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탄식과 성도들의 고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8:19-22).
사도는 18절에서 성도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대조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본문에서는, “피조물의 고대(苦待)하는 바는”(19상) 하고, 고난 중에 있는 것은 성도들만이 아니라, 피조물들도 고난 하에 있다는 점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 성도들의 “고난”에 대한 이해의 시야(視野)를 넓혀주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시적(詩的)인 표현입니다.
사도는 ㉠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상이 본문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19) 합니다.
㉠ 먼저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피조물”(被造物)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 선한 천사(天使)가 아닙니다. 그들은 “허무한데 굴복”(20)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악한 천사들일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영광의 날(19)을 고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성도들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23) 하고 별도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고 불신자들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어서, 탄식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사도가 말씀하는 피조물이란, 차라리 순수한 나무와 꽃과 새와 짐승과 물고기 같은 피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피조물은 인간이 살아갈 환경을 조성해주시기 위해서 먼저 지은바 된 것들입니다.
②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19하) 합니다.
㉠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고 복수로 말씀을 했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4절에서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현재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여기 “나타남”은 성도들의 지금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 21절에서 이를 설명하기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섞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榮光)의 자유(自由)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영광의 자유”란, 영적(靈的)자유하고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영광의 자유가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영적자유 함입니다.
㉢ 그렇다고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장례되고 영은 주님께로 갑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는 상황입니까? 이것은 영광의 자유가 아니라, 무거운 육체로부터의 자유 함입니다.
③ “영광의 자유”함이란, 주님께서 재림(再臨)하시는 날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한 이것이 “영광의 자유”함을 얻는 날이요,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나, 자녀로써의 영광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그 영광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피조물도 섞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이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인가?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운가? 왜냐하면 정작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들은 이처럼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④ 그래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 하는 것입니다.
㉠ “굴복”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피조물들도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의(他意)에 의해서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피조물들도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즉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복종하는 것이 자기 뜻이라는 것입니다.
㉡ 사도는 창세기에 기록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합니다.
㉠ 사도는 “고난”(苦難)은 우리 인간만 받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즉 모든 만물들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아라. 인간은 자신의 죄 값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고 있지만, 피조물들은 만물의 대표자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범죄로 저주 받은바 되어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불평할 수가 있단 말이냐”,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 초목들은 봄이 오면 새싹을 내며 새순이 돋아납니다. 여름에는 마음껏 녹음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시들어 버리고 낙엽 되어 떨어지고 맙니다. 한 송이 꽃을 보십시오. 그 정교하고 아름다운 신비스런 모습을, 그러나 그것도 몇 날이 못 되어 추하게 시들고 떨어지곤 합니다.
⑥ 이렇게 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요”, 피조물들도 “굴복케 하시는 이”, 곧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고 피조물들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과일과 곡류와 바다의 생선과 육축의 고기를, 인간들에게 제공하여줌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섭취하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배은망덕인 것입니다. 얼마나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1:21) 것입니까?
⑦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22) 합니다.
㉠ 사도는 피조물들도, “고대(苦待)한다(19), 해방(解放)되기를 바란다(21), 함께 탄식(歎息)하며, 함께 고통(苦痛)한다(22) 하고, 의인화해서 말씀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만물이 다 회복의 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이것을 어떤 방도로 알 수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 사도는 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하고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깊은 영적 묵상(黙想)을 통해서 얻어진 산물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그들이 낙원에 있지 아니하고 저주하게 있어서 탄식하며 고통 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⑧ 사도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일까요?
㉠ 8장 안에는 세 부류의 고난이 있습니다.
㉮ 첫째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심”(3)으로 당하게 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고난이요,
㉯ 둘째는 땅이 저주를 받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22) 한다는 “피조물”의 고통이요,
㉰ 셋째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18) 한,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고난” 하면, 어찌하여 자신(自身)의 고난만을 생각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인하여 십자가라는 극한적인 고난을 당하셨고, 인류의 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잠시 당하게 된 고난을 마다할 수가 있단 말이냐?
⑨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저들의 기대에 또다시 실망(失望)을 줄 수가 있단 말이냐 하고 말씀하는 셈입니다.
㉠ 피조물들까지도 그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행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더욱 장차 받을 영광(榮光)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피조물의 탄식소리는 우리들을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 격려해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밥그릇의 밥알 하나까지도 남길 수 없게 합니다. 왜냐하면, “제발 나를 버리지 마셔요, 나를 낙오시키지 말아주셔요” 하고 부르짖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 본 문단에는 “나타난다”(18, 19)는 말과, “기다린다”(19, 23, 25)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19) 고대합니다.
㉯ 성도들은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23) 있습니다.
㉰ 그런데 “탄식도, 기다림”도 없는 전연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입니다.
㉢ 그 날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한, 주님께서 “나타나는”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나타날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마귀의 자식의 모습으로 나타날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만물의 탄식과 고대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