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아, 너도 모르는 너의 성씨를 가르쳐 주마.
장노도가 아비 성씨도 안 가르쳐 주었느냐?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는 모든 나라의 대선은 말할 수 없이 치열하다. 이들 나라에서 각 정당은 상대 후보의 흠잡기에 여념이 없으며, 상대방에 대한 모략도 서슴치 않는다. 미국에서도 출마를 선언한 모든 후보에 대해 철저한 뒷조사가 이뤄지는데 심지어 대학 재학 중 리포트를 베낀 것이 밝혀져 후보를 사퇴하는 일도 있다.
1963년 10월에 치러진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좌익 경력을 상세히 폭로하였다. 그 자료는 한국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많았고, 미국이 1948년에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 사건조사에서 주역이었으므로 미국에서 제공한 것 같다는 추측을 낳았다(1949년 6월까지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윤보선 후보는 선거에서 이기지는 못했으나 사상논쟁으로 선거는 박빙이 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도 김대중 측에서 이회창 후보에 대해 철저한 뒷조사를 했고 이 때문에 승리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공화당에서 김대중의 신상조사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1971년 초 공화당 정권은 비밀리에 김대중에 대한 신상조사를 했다. 이 조사를 한 사람은 육군헌병장교 출신의 하영조(河永祚) 씨였다. 수사의 베테랑이었던 그는 1961년 7월 9일 발표된「장도영 일파 44명 반혁명 사건」의 일원으로 법정에 선 경력이 있다.
이 ‘혁명재판’에 회부된 이는 다음과 같았다.
장도영(前최고회의 의장, 군사영어학교 출신, 중장), 송찬호(최고회의 위원, 육사 5기, 준장), 박치옥(최고회의 위원 육사 5기, 대령), 문재준(최고회의 위원, 육사 5기, 대령), 김제민(최고회의 위원, 육사 9기, 중령), 이희영(내각수반 비서실보좌관, 육사 5기, 대령), 안용학(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 육사 5기, 대령), 노창점(舊황실 재산관리 사무총국장, 육사 5기, 대령), 이성훈(내각수반비서실 보좌관, 육사 5기, 대령), 최재명(감찰위원장, 육사 5기, 대령), 방자명(제 15 CID 대장, 육사 8기, 중령), 김영우(제 3 CID 대장, 육사 8기, 중령), 오기수(제 15 CID 정보과장, 대위), 장인항(제 15 CID 배속, 준위), 하영조(예비역 헌병대위), 김경조(제 1 공수 전투단 소대장, 중위), 김석률(제 7헌병 중대장, 대위)
단기간의 복역 후 사면된 하영조는 공화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이때는 공화당 중앙위원이었다. 하영조는 2명을 보좌역으로 채용하였다. 그들은 자유당 시절 치안국 특정과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김대중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김의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었다는 이백래(李白來), 해병대 상사 출신이며 김대중의 사촌이 된다는 윤일만(尹一萬)이었다.
이들은 목포와 신안군 일대를 샅샅이 누볐다. 배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펜과 녹음기와 카메라를 메고 40여 일간 힘들게 자료를 모았다. 육지에 돌아와서는 김대중이 사업을 한 부산을 거쳐 강원도 인제까지 원정하여 사진을 찍고 증언을 녹음하고 진술조서를 꾸미고 증거서류를 수집했다.
이들이 조사한 김대중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뻐리섬에서 성장한 張鹵島는 17세의 어린 처녀의
몸으로 같은 섬에 사는 총각 諸葛成祚라는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됐다. 남편을 잃은 신부를 그를 시숙인
諸葛成福이 돌봐주고 있었으나 과부가 된 장 여사는 얼마 후 여아를
분만했다(이 여아 즉 김대중의 누이는 장성하여 목포에서 이발관을 하는
김 모에게 시집을 가서 잘 살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린 젖먹이까지 가진 과부 장 여사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생계를
위해 뻐리섬에서 같은 신안군 하의면 너리섬으로 이사를 갔다. 너리섬에서
시골 주막집을 차렸다. 주막집을 하고 보니 뭇 사람을 상대하게 되었고,
젊은 과부는 홀로 살기가 어려웠다. 그곳에서 농악을 하는 尹昌彦이라는
사람을 알게되었고 끝내는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윤창언이라는
사람과 동거하면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을 낳을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張都産이 조산을 했다. 김대중은 김대중이 아니라 윤창언의 아들로
尹x萬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그의 사촌에 尹一萬이란 동생이 있었다
(이 사람은 하영조가 채용한 사람).
김대중의 일생도 기구한 운명이었으나 그의 어머니 장 여사도 팔자가
기구했다. 또 남편 윤창언을 잃었다. 남편 윤창언을 여윈 장 여사는
金云式이란 사람에게 또 시집을 갔다. 김운식에게는 김순례라는 부인이
있었고 梅月, 大本, 安禮, 用禮라는 자식도 있었다. 장 여사가 김운식의
집으로 尹x萬을 데리고 들어가니 尹x萬의 나이가 큰 아들 大本보다는 적었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김대중(金大仲)이라 했다. 그후 정치인이 되자 관상가
金鶴에게 이름풀이를 해보았더니 사람들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평해서
人변을 없애고 中자로만 쓰게 되었다.
이후 김대중은 목포 북교국민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등에 몸을 담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통선업을 하다가 자유당 때인 1954년 5월 20일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었고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선거구 재선거에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다시 낙선하였으며, 4․19이후 7․29 총선거에 민의원에 입후보하여 또 낙선했으나, 다음해인 1961년 5월 13일 인제지구 재선거에 또 다시 입후보하여 당선의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3일 후의 5․16 군사혁명으로 국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국회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그 동안 義父 김운식의 호적에는 입적을 못하고 있다가 인제
지구가 6․25 휴전으로 이남에 편입되는 바람에 여기에 착안하여 월남동포 행세를 하고 월남가족으로 假호적을 만들었는데 1962년 新民法 시행으로 그제야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이 되어 김해 김씨가 되고 처음으로 호적을 갖게 되었다.
(이한두 저,『유신 공화국의 몰락』, 매산 출판사, 1986 P42~44)
『유신 공화국의 몰락』은 공화당 중앙위원이었으며 김종필과 가까웠던 이한두 씨가 쓴 책으로 내용은 유신체제에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김대중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이한두 씨는 70년대 후반부터는 윤보선의 개인비서로 정치활동을 했다). 이 책에는 위의 내용이외에도 김대중에게 불리한 서술이 많다.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말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는 여러 설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한두의『유신 공화국의 몰락』에 따르면 공화당 지도부는 하영조의 조사보고서를 가지고 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로 찬반논쟁을 벌인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공개를 찬성하는 측은 한국민이 가문을 중히 여기는 비교적 혈통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민족이고 보니 지저분한 가계에 대해서 멸시하는 경향이 있고 더군다나 성씨를 바꾸었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신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일로서, 이것은 김대중에게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개를 반대하는 측은 자칫 잘못하면 국민에게 대통령 후보자를 중상모략 한다는 인상을 주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이 나라에서 과거 시행한 선거의 예를 보아 적자 출신과 서자 출신이 맞서면 서자 출신이 이겼고 또 서자 출신 국민이 은연중 단결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입후보자를 동정하여 뭉치는 경향이 많으니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운식이 1974년 2월 25일 사망했을 때(호적에는 4월 25일 사망으로 되어 있음), 김대중은 연금해제 중인데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1973년 8월 납치 사건 이후 가택연금된 김대중은 1973년 12월 12일 박정희씨에게 연금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1974년 5월 23일부터 12월 17일까지 외신기자를 제외한 국내인사의 김대중 자택 출입은 금지되었다). 이미 2년 전 김운식의 장남인 김대본이 숨진 이상 호적상 2남인 김대중이 빈소에서 상주로서 문상객을 맞아야 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문의 기본예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관계 인물들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이 호적들이 단기 연호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해방 후에 작성된 것이다.
호주 : 金大仲/ 부 金云式 모 張鹵島/ 출생 단기 4258년 12월 3일/
본적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 번지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 호주 張文淑(편집자주 :장지숙의 오기) 장녀
장노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庶子 출생. 父신고 단기
4257년 7월 7일 접수 입적
출생 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 정정의 신청을 하지
아니 함으로 단기 4276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 1월 16일‘을 ‘단기 4258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 4월 20일 광주지방밥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단기 4276년 7월 10일 그의 출생 연월일 ‘단기 4257년
1월 16일’을 ‘단기 4258년 12월 3일’로 정정함…
단기 4287년 4월 20일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원의 허가 재판에
인하여 호적정정 신청 동월 21일 접수명 ‘大中’을 ‘大仲’으로 정정함…
(김대중 호적 초본)
다시 말하면 1924년(단기 4257) 1월 16일 출생한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1924년 7월 7일 호적에 올려졌으나 1943년(단기 4276)에 출생 연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1954년(단기 4287) 이름을 ‘大中’에서 ‘大仲’으로 고쳤다. 훗날 다시 ‘大中’으로 개명한다.
車蓉秀와 혼인 신고 단기 4278년 4월 9일 접수… 단기 4293년
5월 27일 처 차용수 사망으로 인하여 혼인 해소.
단기 4293년(1960) 6월 5일 부 김운식, 모 장노도의 혼인으로 인하여
嫡出子로 됨
(김대중 호적 초본)
김운식의 본처 김순례는 1894년생으로 66세 때인 1960년 6월 1일 김운식과 ‘협의 이혼’한 것으로 자신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순례는 이혼 후에도 주소만 후광리 257번지로 옮겨 놓았을 뿐 김운식과 함께 살았으며 사망한 후에는 김운식 무덤 옆에 묻혔었다(1972년 5월 사망한 장노도는 경기도 파주군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호적대로 한다면 김운식은 67세에 이혼하고, 이혼한지 4일 후에 67세의 장노도와 재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운식과 김순례의 ‘협의 이혼’ 및 김운식과 장노도의 ‘혼인 신고’는 김대중을 적출자로 만들기 위한 요식행위이며 서류상에서만 발생한 일이라 하겠다.
김대중은 장기간 김운식의 첩으로 있던 모친 장노도가 67살의 나이로 1960년 김운식과 혼인 신고를 함으로써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던 때 비로소 庶子 신분에서 벗어나 嫡子로 인정되었다.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 번지에서 출생. 서기 1911년 3월 10일
제갈 성조와 혼인 신고 除籍. 서기 1925년 12월 8일 호주 張之淑
입적 신고, 서기 1924년 10월 10일 전 호주 사망으로 호주 상속.
서기 1960년 6월 5일 金云式과 혼인 신고 除籍.
(장노도 호적 초본)
장노도는 18세 때인 1911년 결혼한 첫 남편 제갈성조와는 사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1923년까지 12년 동안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며 호적 이외의 공식 기록은 없다. 앞의 김대중 호적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1924년 1월 16일 김대중을 낳아 이 해 7월 7일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시켰으며, 자신은 이듬해인 1925년 12월 8일 아버지 장지숙에게 입적함으로써 호적상 신분을 정리한 것이 된다.
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이런 자료가 있다.
출생과 성장 金大中의 생모 長鹵島여인(71년5월9일사망)은 1911년 諸葛成祚와 결혼했다가 사별, 1920년에 尹昌彦의 셋째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후 본남편 諸葛成祚의 친형인 시숙 諸葛成福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 全南新安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金云式의 첩으로 들어갔다.
1924년 11월 16일 全南新安군 荷衣島에서 이같은 복잡한 계보속에서 태어난 金大中은 金云式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木浦상업을 졸업한후 어업을 시작했고 그후 해운업에 종사했다.
복잡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金도 극히 반항적이고 교활한 성품이 길러졌고 심지어 의부 金云式을 부친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1960년에는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金云式과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長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金云式의 차남으로 조작해 江原도 麟蹄군 北면 元通리로 분가, 전적했었다.
(경향신문 1980년 9월 11일자에서)
이 기사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신문사측에 제공한 자료에 기반한 것 같다. 전두환 측이 중앙정보부 등 각 정보기관의 인물 자료를 보유하기는 했으나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
김대중은 자신의 가족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 카톨릭 잡지인 월간지 ‘司牧’ 1990년 11월 호에서 누이동생 얘기를 했다.
당신 생애에서 양심에 가장 거리낀 일을 한 것은? 언제, 무엇을?
“내 누이동생이 1959년에 죽었는데, 누이동생은 이화여대 다니다가 중도
퇴학하고 오랫동안 심장판막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그 당시 나는 야당을
하면서 선거에 몇 번 실패해서 가산이 탕진되어 누이동생의 치료를 충분히
해 주지 못했다. 그보다도 좀더 누이동생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보살펴 주었
어야 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했다. 어떨 때는 귀찮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
는데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 누이동생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정치적 격변과 극적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한국은 외국언론에는 좋은 뉴스원이다. 1979년 박 정권과 김영삼의 결전이 전개될 때부터 미국과 일본 언론은 한국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10․26 이후 한국에 대한 취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 정황은 매일 일본신문을 장식했다.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는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현장을 누볐는데, 그는 김대중의 생애를 샅샅이 취재해 김대중 전기를 펴냈다. 시바다 미노루는 야마사끼 하지메(山崎一)기자, 통역을 맡은 김영희(金英熙) 씨와 더불어 2일 동안 하의도에 머물며 김대중의 출생과 성장 등에 대해 취재했다. 이들은 70대의 村老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에서 김대중 출생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 민주화의 영웅 김대중 씨의 출생지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로
되어 있는데, 原籍은 하의면 대리 232로 다르다. 생모는 1911년 3월, 제갈성조
(諸葛成祚)라는 사람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1920년 12월 병사하자 남편의 친형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인 諸葛成福과 동거했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인가
1921년(양설이 있다) 尹昌彦이라는 사람의 세 번째 처(첩)으로 入籍했다.
그런데 1927년 윤창언과도 사별했다. 남편복이 없는 어머니였다. 그후 최초의
남편의 친형, 제갈성복의 원조로 다방을 경영하는 중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김대중이다. 그러므로 김대중 씨가 윤창언의 아이인지 제갈성복의 아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생년월일의 양설이 1년 남짓 차이나는 것도 그간의 복잡한
사정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후 金云式이라는 사람과 동거했다. 김운식에게는 본처인
金順禮가 있었기 때문에, 김 씨의 어머니는 여기에서도 첩이었다. 김대중 씨는
그 김운식의 서자로서 입적했다. 김대중 씨가 김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
부터라고 생각된다.
김대중 씨는 實父를 몰랐으며, 형제의 맛을 모른다. 생모인 張鹵島가 1920년
(21년의 양설이 있다), 하의도에서 두 번째 첩이 된 남편 윤창언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大義, 大賢이라는 두 명의 사내아이와 貞賢이라는 계집아이다.
지금은 모두 50세 전후가 돼 있어 김대중 씨와 그다지 나이 차이는 없다. 그러나
義父가 사망한 1927년은 김대중 씨가 태어나 2,3세 때이므로 물론 배다른 형제를
알 리가 없다.
김대중 씨가 태어난 1924년(25년 설이 있다), 어머니는 김운식의 첩이 되는데,
김운식에게는 4명의 아이가 있었다. 梅月, 大本, 安禮, 用禮 등 네 명으로 지금
모두 50대에서 60대가 돼 있어 김대중 씨와 별로 나이 차는 없다.
(시바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 1982)
이 내용의 진위 확인은 어려울 것이다.
1998년에는 김대중 명예훼손죄로 재판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한길소식」 편집인이었던 孫昌植씨도 재판을 받았다. 1998년 7월 14일 손창식씨는 김대중의 출생과 관련된 진술서를 제출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이다.
피고인이 金大中 대통령의 姓氏 眞否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부터 정가에 설왕설래하던 풍문 때문이 아닙니다. 1980년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 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와 그가 쓴「김대중의 좌절」이란 책과 1980년 5월 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꼈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金大中씨의 열혈 지지자였던 피고인은 울분과 충정의 일념에서, 그런 음해들에 대해 반박 자료를 만들기 위해 金大中씨 출생에 대해 깊이 探査해왔습니다.
그런데 探査가 계속될수록 金大中씨측이「정치적 모함」이라 일관해온 주장이 한낱 강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金大中씨 호적에 드러난 것만 보아도, 張鹵島씨가 金대통령을 庶子로 출생신고하여, 1924년 7월 7일에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중략).
이 같은 의문들 속에서 피고는 1990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8년간, 金大中씨 출생지 하의도를 13회,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을 10회(1회 평균 3박4일) 방문하여 金大中씨를 아는 사람 28명을 만나 대화, 녹음, 촬영 등 자료수집을 해왔습니다(중략).
재판부의 객관적인 조사나 규명작업이 진행된다면 그 동안 피고인이 수집해 둔 자료를 제공하고 기꺼이 고증에 협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 제출한 金大中씨의 호적 사본과 관련자들의 호적 사본 등은 증거보존해 원본과 대조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8년 8월 17일, 손창식씨는 광주 지방법원 목포 지원에 있는 김대중의 호적 原簿, 전남 신안군 하의면 하의초등학교에 있는 김대중의 학적부, 金云式의 호적 원부, 諸葛成祚의 호적 원부, 諸葛成福의 호적 원부 등에 대해 증거보존 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이를 8월 25일 기각하고 변론을 종결했다.
증거보존 신청이 기각된 그 다음날인 8월 26일, 손창식씨는 재판부에 변론재개 신청을 하고 김대중의 호적등본 변조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증거보존 신청한 서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종필과 전두환을 증인 신청했다.
김종필은「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낀 1980년 5월 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 초헌관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金大中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인 신청은 기각되었고 서울지법 형사지부는 1998년 11월 26일 손창식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손창식씨는 항고하여 2심에서 광주지법 목포지원 호적계에 보관중인 金云式의 호적원부와 김대중의 외조부 張之淑의 호적 원부, 그리고 諸葛永凡의 호적원부와 除籍 원부의「認證등본 송부촉탁」을 신청했다. 호적원부와 제적원부에는 본인은 물론, 자식들의 출생․결혼․사망 등 변동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인증등본」이란 법원에 보관중인 김대중 관련 호적등본이 관청에서 인증하는 절차로 발급되었음을 말한다. 재판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9년 4월 19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항소심 재판부에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을 보내「호적 예규 제475조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통보했다.
손창식씨는 여러 호적 문서 외에 ‘김대중이 김해김씨가 아니다’라고 증언한 주민 28명의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는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손창식씨가 다시 요구한 김종필, 전두환에 대한 증인 신청도 기각했다.
손창식씨는 1999년 6월 22일 재판부에 제출한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김대통령의 측근이 현역 국회의원을 세 차례나 피고의 집에 보내, 피고가 가지고 있는 김대통령과 관련된 일체의 호적 원본과 28명의 녹음 테이프를 돌려주고, 한길 소식지 발행인 咸允植 씨를 별도 형사 고발하면 피고의 사건을 취하해 주고 생활과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헌법에 검찰이 항소까지 한 사건을 취하할 수 있습니까. 피고가 변호사도 없이 이 어려운 재판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헌법체제와 독립된 사법부, 현명하신 재판부의 명철한 심판을 믿기에 회유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는 1999년 7월 13일, 1심 판결을 인정했다.
이런 말들이 맞는지 그른지 판별하려면 DNA 검사가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1995년 미테랑 대통령 사후 프랑스에서는 친자 확인을 위해 프랑스 법원이 무덤을 열라는 판결을 내려 확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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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부추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