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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수필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양희용(사무)
⊙제12회 수필아카데미 초청 강연⊙
- 주제: 창의적 글쓰기 십계명 -
강사: 양선규(대구교대 교수, 소설가)
- 목차 -
1. 글힘은 글로 키운다
2. 글쓰기는 창의력이다
3. 통째로 눈치껏 익혀라
4. 박학다식(博學多識)보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다
5. 길면 나누고 짧으면 합쳐라
6. 중요한 건 틀이다
7. 언어는 시스템이다
8. 세 가지 코드를 기억하라
9.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
10. 견물생심(見物生心), 사랑이 전부다
1. 글힘은 글로 키운다
‘생각의 그물’이나 ‘생각의 나무’ ‘마음의 지도’ 등을 그려보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창의적 글쓰기 지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뇌 활동의 기계적인 연속인 이른바 ‘생각 꺼내기 연습’이 아동들의 창의적인 글쓰기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올바른 창의성 교육의 선결 과제이다. 창의성의 발원지는 우뇌이다. 우뇌에서 요구하는 창의성은 텍스트 안에 있다. 과거 하이퍼그라피아를 앓았던 이들의 ‘과도한 리비도 에너지가 승화를 거쳐 대중들에게 제시된’ 작품들은 글쓰기, 특히 창의적 글쓰기의 훌륭한 안내서가 된다. ‘수학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격언은 글쓰기 공부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글이라는 글은 모두 맥락 생성적이기 때문에 그 맥락적 토대를 벗어난 생각 꺼내기 연습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토끼>라는 단어를 사용한 ‘생각의 그물’의 예를 들어 하나 들어보자.
처음에는 교사 주도의 시범을 통해 토끼의 모습 중 색깔을 설명하면 색깔에 따른 특징을 이야기하고 눈을 이야기 하면 학생은 얼굴의 한 부분을 찾아 이야기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토끼의 먹이, 특징 등으로 이끌자 학생은 설명, 시범에 따라 잘 따라 주었고 나름대로 생각을 조금씩 넓게 하였다. 철수가 만든 생각 그물을 보고 처음으로 작성한 것치고는 잘했다고 칭찬도 해주고 이렇게 잘 생각해보고 생각 그물을 작성하면 뒤에 글을 쓰는데 쉽게 쓸 수 있음을 설명하자 학생 역시 생각 그물을 이용하면 글을 쓰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눈치였다.
이 부분, 교사가 ‘생각의 그물’을 짜도록 지도한 내용은, 이를테면 아이의 장기기억(長期記憶)이 어떤 식으로 ‘정교시연(精巧試演)’을 통해 조직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아이가 한 일은 자유롭게 ‘생각’을 일으킨 일이 아니라 한 단어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기억들을 의도적으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맥락 중심의 의미생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파편적인 단어 연상(한정된 영역의 코드 파악)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좌뇌의 언어 활동(2차과정)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토끼>는 여러 가지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다. <토끼와 거북이>, <용왕과 토끼의 간>, <가축으로서의 토끼>, <설치류로서의 토끼> 등등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전경화(foregrounding)되는 의미가 서로 달라지는 단어이다. 그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진공 상태에서의 ‘그물이나 지도 만들기’는 오히려 아동기 창발적 문식력의 위축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용왕과 토끼의 간>을 패러디한 상품 선전의 예를 생각해 보자. 거대한 잠수함에서 내린 용왕에게 기자들이 묻는다. 요즈음은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다(이 때 ‘용왕’이라는 ‘맥락 속의 인물’은 ‘오직 자기 건강만을 위하는 존재’라는 내포를 지닌다). 그 물음에 용왕은 이렇게 답한다. “토끼 끝이야(이제 내 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토끼의 간이 필요 없으니), ***야(이 제품만 있으면 문제없다는 뜻이다)!” 이 광고 사례는, 옛 이야기의 패러디가 창의적인 맥락 위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적인 언어활동의 한 예로 꼽힌다.
언어는 그러한 역사적 함축 위에서 성장하고 소멸한다. 창의적 발상의 토대가 되는 이야기 자료로서의 ‘토끼와 거북이’, ‘용왕과 토끼의 간’은 위에서 예로 든 ‘생각 꺼내기’와 같은 절차를 거쳐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 꺼내기’에 속하는 모든 전 단계 학습은 이른바 브레인스토밍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브레인스토밍은 프로이트가 썼던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기법의 변형임이 분명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보통 브레인스토밍은 쉬운 형태로(그냥 긴장을 푸세요) 제시되지만, 정신분석가들은 진정한 자유연상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평생에 걸쳐 형성된 경직된 사고에서 탈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환자는 자유연상을 통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연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유된다.”라는 유명한 정신분석계의 한 마디 격언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2. 글쓰기는 창의력이다
창의적 사고 기능의 주 내용으로 거론되고 있는, 유창성(fluency), 융통성(flexibility), 정교성(elaboration), 독창성(originality) 등은 글힘의 수월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유창성, 융통성, 정교성, 독창성이 한 인간의 언어능력이 보여주는 현상적인 수월성(秀越性)의 정도를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능력이 인간 두뇌의 정보처리과정에서 어떤 위치와 과정 속에서 발현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작용과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나아가 그 능력의 향상에는 어떠한 자극이 효과적인지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추측만 가능할 뿐인데, 언어와 인지가 동일한 정보처리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언어가 인지의 한 부분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지심리학자(혹은 언어심리학자)들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에 의해서 형성, 발달된다. 선 ㆍ 후천적인 요소가 인간의 능력 향상에 어떤 방식과 비율로 작용하는가는 현재까지는,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다만, 양자가 상호텍스트성을 가지고 상승작용을 한다는 것만은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언어 능력의 이해적 국면과 표현적 국면 중에서 후자 쪽에서 보다 활발한 두 요소의 상호텍스트성이 발견된다는 정도가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표현적 국면에 있어서의 상호텍스트성’도 ‘표현’의 특성상(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그렇게 인지될 공산이 큰 것이어서, 우리가 인간의 언어 능력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로만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 자크 라캉의 ‘기표’와 ‘기의’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정보처리 이론, 그리고 최근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지심리학적 관점에 의지한 언어학 연구 등,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언어 능력에 대한 과학적 정보(그것의 신뢰성)는 아직까지는 시론적 차원에 머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그 정보들이 유소년기의 실천적인 언어 교육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언어 능력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 불과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토대로 한 교육학적 매개물을 구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가 하나의 독립적인 창의력이라는 것에 유념하는 것이 글쓰기 공부에서 훨씬 생산적인 태도가 된다.
3. 통째로 눈치껏 익혀라
좋은 글을 쓰려면 가능한 모든 매체에 접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식력(文識力, 글힘)의 수준은 결국 문화적 인용의 수준이다. 글쓰기는 주체의 인지과정 중에서 백과전서식 인용행위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 과정은 일반 인지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독립적이고 복합적이다(글쓰기 공부의 높은 단계에서 심층심리학-무의식에 대한 이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인지 체계가 여러 하위체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고 가정할 때에도, 언어는 다른 하위체계의 간섭을 받지 않는, 여타의 인지과정과 독립된 하나의 단원(module)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처음-중간-끝]으로 조직되어 있지만, ‘주제와 목적에 맞는 상위 화제’, ‘참신한 정보로 가득 찬 중심 글감’, ‘적절한 주제의 도출’ 등으로 고정된 순서나 위계로 구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서두에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무거운 단어’가 나와서 일찌감치 글의 흐름 전체를 선도하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가벼운 단어’들로만 일관되는 글들도 있다. 전자는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이고, 후자는 행간(行間)을 읽어야만 주제가 파악되는 경우이다. 중심단락, 중심문장, 중심단어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 기호를 배운다는 것은 기호 안에 있는 기의(내용)가 기표(표현)를 결정하는 양태를 알아낸다는 말이다. 기의가 기표를 결정하는 양태는 관습화되어 있다. 관습은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서로 나눈 기호의 체험에서 유도된 기대(期待)들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들은 책에 씌어 있는 것도, 누가 옆에서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눈치껏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형식상 언어는 의미의 가치체계이고, 하나의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이다. 유한수의 자의적인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체계는 약속된 가치들(계약된 가치들)의 체제이며, 이러한 언어는 추상적 체제로서 오직 ‘말하는 대중(speaking masses)’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언어는 개인 위에,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언어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려면 개인은 언어를 통째로 받아들이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4. 박학다식(博學多識)보다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공통된 특성을 보인다. 문장을 만들고 연결하는 일에 충분한 준비가 결여되어 있다. 계획도 연장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항상 새로운 기술이다. 기획하고 배우고 연마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오늘 아침 마당에 나가 잔디 깎는 일이 새로운 기술인가, 아니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이 새로운 기술인가?”라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답은 물론 ‘글을 쓰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쓸 때(이 글도 포함한다)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술’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그 글은 쓰레기 같은 글이다.
항상 글쓰기에 대한 아이디어나 계획을 세우고 유익한 강연 청취나 토론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 공부다. 세부적으로는 문장의 구성도 단순한 주어 동사의 연결에만 치중하지 말고(가급적 간결하게, 형용사나 부사를 많이 쓰지 말라는 사람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케바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적절한 수사를 동원해 자신의 주제를 뒷받침하도록 해야 한다. 응집성(應集性) 있게 글감을 조직하는 법을 체험적으로 익혀야 한다(문장의 주술호응이나 표면적인 단락간 협력 문제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글의 응집성은 주제에 대한 통일적인 이해와 소재의 응용에 대한 포괄적인 조망, 그리고 그때그때 필요한 순발력(은유, 환유 등의 비유나 상징적 표현의 동원)의 등장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수준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글감의 성격과 자신의 의도를 스스로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학다식보다는 일이관지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5. 길면 나누고 짧으면 합쳐라
모든 글쓰기는 자애적(自愛的) 성격을 띠고 있다. 글의 내용이 생성되고 그것이 조직화되는 데에는 무의식적인 심리에너지의 간섭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무의식적으로 싫은 것, 불쾌감을 주는 것, 상처를 건드리는 것, 자존심을 깎아 내리는 것, 알 수 없는 것 등은 일단 무의식의 검열에 걸리게 되어 있다. 퇴고(推敲)는 그러한 무의식의 간섭을 사후에라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된다. 글의 응집성 제고는 그 간섭을 최소화한 후 다시 추구되어야 한다.
텍스트의 성립 요건으로는 일반적으로 응집성, 응결성, 의도성, 수용성, 정보성, 상황성, 상호텍스트성 등이 거론된다. 그 중에서도 입문기 글쓰기 공부 과정에서 주로 문제되는 것이 응집성과 응결성이다. 응집성(cohesion)과 응결성(coherence)은 문장들이 모여 텍스트를 형성하기 위해서 서로 맺는 긴밀한 관련성을 뜻하는 말이다. 응집성은 형식적 ㆍ 통사론적 측면에서 여러 기제들을 사용하여 확보된 문장들 사이의 긴밀성이고 응결성은 내용적 ㆍ 개념적 ㆍ 의미론적 차원에서 확보된 문장들 사이의 긴밀성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구분이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고, 형식적 차원의 긴밀성과 내용적 차원의 긴밀성이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응집성(cohesion)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문장들 사이의 긴밀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제 중, 지시(reference), 대치(substitution), 생략(ellipsis), 접속(conjunction)은 주로 형식적 ㆍ 통사론적 측면과 관련되고 어휘적 응집성(lexical cohesion)은 내용적 ㆍ 의미론적 측면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문법적인 글다듬기는 주로 비문(非文)을 가려내는 작업에 한정하는 것이 좋다. 지나친 문법의식은 오히려 표현의 독창성, 다양성을 억압하는 경우도 있으니 유의하여야 한다. 어떤 문장을 비문으로 볼 것인가는 글 쓰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고도의 맥락적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좀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글을 써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조금 느슨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6. 중요한 건 틀이다
읽기와 쓰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읽기의 틀을 가르쳐서 쓰기로 나아가게 한다. 읽기는 해설(解說), 투사(投射), 시학(詩學)의 세 단계를 섭렵하도록 배려한다.
해설적 독서 행위는 ‘공적 의미의 확정’이라는 목표를 지닌다. 그것은 자연과학 서적이나 사회과학 서적 중의 일부에서는 하나의 규범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문과학, 특히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읽기 유형에서는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기초 작업적인 성격을 띤다. 그 영역에서 만약, 이 위계의 독서만을 행한다면 그것은 미숙한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해설적 독서에서는 전형적인 <틀>에 의해 텍스트의 파블라가 의미화된다. 파블라는 스토리 내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재료로서 사건의 연쇄이다. 사건의 이러한 연속성은 일반적으로 법칙성을 띠고 있다. 그 법칙을 사건의 논리라고 부르는데, 그 논리는 현실과 분리되어 텍스트 내적 인과관계에 종속된다. 작품 안의 논리는 현실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법칙은 과거의 독서 경험에 의해 <틀>을 형성하는데, 인용된 텍스트에서의 <틀>은 독서 주체가 수용하고 있는 규범적 예술양식(유소년기에 자주 접하는 TV 애니메이션, 설화, 동화, 만화 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해설적 독서의 기초 단계에서는 줄거리 혹은 메시지가 중심이 되고 복잡한 코드 혹은 포괄적 의미의 맥락(인간의 역사적 ㆍ 실존적 조건)은 의미화의 주변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코드(code)는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는데, 모든 코드화(encoding)는 장르의 내적 형식을 반영하므로 그것을 해독(decoding)하는 데에는 장르의 내적 형식에 대한 학습(사회적, 제도적, 규범적 차원에서의 교육이 이루어진다)이 요구되는 법이다. 해설적 독서가 깊이 있게 진행되려면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상 텍스트가 지니는 포괄적 의미의 맥락은 독서 주체의 인생관이나 역사관에 조회될 때 그 실체가 드러나므로, 주어진 텍스트가 전달하는 메시지 파악에 주력하고 있는 해설적 독서에서 그 진면목이 전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투사적 독서 행위는 ‘우연한 깨달음이나 터득’을 위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숙성된 ‘자기 이해’의 일반적인 자기표현 방식이다. 유소년기에 습득한 읽기의 <틀> 혹은 규범은 영향력을 잃고, 텍스트의 내적 형식이 파블라의 의미화에 크게 관여한다. 장르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사회 ㆍ 역사적 조건과 실존적 조건이 의미 형성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지각작용보다 상상작용이 우세하다. 상상작용은 내부 이미지의 연쇄인데 그것은 텍스트 내적 형식과의 상호 텍스트성 속에서 활성화된다. 기왕의 <틀>은 힘을 잃고 새로운 <틀>이 짜이는 것이다. 코드와 컨텍스트(맥락)가 주제 층위를 통어(統御)한다. 줄거리와 메시지는 코드와 컨텍스트 안에서 의미의 자가 증폭을 일으킨다.
시학적 독서의 층위는 다양하다. 메타언어의 속성이 특별히 강한 연구서나 비평서는 현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생성해 내는 이른바 원리와 구조에 그 초점을 맞출 것이고, 주체의 형성과 관련된 텍스트들, 이를테면 예술 작품이나 철학 서적들은 성기성물(成己成物, 자아의 성취에 그치지 않고 환경의 변화에도 기여함, 단순히 무엇을 아는 사람이기보다는 무엇인가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의 수행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공적 의미의 확정’이라는 해설적 독서의 목표와 ‘텍스트가 모르는, 그러나 말하고 있는’ 의미를 구성하려는 투사적 독서의 지향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층위에 따라, 시학적 독서는 그 자체로 역설의 미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투사적 ․ 해설적 ․ 시학적 독서는 독서 주체에 따라 그리고 대상 텍스트의 속성이나 장르에 따라 그 위계가 달리 설정될 수가 있다. 보통의 경우(유소년기의 미숙한 독자들의 경우)는 투사적 독서 행위가 가장 먼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해설적 독서가 가장 아래에 놓이고 그 다음 투사적 독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학적 독서가 최상층에 놓이는 구조를 보일 수도 있다. 이미 일정한 ‘자기 이해’의 수준에 도달한 연후의 독서과정이거나, 독서의 마지막 단계가 ‘해체’를 전제로 할 경우에는 해설이 가장 하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7. 언어는 시스템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다. 우리가 어떤 장르의 독특한 언어 행위 유형을 두고 ‘시스템 언어’라고 부르고, 일반적으로 언어를 ‘시스템 언어와 자연 언어’라고 나누는 것은, 그러므로 언어라는 시스템 안에서의 하위 분류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두 가지 다른 타입이 있다.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정보의 ‘자가 증폭’이라는 부분이다. 일상의 일반적인 타입과는 반대로 바깥에서 받아들여진 정보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용자의 마음속에 있는 정보를 증가시키도록 자극하는 타입이 있다는 것이. 이러한 자가 증폭은 수용자의 두뇌 속에 산재되어 있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조직한다. 이 때 수용자는, 고정된 사실을 옮기는 단순한 수용 과정에서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동한다. 자주 거론되는 가장 기본적인 사례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나 리드미컬한 음악이, 명상이나 기하학적 도형 작업(혹은 규칙적인 패턴에 관련된 작업)을 선호하거나 시의 ‘반복되는 언어’에 매료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케이스에서, 내적인 정보는 조직화된 외부 정보의 영향 아래서 증가한다. 이런 현상이 더 복잡한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는 규범적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규범적 예술 텍스트는 전도된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다. 텍스트의 정보적 측면은 통제되는 반면 시스템의 ‘언어’는 비자동적인 메커니즘을 따른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 비자동적 메커니즘을 의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인 것이다. 자연 언어로는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텍스트의 ‘시스템 언어’는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물론, 규범적 텍스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적 코드화(codifying), 즉 일정한 약호체계의 도움을 받는 텍스트의 창조는, 우리가 자연 언어를 말하거나 쓸 때처럼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 부분은 메시지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있는 것이다.
비규범적인 텍스트가 정보의 원천이라면, 규범적 텍스트는 ‘환기시키는 힘’이다. 비규범적 텍스트에서 표면적 구조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정보 채널 혹은 연결 고리이다. 규범적 텍스트에서 구조는 정보의 본질이다. 구조는 수신자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보를 구성하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이들의 모험 소설 독서의 예를 상기해 보자. 그들은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를 전에 읽었던 모험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비교하고, 대조한다. 물론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아이들이 독서하는 동안 행하는 창조적 작업이다. 아이들이 왜 자꾸만 똑같은 책을 고르는지 의아해 할 때, 우리는 이 중요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8. 세 가지 코드를 기억하라
이야기는 세 가지 코드에 입각해서 지어진다. 기호학자들이 말하는 논리적 코드, 심미적 코드, 사회적 코드가 그것이다. 코드는 사람들이 기호를 계속적, 반복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관습화된 기호 사용들의 패턴들이다. 그것의 의미는 한 문화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매우 명백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코드가 커뮤니케이션의 두 수준, 즉 외시와 함축의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어서, 코드의 사용에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개인이 자기가 소속한 사회에서 성공을 하는지 못하는지 결정되기도 한다.
논리적 코드에는 대체코드, 신호와 프로그램, 과학적 코드, 점술 코드의 네 가지가 있다. 이 예들은 기호들의 계열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계열체 안에서, 이 코드는 하나의 기표에 단 하나의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논리적 코드는 어느 것이나 외시 의미만을 일으키도록 할 뿐, 함축적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체코드(substitute code)는 언어적 기능을 시각적으로 대체하는 코드이다. 알파벳, 모르스 부호, 수화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은 언어를 대체하는 코드들이기 때문에 기호 자체가 혼자서 <말>을 할 수 있다. 점술코드(mantic codes)는 과학성을 지향하는 종교적 코드이다. 예를 들면 점성술, 화투나 카드점, 손금보기, 해몽 같은 것들이다. 점술코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코드를 과학이라기보다는 확실성의 원리로 믿는다. 점술코드도 과학적 코드와 마찬가지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애매함이 없는 일대일 대응을 이루고 있다.
예술과 종교의 수많은 코드들은 심미적 코드이다. 논리적 코드가 자의적 상징기호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 미학적 코드는 도상적 혹은 도상-지표적 기호를 사용한다. 이것은 심미적 코드가 체험된 물체를 반영하려 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코드는 인간 심리와 어느 정도 독립된 체제이지만, 심미적 코드는 인간 심리에 직결되어 있다.
심미적 코드는 불가시성, 신비성, 비이성성 같은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체험의 대상들을 표상하는 코드이다. 이런 코드는 인간을 미지의 것에 연결시킨다. 그런데 그 연결 방식이 코드 사용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심미적 코드는 논리적 코드에 비해서 훨씬 덜 관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코드화의 강조가 약하다. 인류 생성 이후 엄청난 양의 심미적 코드가 만들어져 인간의 집단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다.
대중문화 시대의 대표적 심미적 코드는 여러 가지 유행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행은 언제나 짧다. 유행도 예술과 비슷하지만 코드가 바뀌는 과정이 다르다. 예술에서는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는 순간 코드를 뛰어넘어 다른 미지의 차원으로 움직이지만, 유행은 알려진 코드를 즐기며 얼마간 그 코드 위에 머문다. 유행이 바뀌는 것은 코드가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심미적 코드의 해석은 메타언어의 수준에서 일어난다.
사회적 코드에 의해 문화는 일어난다. 사회적 코드를 개발하지 못한 사회에는 문화적 교양이 없다. 사회적 코드는 개인들에게서 동물성을 억제 혹은 정화하여 다른 동물들과 분별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이룩하고, 사회에서는 야만성을 극복하여 인간 고유의 문화를 일으킨 핵심요소이다. 서열, 지위, 예의범절, 의례(rituals) 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코드이다. 인간에게서 사회적 코드를 없앤다면, 이미 인간이 될 수 없다.
일례로, 「신데렐라」는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만국 공통 언어’이기도 하다. 악독한 계모와 착한 전실 자식 간의 갈등, 수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을 쟁취하는 어리고 불쌍한 주인공, 때때마다 주인공을 돕는 환상적인 마술적 힘들, 언젠가는 나에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불운과 고난을 한 순간에 떨쳐버리는, 엄청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 「신데렐라」의 이 모든 요소들은 빠짐없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공유되어 있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전형적인 상황 속에서 고유의 사건 ㆍ 사물적 요소로 완벽하게 재현된 이야기는 아마 「신데렐라」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적 코드가 바뀜에 따라, 현전(現傳)하는 「신데렐라」에서 ‘배고픔의 주제’가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문자(文字)의 기록적 차원의 사명을 중시하는 문헌사학자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이야기의 원형은 그 발생 동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변형된 이야기들은 그 또한 사회상의 반영이며, 인류의 무의식적 소원충족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모든 이야기는 그 시대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된 해석에도 넘지 못할 선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솝 우화를 동화로 윤색하는 일이 많다. 우화(寓話)는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전적으로 복속되어있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문학적인 울림, 구성과 반(反)구성의 은밀한 충돌이라든지, 아이러니컬한 삶의 이면적 주제라든지, 존재에 대한 조건 없는 연민이라든지(휴머니즘), 언어 그 자체의 즐거운 용법 등이 개입 ㆍ 공존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화가 복잡한 구성을 가지면 이미 우화가 아니다. 우화는 우화대로 전래동화는 동화대로 다 그 나름의 존재 의의가 있음은 물론이다. 양자가 하는 역할이 서로 상반되는 면이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화를 패러디하는 일이 지나치면 오히려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일례로 「토끼와 거북이」를 패러디해서 ‘거북이는 잠자는 토끼를 깨워 다정한 모습으로 같이 손잡고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는 식의 재구성은 삼가야겠다는 것이다. 그 뜻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줄거리 고치기’는 엉뚱하게도 ‘인간들이 이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들 때문이다’는 식의 좋지 못한 편견을 조장할 수도 있다. 문제의 본질이 호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진짜 범인은 찾지 않고, 엉뚱한 곳에 와서 몽둥이질을 해대고 있는 꼴이다. 그것은 결국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만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를 두고 ‘왜 육지에서 경주를 시키느냐, 만약 물에서 경주를 시킨다면 그런 서사구조가 가능하냐?’는 식으로 트집을 잡는 일이 있어서는 더욱 곤란하겠다. 인간은 자아 동일성을 ‘문화적 ㆍ 상징적 매개’를 통해 성수(成遂)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화는 우화대로, 전래동화는 전래동화대로, 전통적인 설화적 전통은 전통대로 맡겨진 매개적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일 것이다. 패러디는 또 다른 문화의 장에서 유통되는 코드이다. 일종의 자만적인 지적 유희에 ‘위대한 문화유산’이 크게 흠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심청이의 효(孝)’도 마찬가지이다. 말하기 듣기 수업에서 그것에 대해서 토론해 보자는 차시가 있었다. 교사의 수업 운용 차원이 아니라 교과서 차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물론 적절치 못한 소재 운용이다. 심청이가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 일체는 모두 이른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심청전이 지어지고 한창 유통되던 시절이라고 그 ‘말도 안 되는 짓’이 ‘말 되는 짓’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때도 사람들은 ‘심청의 효’에 대해서 ‘소설이니까...’라고 접어주고 읽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논리적 코드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심미적 코드, 그리고 그런 심미적 형식을 통해서 강조하고 했던 사회적 코드(유교적 효 이데올로기)로 이해(양해)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이제 와서, 18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와서, 순진한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마치 길거리의 야바위꾼들이 하는 짓처럼, 얼렁뚱땅, 얼치기 논리적 코드에 입각해서, 효인가 불효인가를 두고 ‘토론’하자는 것이(고전적인 우리 이야기 전통에서의 ‘효 불효’모티프는 과부 어머니의 개가를 두고 장성한 아들들이 고민하던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효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였기 때문이다.) 가당한 일인지 의문이다. 소재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우리 민족의 서술적 정체성 중의 한 굵은 가닥을(심청이는 나다!) 그렇게 함부로 내팽개치는 것은 아주 그릇된 일이다.
9.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
역지사지(易地思之) 글쓰기’는 ‘다양한 관점에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고, 아울러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 안과 밖에서 총체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에서 제안하는 말이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역지사지’다. 특히 논리적인 문장을 작성하는 데에는 그것만큼 효과적인 태도가 없다. ‘역지사지’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사고력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언어(문학) 영재아 교육이나, 창의력 신장 교육, 그리고 논술 교육에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방법론이다. 일반적인 창의력 신장교육에서도 많이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좀 다르다. 입장을 바꾼다는 것은 그냥 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사유의 기반을 통째로 뒤집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고, 발전이 있다.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를테면 정원을 평가하면서도 “중국은 너무 크고(과장이 심하고) 일본은 너무 작거나 인공적이고, 우리 것이 가장 적절한 크기와 자연친화적인 정원이다”라는 식의 아전인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독도는 우리 땅’을 ‘다께시마(竹島)는 일본 땅’으로 바꾸라는 것인데(정서적으로도 그렇게 느끼라는 것인데)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나 확장력이 결여된 일부 성인들의 상상력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뒤집기가 한 번 성공하면 사고력이 탄력을 받아 글을 구상(構想)하는 힘이 크게 향상된다. 좌뇌 활동은 언제나 자기 회로 안에서만 맴도는 속성을 보인다. 한 번 크게 떨치고 밖으로 나가(우뇌 활동으로 옮겨) 다시 한 번 논리를 재구축하는 것이 창의적 글쓰기에는 반드시 요구된다.
모든 글쓰기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자의식이 존재하는 한 이미 메타언어행위이다. 그것을 한 번 더 ‘메타’해 본다는 것은 그러므로, 언어의 안과 밖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겠다는 말이 된다.
10. 견물생심(見物生心), 사랑이 전부다
모든 글쓰기는 길 없는 길을 찾아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이다. 일단 여장을 꾸려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써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도도 없이, 표지판도 없는 길을 홀로 걷는 자는 ‘몸속의 지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내 몸속의 지도는 때를 기다려 몸 밖으로 나온다. 그 때까지는 힘들어도 걷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걷겠다는 의지이다. 그 의지가 곧 지도라는 것도 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라는 것도 그 때 알게 된다.
‘견물생심’에 능하려면 사랑을 알아야 한다(이때의 ‘견물생심’은 일종의 패러디이다.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이라는 주자학의 공부법과 일맥상통하는 의미이다. 자기를 위한 욕심으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공부’를 강조하는 말이다). 모든 글은 사랑의 소산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사랑한다, 혹은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성, 존재 이유를 수긍하고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를 읽기에 적용할 경우, 그것은 곧 한 특수한 저자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는 ‘생산과 관련된 공식’, 이를테면 ‘생산 절차와 과정’을 독자 스스로 자기 안에서 재구성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랑’을 특별한 관심이나 집착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질병의 일종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재능과 열정도 일종의 질병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질병은 전염된다. 위대한 작가들이 남긴 텍스트는 위대한 질병의 소산이다. 그것은 감염력도 크다. 이를테면 그러한 감염력 강한 텍스트를 읽고 글쓰기 중독증(하이퍼그라피아)에 감염되는 길(이것도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이 가장 빠른 ‘재능의 실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경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두 반구는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두 반구는 서로 반대편 신체의 감각과 운동을 통제한다. 따라서 만약 좌반구에 손상을 입게 되면 오른쪽 팔과 다리의 마비를 가져오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어의 생산과 이해는 오직 좌반구에서만 일어난다. 반면 우반구는 말의 의미보다는 어조나 감정적인 측면을 통제한다. 그러한 신경의학적 보고가 기존의 인지적 조작 활동을 통한 창의적 글쓰기 지도법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금의 실정이다.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창의적 글쓰기 십계명’이라는 표제 아래 10개 항목의 글쓰기 공부와 관련된 명제들을 제안해 보았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손으로 쓰는 것이니 그저 하나의 참고로만 여겨주시면 고맙겠다.
| 양선규 소설가 약력 |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및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 1983년 세계의 문학(민음사) 주최 제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 창작집 <난세일기>, <고양이 키우기>, <나비꿈>, <칼과 그림자> 등
- 연구서 <한국현대소설의 무의식>, <문학, 상상력, 해방>,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 <어떻게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글쓰기 인문학 10강>(근간) 등
- 인문 수필 <인문학 수프, 장졸우교> 등 6권, <글쓰기 연금술>, <세 개의 거울>,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