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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인 권기옥(중국) 과 2번 박경원(일본)!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는 1925년 중국에서 비행사가 된 권기옥과 1925년 일본 도쿄 가마다 비행
학교에 입학해 2년 후에 3등 비행사 자격 취득한 박경원이 있으니..... 권기옥은 박경원과 같은
1901년생으로 평양 근교 대흥면 삼수구리에서 1남 4녀중 차녀로 태어났는데 집에서 '권갈례' 로
불리게 되었으니 '일찍 생을 마감한다' 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권기옥은 가난한 집안 형편에 11살 때 부터 은단 공장에 취직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그녀는..... 12살이 되던 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 소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한 뒤에는 기독교 계통 숭의여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 합니다.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의 영향으로 반일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회에 가담해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반 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등사해 김선주
목사의 독립 선언문 낭독하에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고 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펼칩니다.
3.1 운동에 참가해 체포되어 3주 동안 구류를 산 그녀는 일본경찰에 주목을 받게되고 유치장에 구금되기
를 반복하던 중에... 1917년 5월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렸던 미국인 '아트 스미스' 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 을 갖게 되었다니 비행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시기는 박경원 보다 5년이 빠른 셈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인 김순일(金淳一)·김정직(金鼎稷)·김재덕(金在德)·임득삼(林得三) 등
과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 간 복역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1920년 8월 광복군 총영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소속 문일민(文一民)·장덕진(張德震)
등을 도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 접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
전도단을 조직하고 '브라스밴드단' 을 결성해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비밀 공작을 전개하였습니다.
그후 평남도경 폭파를 위해 폭탄을 현장에 운반하는 일을 돕게 되는데, 도중에 일본 경찰에
들통이 나자 '조만식' 의 도움으로 1920년 9월 중국인 멸치배 를 얻어 타고는 상하이로
망명해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권기옥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 '손정도' 목사의 집에 머물며 비행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는 중국 항공학교에 도전하나, '여자' 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하자.... 이후 그녀의 열정과 애국심, 그리고 오기 는 더욱더 불타오르게 됩니다.
1923년 12월 그녀는 임정의 추천을 받아 윈난(雲南 운남) 육군 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에
성공하는데 입학을 허가했던 '탕지야오' 는 조선 독립운동에 호의적 이었던 총사령관으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이국만리를 찾아온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고는 입학을 승인한 것입니다.
운남 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고는 북경의 군벌
풍옥상(馮玉祥) 군의 항공대 에 들어가서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항원으로 임명된후
1927년 장제스의 북벌(北伐) 때 손정방 군을 떠나 최용덕(崔用德)과 동로항공사령부
東路航空司令部)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총사령부 항공처 항공제2대 비행원이 되었습니다.
1928년 5월에는 난징에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에
독립운동가 '유동렬' 장군을 만났으며 또 이상화 의 형인 '이상정' 을 만나 결혼합니다.
1929년 2월 4일에는 항공서 임시편집위원회 편집위원, 5월에는 항공사령부 항공제2대
비행원, 6월 4일에는 항공서 항공서 항공제1대 상위 관찰사 등을 거쳐 1930년
10월 20일에 육군 소교가 되었고 이후 군정부 항공제1대 비행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중국 공군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대령에 까지 올랐던 그녀는 1931년 일본의 기습점령
으로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을 기총소사를 하면서 항일운동 에 기여
했으며... 1933년 항공서 계급 변경에 따라 육군 중교에서 공군 상위로 변경되었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충칭으로 이동해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 일본어
일본의 주요 인물 식별법과 성격 등을 연구해 강의했으며 1940년에는 공군 중교에 이르렀으며
중일전쟁 시 중경의 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에는 김순애·방순희·최선화·최애림·
최형록 등과 충칭 임정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 사교부장(社交部長)으로 활동합니다.
중국 공군에서 활약했던 그녀는 광복후 1947년에 남편 이상정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고 1949
년에 귀국해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대한민국 공군 창단에 중요한 힘이 되었고
6.25 전쟁 시기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전 재산을 장학 사업을 위해 기부하는등 마지막 생까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며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4월 19일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이후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항공인 독립운동가이자 최초
의 여성 비행사라는 상징성이 있어 공군에서도 교육자료에 꼭 포함시키는 인물이며......
2009년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두산 김) 10과 본문에 권기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
의 제목은 "I want to fly" 로 어린 시절, 비행사를 꿈꾸었던 계기 등을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2019년 8월 8일 다음웹툰에서 홍혜림 작가가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을 소재로 웹툰 "꿈의날개" 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박경원은 1925년 일본 도쿄 가마다 비행학교에 입학해 2년후 3등 비행사 자격 취득하여 한국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가 되었으니, 박경원은 1928년 도쿄 요요기 연병장 비행경기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한후 1933년 8월 7일 도쿄- 서울- 평양- 만주 비행을 위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해 하코네산 지나 50분후 시즈오카현 겐가쿠산 (玄嶽山) 에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1934 일본 시즈오카현 겐가쿠산에 박경원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시즈오카현
아타미시 의왕사에서 ‘박경원 추락사 50주년 추모제’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두곳 모두 하코네에서 가까운 곳으로 하코네산을 넘다가 추락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소름’에서 압도적 미장센과 치밀한 연출력을 선보였던 윤종찬이 3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영화 "청연" 을 개봉했는데, 공중 촬영 등의 스펙터클과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로
“근래 보기 드문 수작” 평가를 받았으나... 친일 경력이 문제되어 흥행에는 실패 했습니다.
그녀는 1901년 대구 에서 태어나 1922년 12월 10일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조선인 안창남
의 시범 비행을 보고는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으며, 간호사 생활을 하며
비용을 마련해서는 1924년 12월 의사가 되겠다며 부모를 속이고는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박경원은 일본 비행학교에 입교했는데 그녀의 꿈은 비행기를 몰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보는것 이었으니.... 택시 운전 등을 하며 학비를 조달해서
비행학교를 졸업하고는 3등 비행사를 거쳐 1929년에 2등 비행사가 됩니다.
그녀의 집안에서 부르는 이름은 사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얘기를 내내 듣고
자란 박원통(아들이 아니라서 원통하다?) 이었다는데... 솥뚜껑 처럼 두툼한 손에
힘이 장사라 어떤 남자와 맞붙어 씨름을 해도 지는 일이 없었다는 여장부 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일본군 장교와 사랑을 나누고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오해를 받아 일본군의
고문을 받기도 하는데, 일본의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행사 비행을 하다가 추락해
목숨을 잃었으니 부지런히 "꿈에 다가갈수록 조국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라?
첫 비행을 마치고 2등 비행사가 된‘경원’은 조선에 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진 때문에 조선의 젊은 여성들
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데 모금운동으로 기금을 마련할 때... 훗날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부장관의 도움을 받아 애기 "청연(靑燕)" 을 마련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박경원은 고이즈미 마타지로 장관과 신사참배를 하며 데이트를 했고 그녀의 고국 비행
의 명칭은 “日滿 친선 皇軍(황군) 위문 일반 연락비행”으로 관동군, 조선총독부,
협화회가 후원하는 제국 비행협회가 지어낸 명칭이라는데, 그녀의 비행기 “청연”
에는 육군대신, 체신대신, 척무대신, 도쿄시장의 축하메시지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아버지는 요코스카 해군 무기고 에서 목수 및 자재 조달업자로 일했으니 거친
환경에서 자랐다는데..... 형이 죽자 억지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고 30세의 게이샤인 아야베
나오와 결혼했는데 고이즈미의 딸 고이즈미 요시에는 사메시마 준야와 결혼하니 준야는 처가의
성을 취해 고이즈미 준야가 되었으며 1942년에 아들 준이치로를 낳았고 나중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
1889년에 고이즈미는 마이니치 신문 기자가 되었고 1903년에는 가나가와현 의원에 선출
되었으며 1908년 총선에서 하원 의원에 당선되았고 이후 12번 재선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38년 동안의 자리를 지켰는데 보통선거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도쿄
에서 대규모 집회를 이끌었고 1929년 통신 대신이 되었으니 이때 박경원을 만난 것입니다.
손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중의원 의원(12선) 과 내각 총리대신 (제87·88·89대) 을 지냈는데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참회했으며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했는데 2005년 8월 15일 과거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합니다.
일본 총리 무라야마의 담화는 “우리나라는 전쟁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諸國)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
일본총리 고이즈미의 담화는 “일본국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나라 사람들
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다시한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함과 더불어 비참한 전쟁의 교훈을 풍화
시킴이 없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는 일 없이 평화와 번영에 공헌해 나갈 것을 결의합니다”
하지만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과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빛이 바래긴 했는데 그래도
고이즈미 총리는 막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오래된 파벌정치 관행을 과감히 깼습니다.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나 한국의 누구 처럼 도어스테핑 으로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극장정치 ” 로 대중의 인기를 누렸는데.... 자민당내 비주류였던 그가 주류의 거센 저항
을 이겨내고 굵직한 개혁작업을 완수할수 있었던 무기가 바로 "도어스테핑" 이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결과 함축이니 8초를 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방송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발언영상 일부가 잘려나가 메시지가 왜곡될 가능성(악마의 편집?)
을 원천차단하기 위함이니 짧은 문구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니 이는 ‘One Phrase Politics" 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3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최고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으로 살다간 여인 박경원
이 죽자 일본은 제국비행협회 비행관에서 일본비행학교장 으로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장례식에서 그녀는“하코네의 여신”이라 칭송되고 조난 장소에는
돌기둥이 세워졌으며 일본제국의 "식민지 융화정책의 좋은 선전 자료" 가 되었습니다.
권기옥과 박경원을 두고 누가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지 논란이 있는데 해방 이전 여류비행사는 저
두사람과 훗날 1명등 3명 뿐이며 권기옥은 1925년 2월 28일 윈난항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20
일 중화민국 본부 ‘항공처 부비행사 임명장’ 을 받았으므로 권기옥이 박경원 보다는 2년 정도 앞섭니다.
그 시절 조선인들은 단 2명 뿐인지라 권기옥과 박경원을 똑같이 ‘여성 비행사’ 라고 불렀으니....
1926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中國 蒼空 에 朝鮮의 鵬翼 - 中에도 女流飛行家’라는 제목
으로 권기옥을 소개하고 있고 1928년 5월 25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을 ‘女飛行士’로 불렀습니다.
박경원을 소개한 동아일보 1926년 9월 4일자 기사 역시 ‘朝鮮 의 女流飛行士 박경원 양’ 이라
표현하였는데 민간인 비행사와 전투기 조종사를 구분하는 것은..... 비행기가 무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때는 훨씬 후대라는 의견이 있으며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
자료실이나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 권기옥을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년)
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총 7000시간을 비행했다" 고
기록하고 있고 또 초창기 여자 비행사로 권기옥- 이정희- 김경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여성 비행사 이정희(李貞喜, 1910년 1월 26일) 는 여성 비행사 1세대 3명 가운데 한 사람
으로 3번째 비행사이니 일제시대에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정희는 광복후인 1949년 1월 10일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되고 대위로 진급했으나 6.25 때 피랍되었습니다.
이정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서 비행 기술을 배우고 1931년에
귀국했는데 1946년 5월 24일 최용덕, 이영무 등 남성 비행사를 비롯하여 권기옥,
이정희 등 200여 명의 항공계 인사들은 한국항공건설협회를 만들었고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한때 무용가로 진로를 바꾸어 무용 연구소를 열기도 했습니다.
여성 비행사 김경오는 1948년 공군사관학교 1기생을 모집하며 여생도 또한 15명을
모집했는데 여성 3백여명이 시험을 보았고 합격했지만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버리
겠다며 방문을 걸어잠그니 창문을 열고 맨발로 탈출해 친구 신발을 빌려신고
김포비행장으로 가서 2년후 졸업했지만 공군에서 여자는 비행기에 태워주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탈수 없는지라 14명은 포기하고 나갔지만 김경오는 대통령이 기지를 방문했을
때 다짜고짜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다고 호소해서는 겨우 비행기 조수 자리에 2번
탄후 1952년 5월 12일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싸서 유서와 함께 어머니께
건넨후 50시간의 첫 단독 비행 임무를 받아 대한민국 1호 여류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중국 하늘을 날은 애국소녀의 얼- 최초의 우리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와의 인터뷰”, “한국
최초의 여자 파일럿 권기옥씨의 슬픈 8ㆍ15”등 에서 권기옥을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밝히고
있으며 권기옥을 한국 최초일 뿐만이 아니라 ‘동양 최초의 여성 비행사’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성 비행사로는 안창남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1919년 가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풍옥상군의 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왈보를 최초의
비행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으며 1920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미주 교포들의 후원
을 받아 캘리포니아에 세운 윌로스 비행학교의 졸업생 6명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라는 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