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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료 스크랩 바울 사도의 연보론 ─ 고린도후서 8장 1~15절을 중심으로 ─
조아유 추천 0 조회 125 10.07.02 16: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울 사도의 연보론 ─ 고린도후서 8장 1~15절을 중심으로 ─  
 바울 사도의 연보론 ─ 고린도후서 8장 1~15절을 중심으로 ─

 김은수


Ⅰ. 들어가는 글

현재 교회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그 내용은 교회가 헌금을 강조하여 봉사보다는 교회 자체에 사용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1) 때문이다. 그래서 헌금에 대한 도전과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고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성경을 통하여 교회의 헌금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확인하고자 한다.
현금(現今)의 주일연보는 교회의 중요한 재원(財源)이며 성서적 기초가 분명한 헌금이지만 다른 헌금의 역할(役割)과는 달리 점점 그 역할과 의미가 축소(縮小)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생명의 속전’에서 유래한 연보의 정신은 사라지고 예배 순서 중의 하나로써 필요한 의식이라는 형식적인 태도로 처리되고 있어(마 21:12),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 글은 고린도후서 8장 1∼15절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의 연보론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서 주일연보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Ⅱ. 고린도교회와 고린도후서
1.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고린도후서의 집필목적

1) 고린도교회의 외부적 상황

고린도는 아가야의 중심지였으며, 고린도 지협에 위치한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다. 또한 고린도 만의 동편 에게 해 쪽에는 겐그레아(Cenchrea)란 항구가 있고, 서편에는 레케움(Lechaeum)이란 무역항이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고린도는 두 개의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서 지리적인 특성과 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점을 통하여 고린도는 상당한 부유함을 누렸으나 로마의 침략 후에는 매우 비관적2)이 되었다. 그렇지만 로마의 침공으로 무너진 옛 고린도가 다시 새롭게 세워졌으며 여기에 로마인과 유대인 등이 이주(移住)하여 왔다.3) 그리고 이러한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곧바로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린도는 종교적으로 본래 다신교(多神敎)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여신숭배 중심의 종교가 지배종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로마의 만신사상과 유대의 유일신 사상이 함께 가세하여 혼합 주의적인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로마의 고린도 권력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했기 때문에 종교에 관여하지 않았다.
고린도는 아프로디테(Aphrodite)라는 여신 숭배의 중심지로 성적 타락이 극심했다. 그 신전에는 1천 명의 여사제가 있어서 매춘 행위를 종교라는 미명 하에 행하였다. 그래서 ‘고린도교인과 같이 생활하다’(Korinthiazesthai)라는 말은 타락과 방탕의 태도를 의미하게 되었다.4) 또한 고린도의 문화는 헬라적이었다. 이러한 고린도에 신전이 들어섰기에 고린도는 인근지역의 종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5) 그러면서도 인구의 유입과 무역의 발달로 여러 가지 철학이 들어옴으로 고린도는 새 이주자들의 사고(思考)와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고린도교회의 내부적 정황

고린도는 모든 사랑과 믿음과 말과 지식이 풍성한 교회였다(고후 8:7). 이는 고린도가 초대교회 중에서도 은사와 사랑이 가장 풍성한 건강한 교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린도는 이적이 가장 크게 일어난 초대교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긍정적인 면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와 일치하지 않은 교회로서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음행과 탐람과 우상숭배와 술 취함과 토색이 만연(고전 5:1∼6:10)한 교회6)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고린도교회는 내분이 있었고 여러 파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교회에는 거짓 사도가 공공연히 활동하였다. 지도자들은 게바와 바울과 아볼로 등 여러 파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보였고 거짓 사도로 인하여 자칫하면 교회의 분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소지를 가진 불안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초대교회로서 은사가 충만한 교회는 좋은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에 은사가 충만한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준비되어 있었고 또한 복음을 많이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고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정을 인도했다.7) 고린도전후서에도 부정적인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교인들이 수용적(受容的)이니까 충고가 가능한 교회라는 것이다. 고린도전후서는 바울에게 있어서 다른 서신들과 달리 무엇이든 상담하고 나눌 수 있는 ‘결혼 편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하여 ‘연보’를 가르칠 수 있었다(고후 8, 9장). 또한 고린도교회에는 바울과 가까울 뿐 아니라 물질을 후원 할 수 있는 조력자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는 헌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헌금에 대해서 다른 어떤 서신보다 고린도후서에 많이 기록한 것은 그만큼 고린도교회가 바울 사도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있었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전해 준 대로 잘 행하였다고 칭찬(고전 11:2)을 받은 건강한 교회였다.
3) 고린도후서의 집필 목적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과 자세, 그리고 사도권에 대한 주장과 연보론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후서에는 그의 개인적 변명이 많고 때로는 바울의 격정과 개인적 고백도 많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입장과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고린도후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고린도후서의 집필 목적은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사도 바울의 입장 등 외향적으로 드러나는 사역적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불리하고 어려운 입장 속에서도 드러난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내적인 면을 곰곰이 따져본다면, 바울이 왜 고린도후서를 집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행 18:23∼19:20)에서 에베소와 고린도를 중심으로 목회에 치중한 사역을 한다.8) 이는 바울이 회당을 중심으로 제1차와 2차 선교여행을 한 것과는 달리 제3차 전도여행은 목회에 치중한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는 목회라는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목회는 성도를 양육하고9)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돈독하게10) 하며 주가 직접 해야 할 일을 제자들이 위임(委任)을 받아 목양(牧羊)을 하는 것11)이다.
오직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교인을 상업주의적 물질관과 영지주의와 신비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거짓 사도의 대적을 물리쳐 영적인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것에 대해서 신학적인 조명12)과 근거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린도후서는 상황적 기반 위에서 상황극복 이상의 교회를 세우며 성도의 신앙을 고취하고자 하는 사도의 노력이 담겨 있다.
특히 바울의 연보론이 다뤄지는 8∼9장의 목적은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예루살렘의 심한 기근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의 교회들이 모교회(母敎會)를 도와야 하는 교회론적인 접근을 한다. 둘째,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의 신임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린도교인들에게 연보를 호소한다. 셋째,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우고자 사도로서 연보에 대해서 기독론적으로 접근하고 가르친다. 이 가운데 본 글은 세 번째 집필 목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Ⅲ. 바울의 연보론

1. 구약성경적 배경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바울이 본문에서 구약성경를 인용함으로써 ‘연보론’이 구약성경적 배경을 가지게 한다. 즉, ‘만나 이야기’가 구약성서의 배경을 가지고 ‘연보론’에 대입됨으로 ‘연보론’이 구약성경의 ‘생명의 속전’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본래 만나는 출애굽 후의 광야생활로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며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두 달 반 되는 때부터 처음으로 주어졌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이었다. 모양은 갓씨같고도 희며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출 16:31, 민 11:8).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은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다(민 11:8).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진치고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된 때, 그 내리는 것이 그쳤다(수 5:10∼12).
그러면 왜 바울이 만나 이야기13)를 인용하였는가? 그것은 만나 이야기의 의미가 신약 성경 안에서 연보의 의미로 전환되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를 균등하게 취하는 것처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연보가 균등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만나가 ‘연보’를 설명하는 데 쓰였는데, 이는 바울의 ‘연보’가 구약 성경적으로는 생명의 속전과 성전세와 동일한 개념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연결의 배경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첫째, 만나와 연보(생명의 속전)는 ‘보호’와 ‘생명을 지킴’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핍박과 위협을 받던 중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균등하게 풍성함을 누리던 만나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온역과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반 세겔14)을 헌금하도록 한 것은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만나 이야기는 바울의 연보론이 구약 성경적 배경을 갖게 한다. 즉 만나의 배경인 ‘광야’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 ‘세상’을, ‘이스라엘’은 ‘교회’를, 이스라엘을 위한 ‘만나’는 교회에 쓰이는 ‘연보’로 의미를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광야의 위협과 핍박 속에 있는 이스라엘처럼 세상 속에서 핍박과 위협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15)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광야교회에서 ‘만나’는 주권의식과 함께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양식이었고 누구에게든지 균등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예루살렘 모교회를 위한 연보론을 펼치는 데 있어서 균등함을 설명하는 이유로서 만나 이야기를 대입한 것이다.
셋째, 만나와 연보는 은혜에 기초한다. ‘만나’는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인 것처럼 ‘연보’도 ‘은혜’가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져서 ‘생명’과 ‘부요’를 얻었기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넷째, 만나와 연보는 공통적으로 ‘참여의식’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누구나 만나에 참여할 수 있었듯이 성도는 누구나 ‘은혜에 참여’(4절)할 수 있다. 다섯째, 만나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균형과 보충인 것처럼 연보는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하여 나눔이 필요하다. 만나가 모아두지 않아도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언제든지 보장되어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바울의 연보론에서 성도가 ‘부요’를 가진 것은 ‘나눔’을 실현하는 근간이 된다.

2. 구원론적 특성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1절에서 마게도냐교회에게 준 ‘은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9절)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가난의 압제자인 ‘마귀’를 이긴 공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요일 3:8)이며 성도에게 믿음으로 준 ‘은혜’다. 이 은혜에 대해서 김기동은 “은혜는 선물이란 말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영원한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신 것을 말한다”16)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독론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질병치료와 가난극복과 같은 현실에서의 구원도 포함한다. 이러한 연보의 구원론적 특성 때문에 바울은 ‘은혜’라는 말을 썼다. 여기에 대해서 불트만(Bultmann)은 “관대함은 큰 것이다. 정확하게 그러한 것은 헌신자가 경험하는 은혜다”17)라고 말한다. 이는 연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체험하게 됨을 말한다.
바울은 성도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에 있으며, 이러한 구원에 감사하는 것이 연보의 동기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극한 가난에 처하여 있었던 마게도냐교회에게 ‘주신 은혜’는 그리스도의 ‘가난해짐’으로 우리의 가난을 담당하고 또 그 해결 방안을 준 것임을 바울은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축한다. 이에 대해 김기동은 “은혜는 선물”18)이라고 한다. 그는 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는 선물”19)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 )이다. 이러한 사랑의 모본(模本)을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은혜’로써 ‘나누는 사랑’을 요청한다.
이러한 ‘은혜’는 마게도냐교인들로 하여금 ‘나눔’을 위한 ‘참여’를 간청하는데, 이 ‘참여’는 정신적으로 그리스도의 부요에 이를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는 것은 영적으로는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과 정신적, 물질적으로는 ‘나눔’과 ‘섬김’을 통한 완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은혜’나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눔’은 수평적인 것으로 성도 간의 ‘교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은혜’로써 연보를 말할 때는 오히려 5절에서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또한 우리에게도 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진실함’이란 연보를 통하여 먼저 하나님께 사랑의 진실함을 보이는 것(loadship)과 예루살렘교회를 돕도록 사도에게 주는 것(fellowship)을 말한다. 헌금을 성도 간의 관계(fellowship)로만 생각하면, ‘모금’으로 국한하게 된다. 이는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관대한 연보를 호소한 것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굳이 ‘은혜’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연보 개념은 먼저 ‘은혜’를 받아서 그 응답으로 사랑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그 다음은 ‘나눔’을 통하여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은혜의 성취’는 연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통전적(統全的)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3. 기독론적 특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1) 그리스도의 부유

본문은 바울이 연보의 영적인 원천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가난과 부요를 주관하시는 자로서 우리의 구속자가 됨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연보론 중에 기독론을 말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도 ‘부요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갑자기 어떤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이 적당한 때에 ‘있으라’(창 1:3)는 하나님의 말씀20)으로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와 말과 새와 물고기와 나무 등 그 모든 것들이 자기의 형상과 같은 “종”(창 1:24, 25)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였는데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부요하고 모든 것이 되는 유일한 분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신 것을 두고 “그의 소유를 포기하셨으며 당분간 그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21)고 말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에서의 삶이 ‘권세’와 ‘소유’로서 부요하다는 뜻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바렛(C. K. Barett)은 바흐만의 말을 인용하여 “바로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부요함을 포기했기 때문”22)이라고 말한다. 이는 칼빈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삶이 ‘부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선재적인 삶은 ‘하늘’에서 이루어졌고, 그 하늘에서의 삶은 왕(王)으로서 ‘권세와 부요’를 누리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이라는 어떤 공간(空間)에서 삶을 가진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심으로 ‘하늘’에 오른(행 1:11, 21) 분이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한 독생한(요 1:18)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 이전은 유일한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그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따라서 말세에 나타난 것이다(벧전 1:2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요’한 것은 그의 권세로서 ‘부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하나님으로서 유일하심으로 ‘부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진 영적인 권세는 한 번도 없어지거나 포기(抛棄)되거나 버려진 일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하였다고 한다(요 17:5, 행 3:13). 그는 비록 그리스도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성육신 하였을 때도 여전히 그의 권세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이를 증거23)하셨다.

2) 그리스도의 가난

예수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지심으로 성육신(成育身) 하였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王)과 제사장(祭司長)의 직분(職分)을 가지고 육신(肉身)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육신은 그 자체가 제한적(制限的)인 육신(肉身)으로 한계(限界)가 있었으므로 히브리서 2장 7절에서 천사(天使)보다도 못한 인성(人性)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은 하나님으로서 겪는 최고(最高)의 ‘가난해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왕으로서 왕궁(王宮)에서 태어났다고 하여도 그의 성육신은 그 자체(自體)가 하나님으로서는 극도로 낮아져서 가난해지는(부정과거는 진입적 동사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실천적인 가난한 삶(마 8:20)을 살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난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으로 육적인 삶을 마쳤다는 데서 ‘최고의 가난’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크레독(Fred. B. Craddock)은 마틴(Ralph P. Martin)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가난에 대해서 “그가 가난한 삶을 산 것”24)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을 ‘그의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직분을 고려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적인 삶만 말하는 것이므로 부분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원래 직분으로써 자원한 헌신을 말하며 현상적인 육체적 삶으로써 가난만을 지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육적인 삶만을 말한다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하여 육신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진, 그야말로 운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25)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그리스도의 자원한 겸손과 헌신을 설명할 수 없는 인본주의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은 오직 자원함(요 10:17, 18)에서 온 것이며 누구의 뜻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도(마 26:42)이지 외압(外壓)이나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겸손과 순종으로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로 온 것이며 이는 아버지가 상속하려는 하늘을 후사로서 받드는 태도다(빌 2:5∼11).
더 나아가 분명한 것은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난’은 비유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요한일서 3장 8절에서와 같이 ‘마귀’라는 ‘인격적 실체(實體)’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죽음은 ‘가난의 압제자’에게 당하고 끝내 멸망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하늘을 상속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부활은 ‘가난의 압제자’인 마귀를 이긴 부활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과 함께 ‘마귀의 일은 멸하여졌고’(요일 3:8),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에게 ‘믿음’으로 주어졌다.
덧붙여 9절에서 부요해져야 할 대상인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말하며 ‘우리는 보호와 구원’이 필요한 자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가난하다고 보았고(고후 8:9), 구원을 선포함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지 상대적(相對的)으로 가난한 자로 국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가난’은 영적, 정신적, 물질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靈的)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부요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비참함에 처해져 있는 상태’로 “가난의 압제자에게 눌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정신적(精神的)으로는 나눔과 섬김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것(고전 1:18)으로 생각하는 ‘이기적(利己的)인 마음’을 말한다. 이기적인 마음은 ‘부족함’에서 나온다.
만나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언제나 풍성하게 하였던 것처럼 주기도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한다. 이는 일용할 것만 있는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까지 언제나 끊어지지 않고 항상 있었던 것처럼 ‘하늘의 창고’로 넉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요’가 있는 자는 ‘나눔과 섬김’의 일에 있어서 인색하지 않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우리’들을 그의 부요함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4. 교회론적 특징

교회는 복음의 큰 소식을 전파하기 위한 하늘의 기관이고 예수의 증거가 듬뿍 담긴 그릇이며 하늘로써 샘줄기가 이어진 생명 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보좌가 들여다 보이는 창이다. 이러한 교회는 영혼을 위한 모임이며 신앙 공동체다. 이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요 부름 받은 회중이라는 말이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의 피로 산 한 형제들이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겸손하여 협동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모임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연보론에는 모교회를 돕는 것과 교인들에 대한 필요와 헌신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교회론적인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모교회를 도움

이방교회에게 모교회인 예루살렘의 빈곤을 돕도록 요청한 것과 관련하여 바울은 교회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틴(Ralph P. Martin)과 퍼니쉬(Victor Paul Furnish)는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바울의 교회론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원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시기하도록 이방교회를 축복한 것을 이유로 이방교회는 영적인 빚을 진 자로서 물질적인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모교회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방교회는 지교회로서 모교회와 동일한 정체와 책임26)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이방의 교회는 모교회에서 파견한 사도와 교사들을 받아들였고 따랐다.27)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는 지역교회(local church) 내에서도 연대책임이 있지만, 우주적교회(universal church)에서도 공동책임으로 여겼다. 그래서 바울은 지교회로서 마게도냐와 고린도는 모교회를 돕는 일에 책임을 가지고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라고 강력한 권고를 받았다. 바울은 우주적 교회로서의 개념이 분명하여 나중에 지교회가 어려우면 모교회가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2) 교인들에 대한 필요

바울은 생명의 속전인 성전세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가 새롭게 깨달은 연보의 정신은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개념을 넘어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섬기는 ‘헌신’의 단계에 이르게 됨을 사도적 차원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연보론을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전하였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되었고 극한 가난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희생할 줄 아는 ‘성장한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함(명령적인 권고)으로 고린도교회에도 이를 증거했다(3절).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연보론을 기독론과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연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만연한 ‘상업주의와 배금주의에 맞서서’ 연보론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이기는 내용들이다. 즉 바울의 연보론이 마게도냐교회들과 고린도교회에 우세하기 시작하였을 때 마케도냐교회는 극한 가난을 이기게 되었고 고린도교회는 물질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포기하게 되었다(마 6:24).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연보의 중요성을 성도가 깨닫기를 원했고 그러한 연보론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보호와 생명을 맘껏 누리기를 원했다. 바울은 자신의 연보론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정신’(lordship)과 ‘나눔과 섬김의 정신’(fellowship)을 통하여 교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강조한다. 이로써 고린도교인은 교회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회를 세우려는 바울의 의도에 협력하여 헌신을 하게 된다.

3) 헌신

헌신이라는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과 결과들을 말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헌신을 할 수 없다. 헌신이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을 말하며 시간과 물질과 지혜를 다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헌신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과 같아서 교회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된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은 제직(諸職)들의 게으름과 무사안일주의에 있다. 심지어는 교회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방만하고 게으른 자에 대해서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왜이드(Wade P. Huie, Jr)는 “가난한 자는 이미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다”28)고 말하여 교회 성장은 부지런히 힘쓰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바로 성도의 헌신이 교회의 성장을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사도적 책임을 가지고 성도를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일(고후 11:2)을 열심히 하였다. 사도는 성도를 훈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헌신하게 하는 것이 임무였다. 바울은 연보를 통하여 성도의 헌신(고후 8:2)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문에서 헌신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과 교회를 위하여 사도들에게 주는 것(고후 8:5)이었다. 이러한 헌신은 성도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는 것과 간절하게 하는 것(고후 8:8, 16)이었다. 헌신을 통한 마게도냐교회들의 성장과 연합은 놀랍도록 강하고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도 자원함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울은 성도의 헌신을 ‘은혜의 성취’로 보았는데 이러한 헌신은 먼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는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음으로 인해서 ‘헌신’이 가능한 것이다.
4) 교회의 연합과 일치

교회라는 말 자체가 협동체이고 교회는 협동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기관이다. 혼자서 받는 핍박은 어렵지만 다같이 나누어 받는 핍박은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 아무리 어려운 환란이라도 함께 하면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협동의 장점을 이해한다면 기꺼이 협동을 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핍박과 환란(고후 1:8)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의 내분이 있었고 이에 따르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연보론을 통하여 교회의 내외적인 결속을 높이고자 한다. 그는 고린도와 마게도냐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에 모두가 힘을 합하도록 함으로써 무사히 헌금 모금을 마치고 예루살렘교회로 귀환할 수 있었다. 바울은 힘을 다한 헌신의 결과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져온다는 뼈저린 사실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러한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동기 유발은 바울의 연보론에 나타난 기독론과 ‘생명의 속전’이라는 모티브(Motive)다.
이 모티브는 고린도교회에서 폭발적인 연보를 가능하게 했고, 성도의 헌신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실현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보의 행위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로 나타났고, 넘치는 기쁨과 풍성한 은혜로 인하여 교회에는 큰 감사가 있었다. 극한 가난의 마게도냐교회와 부유한 고린도교회는 물질적인 사정은 달랐지만 모두가 풍성한 은혜로 인하여 부요함을 누렸다. 또한 마게도냐와 고린도교회는 연합과 일치라는 기치 아래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교회 성장을 향하여 달려갔다.



Ⅳ. 결 론

바울의 연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난다. 결국 연보는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의 자연스러운 발로(發露)다. 바울은 성도가 은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말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행한 연보는 그 당시의 형식적이며 종교적이었던 성전세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생명의 속전’이라는 사실을 자각케 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다메석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회심하게 된다(행 9:3∼9). 이 체험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행하던 연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연보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연보의 뿌리를 구약의 만나 사건에서 찾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살았지만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고 굶주리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입히시고 먹이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수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며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카리스, )이며 은혜다. 그러나 그 양식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대한 비유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은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했다. 이 생명은 우리의 수고와 공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발적인 은혜(카리스, )로 된 것이다.
주일 연보는 우리의 생명을 주신 그분의 은혜에 대한 ‘생명의 속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명의 표현이어야 한다. 성도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주일 연보에 참예해야 한다. 이와 같이 주일 연보를 생명의 속전으로 인식할 때 교회는 건강한 교회로 변할 것이며 성도의 삶에는 영적 풍요함과 물질의 부요함이 넘칠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2∼6).



주)

1) 『한국기독공보』에 따르면, 교회 재정의 2.5∼5%만이 사회봉사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사회봉사에 참여해야만 한다고 함. “이웃돕기, 사랑의 실천”, 『한국기독공보』 2000년 12월 2일, 사설 3면.
2) C. K. 바렛, 『고린도후서』 국제성서주석 36권, 번역실 역(1986; 6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p. 22.
3) Ibid., pp. 22-23.
4) W. 바클레이, 『고린도서』 성서주해전집 9권, 서기산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71), p. 23.
5) 한상식, “바울 시대의 도시”, 『한국신학』 8호(1999), p. 220.
6) C. K. 바렛, op. cit., p. 66.
7) 한상식, p.219.
8) Ibid., p. 220.
9) 김기동, 『평신도를 위한 교회론』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9), p. 355.
10) 김기동, 『목회자가 되는 삼단계』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8), p. 19.
11) 김기동,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의 길』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0), p. 167.
12) 바울은 청중의 ‘현대적’ 세계관을 성경의 세계관으로 변혁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헬라 철학의 ‘현대적’ 세계관을 신화로 보고 그것을 성경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비신화화’를 했다. 권성수, 『성경해석학』 (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 1991), pp. 335-336.
13) Ralph P. Martin, Ⅱ Corinthians WBC, vol 40 (Waco, Texas: Word Books, 1986), p.267.
14) 성전세로서 반 세겔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동일한 대가를 주고 구원하셨다는 것이요 예수의 피의 가치가 모두에게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세로서 반 세겔은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김기동, 『율법과 복음』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4), p. 95.
15) 오연수, 『세계교회사(상)』 (서울: 도서출판한글, 1996), p. 22.
16) 김기동, 『요한복음강해 2권』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2), p. 291.
17) Rudolf Karl Bultmann, THE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trans. Roy A. Harrisville(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5), p. 254.
18) 김기동, 『초월하지 않는 하나님 下』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5), p. 105.
19) Ibid., p. 106.
2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의 말씀은 ‘로고스’라고 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을 의미한다. 김기동,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3), p. 80.
21) 존 칼빈, 『고린도후서』 한국기독교선교백주년기념 존·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p. 166.
22) C. K. 바렛, op. cit., p. 284.
23) 증거란 표적을 보이면서 말씀을 확실히 확증하는 것(막 16:20)을 말한다. 김기동, 『교회성장을 위한 설교학』 (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88), p. 109.
24) Fred. B. Craddock, “The Poverty of Christ” Interpretation, 22(1968), pp. 162-165.
25) “그는 그의 운명으로서 가난을 가지셨고”, Ralph P. Martin, p. 263.
26) 5절에서 연보의 성격이 ‘드림’과 ‘줌’이라는 동사에 귀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Loadship과 Fellowship을 말한다.
27) 바울파, 아볼로파 등의 교회 분열의 위기를 초래했다.
28) Wade P. Huie, Jr, “The Poverty of Abundance. From Text to Sermon on Luke 16: 19-31” Interpretation, 22(1968), p. 409.
29) 오연수, op. cit.,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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