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내 주님의 말씀 (요21장)
2024.11.10. 주일오전예배
오늘은 주님 모시고 ‘잊지 못할 내 주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21장에서 다섯 가지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기다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먼저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제자들은 그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이 보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는데 소득은 없었지요. 날이 새어갈 즈음에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신 모습이 보입니다. ‘그 친구들 조금만 더 기다리지, 그새 못 참고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네’ 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몰라요. 그 바닷가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몰라 뵈었습니다. 어제 낮에 제가 아파트 주차장 한쪽에서 몸을 푸는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식구님 두 분이 걷기 운동하시면서 제 옆을 지나가시다가 만났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목사님, 혼자 운동하시네요?” 저는 즉시 대답하기를 “아니오,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냥 생각 속에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과 조용히 몸을 풀면서 참 좋은 시간을 짧게나마 가졌습니다. 그날 새벽 예수님이 그 갈릴리 바닷가에 서신 것처럼 지금은 하늘 보좌에 계셔서 우리를 살펴보시고 오늘 우리 삶의 바닷가에 서 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종처럼 밤중에 깨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님이 언제 오실지 기다리는 그 아름다운 종처럼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면서 날마다 주님을 추구하며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시기 전에 제자들이 그 갈릴리 바닷가에서 기도하면서 조용히 주님을 맞이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둘째, 내 우편에 계시는 주님
예수님은 고기가 있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을 때 “없습니다.” 라고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그들은 지금 물어보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도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곧이어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말씀해주십니다. 시편 16편 8절 말씀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삶 속에 요동치는 환경이 자주 임했지만 다윗이 주님을 앞에 모시고 주님을 그 자신의 삶의 우편에 모시므로 요동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한 밤을 지내면서 오른편, 왼편, 뒤편, 앞편 그물을 많이 던져보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배 오른편에 한번 그물을 던질 때 큰 고기만도 백쉰세 마리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이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나의 삶에도 주님이 우편에 서 계시기를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제 오른편에 서 주십시오. 당신의 권세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이지 않지만 제 곁에 서 주십시오’ 그 말을 주님이 어렵게 생각하실까요? 실제적인 주님의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익하고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내 우편에 예수님을 모실 때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지금 잡은 생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생생하게 날뛰고 있는 살아 있는 생선, 지금 잡은 생선!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주신 식탁이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밤이슬, 새벽이슬처럼 이슬이 내린 후에 그 만나가 모습을 드러내지요. 광야의 식탁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아침에 해뜨기까지 기다리면 부패해서 썩어버렸다고 했어요. 그리고 해가 뜨면 부스러져버린답니다. 새벽같이 나아가서 만나를 거두고 자기나 자기 가족들이 먹을 분량만 거두면 되겠지요. 날마다 새롭게 주님의 은혜를 거두어 주님이 베푸시는 영혼의 양식을 힘입었으면 합니다. 저나 식구님들이 영혼의 양식뿐만 아니라 섬길 말씀을 받을 때에도 묵은 말씀 말고요. 일주일 전쯤, 조금 더 시간을 들인다면 십일 전 즈음부터 주님 앞에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깨달은 말씀, 먹은 말씀,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을 생생하게 전해갔으면 합니다. 예전에 천국 가신 목사님이 제게 개인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아우님, 다음 주간에 섬길 말씀은 이번 주 주일날 저녁에 받으시오. 늦어도 월요일까지만 주님께로부터 받는다면 여유 있게 묵상하면서 섬김을 잘 할 수 있을거요” 조그마한 섬김의 비결을 알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주일에 온종일 주님을 섬겼으니까 이제 마음의 허리띠를 푸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마음의 허리띠를 동이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지요. 지금 잡은 생선처럼 말입니다.
넷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전에 제자들의 그 형편과 비슷한 상황이 데자뷰처럼 나타납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잡지 못했던 형편이라던지,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의 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시간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초창기에는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지 않으셨지요. “나를 믿으라” 믿음의 관계를 견고히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재차 확인하고 싶은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창세기 2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모습이 나오지요.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에 데려가서 내가 지시하는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 청천 날벼락 같은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자기 아들, 사랑하는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리려는 순간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합격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온전한 삶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다 지켰으니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고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 것이지요.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하실 때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는 보화의 가치를 알고 자기 전 재산을 팔아서 보화가 감추어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모시고 가는 길이 이와 같이 나를 팔고 주님을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 말씀에 “나의 힘이 되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는 입에 바른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king James version에 “I will love thee 내가 당신을 의지적으로 사랑합니다.”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살아 있는 우리 식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땅에 던진 불이 붙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불 붙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곁에 있는 요한 사도의 마지막 길을 물어보았을 때 주님은 거기 신경 끄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생생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일이 아니지요. 그건 나중의 일이고, 먼저는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로 빈틈없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 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주님은 몇 가지만 하던지 한 가지 일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십니다. 마르다가 음식 장만한다고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마리아는 따라가지 않았지요.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이 좋은 편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언니의 분주함에 같이 하다가는 둘 다 영혼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간의 일이라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철저하게 홀로 가는 길로 따라가야 할 줄 압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 성의 부흥을 사도들에게 맡기고 사막의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러 갔습니다. 주님의 영이 이끌어 가셨지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에 주님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고 했는데 ‘흔연히’는 흔쾌히, 기분 좋게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마음을 쓰는 영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을 내가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이나 자녀를 돌볼 때에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깨어서 돌봐야 될 줄 압니다. 그 길이 주님 향한 철저한 신앙의 길이고 그 온전한 길이 가족과 이웃들에게도 더 유익하게 될 줄 압니다.
요즘 식구님들이 성서를 많이 가까이 하고 계시는 줄 아는데요, 성서는 생각해볼수록 천국의 보화가 가득 차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영양가가 풍부한 신선한 식품이 가득 들어있는 식량 창고이지요. 부지런히 들어가서 먹고 부지런히 주님과의 관계가 사랑 가운데 생생했으면 합니다. 잊지 못할 내 주님의 말씀! 식구님들이 힘입고 더욱 주님 섬기는 길에 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