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구약성서와 유대교 이야기
모세와 출애굽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 강과 피라미드
무대를 이집트로 옮겨보자. ‘이집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일 강이다. 기원전 484년경 지금의 터키 남서부 지중해에 인접한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집트인들에게 나일 강이 없는 삶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이집트 전체 국토 면적은 약 100만 제곱킬로미터이고, 이곳에서 약 1억1,000만 명이 살고 있다.(2021년 기준) 하지만 국토 대부분은 사막이며, 나일 강 지류를 중심으로 지중해를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델타 지대와 좁은 띠 모양의 나일 강 유역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거주 지역은 전 국토의 3.5%에 불과하다. 인구 밀도를 계산해보니 1 제곱킬로미터당 100명이 모여 사는 셈으로 이집트인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나일 계곡과 델타 지역에 의존해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나일 강이 이집트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수도 카이로에서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지금의 룩소르)까지 비행기로 이동해보면 더 실감할 수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상은 온통 황량한 사막으로, 녹지는 나일 강변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나일 강 유역에 모여 생활했다. 나일 강과 지중해가 밎닿는 하류 일대에는 매년 7~9월 강물이 범람해 부채꼴 모양의 수로를 만든다.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의 우기 때 물이 불어나 이 무렵 나일 강 하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델타 지역이다. 델타 지역은 녹지를 조성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원지대다. 이 때문에 이집트의 고대왕국 시절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 유역과 델타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나일 강과 함께 이집트를 대표하는 또 하나는 피라미드다. 카이로 도심에서 나일 강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 강 서안을 관통하면 사막지대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은 도시화 현상으로 사막지대 바로 코앞까지 주택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사막 바로 바깥 지역에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다. 교통의 혼잡도 고려해야겠지만, 피라미드는 카이로 도심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이 제4왕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다. 사막을 배경으로 거대한 3개의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대한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피라미드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지 않고는 피라미드의 진정한 위용을 감상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나일 강 유역에 모여 생활했다. 나일 강과 지중해가 밎닿는 하류 일대에는 매년 7~9월 강물이 범람해 부채꼴 모양의 수로를 만든다.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의 우기 때 물이 불어나 이 무렵 나일 강 하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델타 지역이다. 델타 지역은 녹지를 조성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원지대다. 이 때문에 이집트의 고대왕국 시절부터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 유역과 델타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나일 강과 함께 이집트를 대표하는 또 하나는 피라미드다. 카이로 도심에서 나일 강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 강 서안을 관통하면 사막지대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은 도시화 현상으로 사막지대 바로 코앞까지 주택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사막 바로 바깥 지역에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다. 교통의 혼잡도 고려해야겠지만, 피라미드는 카이로 도심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이 제4왕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다. 사막을 배경으로 거대한 3개의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대한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피라미드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지 않고는 피라미드의 진정한 위용을 감상했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쌓아올린 돌들은 모두 230만 개라고 한다. 정말이지 돌 하나하나의 크기가 대단하다.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모양의 돌은 높이가 어른 키의 3분의 2정도 된다. 개중에는 돌 하나의 무게가 150톤에 달하는 것도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거대한 돌을 230만 개 쌓아올려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 상류 아스완의 돌 세공소에서 다듬은 돌을 나일 강에 띄워 이곳까지 운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돌들을 어떻게 쌓아올렸을까. 모든 피라미드는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졌으며(오차는 0.09퍼센트), 아래쪽 기단의 수평 오차가 45밀리미터에 불과하다. 거의 완벽한 수평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피라미드의 네 면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있다.
이 대피라미드의 밑변 길이는 230미터, 높이는 146미터이다. 하지만 훗날 피라미드의 정상부와 기저부 일부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행했다. 훔친 돌은 다른 건축물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기저부는 몰라도 정상부의 돌을 훔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니었을까. 도난 사건 이후 대피라미드는 높이 137미터, 기저부 220미터의 석조물로 남아 있다. 이 피라미드의 정면(북면)을 조금 오르는 지점에 입구가 있다.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세워진 피라미드가 4500년 전 제4왕조 시대(기원전 2613-2498)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 <역사(Historial)>에서 “이 나라에는 경탄할 만한 일들이 매우 많으며,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조물들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다.”며 피라미드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남겼다. 하지만 우리에게 헤로도토스의 시대는 약 2500년 전의 아득한 먼 옛날이다. 2500년이라는 세월 자체가 전설과 망각의 시간 아닌가. 그 옛날에도 헤로도토스는 여러 차례 여행에 나섰고, 이집트도 두 차례나 여행했다. 나일 강 상류 아스완 지역까지 다녀간 기록도 남아 있다.
그의 눈앞에는 2000년 이상 된 거대한 피라미드가 펼쳐졌을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이 거대한 건축물은 미스터리였다. 헤로도토스는 역시 피라미드 앞에서 21세기 현대인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원형을 알려면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고대 도시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사카라의 볼거리는 제3왕조(기원전 2686-2613)의 두 번째 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이를 둘러싸고 세워진 고대 피라미드들이다. 피라미드는 진흙 벽돌을 쌓아올린 마스타바 고분에서 발전한 것인데, 왕은 하늘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를 원했다. 조세르의 건축가 임호테프는 이런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6개의 계단으로 된 60미터 높이의 새로운 무덤, 피라미드를 만들어냈다.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사방에 세워져 있는 피라미드와 마스타바 고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세계로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모세도 이곳에서 같은 심정으로 피라미드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모세는 파라오의 집에서 성장
이야기는 또다시 <구약성서>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 고센으로 터전을 옮겼다. 고센이 어디쯤이었고, 이곳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은 훗날 모세를 따라 또다시 이곳을 떠나게 되는데, 모세의 출애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가 신왕국 제18왕조의 람세스 2세(기원전 1290-1224)이거나 아니면 그 직후 파라오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람세스 2세 당시 고센이 나일 델타의 동쪽 지역에 있었다는 것,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430년간이나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출애굽기 12:40) 등을 감안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당 기간 이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성서>를 토대로 정리해보면 요셉을 모르는 이집트의 새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 찰 만큼 무섭게 불어났기”(출애굽기 1:7) 때문에 새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중노동을 하게 했다. 이집트 파라오의 이런 인구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인구는 늘어만 갔다. 급기야 파라오는 태어나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 무렵 이스라엘 레위족의 한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차마 아들을 죽이지 못하고 몰래 키웠고, 석 달 후 파피루스 바구니에 아이를 담아 나일강에 흘려보냈다. 마침 나일 강변에 있던 파라오의 딸이 이 바구니를 건졌고,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붙였다(출애굽기 2:10). 이렇게 해서 모세는 파라오의 집에서 자라게 됐다.
모세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모세는 히브리어로 ‘끄집어 내다’라는 뜻인데, 실제로 파라오의 딸이 그를 나일 강에서 건졌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모세는 훗날 신의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는(끄집어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모세라는 이름은 결국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이런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쨌든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계 민족의 이름이며, 간혹 이집트에서 태어났거나 이집트로 이주한 이스라엘인들이 개명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외국인이 이집트에서 관직에 오른 뒤 이집트 이름으로 개명한 사례가 이집트 자료에 남아 있다.
파라오의 집에서 성장한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어느 날 이집트인 노동감독관이 이스라엘 일꾼을 채찍질하는 모습을 본 모세는 그 이집트 감독관을 죽이에 된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모세는 파라오의 집을 나와 시나이의 광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미디안인 사제 이드로의 도움을 받게 된 모세는 그의 사위가 되어 양을 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모세는 광야 호렙산에서 장인의 양떼를 치다 불타는 떨기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야, 모세야”라는 신의 부르심을 들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이고, 백성을 고통에서 구해내도록 명령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출애굽기 3:10)는 신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놀란 모세는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라며 신의 명령을 세 차례 거절한다. 하지만 “너는 신이 보내는 사람”이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집트 파라오와의 싸움인 모세의 ‘출애굽’은 이렇게 시작됐다.
모세는 뒤쫓는 파라오의 군대를 물리치고 60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시나이(지금은 이집트령 시나이 반도)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십계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