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평동리사거리 서쪽 구릉에 위치한다.
이곳은 원주이씨(原州李氏)의 묘역이 넓게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로 올라가는 길은 평동사거리에서 평동4로를 따라 약 120m 가량 올라가면 콘크리트로 포장한 진입로가 있다.
이 묘역의 가장 높은 곳에 이만춘(李萬春) 묘소가 위치하며, 남쪽 방향으로 약간 떨어져 이시행 묘소가 있다.
이만춘은 이시행(李時行)의 장자로 경원군(慶原君) 반계(攀桂)의 11세손이다.
묘소의 앞에 방형의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우측에 묘비가 위치한다. 묘소는 유인 진주유씨와의 합장이다.
묘소 좌측으로 이덕문 묘소가 있는데, 이만춘 묘소와 이덕문 묘소의 양측에 망주석을 세웠다. 묘소의 관리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묘비는 직육면체의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고, 비신은 윗면을 호형(弧形)으로 다듬은 형태이다.
묘비 전면 곳곳에 깨진 흔적이 있는데,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총탄을 맞아 파손된 것이라고 한다.
비문은 전면과 후면에 새겼다. 전면은 파손된 부위가 있긴 하지만 획이 명확하게 보인다.
후면은 상단부가 전반적으로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고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숭정 3번째 갑술년인 1754년(영조 30)이다.
[비의 전면]
學生李公萬春之墓
孺人晉州柳氏附左
[후면]
(歲癸)酉 (余觀鄕飮)禮 于丹陽北邨 有一人玉立衆中 䫉端氣淸 恂恂然孝悌之德 發
(見於)外 余固敬而異之 退而問於人 果有至行者也 姓曰李 名曰尙文 其明年后 其
(先人狀告余)曰 先人事母孝 又友于諸弟 慷慨有志 急人之難 義所當恤 傾家力以施之 小無計較私吝之意 天姿甚高 氣像毅然 有不可犯之色 雖終老於艸野 高邁之行 不愧於古人 余聞其言而歎曰 誰謂醴泉無源 靈芝無根哉 斯人之有斯子 良
(有以也 謹按狀) 公諱萬春字聖伯 通政大夫숙之玄孫 將仕郞東立之曾孫 祖曰後
(閔 壽階嘉善考)曰時行 功陞通政 外祖 淸風劉仁○也 新羅時爲慶州人 開國功臣
(謁平其始)祖也 高麗末 〇原州之〇 中郞將慶原君攀桂 其遠祖也 知麗運將訖 避
(地以居故)也 高祖以後 移于丹陽 爲丹之望族 公生於乙卯 卒於丁卯 娶晉州劉氏
(待)昌女 生一男三女 男卽尙文 女曰池桂齡 曰申命重 曰申光復 尙文有四子女 宜
(命 宜道其)子也 宋煊 申致文其壻也 公之墓在郡北三十里安盤山酉向之原 與柳
(氏同)兆(嗚呼) 尙文(旣肖)公之像 事之如事生 又將碣公之墓 圖所以不朽 余實不文
(其何能善貌)公之(言)行 可傳於永久耶 然孝子之請 悃愊無華 遂不敢辭爲之記 欲
(使後)人 知孝子爲親之情而不加樵牧焉 崇禎三甲戌 韓山李胤永逑 其弟運永書
*( )의 글자는 한국고전종합DB에 수록된『丹陵遺稿』卷18, 李生尙文大人墓表를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국역]
학생 이공만춘의 묘
유인 진주유씨 부좌
계유년에 내가 단양 북촌에서 향음주례를 보고 있는데, 무리 중에서 옥같이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풍채는 단정하고 기운은 맑았으며 공손하고 진실된 효제의 덕이 밖으로 나와 보였다. 내가 진실로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물러나와 사람에게 물은 즉 과연 지극한 행실이 있는 자이니 성은 이(李)요, 이름은 상문(尙文, 1692~1767)이었다.
그 다음 해에 그 선인(先人: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나에게 알려 말하길 “선인께선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시고 뭇 형제들과 우애하며 강개함에 뜻이 있어 타인의 어려움을 급히 구하되 의로서 궁휼하며 집안의 힘을 기울여 베풀되 조금이라도 사사롭고 인색하게 꾀하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타고난 자품은 매우 고매하셨으며 기상은 의연하시어 범할 수 없는 늠름한 기색이 있으셨습니다. 비록 초야에서 생을 마치셨지만 고매한 행실은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감탄하며 말하길 “누가 맛이 좋은 샘은 근원이 없고 지초는 뿌리가 없다고 하였는가?
이 사람에게 이 아들이 있으니 진실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삼가 행장을 살피니 공의 휘(諱)는 만춘(萬春, 1675~1747)이요 자는 성백(聖伯)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현손(玄孫=高孫)이며 장사랑(將仕郞) 동립(東立)의 증손(曾孫)이다. 할아버지는 후민(後閔)이요 수계(壽階)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시행(時行)이니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외조(外祖)는 청풍 유인(劉仁)이다.
신라(新羅) 때 경주(慶州) 사람으로 개국공신 알평(謁平)이 그 시조(始祖)이다. 고려(高麗)의 운수(運數)가 장차 다하려는 것을 알고 피난하여 고향에 거처하였다. 고조(高祖) 이후로는 단양(丹陽)에 이거하여 단양의 망족(望族: 명성과 덕망이 있는 집안)이 되었다.
공은 을묘년에 태어나 정묘년에 졸하였다. 진주 유씨(晉州劉氏) 대창(待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 삼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상문(尙文) 이요. 딸은 지계령(池桂齡), 신명중(申命重), 신광복(申光復)에게 시집갔다. 상문(尙文)에겐 네 명의 자녀가 있으니 의명(宜命), 의도(宜道)는 그 아들이요, 송훤(宋煊 )과 신치문(申致文)은 그 사위이다.
공의 묘(墓)는 군(郡)의 북쪽 삼십리 안반산(安盤山) 유향(酉向: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터) 언덕에 있다. 부인 유(柳)씨와 함께 동조(同兆: 부부의 시신을 한 광중에 묻음)하였다. 오호라! 상문(尙文)에겐 이미 아버지의 기상이 있어 섬기기를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하고 또 장차 공의 묘에 비(碑)를 세워 불후(不朽: 썩지 아니함) 함을 도모하고자 하나, 나는 실로 글 재주가 형편 없어 어찌 공의 언행을 잘 모사(模寫)하여 영구토록 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효자(孝子)의 청은 정성이 지극하고 꾸밈이 없어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기록하노니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효자가 부친을 위한 정을 알게 하여 초동과 목수를 더하지 않게 함이라.
숭정 삼년 갑술[1754년(영조 30)] 한산(韓山) 이윤영(李胤) 이 짓고 그 동생 운영(運永)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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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이만춘(1675∼1747) 초상화 / 1746년에 그린 작품
▲ 原州李氏 丹陽宗中 所藏 遺物 敎旨
▲충북 단양 원주이씨 종중 소장 묘산도(1746년 화가 정태명 작)
당시 회화식 산도가 전국적으로 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소백산은 조산으로 객산은 주산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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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군은 원주이씨 단양종중 소장 유물 31점이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366호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군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1월 4일 지정된 유물 31점은 초상화 2건, 묘산도 1건, 교지 2건, 서목 3건, 소지 18건, 성책 2건 등이다.
초상화는 이만춘(1675∼1747)을 그린 전신상과 반신상으로 1746년 정태명이라는 화가가 이만춘의 72세일 때의 모습을 그렸다고 기록됐다. 묘산도 역시 정태명이 그린 것으로 회화식 산도가 전국적으로 제작됐음을 말해주는 자료이며, 소백산을 조산(祖山)으로, 객산(客山)을 주산(主山)으로 표현했다.
그림에 나타난 기록으로 유추하면, 묘산도는 1746년 9월에 화가 정태명이 그렸으며, 상기 초상화 2점을 고려하면 이상문이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물 중 교지는 임금이 내려보낸 임명장이다. 서목은 조선시대 관부에서 사용하는 서류로, 하관(下官)이 상관(上官)에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된 문서이다.
소지는 이상문(李尙文·1692~1767) 선생의 효행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으로 요즘말로 하면 청원서에 해당되며, 성책은 이름과 주소, 재산 등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 군 관계자는 “유물이 지니고 있는 일련의 내용을 통해 18∼19세기 단양 지역의 사족 사회상을 알게 해준다”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원주이씨 단양종중 소장 유물이 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만큼 앞으로 관리와 보존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국민의소리 제천단양=조재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