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1일 , 오늘은 서울에 글 모임이 있는 날이다. 정오까지는 서울시청 앞에 가야한다. 전 같으면 8시쯤은 집을 나서야 겨우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인데 KTX 덕분에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대전역 까지 가는 것이 문제다. 택시를 타면 8천 원 정도가 나오니 만만치가 않다. 나는 종종 버스를 중간 쯤 까지 타고 갔다가는 택시를 집어타곤 한다. 그러면 4천 원 정도가 절약이 되는데 그 꽁 돈이 꽤 고소하다.
헌데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대전에도 전철이 생긴 것이다. 아직 정식 개통은 안 되었지만 시범운전을 하는 때라 시승을 하여 설문조사에 응하면 공짜로 얻어 탈 수 있다한다. 나는 그 말을 믿고 느긋하게 전철역으로 향하였다. 푸른 조끼를 걸친 사람들이 지하통로 앞에 쭉 서있다. 들어서려니 그들이 막아서서는 들여보내주지를 않는다. 장애우만이 탈 수 있는 날이라 는 것이다. 그냥 돌아서려니 난감하다. 택시를 잡아타기에는 시간이 늦어 버렸다.
엉겁결 나는 장애인의 보호자라고 말을 받아넘겼다. 그러자 젊은 친구가 힐끔 쳐다보더니 놓아준다. 아래로 내려왔더니만 거기서도 철통방위다. 뒤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대번에 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발을 들인 것이 너무 늦었다. 양복 빼 입은 중년신사가 설마 결례를 저지르랴 생각할 것 같기도 하여 대담하게 나는 선수를 치며 들어섰다. ‘수고가 많습니다. 참 잘한 시승식이네요.’그러자 지켜선 두셋의 안내인들이 정중히 고맙다는 말과 더불어 ‘저 안으로 들어가세요.’ 한다.
막 계단을 내려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일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뛰어 내려갈까 망설이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망신살이 뻗친다는 말을 이런 때 쓰는가. ‘선생님 설문지는 가져 가셔야지요. ’뜻밖의 말이다. 이제는 계단만 내려서면 바로 전철이다. 그런데 대기하는 장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안내인들이다. 장애인 하나에 안내인 둘 셋은 되지 싶다. 초청장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주위를 곁눈으로 살폈다. 아무래도 불안하였다. 나란 존재가 금세 드러날 것만 같다.
마침 바로 옆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휠체어 상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느낌을 느꼈는지 그가 뒤돌아 쳐다본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웃었다. 그러자 그가 고맙다는 듯 인사를 꾸벅한다. 그를 챙겨주려던 안내인이 나를 보자 손을 들어 고맙다는 시늉이다. 순식간 나는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는 나를 지하철 공사 간부쯤으로 보았나 보다. 고마운 표정에 시설이 좋다는 말을 연거푸 한다. 도둑 전철을 타러 몰래 들어온 작자를 오늘의 주인공들이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보고 있다.
태연하게 그를 끌고 전철에 올랐다. 마음이 옹색하여 어쩌지 못할 지경인데 그는 자꾸 말을 건넨다. 직원처럼 고개를 연실 끄덕였다. 자칫 하다가는 이제는 직원이 아닌 것이 들통이 날 것만 같다. 그런 나는 장애인들을 잘 부탁한다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음 칸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옮겨 탄 칸 또한 장애인들이 많다. 웃는 얼굴표정에 손짓이 분주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수화의 손짓을 뚜렷이 쳐다보고는 손짓으로 또 답을 한다. 열심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손으로 전하는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나는 나를 다시 쳐다본다.
일순 창피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TV에서 촬영을 하는 것인지 여러 대의 카메라가 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들과 나의 표정이 그대로 화면에 콕콕 박힌다. 얼굴을 가리려다가 참았다. 그들의 진지한 모습들이 나로 인하여 망가져버릴 것만 같았기때문이다. 사실 난 전혀 악의는 없다. 그러니 진실을 숨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엄연히 거짓을 말하였으며 진실을 호도하여 들키지 않으려 위장을 하였다. 모면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태연히 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하여도 분명히 죄다.
큰 죄는 바윗돌과도 같아 기억하여 잘못의 것을 순순히 말하고 제 위치에 돌려놓을 수 있지만 작은 죄는 조약돌 같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다시 제 위치에 끼워 넣을 수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런 조약돌도 쌓이면 큰 돌 하나의 무게와 똑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 휠체어의 아저씨는 밤 뉴스에서 내 얼굴을 보면 고마움에 반가워할 것이다. 위선은 처음부터 계획하여 시작된 경우는 거의 없다.
삶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약삭빠르고 교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니 아예 죄책감이 들지도 않는 세상이다. 나 역시도 죄책감을 갖기보단 솔직히 용케 잘 빠져나왔다는 무용담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무던히 많은 죄에 젖어 살고 있어 그러는 나의 평범함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쯤에 매일 한 번씩 외쳐야할 말이 이 말이 아닐까. 어쨌거나 오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하는 그런 나의 공짜 전철요금은 꽤 비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장애우 전철 시승식에 참석하기를 그야말로 아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