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본질로 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로 보입니다. 열매를 보게 됨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여집니다. 열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복음이 지닌 생명의 열매 맺음입니다. 열매는 생명의 소산입니다. 생명이 없다면 열매 맺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삶을 산다고 하면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속성과 열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은사를 말하지만 또한 성령님의 열매도 말합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은사 곧 '선물'의 뜻을 강조하며, 한 분 성령님으로 온 선물이니 모두가 하나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로 드러남으로 성령님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교회를 개인들이 각기 능력을 살려서 모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사를 보이는 함께라는 점을 바울은 은사로 이야기합니다.
이에 비추어 성령님의 열매를 말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이 각기 개인적으로 보이는 타고난 속성에 비추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육신의 삶이 아닌 영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구약에서 십계명은 어떻든 육신의 속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금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육신의 속성으로 여러 가지 욕망이 일어나지만 내면적으로 잠재하여 있을 것이지 밖으로 드러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말로 주어진 것이고 그런 말은 율법적으로 가게 됩니다.
내면적으로는 욕망이 그대로 있지만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법적으로 내리는 명령입니다. 사회에서 제정하는 법은 결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다스릴 뿐입니다.
이런 점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에 비추어 복음은 마음으로부터 욕망이 아닌 순종이 드러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런 것입니다. 내면으로부터 드러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의 성령님의 열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연장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마음이 욕망이 아닌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열한 9가지는 그 예를 보인 것입니다.
도덕적인 덕은 어떻든 육신의 속성 가운데 장려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중, 분별, 자제, 그리고 정의 같은 것을 덕으로 장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속성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삼강오륜도 마찬가지로 개인이 덕을 보이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지닌 성향 가운데 어떤 것은 신장하고 어떤 것은 억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도덕입니다. 이런 점이 단지 행동을 억제하게 하는 법과 다릅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이 개인적으로 타고난 성향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령님이 임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개인의 존재적인 속성으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명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서 성령님의 열매로 이야기한 구체적인 내용을 봅니다.
개인적인 내용이란 개인의 속성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함께의 내용은 개인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은 성령님의 열매로 보입니다.
<함께의 열매>
성령님의 열매는 함께의 삶으로 맺습니다. 그런 열매를 보게 됨으로 함께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덕을 쌓는 것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열매로 보다 성취로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노력하는 대가, 혹은 걸어서 이르게 되는 결과 같은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성취라고 하여야 삶의 과정에 일어나는 것 뿐입니다.
열매는 어떻든 과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것을 야기하는 원인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로 생명이 자라는 것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말하게 되면 생명의 내용과 그리고 끝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생명은 자연의 운행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고유성은 자람과 그리고 열매 맺음입니다.
바울이 성령님의 열매를 말한 것은 영적인 삶이 곧 생명의 삶인 것을 보게 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사건적인 것이라기보다 생명의 결실을 맺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것은 생명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 성령님의 역사를 힘의 시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힘에 의한 현상처럼 보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영적 현상을 다루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현상적으로만 다룸으로 생기는 문제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단순히 현상으로 기술함으로 결국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표현이 물리적인 표현으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의 열매를 맺기보다 힘을 작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뜻이 표현하는 힘의 강도로 이야기된다면 생명력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의 열매 맺음이 없다면 세상에 있는 물건 같이 힘을 표현하기에 급급합니다. 생명의 열매로 삶을 뜻을 보이지 못하고 얼마나 강한 힘을 집결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뜻을 보이려고 한다면 생명의 삶이라고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생명으로의 열매 맺음이라고 한다면 함께의 내용으로 맺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의 수명은 있는 것을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경우 생명으로 열매 맺습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삶으로의 열매입니다.
세상을 산다고 하면 세상에 이루어 가는 것을 보이는 삶이 됩니다. 어떻든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삶의 뜻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산다고 하면 열매 맺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룸의 삶과 열매의 삶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세상에 무언가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룸이 허무합니다. 세상이란 항시 변화하는 것이고 보면 이루어 놓은 것이 그대로 지속되어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루어 놓아야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이룬다는 것은 어떻든 힘으로 집약됩니다.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에 이루려고 하는 한 힘으로의 치달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힘이란 유동적이지 항구적이 아닙니다.
<시간성으로 열매>
예수님은 생명의 삶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은 세상에 있는 내용으로 이야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수 없고 생명으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생명으로의 자람은 열매 맺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을 열매 맺음으로 볼 때 그 열매 맺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이 아닙니다. 이상은 어떻든 세상에 이루어지는 의식에 근거합니다.
세상에 이루어짐이란 공간성을 보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공간성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성을 담고 있습니다. 열매는 시간으로 맺어지고 시간으로 새 생명을 싹틔웁니다.
목적으로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공간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이란 공간적으로 설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 맺음이라고 하면 시간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로마서 8:14). 이런 경우 영으로 인도됨이란 시간적인 것입니다. 자라며 열매 맺음으로 인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는 시간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선교는 시간성으로의 열매 맺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 생각하게 되면 의도적이 됩니다. 시간으로 성숙하면서 파급되는 것입니다. 때를 따른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의식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간성을 보아야 합니다. 생명은 시간으로 자라면서 성숙하여지는 것이지 힘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을 열매 맺음으로 보면 구체성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열매 맺음이란 삶의 구체성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체성은 육신의 성질로 표현되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즉 영의 열매로의 자제는 도덕적으로 장려되는 자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열의 열매로의 자제는 시간으로 성숙하게 자라며 보이지만 도덕적인 자제는 의지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열매 의식을 가져야 시간으로 기다리며 삽니다. 기다리는 것을 목적적으로 이루려고 하면 이미 힘에 의하여 변형된 것입니다. 즉 힘에 의한 사람은 자람으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 맺음으로의 종말을 생각하여야 생명으로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삶이 그 자체의 결실로 사는 것이지 어떤 것을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은 그 자체가 과정이지 끝이 아닙니다. 아무도 사업에 성공한 것이 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끝이 될 수 없는 것을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삶이 자라지 못한 채 목적을 이룬 것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공한 삶은 세상에 자리잡은 자리로 보일 뿐입니다.
열매 맺음으로 사는 것은 끝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산 삶을 열매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새로운 삶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이 바로 그런 열매 맺음입니다. 그 열매는 믿음의 씨로 삶을 싹틔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룸의 삶보다 열매의 삶을 묵상하게 하옵소서.
이룸으로 사는 것은 세상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아버지께서 함께하심으로 맺어집니다.
열매를 맺기에 아버지와 함께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열매를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