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와 단심가에 대한 고찰
하여가-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 향한 일펀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여가와 단심가는 무엇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을까? 이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장이 일할 사람이 필요해서 한 사람을 고용했다. 그리고 고용주인 사장은 고용인인 일할 사람과 고용 계약서를 작성했다. 고용 계약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고용인은 하루에 30시간을 일해야 하고 만약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땐 그 계약은 파기되고 만다. 그래서 고용인은 그 시간을 채우려고 온갖 힘을 다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채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루는 24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계약은 이미 계약의 시점에서부터 불가능했다. 이것이 단심가이다.
이 번에는 사장이 한 여자를 같은 계약 조건 하에 고용했다. 그런데 사장은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됐고 마침내 결혼까지 해서 부부가 되었다. 이 순간부터 이 여자는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벗어나 입사할 때 맺은 고용 계약서는 당연히 파기된다. 이 여자는 더 이상 고용계약서의 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이 여성이 “이제 내가 부인이 되었으니 사장인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해도 될까? 아니다. 오히려 이 여성은 자신의 남편을 더 기쁘게 하기 위하여 밥도 맛있게 하고 빨래도 하고 사장인 남편의 일도 더 열심히 도울 것이다. 이 여인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더욱 열심히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고용계약서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사랑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여가이다.
삶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유심(有心)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무심(無心)적 측면이다. 유심(有心)적 측면의 행위는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으나 무심(無心)적 측면의 행위는 무심(無心), 무념(無念)이기에 분별이 없으니 무목적성(無目的性)이고 무가치성(無價値性)인 특색을 지닌다.
‘단심가’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은 “~하라, ~하지 마라”에 얽매인 삶을 산다. “~하라, ~하지 마라”는 삶에는 분별, 즉 좋고 나쁨이 있다. 분별은 항상 이것은 좋고 저것은 바쁘니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 아래 있게 되므로 목적성(目的性)과 가치성(價値性)을 지닌다. 목적성(目的性)과 가치성(價値性)은 항상 상대적이므로 절대 진리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정몽주의 '단심가'와 같이 무엇을 제단하는 삶이다.
그 반면에 ‘하여가’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은 누림(enjoy: 은혜)의 삶을 산다. 누림(enjoy)의 삶은 누림(enjoy)이란 단어가 ‘안에(en)+기쁨(joy)’의 삶이므로 분별, 즉 좋고 나쁨이 없이 이것은 이것대로 좋고 저것은 저것대로 좋다는 기쁨의 삶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이방원의 시 ‘하여가’와 같은 삶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자들은 항상 ‘단심가’의 삶을 산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의 결국은 허무함이다. 반면에 누림의 삶을 사는 자들은 항상 ‘하여가’의 삶을 산다. 그런 삶을 사는 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안에 누림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 은혜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