 하실 능력을 가지셨지만 그러길 원치 않으신다. 대신에 남녀가 연합하게 하셨다. 마치 인간의 공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가면을 쓰고 하신 일이다.
루터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참뜻을 인식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밭을 갈거나 땅을 파는 소소한 일거리조차도 하나님이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면'이다. 투표를 하거나, 공직을 맡거나, 아빠 엄마가 되는 것처럼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만한 사회적 역할이나 책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주님이 인류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수단이다. 소박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농장의 소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루터가 설파하다시피,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
*루터는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붙들고 씨름했다. 수도사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한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보상이 될 만한 행위(종교적 노력)를 해서 주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는 얘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납고 쓰라린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1장 16-17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당시 심경을 루터는 이렇게 전한다.
비로소 '하나님의 의'란 의인은 주님의 선물. 다시 말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란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거듭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갔음을 여기서 절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 저마다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일의 의미를 바라보는 시각을 포함해서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루터는 특히 두 가지 점에 주목했다. 우선,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결정적 요소라면 교회에서 목회하는 교직자들과 그밖의 일을 하는 이들 사이에 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데 터럭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노동보다 조금도 우월할 게 없다.
순전히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은 일에 관해 또 다른 통찰을 준다. 옛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속을 받으려 애썼던 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자존감과 자부심)을 찾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높은 보수와 지위를 보장하는 자리에 연연하며 비뚤어진 방식으로 그런 일들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일에 기대어 자신을 입증하고 정체성을 지키라는 압력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미 인정받고 안전해졌으므로 달리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단순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와 고상해 보이는 일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제 일은 종류와 상관없이 인류를 값없이 구하신 하나님과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 까닭이다.
그러기에 루터는 크리스천들에 관해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비록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의 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온갖 선한 것들을 넘치도록 가졌으니,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온전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즐거이 주님을 좇아 이웃에게 나를 주지 못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남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는 것들(구원, 자부심, 선한 양심, 평안 따위의)을 크리스천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면 그만이다. 즐거이 감당하는 희생이자 자유가 보장된 제한이다.
*일은 저마다 남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게 하며 … 다른 이들 또한 이편에 유용해지게 만드는 틀이다. 우리는 심고 (일을 통해) 하나님은 그걸 키워서 인류를 하나가 되게 하신다...
지금 느긋이 앉아 있는 의자를 생각해 보라. 혼자 힘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 한번 대답해 보라. 어떻게 목재를 얻겠는가? 숲에 가서 나무를 잘라올 참인가? 그러자면 먼저 필요한 연장들을 만들어야 한다. 자른 나무를 실어올 적당한 차량도 준비해야 한다. 통나무를 켤 제재소와 이리저리 운반할 길도 건설해야 한다. 한마디로 평생, 아니 죽었다 깨나도 의자 하나 만들지 못한다. 일주일에 40시간이 아니라 140시간씩 일한다손 치더라도 혼자 힘으로는 지금 누리고 사는 상품이나 서비스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조차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급여로 살 수 있는 게 그걸 버는 시간에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일은 특정한 작업에 쏟아부은 노력보다 월등히 큰 결과를 낳는다.
모두가 당장 일을 그만둔다고 상상해 보라.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문명화된 삶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찬장에서 음식이 사라지고 주유기에 기름이 떨어질 것이다. 순찰을 도는 경찰관의 모습을 거리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화재는 저절로 꺼질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통신과 대중교통이 끊어지고 각종 공공서비스도 먹통이 될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불가에 옹송그리고 둘러앉았다가 동굴에 들어가 잠을 청할 테고 짐승 가죽을 벗겨 옷을 삼을 것이다. 야생과 문명을 가르는 요소는 그저 일뿐이다.
*행복해지려면 일이 필요하다. 기조물의 본성이 그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게 하려고 일을 주셨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세계를 잠깐이나마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죄에 빠지면서 일 또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열매를 간절히 바라지만 성에 차도록 얻을 수 없으며 처절한 실패를 겪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이상주의와 냉소주의라는 두 극단에 치우치거나 심지어 수시로 양쪽을 오가기까지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야지!"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선 안 돼. 그저 먹고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을 들이지 말라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창세기 3장 18절은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는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말한다. 가시덤불과 먹을거리가 모두 예고된 셈이다. 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일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낳는다. 좌절과 성취를 두루 담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언뜻언뜻 드러내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천재성은 원래 노동의 지극히 통상적인 특징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 되찾을 것이다.
톨킨이 그려 낸 꿈과 열매에 얽힌 이야기, ‘니글의 이파리'는 그런 소망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니글은 마지막 순간까지 매달려도 결코 빚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나무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러기에 필생의 대작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워 눈물지으며 세상을 떠났다. 이 땅에선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니글이 하늘나라에 이르자 거기에 바로 그 나무가 서 있었다. 톨킨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저마다 일에 대해 품고 있는 간절하고 원대한 염원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미래에 온전히 실현되리라는 메시지를 저만의 방식으로 들려준다.
니글의 나무가 영광스러운 빛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던 것처럼, 사람들이 살리에리의 음악을 듣고 각자 지금 하는 일의 열매를 맛볼 것이다. 과거의 낙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미래의 천국에도 일이 존재할 게 틀림없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서 기쁨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라도 다른 이들의 삶에 유익을 끼치며 무한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건 물론이고 말할 수 없이 능숙한 솜씨로 그 작업을 해낼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친히 지으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소망과 깊은 위안을 찾고, 온몸을 던져 일하며 열매를 구할 때마다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이 땅의 현실에 무릎 꿇지 않을 힘을 얻는다. 아울러 이생에서 하는 일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노동의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또한 온전할 수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3)는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가!
*"철학자는 한 칸 한 칸 자신만의 둥지를 만들어 간다." 전도서는 시쳇말로 세 가지 '인생 프로젝트'에서 이야기를 풀어 간다. '해 아래서'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씨름인 셈이다. 첫 번째는 지식과 지혜를 통해 인생의 참뜻을 헤아려 보려는 탐색이다(전 1:12-18, 2:12-16). 두 번째는 즐거움을 기반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다(전 2:1-11).
철학자가 허무감을 몰아내기 위해 착수한 세 번째 프로젝트는 열심히 일해서 뚜렷한 성과를 올리려는 노력이었다(전 2:17-26). 지식과 즐거움이라는 카드가 수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구체적인 목표를 성취하고 부와 권력을 키우는 데 뜻을 두고 살아보기로 작심한다. 그러나 결국 일 자체로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 2:17). 어쩌다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일까?
누구나 일을 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한다. 스스로 이뤄낸 성과를 개인적으로 인정받으려 하거나, 제 분야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거나,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부지런히 애써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업적을 냈다는 의식만큼 가슴 벅찬 감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도서의 철학자는 온갖 어려운 고비들을 넘어 소망하던 일을 남김없이 이뤄 낸 몇 안 되는 인물이 된다 할지라도, 영원히 값어치가 변하지 않는 열매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에 모두 헛수고라고 단언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전 2:18-20).
고되게 일해서 대단한 결실을 얻었다손 치더라도 시점이 조금 빠르고 늦을 뿐, 언젠가는 퇴색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뒤를 이어 자리를 차지한 이들, 또는 명분과 조직을 물려받은 후임자들은 선배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오래도록 인류와 함께할 발명이나 혁신을 이뤄내는 역사적 인물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단히 희귀하며 그렇게 유명한 이들마저도 영위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전 2:16)한다.
해 아래 있는 존재와 업적은, 심지어 문명 그 자체까지도 끝내 잊히게 마련이며 그 영향력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다(전 1:3-11).
한마디로 말해, 일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어도 해 아래서' 사는 삶이란 전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죄에 물든 마음에서 비롯된 욕망들은 현실 세계에 긴장을 불러오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한다.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
바벨탑은 자신을 넘어 창조주 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한, 집단적인(사회나 단체, 또는 운동의) 노력으로 무얼 만들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그분의 울타리 밖에 세워진 사회는 실망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대상을 우상으로 삼게 마련이다. 가족과 자신에서부터 국가적인 자부심과 부를 쌓아 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최종선, 또는 최고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데렉 키드너의 표현을 빌자면, "반쯤 짓다가 무너져 버린 도시, 바벨은 인간의 그런 속성을 보여 주는 더할 나위없이 적확한 기념비다.
시날 평지에 모였던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을 건축하려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류가 벌이는 이런 기묘한 프로젝트는 도무지 사라질 기미가 없으며, 해마다 누군가 이름을 날리고 한동안 '세계 최고'의 지위를 유지할 만큼 치솟는 건물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이는 경쟁을 추구하는 오만한 마음가짐이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연한 증거다. 물론, 혁신을 자극하고 효율을 높이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파괴적인 양상 또한 엄연하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은 본래 경쟁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본질적으로 경쟁을 교만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만 가지고는 기뻐하지 않으며, 옆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비로소 행복해한다. 흔히 부유하고 똑똑하고 잘생기면 콧대가 높아진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남보다 더 풍요롭고 더 명석하며 더 훤칠해 보이는 데서 뿌듯함을 느낄 따름이다.”
*가진 솜씨를 발휘하며 인류를 섬기기 위해 멋진 신제품들(더 큰 집. 더 빠른 컴퓨터, 더 싼 항공권, 더 화려한 호텔)을 만들 수도 있고, 자신이나 스스로 몸담은 조직을 끌어올려 남들을 내려다볼 만큼 높은 지위에 올라갈 욕심으로 그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루이스는 강조한다. 후자를 택한다면 윤리적인 지름길을 택하고 방해가 되는 상대는 누구든 억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남을 유익하게 하겠다는 순수한 동기만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한없이 다정하고 윤리적으로 훌륭한 이들도 이기적인 욕구나 두려움, 또는 영예를 얻고자 하는 갈구 앞에 쉬 무너진다. 인간과 세상이 망가지고 깨어졌음을 인정한다면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꾸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한쪽을 콕 찍어서 이웃을 섬길 뜻을 품고 일하는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다른 한편을 가리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제 한 몸만 생각하는 '나쁜 인간'으로 단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너 나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기적인 DNA와 경쟁을 추구하는 교만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르드개는 소명이라는 개념에 호소하는 셈이다. 앞에서 소개한 라틴아메리카 출신 목회자도 매한가지다. "수중에 넣은 영향력과 자격증, 돈을 풀어 남들을 섬기지 않는다면, 왕궁은 곧 감옥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름을 얻었습니다. 받은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늘 더 많은 걸 갈구하는 탓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가진걸 활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왕궁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정체성을 찾고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을 통제할 수단을 지녔다는 사실에서 안정감을 얻고 일정한 세계까지 미치는 힘을 가졌다는 데서 존재 의미를 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왕궁에서 확보한 자리를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던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대궐이 여러분을 소유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궁전에 속한 요소를 버리고도 새로이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힌트는 본문에 기록된 모르드개의 답변에 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얻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처럼 왕후의 자리를 얻게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알겠느냐?"로 푸는 게 정확한 번역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음을 강조한다. 열심히 가꾸거나 노력해서 미모를 이룩한 게 아니며 스스로 기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 받았을 따름이다.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지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현재 직장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위치가 은혜의 소산이라는 얘길 들으면 펄쩍 뛰면서 아무개 학교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고, 학생 때는 물론이고 신입사원 시절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으며, 동기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올렸는지 따위를 침이 마르도록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은 달란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제힘으로 열지 않은 기회의 문들을 통과했다. 열쇠를 쓴 게 아니라 그저 활짝 열린 틈으로 지나간게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건 하나같이 은혜의 소산이며, 우리 각자에게는 그렇게 수중에 들어온 힘을 마치 제 능력을 사용하듯 활용하여 세상을 섬길 자유가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답이 바로 이 이야기에 들어 있다. 에스더는 중재자가 되어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 틈에 끼어 저주의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왕후는 죽음을 각오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백성들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할 권력의 보좌 앞에 나가 중재할 수 있었으며, 왕의 총애를 입은 덕에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하나가 되어 중재함으로써 뭇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가 있지 않은가?
영원한 궁전에서 한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에 둘러싸여 사셨지만 그 모두를 버려둔 채 자원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빌립보서 2장은 '아버지와 동등하시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워 사람과 같이 되셨으며 인간의 저주를 대신 지셨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으로 대가를 치르신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한다. 그리스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죽어야 할 때가 자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지금은 우주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먼저 누리신 은총을 덧입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재자시다.
에스더를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화살표로본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표본이 되는 스승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신 구세주로 인식한다면 저마다 자신이 주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깊이 묵상하면 정체성이 달라진다. 스스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참다운 가치를 지닌 인물임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일도 훨씬 덜 이기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영향력, 이력서, 거기서 얻는 이득을 포함해서 일하는 삶과 관련된 온갖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모험을 할 수도 있고, 소모해 버릴 수도 있고, 통째로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주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막연한 계시에 기대어 왕후는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아는 게 얼마나 많은가! 에스더로서는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값을 치르시고 인류에게 한없이 큰 은총을 베푸시는 일을 자신이 했던 것보다 무한정 큰 규모로 행하실 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주님의 거룩한 은혜와 그분 앞에서 갖는 우리의 가치, 그리고 장래에 벌어질 놀라운 사건들에 대해 에스더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정보를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궁궐을 버리면서까지 행하신 일들을 제대로 헤아린다면, 그 궁전에서 제각기 차지하는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시작할 것이다. 에스더서 주석을 쓴 케어런 잡스(KarenJones)는 에스더를 '왕후'로 부른 사례가 모두 14차례 있는데, 그 가운데 13번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
에스더가 큰 사람이 된 건 스스로 이름을 떨치려 애쓴 결과가 아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을 섬길 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건 무슨 뜻인가? 십계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피조물 가운데 무언가를 가져다가 '절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서 사랑하고 섬기며 참 하나님보다 더 큰 의미를 둔다면 결국 대체물이나 모조품을 예배하는 셈이 된다. 실질적으로 우상을 떠받드는 건 마음이므로, 모양을 본떠서 만든다는 말을 꼭 물리적인 차원에 한정해서 해석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영적이고 심리적인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지배권과 안전, 의미와 만족, 아름다움 따위를 제공해 줄 다른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고 신앙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좋은 것으로 '궁극적이고 영원한 대상'을 삼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지침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할 만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그 누구보다 이 계명의 영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루터는 피조물 가운데 무언가가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바라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신앙이 없는 이들도 저마다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고 믿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능력 같은 것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프랑스 철학자 루크 페리 (Luc Ferry) 역시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고 생을 마주하며 두려움 없이 죽음에 직면할 방도를 찾는다"고 했다. 인류는 너나없이 인생을 잘 꾸려 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섞어 줄 무언가를 갈구한다. 앞의 예화에서 소개했던 데이비드는 콕 찍어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재정적인 안정과 성공을 어린 시절의 고단한 기억에서 '구원해 줄' 길(돈)로 보고 추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십계명의 첫 조항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정확히 들어맞는다.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인생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에게 그 자리를 내주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찾는 대상, 곧 신이 있다. 주님은 그 밖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
루터는 신구약 성경의 우상숭배 개념이 얼마나 조화롭게 맞물려 있는지 꿰뚫고 있었다. 구약성경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우상숭배 문제를 다룬다. 반면에 신약성경, 그중에서도 특히 바울서신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진리(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를 설파하는 데 집중한다. 루터는 우상을 세우는 마음가짐과 제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깨달았다. 루터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명령한다.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므로 너희는 온전히 나만을 확신하고, 의지하며,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과 은혜, 선의를 항상 신뢰하지 않으며 주님의 은총을 다른 무언가나 자신에게서 찾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그러이 대하시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또는 건방지게도 다만 제가 하는 일을 이용해, 또는 그로 인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기대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이며 겉으로 주님을 경배 해도 속으로는 자신으로 거짓 신을 삼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의로움을 입증하려 한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인들은 윤리적 덕성이나 예배 행위, 사역 따위에서 '사랑과 은혜, 선의'를 구하는 반면,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손에 넣거나 큰 기쁨을 누리는 데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기본적으로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짓 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아테네에 들어간 바울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행 17:16) 보았다. 여기서 사도는 사실상 물리적인 대상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우상숭배의 성경적인 정의에 비추어 세상을 보면 온 도시와 모든 이들의 마음에 우상들이 가득함을 알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어디에나 우상이 판치고 있다.
우상은 침투력뿐 아니라 파괴력 또한 막강하다. 십계명이 우상숭배 금지 규정에서 시작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첫 번째 계명만 잘 지키면 나머지 계명들을 어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업무상 거래를 하면서 조금만 속임수를 쓰면 한 점 숨기는 것 없이 투명하게 상대할 때보다 훨씬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치자 그래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 거짓말을 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애매한 말로 가린다면, 그건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마주한 '이웃'의 유익을 앞세우기보다 스스로 성공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죄의 밑바닥에는 우상숭배라는 더 교묘하고 근원적인 악이 깔려 있는 법이다. 올바르지 않은 일 (몰인정한 행동, 부정직한 말, 깨트리 버린 약속,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은 어김없이 마음 속 깊은 데 자리 잡은 확신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결정적으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상숭배는 마음을 지배하는 힘이 있으므로 행동 또한 통제한다. 스물두 살 청년 앤드류(Andrew)는 직장을 나와 빈털터리로 지낸다. 창고에서 상자를 나르는 일을 계속하다가는 평생 그 모양 그 꼴로(기껏해야 푼돈이나 벌고, 남들이 다 피하는 일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놈'이란 평판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여자 친구까지 놓칠지 모르는) 살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고 싶었다. 한두 해 된 꿈이 아니었다. 야구를 잘해서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삶이 술술 잘 풀려 나갈 것 같았다. 이처럼 우상을 발판으로 소망을 품으면 늘 자신에게 속삭일 수밖에 없다. "이러저러한 것만 손에 넣으면 만사에 자리가 잡힐 거야. 그때쯤에는 정말 값진 인생이란 생각이 들겠지."
무언가가 '구원'이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야 한다. 여기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걸 빼앗길 것만 같은 환경이 되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겁이 나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낚아채 가기라도 하면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분노와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의식과 감성, 선택과 욕구, 목표와 기쁨 따위를 하나같이 유전적인 소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경향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인간은 몸과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된다는 옛 관념은 사라지고 정신적, 정서적, 영적 신경증을 가진 몸만 남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환원주의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의사와 병원에 쏟아지는 경제적 법적 압력 또한 의료인들에게 전인치유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조심하는 풍조를 부채질하는 것 같다.
창조와 타락이 인류에 미친 파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의료계의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적인 시각을 축소하려는 흐름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크리스천들의 인식은 풍부하면서도 다면적이다. 창조주께서는 몸을 지으셨고 장차 부활시키실 것이다. 육신의 중요성이 거기에 있다. 친히 몸을 속량하신(롬 8:23) 하나님은 최고의 의사다. 그런점만 놓고 보자면 '의료'는 지극히 고귀한 소명이다. 하지만 주님은 육체만 보살피시지 않는다. 영혼도 지으시고 구속하셨다. 따라서 크리스천의료인은 전인적인 인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앙은 환자의 육신을 보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애와 독창성을 발휘해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게 곧 일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개중에는 복음음 주로 일터에서 보여 주어야 할 무언가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크리스천 음악가는 기독교 음악을 연주하고, 크리스천 작가는 회심에 관한 글을 쓰고, 크리스천 기업인들은 예수를 믿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 용품이나 관련 서비스 상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 분야에서 그런 일을 해내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누가 봐도 기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경우에만 복음적인 세계관이 작동한다고 믿는 건 심각한 오류다. 오히려 복음을 눈에 쓰고 세상을 내다볼 안경쯤으로 여기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고유한 세계관에 충실하기만 하면 돈과 적나라한 자기과시, 그 어느 쪽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지극히 다채로운 스토리들을 들려주게 된다. 크리스천 경영인들은 이윤을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인식하며 무엇이 됐든 공동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다. 크리스천 작가는 굳이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주님 외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행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 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다.
성경은 회사를 운영하고, 하수도를 청소하고, 환자를 보살피는 일에 관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지침을 주는 핸드북은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 긴요한 문화, 정치, 경제, 윤리를 비롯해 광범위한 이슈들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세계관은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시대의 문화에 토대를 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현대인이 하는 일(특히 서방사회의)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사상, 즉 과학기술의 진전,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민주적인 기풍,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를 경제자유와 시장발전의 기초로 보는 사고방식 등은 전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불러온 문화적인 변화에 힘입은 바 크다. 역사가 존 서머빌(John Sommerville)은 용서와 섬김이 복수나 제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식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
전지전능하고 인격적이며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경
적인 시각을 가진 사회에서만 현대과학이 싹을 틔울 수 있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이며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한다. 흔히 알고 있는 이상으로 복음적인 세계관이 가진 독특한 틀과 능력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ㅇ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ㅇ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ㅇ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얼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ㅇ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ㅇ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다시 말해서, 문화에 도전해야 할 대목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것 같은가?
o 개인적으로 이 스토리들은 일의 형식과 내용, 양면에 걸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떻게 하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답게 구별된 모습으로 일할 수 있는가?
ㅇ 지금 하고 있는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회가 있는가?
크리스천이 일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할 때, 세계관이란 영역은 실행에 옮기는 씨름이 가장 치열하고 또한 힘겨운 세계다.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너나없이 문화 속에 살며 복음이 설명하는 이치와 첨예하게 충돌하는 강력한 거대 서사가 주도하는 분야에서 일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몹시 심오한 차원에서 작용하므로 얼마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난생처음 외국에서 살게 된 어느 미국 여성은 평생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제도와 관행이 실제로는 지극히 미국적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음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노라고 고백한다. 이질적인 문화 속에 생활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달리 평가할 새로운 시각을 갖추게 되었고 결국 이러저러한 마음가짐을 고치고 다른 태도를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변해갔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건은 깊이에서 차이가 날 뿐,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다. 문화와 세계관, 직업 분야 따위를 보는 시각이 예전과는 딴판이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복음을 통해 만물을 신선한 시점으로 볼 수 있게 되겠지만, 이 새로운 정보들을 파악하고 세상을 살며 소명을 추구하는 방식과 통합하는 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궁극적인 학습 체험에는 끝이 없다. 천사들까지도 복음이 일으키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싶어 한다지 않는가(변전 1:10-12)!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다. 주님의 뜻과 비전에 일치하는, 다시말해서 성경의 스토리라인과 맞아떨어지는 문화를 창조할 때, 인간의 일은 그분의 사역을 반영한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에도 비중을 둔다. 주님은 세상을 창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양육하신다. 스스로 지으신 것들을 하나하나 먹이시고 지키신다. 그렇다면 섭리가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르는가? 앞에서, 특히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서 보았듯이,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동료 인간들의 노동을 통해 광범위하게 다가온다.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다. 그것이 바로 인간 세상을 유지해 가는 주님의 방식이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연장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세상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한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후자는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농부나 요리사는 음식에 얽힌 이웃의 필요를 채운다. 정비공은 자동차와 관련해 기술적인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이웃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섭리, 또는 예비하심이라는 일의 또 다른 측면은 어째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구덩이를 매우는 크리스천들만의 독특한 방법을 식별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며(창 1:26-28) 주님이 누구에게나 일하는 데 필요한 달란트와 재주를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이들이 큰일, 더 나아가 크리스천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내는 걸 놀라워할 이유가 없다.
사실, 세계관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자세는 얼마쯤 위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블루컬러 노동자가 하는 일보다 화이트컬러에 특혜를 주게 될 수 있다는 점만 해도 그렇다. 작가나 경영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일터에 적용하는 걸 신중하게 고려해 볼 기회가 있다. 그러나 조립 라인의 생산직원,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 또는 정비사의 경우처럼 세계관이라는게 하루하루 처리하는 일상적인 작업에 특별한 영향을 줄 수 없는 근로자들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내면의 동기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하며, 이는 자질과 정신, 정직함에 명확한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천 근로자들이 주님을 모르는 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비행기 엔진을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측면에서만 일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살필 줄 모른다면, 은연중에 성경이 가르치는 일의 개념과 원리가 노동자 계층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서 노동의 가치에 낮은 비중을 두는 데서 생기는 더 심각한 위험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이 이뤄 낸 선한 일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온전하고 균형 잡힌 성경의 가르침은 오로지 크리스천이 한 일이나 전문직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며, 오히려 인간의 모든(특히 탁월하게 해낸) 노동에 하나같이 높은 가치를 둔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달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선망하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스스로 하는 일을 인정하고 기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능숙하게 해내는 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가 예수님을 믿든 말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는 성경의 노동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이 가진 차별성에 집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와 파벌주의를 제어해 주는 까닭이다.
*인간이 하는 그야말로 모든 일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다면,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진입한 셈이으로 이 대목에서 그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해 두는 게 좋겠다. 크리스천들은 구원의 은혜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음에 틀림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이들과 공동으로 가진 게 있을까?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은총(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과 협력하고 배울 수 있는 토대가 되는)을 베푸시기 위해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문화적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하셨는가?
성경의 답변은 "예스!"다. 시편 19편은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무언의 메시지'와 성경을 통해 크리스천들에게 주신 계시, 그리고 그걸 신뢰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구별하고 있다. 로마서 1장과 2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든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특히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적혀 있다고 했다. 모두가 정직, 정의, 사랑, 황금률 따위가 미리 장착된 양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울러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이 존재하며, 자신은 창조주의 피조물이고, 인류는 반드시 그분을 섬겨야 하며,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 그리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라고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광대한 자연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님이 지으신 그 자연을 빚어내고 채워 가는 문화를 통해서도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이사야서 26장 14 의정을 곰곰이 곱씹어 보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 지면을 평평히 하였으면 …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자 가르치셨음이며...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놀랍지 않은가! 이사야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가르쳐 솜씨 좋은 농부가 되거나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게 하신다고 말한다. 어느 주석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었다. "씨를 뿌리고, 논밭을 관리하고, 곡물을 돌려짓는 따위의 기술을 인간이 발견한 줄 알지만, 실제로는 창조주께서 창조의 책장을 열어 진리를 보여 주셨을 따름이다."
경작은 문화 형성의 전형이다. 따라서 학문이 발전하고,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혁신적으로 개선되고, 과학기술이나 경영과 행정이 진보하는 건 그저 하나님이 '창조의 책장을 열어 진리를 보여 주신 결과일 뿐이다. 물론, 인류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농부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사실이자 현실이라고 이사야는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일반계시'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뭇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일반 은총'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견을 내놓는 성경의 다른 본문들도 살펴보자.
*일반 은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크리스천에게 세상은 지극히 혼란스러운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동질감을 느끼는 이들이 허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덕적으로 야비했던(최소한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서만이라도) 모차르트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재능이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던 반면, 윤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인 자신의 재주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 살리에리로서는 몹시 쓰라리고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를 깨닫지 못했다는 점 말고도 일반 은총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하나님은 지혜와 달란트, 아름다움과 재주를 은혜로, 다시 말해서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베푸신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환하게 밝히며 잘 보존하기 위해 나눠 주시는 선사품인 셈이다. 원칙대로라면 죄를 범한 인류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금보다 훨씬 끔찍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자연과 문화가 현재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모습이어야 마땅하다. 형편이 그토록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일반은총이라는 선물 덕분이다.
일반 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 모차르트는 예수를 믿었든 아니든,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문화를 두루 연구해야 한다. 거룩한 형상을 좇아 지음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어디서든 주님의 진리와 지혜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은총의 개념이 정리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왕왕 윤리적으로든 지혜로든 크리스천을 앞지르는 연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확하게 파악하고 난 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죄의 교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라 할지라도 참다운 세계관이 빚어내도록 도록 되어 있는 수준만큼 선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일반 은총의 교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릇된 세계관을 따라가면 당연히 이르러야 할 정도까지는 엉망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크리스천의 스토리에서 악당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죄의 실존, 그 자체다. 복음은 그이들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들의 내면에도 죄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세상을 섬기는 일에 힘을 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남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는 크리스천들에게서는 겸손한 협력과 진중한 도전이 두루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일반 은총의 개념을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인다면 신앙은 다르지만 주님이 크게 쓰시는 이들과 손을 맞잡고 한없이 유익한 일들을 이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바로 세워서 남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기독교 신앙이 일을 썩 훌륭하게 해낼 힘과 지침을 준다는 사실을 이웃과 동료들에게 드러내고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접근 방식의 다른 쪽 극단에는 더 일반적이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해체하기가 더 까다로운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교회 일을 할 때만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주일 하루와 평일 저녁에 그것도 신앙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시간으로 된다. 주중에 어떤 핵심 가치에 따라 시간을 보내고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볼 꿈조차 꾸지 않는다. 세상에 나가서 일하며 생활하는 동안은 자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과학기술, 개인의 자유,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를 반영하는 여러 특성 따위를 포함해 현대 문화의 배경을 이루는 갖가지 가치 기준과 우상등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원론의 첫 번째 유형이 세상과 나눠 가진 공통점의 중요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은 복음적인 세계관(신앙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판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 짜는)이 가진 차이점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다.
이원론의 대척점에 신앙과 일의 통합이 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도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신앙이 이끌어갈 정점에 섰다고 볼만큼 선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릇된 신념이 끌어갈 가장 낮은 바닥에 이르렀을 만큼 악한 게 아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의 일을 하든지 양쪽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문화와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쪽짜리 진리를 알아보고 우상을 배격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삶의 모든 국면에서 정의와 지혜, 진리와 아름다움의 흔적들을 분별하고 만끽하는 비결을 익힐 힘이 생긴다. 문화에 참여하는 길과 관련된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받아들인 크리스천이라면, 동료와 이웃들이 하는 일의 이면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누구보다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 잠언은 지혜를 배우기에 맞춤한 자리다. 분노 시기, 교만, 좌절감을 처리하고 아름다움과 돈, 권력의 유혹에 맞서며, 자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씨름하고, 좋은 결정을 내리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따위의 문제들과 관련해 장인의 말씀들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자원이 된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무얼 가르치는가? 구약이 지혜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비해 신약은 잠언서의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새롭고도 놀라운 원천을 보여 준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는 차원을 넘어 그분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다른 이들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정답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님이 보내 주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다.
신약성경은 성령님을 '지혜의 영'(엡 1:17)이며 '힘'(엡 1:19)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골 1:9)으로 채워 주시길 빈다고 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가르치는 에베소서 5장의 유명한 본문에서도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 5:15-16)라고 권면했다. 지혜로워지려면 순간순간을 전략적으로 비할 데 없이 근사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통찰은 크리스천들을 강하게 하셔서 주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골 1:11)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딤후 1:7) 이신 성령님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떻게 임하셔서 지혜를 베푸시는가? 조용히 앉하서 음성이 들리길 기다려야 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회심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의 까다로운 규정들과 문화적인 관습을 따르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초대교회 리더들이 논란에 휩쓸렸다. 조직의 정책 문제를 둘러싼 씨름이었다. 본문은 해법을 찾을 때 까지 치열하게 논쟁하고 논의했음을 보여 준다. 이윽고 결론을 낸 제자들은 답안을 매력적인 표현에 담아 각 교회에 전달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행 15:28).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고민하고 검토한 끝에, 성령님께 맡기겠다는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는지 살펴보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면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3-14)라고 하셨다. 성령님은 옆구리를 살짝 찌른다든지 마음에 무슨 힌트 같은 걸 줘서 투자가치가 높은 주식을 짚어 주시는 따위의 마법 같은 방식으로 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생생하고 선명하게 부각시켜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내적 질서와 자비, 겸손, 담대함, 만족, 용기를 심어 주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요소들이 지혜를 키워서 직업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갈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이끌어 간다.
*일꾼, 또는 직원의 마음가짐
첫째로, 직원들은 온 마음을 다해 "성실한 마음으로 (5절) 일해야 한다. 징계를 피할 만큼만 움직이거나, 상사들이 볼 때만 열심을 내거나, 무성의하고 산만하게 일하면 안 된다. 크리스천은 전인적으로 일에 몰입해야 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서 주어진 과제를 훌륭하게 완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런가?
크리스천 근로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건 노동의 동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하듯이"(5절) 일한다. 아울러 예수님 안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상급을 받게 되므로(8절) 고용주가 돌려주는 대가의 크고 작음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 다른 편지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무슨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게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라(323-24) 헬라이 문법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상'은 장차 다가온 나라에서 누릴 더없이 큰 행복을 암시한다.
알다시피, 크리스천들은 일을 즐길 자유를 얻었다. 주님을 섬기듯 일하기 시작한다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선에서 일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보수와 칭찬을 받는 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일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주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다면 여기에 담긴 몇 가지 실질적인 속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우선, 한편으로는 업신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존경과 두려움을 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움츠러들거나 굽실거리지 않는 겸허한 자신감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본문에 나타난 '두려움'이란 단어는 '주님을 향한 외경심'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나님이 무서워 웅크린다는 뜻도 아니다. 시편 130편 4절 같은 본문들은 거룩한 자비와 용서를 더 경험할수록 주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더 커진다고 가르친다. 진정한 두려움이란 경외감과 경이로움, 그리고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슬프게 할까 깊이 염려하는 짙은 사랑과 존경 가운데 살아가는 걸 말한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존경하며 직접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를 집에 모신다고 상상해 보라. 소문만 듣고도 머리가 조아려지는 터라 그 앞에서는 더더구나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며, 그분의 요청과 소원을 모두 채워 드리고 싶어서 안달한 것이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게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라(323-24) 헬라이 문법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상'은 장차 다가온 나라에서 누릴 더없이 큰 행복을 암시한다. 일터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기억하는 마음가짐도 그러해야 한다. 마음과 능력을 온전히 쏟아서 최대한 능숙하게 처리하며 부담이 아니라 특권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상숭배의 핵심을 꿰뚫는 멋진 설명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더
일의 동기가 없으면 나머지 여섯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에너지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보다 앞에 서고 싶은 시기,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교만, 쾌락을 얻으려는 탐욕이나 탐심 때문에 남달리 열심히 일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해태(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는 가장 교활한 우상숭배다. 삶의 한가운데다 냉소적인 자아를 심어 놓는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을하든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비할 데 없이 끔찍한 죄와 악이 주 동력원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반지의 제왕」3부작의 메인 플롯을 끌고 가는 장치는 절대반지의 효능이다. 반지를 끼면 권력욕이 증폭되고 이어서 악한 의지가 폭발한다. 호빗이 반지를 끼는 장면마다 작가는 누군가의 입을 빌어 효능을 설명한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댁은 유일한 실재가 됩니다. 유령 같은 세상에서 작고, 검고, 단단한 돌멩이가 되는 거죠. 나머지는 다 헛것이고 그림자나 다름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문화는 절대반지처럼 작동한다. 특히, 제잇속만 차리는 인간의 죄스러운 본성을 분출시킨다. 날이면 날마다 무수히 많은 경로를 통해 옳으니 그르니 말할 자격이 있는 존재는 없다고, 곧 선택권을 가진 자아보다 더 높은 표준이나 권위는 없다고 속삭인다. 저마다 가진 의식과 욕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복종해야 할 대상도 없고, 개인의 행복보다 앞세워야 할 가치 같은 것도 없고, 자유를 희생해서 지켜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일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 보라), 로마서 12장은 이 진리를 실제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
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등 12:1)라는 말로 서두를 연다. 여기에 쓰인 표현은 성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들이다.
사도는 제물을 들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기르는 가축들 가운데 튼튼하고 흠이 없는 놈을 골라서 제물로 불태우는 번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을 드러내는 의식이다. "제가 가진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주님의 소유입니다"라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열정의 표현인 셈이다.
사실, '산 제물'이란 어구는 특별한 의도가 깃든 역설이다. 제물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죽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는 메시지를 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섬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리듬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풀었을 따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정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얼 가리키는 것일까? 로마서 12장 전체를 할애해서 소상히 설명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산 제물의 실상을 정확하게 짚어 주는 구절이 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본문에는 두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다. 첫째로, '열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래 긴급'과 '성실'이 결합된 의미다. 초점과 훈련이 없는 상태에서 급박한 마음만 남으면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긴박감이 없이 성실하기만 하면 진전이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서두르되 질서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열심을 품고"라는 말씀은 원문에 비춰 볼 때 "펄펄 끓는 심령으로”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따라서 감성과 훈련, 긴박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하는 일 속에서 산 제물이 되는 임무를 수행해 나가라는 뜻이다. 열정을 품고 살라는 주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참다운 열정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바울은 "그러므로 …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라는 말로 운을 뗀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무얼 가리키든, 거기에 힘입기만 하면 산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정말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 대해서는 죽고, 일 이면의 다른 일을 좇는 습관을 떨쳐 버리며, 그 열정을 하나님께 바치는 인격체가 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비결은 영원토록 산 제물이 되시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의 고난과 희생을 깨달아 알고 그분의 열정을 심령에 아로새기면 지금 몰두하는 일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여섯 가지 죄의 변형 판인지 여부를 금방 가릴 수 있다.
예수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리스도의 열정과 희생은 어디서 왔는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하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요 17:19)라고 기도하셨다. 거룩하게'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올림픽경기에 출전할 달리기 선수로 구별한다는 의미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준비한다는 게 무얼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선수들은 삶의 초점을 온통 그 한 가지 목표에 맞춘다. 하루하루 일분일초, 행동 하나하나를 그 목표를 이루는 데 투입한다. 순간순간이 고통스럽지만 군말 없이 견딘다. 열정과 헌신도가 적어도 그쯤은 돼야 금메달을 딸 수 있다.
예수님과 그분의 열정이 그러했다. 주님은 구원을 목표로 스스로 구별되셨다.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진 걸 다 잃고 온갖 어려움을 다 견디셨다. 그리스도의 열정은 스스로가 아니라 인류와 하늘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이만한 본보기가 어디 또 있겠는가! 저마다 자신을 향해 예수님이 품으셨던 열정의 폭과 깊이를 마음으로 온전히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상 사는 동안 감당하도록 맡기신 일을 멋지게 해내고자 하는 열정이 생긴다. 독생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행하셨던 일을 기억한다면 교만과 시기가 뿌리내릴 겨를이 없어진다.
더 부유하고, 더 멋지고, 더 강하고, 더 편안한 무언가에서 가치를 찾을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낳은 해태를 토대로 그릇된 열정을 품고 일하는 대신,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참다운 열정에 이끌려 움직이게 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가정에 입양되었으므로 이미 확인을 받은 셈이다. 주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므로 굳이 자신을 입증할 이유가 없다. 목숨을 내놓는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든지 활기차게 살 길이 열렸다.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고요한 내적 충만에 반응해서 지지 않고 일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 마음이 힘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우이라 하니라 (마 11:28-30)
그리스도를 만난 뒤, 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또렷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이 구절을 꼼꼼히 살피라. 뭇 민족과 백성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그런데 주님의 치료법이 도로 "짐(30절)이거나, 한 술 더 떠서 '멍에'(29절)라니! 짐 나르는 짐승한테 씌우는 멍에나 마구는 노예와 고단한 노역의 상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뼈에 사무치는 수고를 해결하는 해법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나의 멍에라는 말로 짐의 성격을 한정하시면서 아주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어째서 그럴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너희 마음이 쉼을 얻"(29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녹초가 되도록 일을 시키지 않으며 최상의 성과를 내지 않아도 구박하지 않는 상사는 그리스도뿐이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사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참뜻은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라가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쉼을 누리는 이들을 가리킨다. 저마다 제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잊지 말라. 창세기 2장 1-3절에 따르면, 창조주는 세상을 지으시는 일을 다 마치셨으므로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실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를 통해 끝났으므로 크리스천들은 마음 편히 안식할 수 있다.
독생자 예수님이 이면에 깔린 또 다른 일을 해내셨으므로 주님을 쫓는 이들에게 남은 건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따라 섬기기만 하면 된다.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일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은 급여를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심산으로 일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 안에서 '쉼 이면의 또 다른 쉼'을 누린다. 영혼의 단잠을 자는 셈이다.
심령이 숙면을 이루지 못하면 무얼 해도 만족이 없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저녁이 돼도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미리 마련하신 일을 자녀들에게 맡기시며 구상하셨던 만족을 누릴 수도 없다.
*그러던 콜트레인의 내면에서 참다운 자아를 드러내는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밤, 빼어난 솜씨로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는 32분짜리 찬양 <지고의 사랑>(A Love Supreme)을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오면서 그가 속삭였다.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 이는 누가복음 2장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직접 본 시몬이 했던 말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다. 콜트레인은 일 자체를 위해 일하면서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일에 몰두하는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거룩한 능력을 받았으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만끽했다.' 이후부터는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음악을 위해, 청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 트랙을 질주하거나 세계를 주름잡는 자리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당한 요구를 일삼는 상사와 은사를 활용할 방도가 없는 지루한 일들에 시달린다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하나님이 정확히 알고 계시며 맡겨 주신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게 주님을 섬기는 과정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그런 뜻에서 일을 섬기라고 조언했다. 톨킨이 니글의 나뭇잎'에서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 그리고 주님이 보장해 주시는 미래 세계에 소망을 둔다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쉬운 멍에를 멘다면, 자유로운 심령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크고 작음을 떠나 하나님이 일을 통해 주시는 성공과 성취를 있는 그대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로 부르신 이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가슴 깊은 곳에 담긴 영원한 소망(세상에서 일하며 품는 열망을 포함해서)은 그분의 나라가 이뤄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온전히 채워진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열정을 품고 일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만족스럽게, 유감없이 달릴 수 있다. 그러고 나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눈크 디미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