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육신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적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의 특징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을 하는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특별히
자기 방어가 강하므로 외식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말과 행동이 매끄럽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마8장에서 풍랑이 일어나므로 제자들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사실은
죽겠나이다가 아니라 그러한 자신들이 진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무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풍랑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믿음의 배짱이 생깁니다.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를 보세요. 옥에 갇혀 있으면서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칠 때까지 쿨쿨 잠을 잡니다. 성령을 체험하기 전, 곧 임마누엘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 같으면 그 성격대로 ‘주여 구원하소서 내가
옥에 갇혔나이다’ 하고 부르짖어 철야기도를 했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죽어라고만 말하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죽는 것은 말씀을 듣고 이미 되어 진 사실을
따르는 능동이지만 사는 것은 그 분으로 말미암아 피동이 됩니다. 그 때부터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요령을 터득해야 합니다.
주와 함께 멍에를 메고 사는 법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의인의 길이며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gave Himself)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반복 시인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주체이십니다.
이 경건의 연습이 쉬운 것 같으나 길게 갑니다. 아담 안에 있는 죄성에 대한 부채의식이
질기고 질깁니다. 거기다가 끊임없이 육체의 예법에 대한 교훈을 교육하고 있으므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삶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산 자는 이제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믿음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몸을
내게 주신(gav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버리신’은 원문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번역이다) 20절의 말씀이 법 정신으로 육체의 행위로
살지 않고 영을 좇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성경구절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을 주심이 감춰지고
그 몸을 십자가에 버리신 아들만 바라보다가 이 같은 영성은 요원해 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를 입고 그 분을 먹고 마시며 그 분 안에 거하므로 그분에 의해
살아가는 경건의 연습을 반복해야 할 겁니다. 그로인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임을 심신으로 체험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만약 율법으로 된 것이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는 말씀이
오래 된 아파트 재개발 딱지나 상품교환권 같이만 귀하게 여겨도 얼마나 좋을까요?
컴퓨터가 시원찮으면 포맷을 하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포멧을 해야죠.
잘못하면 신앙생활이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벗고
돌아다니다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속에 나타나서
나를 의롭게 나타내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나의 육신의 의를 없애가라는 말입니다. 예수 죽음을 항상 짊어지므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심신에 나타나도록 반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고후4:10)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
있던 옛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에 의해 내가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상세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대로 아멘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시며 위대한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이를 위한 가장 좋은 책은 로마서입니다. 반드시 로마서적인
구원이 일어나야만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의를 위해
자신의 육체가 한 일이 털끝만큼도 없음을 알고 어떻게 하면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을 좇아 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음식을 먹고 난 다음 소화시켜서 그 힘으로
몸이 움직여지는 원리를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그 에너지는 따로 있는데 바로 먹은 음식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밖에 두고
내가 타고난 의의 의욕으로 열심을 낼 때는 주체가 나며, 에너지도 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엔
나의 의는 곧 누더기와 같고 넝마와 같음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는 내가 행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나와
함께 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내가 일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며 야고보서의 행함의 의입니다.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심령으로 한 걸음씩 이미 되어 진 사실을 익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의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 모든 영광을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돌리자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첫댓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사람이지만, 여전히 환경에서 오는 유혹들은 항상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를 응시하는것 뿐임을 압니다.
변한것은 내가 아니며,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고백 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안에 사는 나의ㅡ정체성 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과 싸움이 격렬해 지는 세상입니다.
우리 안에 임재 역사하시는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므로
반석과 구원과 요새가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겨나아가십니다!
아멘~아멘~~
감사와 기쁨안으로의 시간만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었다는것을
또 체휼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