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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北 朝 時 代
北 齊 王 朝 世 家
北齊(북제) AD. 550∼AD. 577 위치 화북 동부 성 高(고)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文穆皇帝(문목황제) | 高樹(고수) | 鄴(업) | 河北省(하북성) | |||
神武皇帝(신무황제) | 高歡(고환) | 문목황제의 아들 | ||||
獻武皇帝(헌무황제) | 高歡(고환) | 문목황제의 아들 | ||||
文襄皇帝(문양황제) | 高澄(고징) | 헌무황제의 아들 | ||||
AD. 549∼AD. 550 | 齊王(제왕) | |||||
제 1대 | AD. 550∼AD. 559 | 文宣皇帝(문선황제) | 高洋(고양) | 헌무황제의 차남 | ||
景烈皇帝(경열황제) | 高洋(고양) | 헌무황제의 차남 | ||||
제 2대 | AD. 559∼AD. 560 | 愍悼王(민도왕) | 高殷(고은) | 문선황제의 장남 | ||
제 3대 | AD. 560∼AD. 561 | 孝昭皇帝(효소황제) | 高演(고연) | 헌무황제의 6남 | ||
제 4대 | AD. 561∼AD. 565 | 武成皇帝(무성황제) | 高湛(고담) | 헌무황제의 9남 | ||
제 5대 | AD. 565∼AD. 576 | 溫國公(온국공) | 高緯(고위) | 무성황제의 아들 | ||
哀皇帝(애황제) | 高儼(고엄) | |||||
제 6대 | AD. 576∼ | 安德王(안덕왕) | 高延宗(고연종) | 문양황제의 5남 | ||
제 6대 | AD. 577∼ | 幼主(유주) | 高恒(고항) | 온국공의 아들 | ||
AD. 578∼AD. 580 | 范陽王(범양왕) | 高紹義(고소의) |
문목황제(AD. 472∼AD. 526)
북제의 추존 황제이자, 고환의 아버지다. AD. 472년, 高謐(고밀)과 叔孫氏(숙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북위 때 회삭진에서 장군을 지냈다. 아내 한씨도 문목황후로 추존되었다. 그의 아버지 고밀 (AD. 428∼AD. 472)은 북위의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高湖(고호)의 삼남이었다
신무황제(AD. 496∼AD. 547)
그는 북위의 옛 수도인 平城(평성)에서 머슴으로 살았다. 선비족인 廔內干(누내간)의 눈에 띄어 그의 딸 누씨와 결혼했다. 그후 재산을 팔아 그 돈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그의 매형인 尉景(위경)을 비롯하여 司 馬子如(사마자여). 劉貴(유귀). 賈顯智(가현지). 孫騰(손등). 侯景(후경). 蔡儁(채준)등이 모였다. AD. 525 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자 杜洛周(두낙주) 부대에 합류했다가 곧 탈주했다. 결국 爾朱榮(이주영) 밑으로 들어갔다. 이주영이 낙양으로 진격할 때 선봉장을 맡았다. AD. 531년, 紇豆陵步番(흘두능보번)이 효장제 의 복수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자 고환은 이주조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처형했다. 이 전투 후에 이주조는 고환을 신뢰해 의형제를 맺었다. AD. 532년, 효문제의 손자인 원수를 황제로 삼았다. 고환은 대승상이 되어 실권자가 되었다. 또 고환은 자신의 장녀 고씨를 효무제의 황후로 보냈고 이에 고환은 발 해왕에 봉해졌다. AD. 546년, 사망했다.
문양황제(AD. 512∼AD.549)
고징은 고환과 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AD. 525년 두낙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환은 여기에 합류했 으나 두낙주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위경. 段榮(단영). 채준 등과 함께 떠났는데 이때 누씨와 고징 은 소를 타고 떠났다. 도망칠 때 고징이 여러번 계속 소에서 떨어져 고환이 죽일까 생각했지만 단영이 그의 목숨을 여러번 살려주었다. AD. 531년, 고환은 이주영 일족의 신하로 있었는데 이주영 사후 이주조 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대항했다. 이때 고환의 먼 친척뻘인 高敖曹(고오조)가 반대했는데 고환은 고징을 보내 그를 설득했다. AD. 534년, 고환과 효무제가 서로 세력싸움에서 효무제가 열세였기에 장안의 우문 태에게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이 돌아올 것을 요청해도 반응이 없자 효무제의 사촌인 효정제를 세웠고 북 위는 둘로 나눠어졌다. 즉 장안을 중심으로 우문태가 효무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서위와 낙양을 중심으로 고환이 효정제를 옹립하여 장악한 동위로 나눠졌고 곧 고환은 동위의 수도를 낙양에서 업성으로 옮겼다.
AD. 535년, 고징이 고환의 첩 정씨와 간통하자 화가 난 고환은 고징을 폐위기키려 했지만 사마자여가 부인 누씨를 생각해 참으라고 했고 폐위는 없던 일이 됐다. AD. 540년, 고징이 효정제의 누이 馮翊公主 (풍익공주)와 결혼했다. AD. 543년, 그의 심복인 崔暹(최섬) 때문에 장수 高仲密(고중밀)이 반란을 일으켰 다. 고중밀은 처음에 최섬의 누이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를 버렸고 그로 인해 둘 사이가 벌어졌다. 최섬은 고중밀의 잘못을 찾으려고 하던중 고중밀의 새로운 아내 李昌儀(이창의)가 너무 이뻣기 때문에 고징이 그 녀를 겁탈하려고 했다. 이창의는 도망갔고 고중밀이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후 동위가 호뢰를 함락했 고 이창의는 업성으로 보내져 고징의 첩이 되었다. AD. 547년, 고환이 사망했다.
제 1대 문선황제 고양(AD. 526∼AD. 559)
동위의 대승상 고환과 婁氏(루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AD. 547년, 고환이 죽었을 때 고징은 이미 조정 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孝靜帝(효정제)가 고징을 죽이려 하자 이를 알아차리고 효정제를 함장당에 연금했다,. AD. 549년, 고징은 황제가 되기위해 심복들을 데리고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 도중에 음식을 나르던 시종 蘭京(난경)에게 살해되었다. 고양은 이때 업성에 있었는데 곧바로 군사를 모아 난경과 공모 자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고징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양은 고징 사후 혼란을 잠 재우고 자연스럽게 동위의 대권을 손에 넣었다. AD. 550년, 고양은 효정제에게 압력을 가했고 두 달후 제왕에 봉해졌다. 그후 효정제로부터 선양받으면서 동위는 멸망하고 북제가 개국되었다. 즉위 후 세금을 공평히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부의 정도에 따라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거두고 가난한 사람들 에게는 덜 거둬들인 것이다. 아버지 고환과 형 고징처럼 수도를 업성과 진양 둘로 나누고 晉陽(진양)을 효율적인 제2의 수도처럼 사용했다. AD. 552년, 고양은 누이의 집을 방문해서 잔치를 벌였는데 누이는 폐위된 효정제의 아내로 효정제는 선양 후 중산왕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고양은 잔치를 벌이다 누이가 자리를 뜨자 술에 짐새의 독을 타서 중산왕을 죽여버렸다. 고양은 황제의 예로 업성 북쪽에 중산왕의 장 례를 치러주었지만 이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덤을 파헤쳐 관째로 장수에 던져버렸다.
그 후 양나라 원정 도중에 고양은 더욱 난폭해졌다. 그는 후궁 설씨가 사촌인 高岳(고악)과 사통한 것을 알고 이것을 질투해 고악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 후 설씨도 죽여 몸을 조각조각 내었다. 술만 취하면 정 신이 이상한 것 같았다. 하루는 아버지 고환의 첩인 爾朱氏(이주씨)도 강간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 자 살해했다. AD. 557년, 동생 고환이 황제가 되리라고 의심하여 고환을 체포하여 업성으로 압송되었다. 이 에 동생 고준이 고양의 행동을 비판하자 고준 역시 체포하여 두 형제는 나란히 지하 감옥에 갇혔다.
고양은 동생인 고준과 고환이 갇혀있는 감옥을 방문했는데 처음에는 이들을 풀어주려 했다. 하지만 동생 高湛(고담)이 창을 들어 그들을 찔러버린 다음 감옥에 불을 질렀으며, 이들의 아내와 첩들을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여름. 고양은 북위의 황족 원씨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의심해서 효정제의 세 아들을 포함해 원씨 일족들 700여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다음 그 시신들을 장수에 버렸다. 이후 장 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에서 사람의 손톱과 손가락이 나와 주민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직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은이 뒤를 이었다.
제 2대 민도왕 고은(AD. 545∼561)
AD. 547년, 고환이 죽자 고징이 뒤를 이어 받았고 고징은 AD 549년에 시종 난경에게 암살당했고, 아버 지 고양이 그 뒤를 이었고 고양은 AD. 550년, 효정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아 북제를 건국했다. 즉위 후 고양의 아내 이씨가 한족이라는 이유로 황후가 되는 것을 몇몇 관료들은 반대했지만 고양은 이씨를 황후 로 삼았고 고은을 황태자로 삼았다. 고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려깊었다. 스스로 도덕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다 보니 부황 고양은 고은이 나약하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고양은 술만 먹으면 동생 고연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주정을 부렸기 때문에 계승 문제가 일었다. AD. 559년, 고양이 죽기전 고은 이 너무 어리고 유순한 것을 걱정하면서 고연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래도 고은이 뒤를 이었다.
고양의 유언에 따라 조정은 그가 신뢰했던 楊愔(양음). 高歸言(고귀언). 燕子獻(연자헌). 鄭頤(정이) 등이 장악했다. 이 때 고연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고, 황태후 누씨도 고연이 황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래서 양음은 고연의 동생 高湛(고담)이 권력을 잡을까 두려워하여 그들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다.
연자헌 등은 황족 일파의 가장 큰 어른으로 권력를 휘두리고 있던 태왕태후 누씨를 가택에 연금시키려는 계획을 새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누씨는 이 사실을 두 아들에게 일렸고 두 형제는 고귀언. 賀拔仁(하발 인). 斛律金(곡율금) 등과 함께 매복을 했다. 고연의 지방관 임명식이 열리는 날 이들은 양음. 가주혼천 하. 송흠도 등을 구타한 다음 사로잡았으며 고연은 궁으로 들어가 양음과 그 일파의 죄를 고하고 처형했 다. 대권를 손에 넣은 고연은 가을 태황태후 누씨는 폐위한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고은은 폐위되어 제남 왕으로 강등되었으며 업성의 별궁에 유폐되었다. AD. 581년, 고귀언은 고은이 힘을 길러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고연에게 고은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듣고 고연은 고은을 진양으 로 소환하고 술에 독을 타서 고은에게 보냈다. 그는 술 마시길 거부했지만 결국 교살 당했다. 고은의 아 내 이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비구니로 생을 보냈다.
제 3대 효소황제 고연(AD. 535∼561)
동위의 실권자 고환과 누씨의 6남으로 태어나다. 그는 총명했고 특히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AD. 538년, 3살의 나이로 상산공에 봉해졌으며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한서를 좋아했다. AD. 550년, 둘째형 고양이 동위 효정제로부터 양위 받아 북제의 문선제로 즉위했다. AD. 559년, 고양 이 죽기 전 황제하고 싶으면 니가 해라. 대신 내 아들은 죽이지 마라. 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고은이 황제 가 되었다. 550년. 재상 양음은 고은의 숙부들인 고연과 고담을 지방관으로 삼아 수도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된 두 형제는 高歸彦(고귀언). 賀拔仁(하발인). 斛律金(곡율금) 등과 함께 매복하여 고은의 지방관 임명식이 열리는 날 이들은 양음. 가주혼천하. 송흠도 등을 사로잡고 처형했다. 이리하여 문선제 고양이 임명한 고연의 측근들이 모두 제거되고 고연이 실권을 잡았는데 그의 조언자들인 玉唏(옥희). 趙 彦深 (조은심)등이 황제가 되라고 건의했다. 태황태후 누씨의 명의로 교서를 내려 고은을 폐위하고 고연 이 황제가 되었다. 고연은 근면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누씨와 형제들에게도 잘했지만 동생 고담은 고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에 고연은 고담을 황태제로 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지 않고 차남 高百年(고백년)을 황태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AD. 561년, 왕림을 시켜 진나라와 북주를 경계하게 했다. 이 무렵 업성의 고담이 세력을 키웠는데 고연은 계속해서 진양에 머물렀고 수도인 업성은 고담이 통제하 고 있었다. 이때 고귀언은 폐위된 고은이 힘을 길러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고연에게 고은 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고연은 고은을 진양으로 소환했는데 고담은 고연에게 불만이 있었 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려고 했는데 점쟁이의 말을 듣고 고은을 진양으로 보냈다. 고연은 술에 독약을 타서 고은에게 보냈는데 술마시길 거부하자 교살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고연은 곧 후회했지만 소용 이 없었다. 겨울 고연은 사냥중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태황태후 누씨가 와서 고은이 어디 있 느냐고 묻자 고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화가 난 누씨는 저주하며 다시는 고연을 보지 않았다. 고연은 자기 가 곧 죽을 것을 알고 황태자 고백년은 너무 어리니 황위는 동생 고담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그후 효소 제가 죽자 동생 고담이 황제에 올랐다.
제 4대 무성황제 고담(AD. 537∼AD. 568)
AD. 544년, 아버지 고환은 유연과 동맹을 맺기 위해 유연의 칸 욱구려암나진의 딸을 고담에게 주었다.
AD. 559년, 문선제 고양이 죽고 그의 아들 고은이 황제가 됐는데 형 고연과 재상 양음 간에 세력 다툼 이 일었다. 결국 고연이 양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했다, 이후 고연은 晉陽(진양)으로 돌아갔 고 鄴城(업성)은 고담이 맡았다. AD. 560년, 고연은 결국 조카 고은을 내쫓고 황제가 되었는데 고연은 황제가 된 후에도 진양에 머물렀고 고담은 그대로 업성을 지켰다. 원래 고연은 자기가 황제가 되면, 고담 을 황태제로 삼기로 했으나 막상 황제가 되자 자신의 아들 고백년을 황태자로 삼았고 이 때문에 형제간 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AD. 561년, 고연이 사냥중에 낙마로 생긴 상처로 사망하자 고백년이 어렸으므 로 유언에 따라 고담이 뒤를 이었다. 고연은 사망전 고담에게 편지로 “내 아들은 잘못없으니 황제가 되 드라도 제발 죽이지는 마라“, 라고 썼다. AD. 562년, 高緯(고위)를 황태자로 삼았다. 고담이 황제가 되자 형 문선제 고양의 황후였던 이씨와 강제로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는 형수인 이씨에게 자기의 요구를 응 하지 않으면 아들 고소종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임신시켰다. 그 후 이씨는 딸을 낳았는데 던져죽 였다. “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나는 네 아들을 죽이겠다“ 직후 고소종을 불러 이씨가 보는 앞에서 폭 행하고 활을 쏴 죽여버렸다. 또한 이씨도 궁에서 내쫓아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게했다. 그후 고백년도 죽여버렸다. AD. 568년 고담은 병이들어 사망했다.
제 5대 온국공(AD. 556∼577)
아버지 고담과 무성황후 호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AD. 561년, 아버지 고담이 황제로 즉위한 후 황태자가 되었으며, 핵심장군이었던 斛律光(곡율광)의 딸과 결혼했다. AD. 년, 화사개와 조정의 건의에 따라 고담은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고위는 8살의나이로 황제가 되었는데 고담은 태상황으로 있으 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AD 569년, 무성제 고담이 갑자기 병이 들자 화사개에게 뒷일을 맡겼고 화사개는 태상황의 죽음을 몇일 간 알리지 않았다. 호씨는 이제 태상황후가 되었다. 무성제 고담과 후주 고위의 치 세동안 북주는 조금씩 북제의 영토를 잠식했으나, 명장 곡율광이 반격을 가해 汾水(분수)이북의 많은 지 역을 회복했다. AD. 571년, 고위의 동생 낭야왕 고엄이 화사개가 권력을 잡고 전횡하고 있는 있는 것을 꼴사나워 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화사개를 죽여버리고 후주의 유모였던, 육씨와 그녀의 아들 역시 죽 여버리려고 했다. 곡율광은 고엄이 화사개를 죽인 것은 인정했지만 아직 황제에 충성하고 있기에 고엄의 부대를 해산시켰다. 그 후에 고엄을 사로잡아 궁으로 끌고왔는데 고위는 처음에 고엄을 용서했지만 겨울 에 劉桃枝(유도지)를 보내 결국 목졸라 죽였다. 그리고 고엄의 사생아였던 아들들도 죽였다.
AD. 576년, 겨울 우문옹은 대규모 원정을 실시하여 平陽(평양)을 함락시켰다. AD. 577년, 우문옹은 고위 와 북제의 관료 및 제왕들을 데리고 수도 장안으로 데리고 가서 온공에 봉했다. 겨울에 우문옹은 목제파 가 반란을 모의한 일로 처형되자 이 일에 연좌되어 고위를 포함한 고씨일족을 멸문시켰다.
제 6대 안덕왕(AD. 544∼AD. 577)
고징의 5남이며, 문선제가 즉위한 후 안덕왕에 봉해졌다. AD. 575년, 북주 무제 우문옹에게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위기에 놓이자 幷州刺史(병주자사)로 임명된 고연종은 晉陽(진양)의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AD. 576년, 북주가 진양을 공격해오자 황제 고위는 도망치고 말았다. 남겨진 진양의 신하들은 고연정을 황제로 추대하였으나 곧 북주와의 전쟁에서 패해 진양이 함락된 후 AD. 577년. 고위와 함께 살해되었다.
제 6대 유주(AD. 570∼578)
AD. 570년, 고위와 穆氏(목씨)의 장남으로 鄴(업)에서 태어났으며, 그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AD. 577년,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로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태상왕 고위가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고 더구나 北周(북주)의 황제 우문옹의 병력이 수도인 업성에 다가오고 있어서 나라는 거의 망한 상태였다. 태황태후 胡氏(호씨)와 황태후 목씨가 먼저 齊州(제주)로 피신하고 이어서 고항이 제주로 도망가자 마지 막으로 고위가 수도 업을 버리고 피신하였다.그리고 임성왕 고개에게 제위를 양위하려고 斛律孝卿(곡율효 경)에게 양위문서와 옥새를 가지고 영주에 보냈으나 곡률효경은 북주에 항복하였다. 고항이 고위. 태후 목씨와 함께 청주로 피신 할 때 신하들은 수십 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청주의 남등촌에서 결국 북주의 장군 蔚遲勤(웅지근)에게 사로잡혀서 업으로 호송된 후 장안으로 끌려갔다. AD. 578년, 穆堤婆(목제파)가 반란을 모의한 일로 처형되자 이 일에 연좌되어 다른 고씨 일족들과 함께 멸족되었다.
범양왕(AD. 546∼AD. ?)
AD. 577년, 북주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북제가 망하자 당시 북제의 청주자사 범양왕 직위에 있던 고소의 는 동궐에 망명한 상태였는데 북주에 투항을 거부하고, 영주 자사인 고보녕과 함께 북제 부흥 운동을 일 으켰다. 황제로 추대되면서 연호는 무평으로 정했는데 북제가 멸망하기 전에 쓴 영호와 같았다. 그러나 당시 북제의 영역 대부분은 북주가 차지해 버린 상태였고 고소의와 고보융 등의 부흥 운동 세력은 유주 일부와 요서 일대에 겨우 의지해야 했다. 고소의는 돌궐과 연합해 북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북주는 오 히려 돌궐과 연계해 AD. 580년, 돌궐군에 의해 고소의는 북주로 압송되었다. 고소의가 압송된 뒤에도 고 보녕을 중심으로 요서 일대에 있던 북제의 잔존세력은 AD. 583년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고소의는 촉 땅 으로 유배형에 처해졌고 몇 년 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