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고서 얻는 것
이경한
찬바람이 불던 겨울날, 오전 진료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순간적으로 ‘아 이러다가 죽는 것인가’ 라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에 스쳐갔다. 머리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듯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죽음을 앞둔 가여운 인간에게 전지전능한 신이 자비를 베푸는 마지막 선물인가 싶었다.
그러나 의사직감에 뇌에서 출혈이 난다고 느꼈고 방금 식사하러 외출한 간호사에게 겨우 전화를 하고 이내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아득하게 멀리서 누군가가 계속 “눈 떠 보세요, 눈 떠 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가벼운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당시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가 나듯이 뇌출혈이라는 건강사고가 났다. 건강을 한순간 잃고 의식이 없는 채로 뇌수술을 받았다. 코로나사태로 어렵게 면회를 온 남편은, 뇌출혈로 인한 후유증인, 왼쪽 편마비로 왼쪽 손가락 왼쪽 발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나를, 물기 젖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눌님. 목발을 짚더라도 꼭 걸어서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마눌님은 마누라라는 말에 존댓말을 붙인, 남편이 부인인 나를 부르는 애칭이다. 나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왼쪽 다리의 발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데 어떻게 걸을 수 있을 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상황이 나아져서 휠체어를 탔다. 교통수단은 자동차만 운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휠체어 훈련이 필요할 줄 몰랐다. 좌회전 우회전이 어려웠다. 우회전을 하려면 왼쪽 바퀴는 몸 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바퀴를 몸 밖으로 밀어야 되는데 왼쪽 오른쪽이 자꾸 헷갈렸다. 한번은 욕조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욕조 입구에서 몇 번을 좌회전 했다가 우회전했다가... 휠체어 훈련을 포기하고 싶었다. 휠체어를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환자가 부러웠다.
재활을 하면서도 영원히 걷지 못할까 마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는 남편과의 약속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친구나 동료들에게서도 힘을 얻었다. 회복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신 세실리아수녀님. 독실한 기독교신자 친구.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글을 매일 보내주는 벗. 힐링사진을 보내 주는 동아리 회원들. 어렵게 병문안을 와 주신 선생님. 전화를 해 주신 선배님.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어주신 친정 부모님 시댁 식구들 형제자매 가족.
드디어 엄지발가락 하나가 들렸다.
아 얼마나 기쁘던지! 가슴이 벅찼다. 남편도 담당과장님도 이 모습을 보고 ‘엄지척’을 해 주셨다. 마비되었던 다리를 들었다. 가족들이 환호를 했다. 운동을 하니 하루하루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실제보다 훨씬 더 호전되고 있다고 과장을 섞어가면서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 시대의 재앙 코로나 사태는 입원중인 나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쳐 치료를 방해하였다. 병동에서 코로나 환자가 여러 명 입원해 있는 것만으로, 이동이 제한를 받아 다른 층에 있는 재활병동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며칠을 꼼짝없이 병실 안에서만 보내야 했다. 어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을 남편에게 나는 걸어간다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계획된 재활치료를 마음껏 못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가족들 지인들 면회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고 치료조차 마음대로 못하게 하니... ‘아 고약한 코로나여. 너 언제 물러가니?’ 따지고 싶었다.
할 수 없이 병실 안에서 다리를 들었다내렸다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약해진 손을 마사지해주는 남편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기쁜 눈빛을 하며 남편은 “마눌님이 좋아진다는 희망이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좋아서 하는 간호이니 빚 갚을 거 없어요.” 평소 무뚝뚝하고 황소고집으로 버겁게 느껴지던 남편이 이렇게 달콤한 사랑고백을 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마사지해주는 남편의 손등위에 나의 양손을 가만히 포개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남편의 손이 야위었다. ‘아 나는 그동안 내 고통만 생각하고 남편의 아픔을 보지 못했구나.’ 나는 속으로 울었다.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나를 위해주는 남편...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발견한 나는 포개진 우리들의 손에서 강한 사랑의 에너지가 흐름을 느꼈다. 나는 남편을 힘껏 포옹하며 말했다.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의료진들의 도움과 나의 재활 의지로 약해진 왼쪽 팔과 다리에 차츰차츰 힘이 생기더니 마침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 나는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가족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어요. 라고 답을 하고 싶다. 봄날처럼 따뜻한 날, 남편의 사랑을 얻은 나는 남편 옆에서 목발 없이 내 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30년 지기 부부가 권태기를 넘기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 희망처럼 그 날의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경한
golee21@naver.com
< 이 경한 프로필 >
등단연도와 등단지 2013년 에세이스트지.
경북의대졸. 정신과 전문의
수상 ; 2020에세이스트올해의 작품상 수상
부산시 동래구 <이경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메일 :golee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