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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Good Bye List’ - 3.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본문 : 골로새서 3장 5절(1~10절)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새번역>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부터 시작하여 제대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제 마음에 예수님이 자리를 잡게 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제 삶에 조금씩 꿈틀거리며 자라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맞이한 추석 연휴는 저를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져 들게 만들었습니다. ‘과연 제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까지 해 왔던 건대 갑자기 교회 좀 다녔다고 안 한다고 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고, 친척들은 뭐라고 할까?’,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까?’, ‘아니야!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답게 제사는 하지 말아야지!’ 정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했습니다. 제사를 하면서 절하게 되면, 즉 ‘우상 숭배’를 하면 지옥에 갈 거라고 하셨던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이미 단호하셨지만, 선생님들의 생각은 다 다르셨습니다. 그러니 더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생각에는 복잡할 때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하던 일이니 계속 할까요?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할까요? 저는 복잡하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때부터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묘한 승리감도 있었고, 부모님과 한 번도 뵌 적 없었던 조상님에 대한 죄책감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또 다시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 라는 거대한 명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방황하는 분들에게 답을 내려 드리기 보다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선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거대한 명제처럼 보이는 ‘우상 숭배’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함께 나누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이 ‘우상 숭배’ 뒤에 숨겨진 어떤 마음과 Good Bye! 작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작별하셔야 할 마음입니다. 사실은 ‘우상 숭배’라는 말 뒤에 숨어서 우리가 고이 간직하길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납 받고 싶고, 이해 받고 싶고, 가능하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새번역>
바로, 그 마음은 ‘탐욕’입니다. ‘우상 숭배’라고 쓰고, ‘탐욕’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욕심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 드릴 것은 욕심은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욕심마저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과 탐욕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하고 순수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탐욕은 무엇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더’ 라는 비교급이 만들어 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탐욕이란 단어의 헬라어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에 대해서 깊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플레오넥시아’는 ‘더욱 더’라는 뜻의 '플레온'과 ‘갖다’는 뜻의 '엑소'가 합쳐진 말로서 기본적으로, ‘더욱 더 가지려는 억제할 수 없는 열망’ 이나 ‘우상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주로 ‘탐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물질적 소유를 더 가지는(having more), 더 받는(receiving more), 결국에는 더 원하는(wanting more)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플레오넥시아’를 ‘권력의 굶주림’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서 이 단어는 돈, 명예, 그리고 육체적 욕망과 관계하여 사용됩니다. 또한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이 단어는 동료들을 이용하려는 정신적 태도로 ‘거만한 욕심’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매우 뻔뻔스러운 행위’, ‘과도한 야망’, ‘폭력’, 또는 더 좋은 상황에서 인간이 범하는 ‘후회할 양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유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관리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직하게 행하는 태도를 ‘플레오넥시아’라 했습니다.
아주 쉽게 한 마디로 말씀 드려 이 탐심이 왜 ‘우상숭배’라고 말씀 하셨는지를 보면 결국,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절제 없는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부재를 통해 자신만을 위한 절제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사실은 종교인에 가깝지만) 여전히 탐욕 가운데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의 부재를 인정하고, 공동체 안에 있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한 무절제 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게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신이 있다면 바로, ‘자신(自神)’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책의 이름이 ‘내가복음’이라고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욕은 ‘탐욕’입니다. 사실 성경은 이 가장 무서운 3가지에 대한 경계심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내가 아닌 예수라는 복음을 들어야 하며, 탐욕이 아닌 성령님의 채워주심을 바라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지금 탐욕과 얼마나 가까이 지내고 있으십니까? 무엇인가 남들과 비교하여 부족하기에 더 원하고, 더 받고,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주변 사람들의 목마름과 어려움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 나의 배부름과 충만만을 위한 삶은 아니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부재를 동시에 인정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부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익만 얻을 수 있다면 서슴없이 그 일을 행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탐욕이라는 녀석과 Good Bye, 작별할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탐욕’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탐욕의 반대말을 알고 계십니까?
탐욕의 반대말은 총 3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현재에 대한 충분한 만족’입니다. 결코 억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심리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만족한다고 느끼면 만족하게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현재를 바라보면서 행복하다는, 충분하다는, 나아가 감사하다는, 더 나아가 자랑까지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지금 내 현재에 대한 평가가 ‘행복이라는 만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새번역>
사실 바울은 3번이나 자신의 병을 고쳐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병을 고쳐 달라는 마음이 ‘탐욕’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울은 그 병을 고쳐 주시면 더욱 더 이방인 선교와 말씀 전파에 열심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바울의 그 현재에 대한 만족이야말로 더욱 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바울은 그래서 약점마저 자랑하면서, 그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만족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해 보이는 것이 많은데 하나님의 은혜가 현재 우리에게 충분하다구요?’ 바로, 이 마음으로부터 탐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충분하다! 족하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함으로, 현재에 대한 충분한 만족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불필요한 것들의 나눔’입니다. 탐욕은 가톨릭 교리서 1866항에 보면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악 중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탐욕은 ‘인색’이라는 단어 ‘Avaritia’ 와 함께 등장합니다.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탐욕은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재물 모으기에 급급하여 지나치게 인색함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기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탐욕과 작별하기 위해서는 그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삶을 멈추고, 내게 충분하기에 불필요한 것들의 나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기로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이미 탐욕과 좋은 안녕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나눔이 상대방에게로 이어지게 될 때 탐욕은 어느새 기쁨이 되고, 나눔을 통한 뿌듯함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람 중에 한 분인 연예인 ‘차인표’ 씨가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와서 했던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차인표씨는 아내 신애라씨의 권유로 인해 컴패션 자원 봉사활동을 하러 인도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기 싫어서 온갖 변명을 하다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도 마일리지로 업그레이드해서 제일 좋은 클래스를 타고 갔는데 그 칸에는 자신 혼자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게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편히 쉬면서 도착한 인도 빈민가에서 한 어린 아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다가가 손잡아 주고, 격려의 말을 건네려고 하는 찰나 그 아이가 먼저 손을 잡고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잘 왔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너의 삶이 앞으로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말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차인표씨의 마음이 열리고 바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작품 활동을 2년간 자제 하고 봉사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고, 준비하다 멈추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책도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가 뭘까 라는 질문을 통해서 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인기’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누어 준 거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잠깐 보관하게 된 인기로 무엇을 할 거냐 인기를 집에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받은 인기로 남들보다 이름이 알려져 있을 때 쓰임새 있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눔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물질 만능 주의인 시대 속에서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퍼스트 클래스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주변을 돌아 볼 여유도 없이 모으기에 급급한 게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을 당연함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빛을 밝히고, 사람이 가장 소중함을 알리며, 사랑을 전해 줄 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미 충분하기에,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나눔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혹시 그렇게 내어주고 나면 텅텅 빌 것 같은 걱정이 드시는 분께 꼭 한 번 작은 나눔부터 시작해 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작은 나눔이 얼마나 큰 채움으로 돌아오게 되는지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그 손길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8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탐욕의 반대말 세 번째는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식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아주 좋은 예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로 등장합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복음 12장 16~21절, 새번역>
탐욕을 부리게 되는 순간은 소위 지금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때입니다.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을 만큼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밭의 소출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더 많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해와 비와 환경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밭에서 더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축복 속에 있을 때, 그 때가 진짜 위험한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바로 이 부자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부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부리고 창고 짓기에 나선 그 어리석음을 예수님은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부자가 되어도, 그것이 설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라고 하더라도, 우린 그저 주신 것의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은 결코 주문이 아닙니다. 아무런 믿음 없이 툭하고 뱉어 내는 고백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때 쓰이는 말이 아니어야 합니다. 멋있어 보이려고 쓰는 말은 더더욱 아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고백해야 하는 말입니다. 정말 잘 나가는 순간에도, 멈추어 서게 하실 때에도, 축복에서 돌연 절망의 순간으로 전환시키시더라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하박국 3장 17~18절, 새번역>
이런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고백이 있어야 현재에 대한 충분한 만족을 통해,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삶이 되어 결국엔 이런 고백으로 완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탐욕은 ‘신기루’와도 같습니다. 평생을 가도 ‘만족’이란 끝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탐욕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탐욕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새번역>
욕심이 잉태하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주인의 물건을 일정 기간 ‘맡은 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주인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맡은 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깨달아 탐욕의 사람이 아닌 이런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 4장 22~24절, 새번역>
같은 권면을 오늘 골로새서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으며 마음에 새기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9A~10절, 새번역>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작별이 바로,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이라는 녀석입니다. 이번 추석 다른 ‘우상 숭배’로 고민하지 마시고, 이 ‘탐욕’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탐욕과 Good Bye! '작별'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청지기가 되시기를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나는 청지기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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