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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보선원卍 원문보기 글쓴이: 모봉형진
1강- 지혜제일 사리불
<강연>
빛고을 불교아카데미에서 기획한 부처님의 십대제자와 행복한 삶에 대한 이야기 첫 번째 장을 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내내 경전과 주석서를 읽으면서 감동에 젖었습니다. 그동안 부처님 제자하면 피상적으로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 등 이렇게 '제일'이라는 것만 알았는데, 실제로 경전을 통해 부처님 제자들의 행적을 살펴보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리불 존자의 삶은 겸손하고, 고결하고, 인간적인 진솔한 삶이 묻어나며 이런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불교 교단에 사리불 존자 같은 분이 한 두 분만 계신다면 인류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글자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생의 이치와 우주의 이법을 깨닫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깨침의 종교이며 더 줄여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는 삶은 괴로운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나 지혜만 있다면 불교가 한쪽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함께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자비란 지혜의 나툼입니다. 지혜의 발현이며 지혜가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 그것은 자비행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수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자하는 사리불 존자는 지혜를 완성하고 그 지혜를 온전하게 자비로서 행하신 부처님의 훌륭한 제자중의 제자였습니다.
이것은 제 칭찬이 아니라 부처님이 경전 곳곳에 사리불 존자에 대한 칭찬을 해 놓으셨습니다. 칭찬 받을 만한 지혜력과 자비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리불 존자는 왕사성 부근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흥미롭게도 옆 동네에서 목건련 존자도 거의 동시에 태어났습니다. 두 존자가 태어나면서 마을이 환해지고 광명으로 가득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아이는 자라면서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축제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기고 있는데 불현듯 사리불 존자 마음속에 "이것은 도대체 무슨 기쁨이 있고 인생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목건련 존자에게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인가?"라고 물어보니 목건련 존자도 "이건 참다운 행복이 아닌 것 같다"고 답합니다. 두 청년은 축제장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 뒤 참다운 삶, 인생의 가치 있는 삶은 어떤 삶인가를 계속 편력하면서 다니다가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하나인 산자야의 제자가 됩니다. 산자야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자 두 수행자는 유행을 합니다.
하루는 길을 걷다 보니 얼굴이 맑고 빛이 나는 사문을 만납니다. 두 수행자가 사문의 옷자락을 잡고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고 물었습니다.
"나는 고타마 싯달타의 제자입니다"
"그분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저는 고타마 부처님의 진리를 아직도 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 못해 여러분들께 법을 전하기가 송구스럽습니다"
두 수행자는 사문의 겸손한 태도에 감복하며 조금이라도 좋으니 부처님 법을 들려주기를 청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서로 인과연이 되면서 서로의 관계 속에서 모든 현상들이 생성, 지속, 소멸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사리불 존자는 앞 첫 구절에서 바로 수다원과에 듭니다. 그 전에 벌써 많은 수행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리불과 목건련 존자는 부처님을 찾아 제자가 됩니다.
이 두 분은 교단에 들어와서 그 이전에 있었던 많은 제자들의 시샘도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는 전혀 자기 스스로가 상수제자이며 부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마을에서 탁발을 하는 중에 날이 저물어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바로 옆에 따라다니면서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사리불 존자는 뒤로 빠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미승들을 돌보아 주고, 목마르면 물을 적셔주다가 늦게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리불 존자가 주무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자기 가사자락을 펴서 나무에 걸고 거적을 깔고 텐트를 만들어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리불 존자는 항상 대중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에서 대중들을 시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또한 사리불 존자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사리불 존자가 길을 빨리 걷다보니 속가사가 겉가사 밑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7세된 사미가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불 존자가 동자승에게 공손하게 합장하고 "참 고맙습니다. 동자시여, 저는 이런 고귀한 가르침들을 어떤 분한테도 받들어서 행하겠습니다"하고 절을 합니다.
사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지혜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지위를 막론하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사리불은 교단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서 모든 스님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하더라도 단체 조직사회에는 항상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루는 몇몇 스님들이 사리불 존자를 골탕을 먹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아 '정말 화를 내지 않는지'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개구쟁이 스님이 뒤에서 나무로 사리불 존자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사리불 존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터벅 터벅 걸어갔습니다. 도리어 때린 사람들이 무안해졌고 그들은 사리불 존자에게 참회를 합니다.
"존자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래요. 참회를 하면 모든 잘못은 다 없어지는 법입니다"하고 참회를 묵묵히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함께 생활하는 승려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참을성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행을 잘한 스님들도 참 힘듭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잘 가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수행력이라는 것은 자기마음을 잘 조절하는 힘입니다. 그 힘은 바로 지혜, 깨침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부단한 정진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리불 존자의 삶을 경전 속에서 읽으면서 정말 이분은 욕망의 찌꺼기까지도 전부 다 없애버린, 지혜를 완전히 성취하고 자비행을 행하신 훌륭한 분이시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교나 기독교 같은 고등종교 뿐만 아니라 미개하고 덜 분화된 원시적인 종교도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신앙형태를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신행활동을 종교학에서는 1차적인 신앙형태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스님들에게도 있고 목사, 신부님에게도 마음 밑바탕에는 1차적인 신앙형태를 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1차적인 신앙형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그것은 하등종교, 원시적인 종교로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등급 업그레이드 시켜줬을 때 고등종교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주위에는 논리적으로 불교를 잘 아는 불자들을 만납니다.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를 줄줄 외우지만, 실제 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2차적인 신앙형태가 강화되어 있는 것으로 밑바닥에 강하고 뜨거운 신앙심인 1차적인 신앙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조화 되었을 때 사리불 존자와 같은 '안팎이 똑같은' 참다운 수행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사리불 존자의 일화에서 어떤 가식, 논리가 있던가요. 사리불 존자는 자기가 깨친 그대로를 삶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리불 존자만큼 되려면 3차적인 신앙형태 쪽으로 또 한 등급 높아져야 합니다
기복적이고 감성적이며 무조건적인 1차적인 신앙을 이성적 분별력으로 명확하게 분별해서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게 아는 2차적인 신앙으로 높여 믿고 따르는 그것과 함께 직관력이 있어야 합니다. 직관력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수행을 통해서 무궁무진하게 계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선을 잘하시는 분들은 직관의 힘이 커져서 삶과 우주만법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호남 지역에서 큰 교화를 하고 가셨던 서옹, 청화 큰 스님 같은 분들은 그냥 친견만 하더라고 직관으로 승화된 수행의 힘이 그대로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거기에는 이론이나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한 차원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 형태로 커갈 수 있는 바탕은 수행에 있습니다. 이 고삐를 놓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빨리어로 사티(sati)라고 합니다.
사티는 본래 '기억'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기억보다 더 중요한 수행에 관계된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챙김'이라는 뜻입니다. 한문으로는 '생각 념(念)'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念을 분자해보면 뜻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티는 그냥 생각이 아니라 '이제 금(今)'자 밑에 '마음 심(心)'자로 '현재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지금 깨어있는 마음 이것이 사티라는 것입니다.
사티는 모든 불교수행에 있어 핵심이 되는 개념이고 실제 행법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불교수행을 하더라도 바르게만 하면 사리불과 같은 지혜와 자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방법을 모르고 무턱대고 하면 백날을 고생해도 진전이 없습니다. 제자리걸음인데다가 바른길로 나가지 못합니다.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마음을 잃지 않고 지금 여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삶을 살아갈 때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이 정착되어야 합니다. 수행은 꼭 절이나 수행센터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노력했을 때 삶 자체가 전체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정말 큰 스승이었던 것은 예화에서 느낄 수 있듯이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리불 존자와 같이 지혜 갖춘 자비행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사회는 건전하고 불국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 질의 응답
<문>
부처님 제자중에서 각각 특징을 지어 10대제자를 설정했을때가 언제이며 특징별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10대제자 설정시기는 문헌적으로 정확하게 찾을수는 없고, 빨리어 경전에 7대제자를 열거한 부분이 있다. 지혜, 두타, 설법제일 등 정확히 명기된 것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에 이미 제자들의 특성들이 확연하게 정해졌고 또 부처님 제자들끼리 서로 통용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경전에 보면 "사리불 존자보다 먼저 출가하고 연대가 높은 제자가 있는데 왜 상수제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상수제자는 이 생에 수행하고 원을 세워서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지목한 것이 아니다. 사리불 존자가 상수제자가 된 것은 무수한 생 동안에 계속 그런 행을 했고 지혜를 쌓았기 때문에 결과가 지금 나타날 뿐이다"고 답한다.
부르나 존자의 경우 항상 틈만 있으면 설법하러 나갔다. 자연스럽게 저 스님은 설법 잘하고 그렇게 부르는것이 인정 된 것이다.
인위적으로 부처님이 지정한 것은 아니라 자기 특성을 살려 부처님 법을 위해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자세로 불법을 행했기 때문에 그런 칭호들이 자연스럽게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종교의 존재 이유와 가치
돈을 번다든가 명예를 얻거나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는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다.
돈이나 명예, 의식주에 기초한 문화생활 없이도 우리는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 심각한 지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종교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종교는 물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을 더 좋게 만들기보다는
허무한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덧없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에 눈을 돌려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따라서 종교는 최고의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 하여 마루 종宗, 가르칠 교敎를 써서
‘종교宗敎’라고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인간 삶의 질이라든가 행복의 감도를 높이는 데
전혀 무관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종교는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갈등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불교는 마음을 잘 다스려 일상생활 속에서의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향상시켜 주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궁극적인 행복, 아무런 고통과 번뇌가 없는 행복,
설사 고통과 허무와 죽음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큰 자유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이다.
혹자는 그러한 삶의 중요한 문제는 철학哲學에서 다루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철학에서도 ‘나란 누구이며 세계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그러한 물음이 머릿속에서만, 학문과 이론의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다.
반면 종교에서는 그러한 궁극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묻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진리와 진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것이다.
믿고 실천하며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것이 신앙 및 수행 생활이다.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허무와 죽음의 바다를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을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 구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헤엄쳐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이처럼 절대적 존재나 굿과 점 같은 주술 등 자신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종교를 ‘타력종교他力宗敎’라 하고,
반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헤엄쳐 나가 저 언덕에 도달하는 종교를 ‘자력종교自力宗敎’라 한다.
그리고 불교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상존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자력종교로서의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어떠한 형태의 종교가 되었건 종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내면의 행복과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구원해 주는 희망의 빛이요 나침반임이 분명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맞게 되는 좌절과 고통이라는 계기를 통해,
그리고 현실생활의 중압감과 피로감에서 탈출하여 진정 행복지고 싶다는 염원을 통해,
혹은 그러한 계기를 맞지 않더라도 인생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명상 끝에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 어째서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가 후기-
이상의 내용은 일본 교토학파의 주요 멤버였던 니시타니 게이지. 히사마쯔 신이치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의 장에 여러 차례 나섰던 적도 있고 종교철학, 비교철학에 관한 책도 많이 편찬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종교철학에 대한 고민을 철저히 했었습니다. 벌써 8년전의 일입니다.
당시 감리교단에 축출당한 변선환 목사님,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현재 니시타니 게이지의 종교철학은 전지구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많은 동서양의 종교 철학자들이 연구중에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 한 마디를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되어가는 되어진 불교인이며, 되어가는 아직 되어지진 않은 기독교인이다.”
틱스님은 불교와 기독교, 석가모니부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지구상에 꽃핀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라고 했습니다.
간혹 앞으로 전개되는 글 속에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도 언급하면서 어떤 면에서 확실히 대비되는가도 언급해 두겠습니다.
물론 저는 불교가 좋아 불교에 몸담고 있습니다만, 불교인도 기독교인에게서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물론 한국의 극우, 극보수적인 기독교에서는 배울 게 없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