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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익경(金益炅)
[본관]광산(光山) / 지금 광주(光州)의 엣 지명.
[문과] 현종(顯宗) 3년(1662) 임인(壬寅) 대증광시(大增廣試) 갑과(甲科) 2[榜眼]위(02/41)
[진사]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48위(78/100)
[생졸년] 1629년(인조 7)~1675년(숙종 1) / 향년 46세
[주요관직] 예조참판
[거주지] 한성([京])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반(金槃)[文]
[조부(祖父)]
성명 : 김장생(金長生)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계휘(金繼輝)[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서주(徐澍)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윤제(尹濟)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김익렬(金益烈)
형(兄) : 김익희(金益熙)[文]
형(兄) : 김익겸(金益兼)[生]
형(兄) : 김익훈(金益勳)
형(兄) : 김익후(金益煦)[文]
[가족과거]
자(子) : 김만근(金萬謹)[文]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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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대사헌,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계명(季明). 서울 출생. 할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김반(金槃)이며, 어머니는 연산서씨(連山徐氏)로 서주(徐澍)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6년(인조 24)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고 1664년 형조참의·동부승지, 1666년 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와 1672년 대사헌을 지냈다.
이조참의를 거쳐 1674년 예조참판 때,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리(田里: 벼슬길을 떠난 재야)로 풀려나와 일생을 마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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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대사헌(大司憲) 김익경(金益炅) 신도비명(神道碑銘) - 송시열(宋時烈)
대사헌(大司憲) 김공(金公) 계명(季明, 김익경)은 효성을 타고났다. 9세에 어머니를 잃고 12세에 또 아버지마저 잃었다. 공은 슬픔과 사모에 젖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맏형과 작은형이 이것을 민망하게 여겨 손을 끌고 강제로 먹이려고 했지만, 공은 그 소매를 물어뜯으며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작은형이 그 소매를 끌어당기자 이빨로 물어뜯다 피를 흘리며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리자 보는 자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미 그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사람임을 알았다. 공은 작은형한테 글을 배웠는데 그를 섬기기를 마치 참판공(參判公, 김반(金槃))을 섬기듯이 하였다.
차츰 성장함에 온연(溫然)히 온화하였고 형연(瑩然)히 맑았으며, 수연(粹然)히 잡되지 않았다. 문사(文辭)가 날로 진전하여 18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영남 사람 유직(柳)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선생을 헐뜯고 비난하자 관학(館學)에서 유직의 이름을 삭제하고 그를 가두었지만 임금의 명으로 풀려졌다.
공은 당시 반의(泮議, 성균관 학생들의 의론)를 주도하여 그 옳지 않음을 힘써 고집하다 권당(捲堂, 공관(空館))에 이르게 되었다. 공 또한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크게 임금의 노여움을 샀으나 오히려 굽히지 않았다. 사론(士論)은 이것을 중시하였다. 전조(銓曹)에서 공이 자주 과거의 응시(應試)에 궁하였다고 하여 추천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공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 30이 되서야 비로소 재랑(齋郞)이 되었다가 세 관직을 거쳐 청산 현감(靑山縣監)이 되었는데, 자상하고 은혜롭고 청렴하고 깨끗하게 정사를 펴서 한 도의 최고가 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62, 현종 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최고에 도달한 자는 관례대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가는데, 공은 바로 승지(承旨)에 제수되어 왕명의 출납을 상세하고 청아하게 하였으며, 그 사이에 다른 자리로 옮겨졌다가도 번번이 다시 들어왔다.
당시 이충준(李忠俊)이란 자가 있어 숙녕 옹주(淑寧翁主)의 집과 송사를 벌렸는데, 임금이 옹주의 집을 옳다고 하여 형조에 이충준을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충준이 대간(臺諫)에게 부탁하였다는 교시도 있었다. 공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임금은 치우친 사사로움이 없은 연후라야 백성들이 논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송사의 안건은 해당 관청[該曹]의 결단을 기다리지 않고 전하께서 유사(有司)의 일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한편 대간은 전하의 귀와 눈입니다. 그들이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의심하시는 것은 바로 스스로 그 귀와 눈을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공을 파직시키자 말하는 자들이 간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공은 다시 복직되어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여러 폐단을 소통하게 개혁하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남쪽 지방의 풍속이 남들과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한결같이 공에게 맡기었다가 송사에 진 자라도 원망하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나자 공은 체직되어 호조 참의(戶曹參議),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고,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교체되어 옥사(獄事)를 판결함에 있어 먼저보다 죄를 가볍게 하였는데, 일찍이 강경하게 처리하다가 대항하는 관리가 있기까지 되어, 연신(筵臣)들이 이것을 아뢰었고 행상(倖相, 권신(權臣))조차도 또한 이를 말하여 호의를 드러냈지만 공은 이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미 서용되어 자청해 관동 관찰사(關東觀察使)로 나갔으나, 마침 큰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을 진휼해 살리어 실책이 없었다. 관동에는 병사를 주관하는 관원이 없었는데, 공이 영장(營將)을 설치하여 제때에 군사를 훈련시킬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다시 예전의 직책을 제수받고 여러 번 사양하자 체직되었으며,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하였다.
이어서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요행을 바라는 자를 힘써 억제하니 여론이 그 공정함을 일컬었다.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에 성모(聖母, 왕대비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을 당하여 임금이 ‘복제(服制)를 변경하였다’고 하여 예관(禮官)들을 죄주었다.
공 또한 조사를 받았으나 바로 풀려나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옮겨졌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송(禮訟)이 일어나 시사(時事)가 크게 바뀌어 공은 체포되어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가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원년)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공은 두 번이나 옥에 갇혔고 이미 병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다시 시사(時事)에 대하여 비통한 생각이 들자 침식을 모두 폐하였는데, 집안사람들이 ‘너그럽게 하라’고 위로라도 하면, 공은 이르기를, “간사한 무리들이 임금을 속이고 가리워 나라가 기울어지는데, 내 몸이나 한가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병이 점차 깊어지자 여러 자식들이 공을 받들고 서울 사저로 의원을 찾았지만 마침내 8월 15일에 나이 겨우 4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우(士友)들이 통석(痛惜)해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임금이 애도(哀悼)의 은전을 모두 의례와 같이 하였다. 장지를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동쪽 국정리(國井里)로 정하여 그해 12월 29일에 장사지내었다.
공의 휘(諱)는 익경(益炅)이다. 신라 국왕의 후예 가운데 왕자 흥광(興光)이 있었는데, 광주(光州)에서 본적을 받았다. 그리하여 대대로 광주인(光州人)이 되어 드디어 동방의 큰 집안을 이루었다. 공은 호가 황강(黃崗)이고 휘가 계휘(繼輝)인 대사헌(大司憲)의 증손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고 휘가 장생(長生)인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손자이고, 참판(參判)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반(槃)의 아들이다.
호가 신독재(愼獨齋)이고 시호는 문경(文敬)인 휘 집(集)의 조카이고, 대학사(大學士)를 지낸 창주공(滄洲公) 김익희(金益熙)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연산 서씨(連山徐氏)로 오랑캐의 변란을 당할 적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으므로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니, 가세(家世)의 드러남이 고금을 통해서 비할 집안이 없을 것이다.
문경공(文敬公)은 언제나 이르기를,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운데, 단지 문예(文藝)에만 국한되니 애석하다.”고 하였다. 창주공(滄洲公)은 이르기를, “마음에 한 점의 티가 없고 행동은 매우 청렴 결백하니, 이른바 ‘얼음같이 맑고 옥(玉)처럼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내 아우가 그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몇 가지 것만으로도 대체로 공을 알 수 있다.
공은 글을 읽을 적에 간혹 오래도록 목메어 울기도 하였다. 옆 사람이 넘겨다보면, 옛사람이 부모를 임종 때까지 봉양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랜 친구라도 또한 죽은 부모에 대한 일을 차마 일러주려고 하지 않았으며, 분묘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경함을 다하였다.
형[兄, 김익겸(金益兼)]의 죽음에 대해 애통해 함이 진실한 마음에서 나와 오래 될수록 더욱 간절하였는데, 일찍이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부귀(富貴)는 족히 아름답다고 일컬을 것이 못 된다. 우리 집안이 내세울 것은 어찌 시례(詩禮)로써 대대로 전하는 가업(家業)을 삼은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어떤 무관이 1곡(斛)의 쌀을 가져오자 엄한 말로 물리치면서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이름과 절개가 무너진 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자녀들이 일찍 요절하였을 때 나라의 부포(賻布)를 받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어찌 부의로 받겠는가? 조정에 나아갈 때마다 늘 대대로 받은 국은(國恩)을 오직 내 직분을 다해야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현종(顯宗) 시대에 당론이 날로 심하여 크게는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리되고, 작게는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누어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이것에 대하여 매우 근심거리로 여기어 자주 동료끼리 서로 공경하여 협력하기를 힘쓰게 하려고 사람들과 말할 때면 반드시 충신(忠信)과 화선(和善)으로 하여 자신과 가깝든 멀든 아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서는 매우 소명하게 하였다. 스물의 나이에 사책(射策, 과거 시험의 하나로, 어떤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것)을 지어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1)을 베어 없애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는 대개 김자점(金自點)을 지적한 것이며, 윤휴(尹鑴)의 명성이 중외(中外)에 떨쳐 바람처럼 추종하지 않음이 없을 적에도 공만은 오직 ‘길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름난 집안의 후예로서 일찍이 출세하여 이름을 날렸지만, 평소의 성품은 차분하고 조용하여 영리를 즐기지 않았으며, 늘 쓸쓸한 한 칸 방에서 담백하기가 가난한 선비처럼 지냈으므로, 그 너그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인자(仁者)의 수(壽)를 누림이 마땅할 것인데도, 오히려 중년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서 승지(承旨)에 추증된 윤제(尹隮)의 딸이다. 장남 김만재(金萬裁)는 참봉(參奉)을 지냈고, 다음은 김만견(金萬堅), 김만지(金萬至), 김만근(金萬謹)이며, 네 사위는 좌랑(佐郞) 홍중모(洪重模), 이광조(李光朝), 문천 도정(文川都正) 이관(李灌), 심정규(沈廷揆)이다. 안팎의 손자, 손녀가 약간 있다.
나는 일찍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또 창주공(滄洲公, 김익희(金益熙))에게는 분에 넘친 벗이 되었으므로, 공이 나를 대하기를 마치 창주공처럼 하였다. 일찍이 산 속으로 나를 찾아왔을 적에 내가 혼기(婚期)를 놓쳤다고 꾸짖자, 공은 말하기를, “가난하여 혼비(婚費)의 밑천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므로, 나는 그 자리에서 “공은 어질구려! 공으로서도 가난함이 이와 같다니.”라고 탄식하였다.
훗날 또 동쪽 교외에서 서로 방문하였을 적에 말이 영릉(寧陵, 효종의 능)에 미치자 탄식하기를, “소인들의 참언 때문에 성고(聖考, 효종을 지칭함)께서 묻히신 곳이 장차 안녕하지 못할 터인데, 온 조정이 감히 말하지 못하니 한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 뒤 나는 바닷가로 멀리 귀양살이를 갔는데, 공의 부음이 이르렀으므로 나는 신위(神位)를 설치해 놓고 곡(哭)을 하고, 한편으로 공의 조카 김만증(金萬增)을 불러서 곡하였다. 지금 김만재(金萬哉)를 비롯한 제군들이 묘도(墓道)의 글을 부탁하기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저 먼 신라 말기에 왕자로서 행적을 숨겼는데,
광산 김씨는 그 뿌리 매우 깊네.
우리 문원공(文元公)께서 후인(後人)을 인도해 도우셨는데,
공의 자질은 아름답고도 순박하였으며,
집안 행실이 효성스럽고도 어질었도다.
이미 조정의 앞에 나가서는 앞서지도 서둘지도 않았는데,
저 무리들 빨리 쫓아가지만 지혜는 찾기 어려웠네.
나는 굼떠 나서지 못할 적에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네.
서둘지 않고 순탄하게 나아가도 육경(六卿)의 버금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백성들 다스릴 적엔, 은혜를 베풂이 봄날 같았네.
관동(關東)의 관찰사로 나갔을 땐 굶주린 자들 기뻐서 노래하여,
혁혁한 명성의 전달 실로 나에겐 부끄럽게 여겼었지.
전리(田里)에 내려가 편안히 지내니 숲 그늘 맑고도 그윽했는데,
하늘에서 수명을 더 연장해 그 덕성(德性) 함양하게 했더라면,
나이가 많을수록 덕행도 뛰어나 그 존귀함을 누가 상대하랴만은,
중도에서 세상을 뜨다니 신의 섭리 모를 일이네.
광주의 치소(治所) 동쪽 국정리의 묘원(墓原)에
편안한 한 무덤 있어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주해]
1)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태자(太子, 뒤의 순종(順宗))의 측근에 있던 자들로, 왕비(王伾)는 성품이 비루(卑陋)한데다가 뇌물을 좋아하
여 큰 궤짝을 만들어 두고서 진귀한 물건을 받아 넣고는 밤이면 그 위에서 잠자는 등 세력을 부리려다가 폄관(貶官)되어 죽었고, 왕숙문
(王叔文)은 동궁(東宮)의 곁에서 궁중의 일에 모두 참견하면서 천하의 유명한 인사(人士)들과 은밀히 결탁하는 등 나라의 재정과 병권
을 잡아 마음대로 하려다가 주살(誅殺)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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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司憲金公季明, 孝性天至。 九歲喪先妣, 十二歲又喪考。 公哀慕不肉, 伯、仲氏愍之, 手執以强之, 公咋其袂, 不肯開口。 仲氏引其袂, 齒決出血, 俯伏而泣, 見者無不酸鼻, 而人已知其爲仁孝人也。 受學於仲氏, 事之如事參判公。 稍長, 溫然而和, 瑩然而淸, 粹然而不雜, 文辭日進, 十八中進士。 嶺南人柳㮨誣詆栗谷、牛溪二先生, 館學削㮨名以錮之, 上命解之。 公時掌泮議, 力持不可, 至於捲堂。 公又率諸生抗章, 大觸天威而猶不屈, 士論重之。 銓曹以公屢屈於公車, 有尉薦意, 公不肯。 歲三十, 始爲齋郞, 歷三官, 爲靑山縣監, 慈惠廉潔, 政爲一道最。 擢壬寅文科及第。 國制, 資窮者, 例陞通政。 旋拜承旨, 出納祥雅, 間有他遷, 輒復入。 有李忠俊者與主家爭訟, 上直主家, 命鞫忠俊, 仍有忠俊圖囑臺諫之敎。 公上疏曰: “人主無有偏私, 然後庶民不議。 今此訟案, 不待該曹決折, 而殿下行有司之事。 且臺臣, 殿下之耳目, 乃疑其受囑, 是自廢其耳目也。” 上罷公職, 言者爭, 不得。 未幾, 敍復, 出爲潭陽府使, 疏革衆弊, 吏民大悅。 南俗健訟, 使家一委之公, 負者不怨。歲一周, 而遞拜戶、兵曹參議, 入司諫院爲大司諫, 遞爲刑曹參議, 其決獄平反。 嘗噬腊至對吏, 筵臣爲白之, 倖相亦有言以示好意, 公恥之。 旣敍, 求出按關東, 適値大侵, 賑活無遺策。 關東無主兵官, 公請設營將, 以時操鍊。 旣納節, 直歸鄕里。 連除舊職, 多辭遞, 兼承文提調。 仍爲吏曹參議, 務抑僥倖, 物論稱其公。 特陞嘉善, 拜禮曹參判。 甲寅, 聖母喪, 上以服制更改罪禮官。 公亦就理, 卽釋爲戶曹參判, 由大司憲, 移長諫院, 如是者再。 無何禮訟作, 時事大變, 公被逮配陽城。 乙卯, 放還田里。 公旣再入囹圄, 已有疾, 仍復慨念時事, 寢食俱廢。 家人寬慰, 則曰: “群姦欺蔽, 國家欹傾, 吾身不暇念也。” 疾轉㞃, 諸子奉就醫京第, 竟以八月十五日, 年止四十七而終焉, 士友莫不痛惜之。 其隱卒皆如儀。 卜葬廣州治東國井里, 其十二月二十九日窆焉。
公諱益炅。 新羅國王之裔有王子興光, 受籍于光州, 故世爲光州人, 遂爲東方大族。 公大司憲號黃岡諱繼輝之曾孫, 沙溪先生諡文元諱長生之孫, 參判、贈領議政諱槃之子, 愼獨齋諡文敬諱集之從子, 滄洲公大學士益熙之弟。 妣連山徐氏, 當虜變引決, 旌表其門。 家世之顯, 古今無比焉。 文敬公常稱曰: “天資近道, 只局於文藝, 惜也!” 滄洲公曰: “心無點汚, 行甚廉白, 所謂氷淸玉潔, 吾弟其人也!” 此數者, 蓋可以知公也。 讀書時, 或嗚咽良久, 傍人覵之, 則古人終養事也。 故舊人亦不忍以考妣遺事聞也。 丘墓所在, 見其人, 則必下馬致敬。 鴒原之慟, 出於誠心, 冞久愈切。 嘗戒子孫曰: “富貴不足多也, 吾家長物, 豈非詩禮爲靑氈耶?” 有武弁致一斛米, 嚴辭以却, 曰: “士夫名節之壞恒於斯。” 子女夭殤, 不受賻布, 曰: “此焉用賻? 立朝, 每以爲世受國恩, 惟盡吾職, 可以報效。”
顯廟朝, 黨論日甚, 大分小分, 莫可收拾。 公深以爲憂, 亟欲以寅協爲務, 與人言, 必忠信和善, 親疎無不愛之。 然於善惡之卞甚晳。 弱冠射策, 有伾、文未翦等語, 蓋指自點也。 當鑴名振中外, 無不趨風, 而公獨曰: “非吉人也。” 公以名家胄胤早致通顯, 而雅性恬靜, 不樂榮利, 常蕭然一室, 淡若寒士, 宜其寬樂安閑, 克享仁者之壽, 而猶未及於中身, 豈不痛哉!
夫人坡平尹氏, 贈承旨隮之女。 長男萬㘽, 參奉; 次萬堅、萬至、萬謹。 四女婿: 佐郞洪重模、李光朝、文川都正灌、沈廷揆也。 內外孫男女若干。
余早遊文元公門, 又忝爲滄洲公友, 公視余亦如滄洲公。 嘗訪余於山中, 余責以婚姻失時, 公曰: “貧無以爲資。” 余面歎曰: “公賢乎哉! 以公而貧若是乎!” 後又相訪於東郊, 言及寧陵而歎曰: “以小人讒言, 而聖考衣冠之藏, 將不得安寧, 而擧朝莫敢言, 可謂寒心。” 又其後, 余遠謫海上, 而公訃至, 余設位而哭之, 又招公姪萬增而哭之。 今萬㘽諸君托以墓道之文, 義不可辭。 銘曰:
逖彼羅季, 王子行遯。 惟光之金, 其源孔遠。 惟我文元, 啓佑後人。 惟公之質, 旣美而醇。 在家之行, 克孝且仁。 旣立朝端, 不競不絿。 曰彼衆趨, 難以智求。 我懶不馳, 世不我捨。 優餘平進, 六卿之亞。 曾試于民, 惠澤春流。 一司東臬, 飢者歡謳。 赫赫馳聲, 實我所羞。 式安田里, 林樾淸幽。 天假之年, 俾養其德。 式高而卲, 其尊誰敵? 半途而稅, 神理冥漠。 廣陵之東, 國井之原。 有寧一宮, 終古斯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