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孟思誠)의 묘... 조선의 청백리. 황소타고 피리불며 다니던 정승
맹사성은 고려말 공민왕 9年 (1360)에 태어나, 조선 세종 20년(1430)에 죽은 청백리 재상이었다. 호(號)는 고불(古佛), 고향은 개성이지만, 대부분을 충청도 온양에서 지낸다. 그리고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의 최영장군의 손녀 사위이다. 1386년(고려 偶王)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말부터 조선 세종때까지 벼슬을 지내며, 청백리, 효자 등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특히 음률(音律)에 밝아, 박연과 함께 당시의 음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었으며, 현재도 맹사성 전국 국악대회가 열리고 있다.
孟氏의 유래
맹사성은 중국 孟子의 후손이다. 맹자의 38代孫인 맹방립의 둘째 아들 맹승훈이 유교를 전파하고자 신라(진성여왕)에 건너와 유교를 전파하였고, 진성여왕은 조정에서 일해주기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신라 백성에게 유교를 전파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 孟子의 39대손인 맹승훈이 신라에 머물며 살면서, 그 후손이 맹사성이며, 즉 맹자의 54代孫이 된다.
맹사성의 아버지는 맹희도로 개성에서 정몽주와 같이 과거시험 준비를 하였으나, 정몽주가 먼저 장원급제하게 된다. 1년후 맹희도도 과거에 급제하고, 그 해에 맹사성도 태어났다.
맹사성과 최영장군
맹사성과 최영장군은 한마을에 살았다. 최영의 집앞에는 배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하루는 최영이 낮잠을 자며 꿈을 꾸는데... 龍이 나타나 배나무 위에서 용트림하며 승천하는 꿈을 꾸게된다.
잠에서 깨어 최영이 마당에 나와보니 어느 소년이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고 있었다. 맹사성은 정중히 사과하고 물러갔지만, 최영은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를 찾아가 꿈얘기를 하며,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후일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맹사성의 어린 시절, 고려는 홍건적과 왜(倭)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웠고, 또한 공민왕은 왕후인 노국공주가 죽자, 나라살림은 관심이 없고, 왕후의 죽음만을 슬퍼하며 지내고 있었다. 공민왕은 신돈(辛旽)에게 정치를 일임하고, 신돈의 횡포는 심해져서 맹사성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관직을 잃는다. 어머니도 오랜 병 끝에 맹사성 10살되던 해에 죽는다.
이런저런 어려운 사정으로 맹사성은 25세에 뒤늦게 성균관에 입학하였고(小科에는 19세에 급제하였다) , 2년만인 27세에 초시,복시,전시 등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권근(權近. 정도전과 더불어 조산개국에 기여한 대학자이며 교육사상가)은 스스로 맹사성의 스승이 되기를 자원하였을 정도로 맹사성의 천재성을 인정하였다.
고불(古佛) 맹사성은 76세에 자진하여 은퇴할때 까지 49년을 벼슬했으며, 다양한 벼슬로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려말, 조선초 이성계와 맹씨 집안은 원수지간이었다.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는 조선에의 변절을 거부하고 소위 두문동72賢으로 불에 타 죽었고, 아버지 맹희도 또한 그 곁에 숨어있다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또한 맹사성은 이성계의 적인 최영장군이 손녀사위이었으며, 정몽주는 아버지 맹희도의 절친한 친구이었다.
아버지 맹희도는 최영장군의 집인 온양에 은신하며 살다가, 조선 건국이 끝나자, 아들 맹사성을 불러 조정에 나가 일하기를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맹사성은 벼슬에 오르는데.. 태종시절 대사헌을 지냈다. 당시 太宗의 사위는 조대림..그는 영의정 조준의 아들이기도 했다. 조대림은 어리석어서 부하의 꾐에 빠져 백성의 재산을 갈취하거나, 태종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장난을 꾸미기도 하였다.
이에 대사헌 맹사성은 직접 취조하며 그에게 벌을 주었다. 이에 격분한 태종은 왕실을 무시한다며
그를 죽이라고 지시한다. 이에 맹사성의 스승인 일등공신 권근, 하륜 등의 적극적인 만류로 맹사성은 곤장 100대를 맞고 한산으로 유배된다. 이때 맹사성의 외아들은 고문에 죽는다. 곧 후회한 太宗은 다시 벼슬에 복귀시키고....
이렇게 76세에 은퇴하여, 3년후 그는 죽는다. 장수한 셈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크게 슬퍼하여 장례에 도움을 주라고 지시한다. 世宗은 그를 평가하여 ...그는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온후자애하여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일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말한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맹사성이 남겨놓은 뚜렷한 업적은 별로 없다. 세종은 여러 벼슬을 주지만, 위의 평가대로 병조(兵曹)와 형조(刑曹)의 일은 한번도 맡기지 않았다.
맹사성이 파주군수를 하던 시절...강원도 오대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선사(懶瓮禪師)를 찾아 간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나옹은 " 그것은 매우 쉽습니다. 나쁜 일 하지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맹사성은 " 그런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치인데, 먼길을 달려 온 나에게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옹은 녹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으니 맹사성은 마지못한 듯 다시 앉았다. 그런데 스님이 찻물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물을 따르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나있는 맹사성을 바라보며 스님은 조용히 말한다. "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人品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하다가, 門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맹사성의 유물 (遺物) 5점
옥적 (玉笛..옥으로 만든 피리). 백옥방인(白玉磅印...옥으로 만든 도장). 포도문일월연(葡桃紋日月硯...벼루). 수정 비녀. 목칠도형배(木漆陶型盃...휴대용 음료수 잔)
공당문답
맹사성의 공당문답(問答) 일화는 유명하다. 청백리이면서 효자인 맹사성은 아버지가 홀로 살고있는 고향 온양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고향에 다녀오던 맹사성이 비를 만나, 주막집에서 묵게 되었다. 방에 앉아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맹사성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 같은 방에 묵게 된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저 밖에 낙수물소리가 "퐁당퐁당"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공당공당"하는 것도 같은데, 우리 말끝에 "공"자와 "당"자를 넣어 문답을 해보기로 하세...
맹사성 ... 청년은 어디를 가는공?
청년..... 한양에 간당.
맹사성.... 무엇하러 가는 공?
청년 ...... 과거 보러 간당.
맹사성 ... 내가 붙게 해줄 공?
청년 .... 어림없는 소리당.
평소 소탈하여 평민과 같은 복장으로 다니는 맹사성을 청년은 보잘 것 없는 늙은이가 헛소리한다고생각하면서도 재미있어 하였다.
그후 과거에 급제한 청년이 맹사성에게 인사드리러 갔는데, 맹사성이 그 청년을 알아보고 "어찌 된 일인 공?" 하였다. 깜짝놀란 그 청년은 " 죽어지어당..."하면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고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의 충신 최영장군의 손녀 사위이다. 이 곳은 최영장군이 태어난 곳인데 맹사성이 은퇴 후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
흑기총(黑驥塚)
어느 봄날...맹사성이 온양의 고택(古宅) 뒷산 설화산에 오르는데, 아이들에게 시달림 받고 있는 검은 소를 보고, 아이들을 호통치어 보냈다. 검은 소는 고맙다는듯이 꼬리를 흔들며 접근하더니, 끝내는 집에까지 따라오자, 맹사성은 할수없어 하인에게 키우라고 지시하니 아주 잘 자랐다.
그 후 맹사성이 죽자, 그 검은 소도 슬픔을 못 이겨 먹지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주위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흑기총(黑驥塚)이라 이름도 지어주며, 해마다 벌초도 해주고, 잔도 부어 주었다고 한다. 맹사성의 묘에서 약 30m 곁에 있으며, 봉분이 얕다.
TV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맹사성이 소를 타고 피리불며 가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