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도저소에서 5일
윤1월 20일 심문을 하고 난 다음날부터 최부에게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짐작하겠지만 최부가 진술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직 ‘당신은 진실! ’ 이라고 단정 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저소 천호인 진화란 사람부터 최부의 상립(상을 당할 때 쓰는 모자)부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더니 묻는다. 해순위 천호 허청은 점심도 같이하자고 하더니만 좌중의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도 먹느냐고 묻는데 최부는 조선의 선비답게 똑 부러지게 대답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
그러자 채소반찬을 접대하기도 하고 허청은 햇볕이 나자 옷을 말리게도 해주고 관인부터해서 조선에 대해 궁금증이 꽤 많다. 조선도 황제라 칭하는지 관인들은 서대를 차는지 금은은 나는 지 등등... 나중 묻는 이에게 누구인지 묻자 그는 이름은 설민인데 파총관이 보내어 미리 조사하고 압송을 하는 것을 담당한다고 했다. 또 한사람이 나서서 자기는 영파부 도사(한 성의 군정을 담당하는 관서)가 파견하여 이곳에 왔으며 이름은 왕해라고 했다.
당연 귀가 번쩍 뜨일 최부다. 최부가 바로 물었다.
<영파부에 하산이란 곳이 있습니까.>
왜 물었겠는가. 그곳에서 자칫하면 사자채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번 하지 않았던가. 왕해가 한 말이다.
<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
한 낱 봉수대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최부가 예상한대로 강성한 국가는 법과 질서가 바로 서며 인과 예로서 세상을 통치하리라 믿었던 것이 과연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은 영파부에서 왔다는 왕해가 대뜸 벽에 걸린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저 그림을 아느냐고 묻는다. 최부가 모른다고 답하자 그림은 당나라 때 진사 종규라고 말을 한다. 이에 최부는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느냐고 하자 좌중의 모두가 크게 웃어댔다.
종규(鍾馗)란 당(唐)나라 때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귀신의 이름으로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불합격한 귀신이라 하였다. 당 현종이 아파서 누워있는데 그가 꿈속에서 작은 귀신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종규란 귀신이 대뜸 종남산의 진사 종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종규는 악귀를 잡는 민간에게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를 제대로 안 최부가 바로 진사도 아닌데 왜 진사라고 하느냐고 한 것이고 이를 소상히 아는 게 놀라워 다들 낄낄대며 웃은 것이다. 참 박식한 최부가 아닐 수 없다. 다들 그러니 심문을 받는 상황임에도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으로부터 지금의 우리로서는 얻는 게 그것 말고도 또 있다. 그곳 사람들은 시대는 명나라 시절인데 당나라를 꼭 끼워서 말을 하고 유교만을 숭상한 조선과 다르게 앞선 글에서는 불당을 지키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민간신앙이나 도교도 숭상의 대상으로서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 흐르듯 흐르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역사일 것인데 역사서나 지리서등과 같은 것에서 보다는 이와 같은 기행문이 얻는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자연스럽게 세상물정 파악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사기나 유사는 자기주장이 없을 수는 없어서 엄밀하게 말해 그려지는 풍광이 삶의 진솔한 수채화 느낌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최부가 말하는 당시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사물에 대한 의식은 보다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그 시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들의 호감을 산 최부는 실제 보지를 못하였을 뿐이지 그것만 아는 게 아니라는 듯 천태산과 안탕산이 어디쯤 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 두 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또한 그들이 놀라워했을 것이다. 백발노인이 그 동네에 주산인 석주산을 마저 가르쳐 주었다. 최부는 이어서 북경, 양자강, 남경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묻기도 한다. 그리고 말끝에 묻는 양주 땅, 이에 “양자강 북쪽에 있는데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입니다.” 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를 묻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코앞인 양주 땅 그곳은 제주를 출발하자고 안의가 꼬드길 때 왕명을 받은 조신으로서 전 정의 현감 이섬 말고는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다고 말을 한 바로 그 전 정의현감인 이섬이 표류를 하다가 닿은 곳이 양주였기 때문이다.
이섬은 성종 14년 (1483년) 2월 29일 에 조천관을 떠났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했으나 다행히 중국 양주 장사진에 표착하였다. 일행 47명 중 14명이 굶어 죽고 33명은 북경을 거쳐 귀환하였다. 돌아온 뒤 행록을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이 조선 실록에 남아 있다.
<성종 14년 14-08-22[05] 천추사 박건을 따라 이섬이 돌아오니 인견하고 이섬에게 표류했던 일을 묻다. 계묘(1483) (성화19)
천추사(千秋使: 황태자 축하사절단) 박건(朴楗)이 경사(京師:북경)로부터 돌아왔는데, 이섬(李暹)이 따라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이 섬에게 표류(漂流)하였던 일을 물으니, 이섬(李暹)이 아뢰기를,
“신이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있다가 체임(遞任)되어, 지난 2월 29일 본관(本館)을 떠나 바다를 가는데, 추자도(楸子島) 10리(里) 남짓 못 미쳐서 동북풍(東北風)을 만났습니다. 운무(雲霧)가 사방에 꽉 차고 우각(雨脚)이 물 붓는 것 같았으며, 노도(怒濤)가 산(山)과 같아 동서(東西)를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10일을 표류(漂流)하다가 뜻밖에 중국(中國) 장사진(長沙鎭)에 정박하여 잔명(殘命)을 보전할 수가 있었으니, 오로지 이것은 성상의 은덕이 미친 때문입니다.”
하고, 인하여 표류(漂流)했던 때의 상황(狀況)을 역서(歷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더라면 어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뒤에 다시 아뢰라고 명하니, 대개 상직(賞職)하고자 함이었다.
【원전】 10 집 504 면 [주D-001]우각(雨脚) : 빗줄기.>
그는 살아 돌아온 공으로 다섯 차급이 승진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어서 비판여론이 조정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훈련원의 검정과 부정을 지냈다. 그리고 그날 한 높은 관인이 오는데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뒤에서는 옹호하여 군대의 모습이 잘 정돈되고 엄숙하게 황화관(黃華館)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파총(把摠)으로 송문(松門) 비왜지휘(備倭指揮)를 지휘하는 유택(劉澤)이 나타났다. 그는 최부 일행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여 위엄은 있었지만 똑같은 상황을 말하는 질문을 또 하였다.
<“당신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었습니다. 본래 마땅히 군법으로써 처결해야 하는데, 혹 그중 가엾고 불쌍히 여길 사정이 있나 해서 잠시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상국(중국)을 침범한 실제상황과 형편의 유무를 사실대로 공술 하십시요”>
이에 최부는 또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는 없었다. 특별하다면 영파부 하산에서 만난 해적과 태주부 임해현에서 6척의 어선에 군인들로부터 당한 사항 그리고 호송을 하는 과정에서 선암리에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마구 때리고 겁탈한 사항도 빠짐없이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날 파총관은 최부를 다시 불렀다. 그는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를 당한 일등은 공술서에서 빼어달라고 했다.
당연 최부는 이를 거부하였는데 그러자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간결해야 한다고 재차 종용을 했다. 파총관이 미리 보낸 설민이라는 자가 살짝 글을 써서 보이면서 황제께서 전일 진술한 공술서를 보시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 여기시고 변장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니다. 굳이 일 만들 필요 없이 조용히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 신경을 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했다. 며칠 전만 해도 호되게 그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묘하게 이제는 황제가 최부 편이 되어 도와주는 듯싶다.
최부는 해달라는 대로 고쳐 주었는데 그리고도 미진하다 싶은 사항에 대해서는 또 추가 질문을 받았다. 이를테면 군자감주부을 역임했다면서 어찌 군량의 수량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하는 묘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최부는 한 달 밖에 근무를 안 해서 실정을 모른다고 했지만 이는 아마도 최부가 국가의 기밀이 알려질까 두려워 일부러 말을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집을 떠난 것은 얼마나 되었느냐, 고향이 생각나지 않느냐 하며 최부의 감정을 우려낸 다음 아주 곤혹스런 질문을 한다. 역시 지체 높은 파총관 다운 심리적인 접근으로 최부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자 하였다.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신하가 된 자는 나라를 생각할 따름이지 집을 잊어야 합니다. 당신이 왕사(王事)로 인하여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마땅히 충성을 해야 합니다. 어찌 갑자기 집을 생각합니까?>
논리적으로는 그의 말이 맞다. 그러자 최부는 답변을 다음과 같이 했다.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하는데 돌아가신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서 군주에게 충성한 사람이 아직 없었는데, 하물며 풍수지탄(風樹之嘆, 이미 돌아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한탄)이 그쳐지지 않고, 해는 서산을 넘어가는데 (日迫西山) 어찌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과 슬퍼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묻는다.
<“그대 나라 임금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니 나는 말하기를 “효자는 차마 부모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까닭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어도 내 부모의 이름 듣듯이 한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벼이 말할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말하기를 “경계를 넘었으니(이국에 있으니) 거리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최부가 또 답했다.
<“나는 조선의 신하가 아닌가. 신하된 자가 국경을 넘었다고 자신의 나라를 저버리며 (자신의)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설민이 최부와 문답한 내용을 파총관에게 갖다가 주니 파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일 관원을 시켜서 떠나보낼 것이니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잘 챙기라는 말을 했다. 상복을 벗지 아니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조선의 선비가 부럽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잘 챙기라는 당부의 말도 건네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아마도 파총관도 최부의 말에 감복을 받았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리자 그때서야 이곳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는 최부다. 그는 이 글의 첫 글에서 쓴 태주 동구국에 대한 풍광을 간략히 묘사해두었다. 이는 훗날 그리움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 써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주는 옛날 동국의 땅으로서 민(복건성의 옛말) 지방의 동쪽과 월 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 앞바다 등지는 임해현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무덥고 풍토병이 많은 곳)의 땅이었습니다. 신은 이곳에 정월에 도착을 했는데 기후는 3~4월과 같아서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며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또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한데다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였습니다.>
2006년도 연합뉴스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세계 3대 기행문의 하나로 손꼽히는 표해록(漂海錄)의 저자 금남(錦南) 최 부(崔 溥) 선생의 사적비가 중국 저장성(折江城) 임해시(臨海市) 도저진(桃渚鎭)에 세워졌다. 나주 출신인 최 부선생은 조선 성종때 제주도에서 귀향중 폭풍우를 만나 중국에 도착, 8천리 길을 돌아 귀국한 뒤 표해록을 썼다.(연합뉴스|입력2006.02.28. 15:03)>
최부는 백발노인이 가르쳐준 높게 솟은 석주산을 한 번 돌아보며 발길을 옮겼을 것 같은데 최부가 복숭아 꽃 살구꽃이 많다고 말 한대로 도저소라는 곳의 ‘도’자는 복숭아를 의미하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우리가 요즘 흔하게 항주나 계림을 가면 손쉽게 먹는 아열대성 과일들이 모두 그곳 태생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민속] 중국에서, 역귀(疫鬼)나 마귀를 쫓는다는 신(神).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본 형상을 오도자(吳道子)를 시켜 그린 것이라고도 하는데, 수염을 기르고 검정 관을 쓴데다 군화를 신고 한쪽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를 문에 붙여서 악귀(惡鬼)를 막는 풍습이 당송(唐宋) 때 성행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