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005~2020]/정기산행기(2009)
2009-06-02 12:51:37
술이 흐르는 산행
날짜: 2009년 5월 31일(토요일, 맑음)
사람들: 광용, 병욱, 민영, 은수, 인섭, 재일, 문수, 진운, 병효, 상환, 택술, 거훈, 경림(산행대장)
산길: 망월사 들머리-원효사-포대능선-사패능선-사패산 정상-사패능선-회룡계곡-회룡역
시간: 5시간 반(점심 1시간 반 포함)
지하철 1호선의 망월사역 3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앞에 산악인 엄홍길을 기리는 전시관이 있고, 거기서 9시 45분까지 모이기로 했다.
습기가 없는 맑은 여름날, 참가 신고한 산우들11명이 모두 출석했고,
바람처럼 나타나는 택술이와 부산에서 올라 온 거훈이까지 해서 모두 13명이라는 대군이다.
광용이가 오랜만에 나왔고, 최근에 인수봉을 등정한 병효도 오니, 산행 팀의 무게가 의젓하기 그지없다.
산행대장이 변변치 않은 것이 유일한 흠이지만, 야구에서 뚜렷한 마무리 투수가 없을 때 비슷한 여러 명을 돌려서 마무리를 시키는 소위 bullpen by committee가 있듯이 오늘은 산행 by committee가 되겠다.
등산 코스를 두고 설왕설래 하다가 일단 예정대로 원효사-포대능선-사패능선을 타기로 하고, 10시에 출발한다.
지난 겨울 한 번 왔던 코스인데, 능선까지 올라가는 길이 기억보다 힘들다.
다행히 여러 산우들도 지난주에 무리한 듯, 몇 번 쉬기를 반복한다.
어디선가 또 쉬면서 막걸리를 한 병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느긋하게 올라오고 있던 상환씨로부터 문자가 도착한다. “산골의 바람이 하도 좋아 오늘은 도중에서 유유자적하고자 하니, 즐산하소서.”
상환씨를 부러워하면서 행군을 계속, 간신히 포대능선에 이른다
포대능선 위치 안내판
포대능선을 뒤로하고 山友들 뭉치다~!
포대능선의 흐름
포대능선에서 보는 수락과 불암
북한산과 달리 도봉산은 갈림길에 표지판이 없는 경우가 많아, 길치인 대장이 2명의 산우를 데리고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그냥 하산할 뻔한 위기가 잠깐 있었지만, committee의 구원을 받아 정상궤도로 복귀하는 해프닝이 있었음을 기록에 남긴다.
사패능선을 조금 걷다가 12시 경 점심 자리를 편다. 약간 경사가 진데다가 좁지만, 건너편 북한산 봉우리들이 보이는 경관이 좋다.
음식이 푸짐한 것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오늘은 유달리 술이 많다.
인섭이가 준비해 온 냉장 막걸리 2병, 광용이가 가져 온 매화주, 마가목주 각 1병, 경림이 가져온 내장산 복분자 2병, 병욱이가 가져온 소주 1병, 은수가 가져온 소주 1병이 일차로 진설된다.
그런데 병욱이가 가져온 소주는 500cc 페트병에 들었는데, 마시다가 남긴 것을 들고 온 듯, 내용물이 원래 용량보다 모자란다.
마시던 것이 아니라 “댓병에 들었던 소주를 병이 깨질까봐 페트병으로 옮기니, 다 안차더라”라는 설명에 모두들 그 심오한 뜻을 헤아리고자 숙연해진다. 댓병이 아닌, 보통 우리가 마시는 (2홉들이) 소주병을 말했다는 조금 후의 주장에 그제야 “아하.”
병욱이의 보따리에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하나가 더 나온다.
병욱이 모친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가오리 찜 말린 것 - 이 특급 안주를 필두로 술이 돌기 시작한다.
막걸리가 끝나고, 복분자가 끝나고,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데 진운이가 “운우”라는 복분자 술 1병을 새로 꺼낸다.
과연 술병에 그려진 운우라는 글자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운우지정에 취해서 매화주 남은 것과 소주를 섞은 “소매”를 다 마실 즈음, 민영이 휴대용 플라스크에 들어 있던 양주도 혼합하니 “양소매”가 된다
결국 진설된 모든 술이 끝나고야 일어난다. 지금까지 2시간 산행했는데, 점심과 음주에 1시간 반이 더 걸렸다.
경치는 좋았을 뿐이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을 뿐이고, 친구들은 즐거웠을 뿐인데.
사패산 정상까지 취중 산행을 한다. 멀리 보이는 사패산 정상 옆에 큰 바위가 눈에 띈다. 광용이는 저 바위는 삿갓바위라고도 하고, 버섯바위라고도 하고 하면서 설명하는데, 운우지정의 취기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한 인사는 그 바위에서 우리 몸의 일부를 본다.
다행히 능선 길은 오붓하고 힘든 오르막길은 정상 직전밖에 없다.
바위 덩어리로 된 사패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통쾌하게 다 보인다.
바로앞 송추계곡 건너로 도봉산의 오봉이 자리잡고있고 상장봉의 곧고 우람한 능선, 그 뒤로 인수와 백운이 자리잡고 있다
호연지기는 술로 자라게 해야 하는 법. 문수가 냉동해 두었다가 보온 용기에 보관하고 있던 맥주 1캔을 꺼내서 나누어 마신다
맥주가 너무나 청량하여 정상에서 의례 찍게 되어 있는 단체사진도 생략한다.
하산은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서 범골대신 회룡사 계곡길을 택한다.
이 길은 호젓하나 나무와 철로 된 계단이 많다.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을 가로 지르는 나무다리 위에서 부엉이 바위와 비슷한 암벽을 보면서 뒤늦게 사진을 찍는다.
회룡사를 잠깐 둘러 본 뒤 마을로 거의 내려 올 즈음, 길가에 생맥과 치킨이라는 수제 간판을 본 병욱이의 제안으로 뒤풀이를 그 가게에 딸린 호젓한 옆 마당에서 하기로 한다.
장작불에 구운 치킨과
시원한 생맥주로 마무리를 하다가,
택술이가 비장하고 있던 중국 백주 1병도 나누어 마신다.
중요한 계기마다 특별한 술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주당들의 원모지려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다.
새로운 뒤풀이 전통으로 굳어가는 제기 차기 시합에서는 문수가 1등, 육포 상품을 가져간다.
저녁 기차로 부산에 내려가야 하는 병욱이와 거훈이를 핑계삼아 아직 해가 남아 있지만 일어서서 회룡역으로 간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당구장에 들렀던 일부 인사들은 몽롱한 몸과 마음으로 노닐다가 3명, 4구 한게임에 1시간 10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신선들이 바둑 두면 도끼자루가 썩는다는데, 30산우회가 취선이 되어 간다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