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중국의 사상가, 지식인 가운데 여러분은 누구를 제일로 꼽겠습니까? 중국 현대 문학과 혁명의 아버지 루쉰(鲁迅)? 초대 베이징 대학 총장으로 중국 근대 교육을 세운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당 창당의 두 주역 천두슈(陈独秀)와 리다자오(李大钊), 중국 최후의 선비, 중국 정신의 상징인 량수밍(梁漱溟)? 누구든 손색이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후스(胡适;胡適)을 꼽아 보겠습니다.
후스, 우리 발음으로 호적이라고 하는 이 분은 저는 역사서에서 보통 현대 중국의 문체혁명, 즉 백화문(白話文) 상용화의 주역으로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법률사상사 강의를 들으면서 보니, 후스는 바로 중국 고대사상사를 현대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였으며, 지금도 그의 연구를 빼놓고는 중국 고대사상을 얘기할 수 없는 석학이었습니다. 나아가 제가 있던 중국 샤먼대학 구내 서점에 보니 후스의 전집이 '전시 서가'에 아주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전반의 지식인임에도 현대 중국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비로소 후스에 대하여 조금 살펴보니, 아 후스는 중국 공산당과 대적하였던 타이완 중화민국을 택한 인사였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오늘날 중국 대륙의 청년들에게 새삼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 살펴보니, 저는 바로 후스야말로 중국 최초의 현대적 지식인, 중국 최초의 자유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손색이 없다, 그의 위상은 실로 현대 중국의 지성사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현대 중국인들의 언어를 엘리트들의 고문에서 일상 민중의 언어인 백화문으로 바꾼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가히 중국 2천년 답보의 역사를 일신했다고 할 것인데, 후스는 그에 그치지 않고, 인습과 구태에 젖은 중국 전통 문화와 사상을 근대 자유와 민주 그리고 과학의 정신으로 뒤바꾸는 데에 일생을 헌신해 왔으니, 그의 공적은 곧 현대 중국의 모습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록 그를 쫓아낸 중국 공산당도 결국은 그의 근대 정신을 계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후스는 미국에서 존 듀이를 스승으로 삼아 서구 문명의 정수를 호흡하였으나, 중국 주지주의와 인본주의의 역사를 잊지 않았고, 마침내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빛으로 중국의 전통을 일신하여 중국의 저력을 되살리는 데에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근대적 정신으로 비로소 중국은 유교중심의 국가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타이완 중화민국이 장개석 독재를 넘어 지속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 체제가 파시즘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그런데 아쉬운 것은 우리 나라에서 후스에 대한 어떤 개괄적인 연구, 안내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다가 1996년에 나온 민두기 선생의 <중국에서의 자유주의의 실험 - 胡適의 사상과 활동>(지식산업사)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기쁨은 후스를 알게 된 것 못지 않게 큰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에게도 이처럼 훌륭하고 성실한 연구서가 있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인문학 가운데 역사의 전통이 가장 깊고 두텁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의 '민두기' 교수님과 같은 분이 중심을 잡아 주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책이 현재 시중에서 절판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출판 문화의 현 주소를 말해 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였답니다....
여기 민두기 선생의 후스에 대한 저서의 목차를 올려 보겠습니다.
머리말 : 왜 후스인가
제1장 신사조의 기수
1.평민과 역사의 발견 - 문체혁명
2.개인의 발견과 여성의 해방
3.과학방법과 문제를 찾아
제2장 중국문명의 재창조를 위하여
1.전통 학술문화의 비판적 정리[國故整理]
2.전통문화의 비판
제3장 외로운 자유주의자의 길
1.자유와 용인[여기의 용인은 '관용'을 뜻합니다: 필자 주]
2.인권과 민권의 갈림길
3.민주헌정으로의 길
4.학생운동의 격랑 속에서
5.공산당과의 거리
맺음말 -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여기 맺음말의 시구는 공산당 치하 중국 대륙에서 불었던 격렬한 후스비판 운동에 대한 후스 자신의 소감인데, '들불이 다 태우지 못하고, 봄바람에 다시 살아 난다'라는 당 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의 한 구절입니다. 그 내용이 참으로 현대 중국 역사 속에서 후스 복권의 양상과 똑같으니 그 또한 절묘하다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