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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멈출 수 없는 스승의 길이여
20대 후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었지만.
꿈을 먹고 세상을 품던 떡거머리 총각 시절에 금산을 딱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동생(지금 직업은 만화가)이 진악산에 텐트를 치고 한 달째 건달노숙 중이던 차라 위로 방문을 시도한 셈이다. '인삼아가씨' 후보자 같은 여자 후배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허벅지의 절반을 자른 청바지 차림들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는 그미들의 밀짚모자가 훌러덩 떨어지면서 머리카락들이 터미널 바닥에 잘름잘름 쏟아졌다. 당구나 고스톱, 바둑이나 테니스, 영화구경까지 뭐 하나 취미가 없었던 나는 당연 코스처럼 진악산 길목의 주막에서 취하고 토했던 것 같다. 그 금산을 30년 만에 방문했다.
‘작가와의 만남’에 두 고등학교를 시차별로 두 탕을 뛰게 된 것은.
‘2012년 안식년’ 연수 동기인 정채선 선생과 옆댕이 학교 문유진 선생의 주선이었고.
덕분에 금산의 회한을 되살리기도 했다. 인삼의 산지인 30년 후의 소도시는 여전히 도로의 폭이 좁았고 커피숍도 찾을 수 없었다. 간판 이름이 '샴푸'니 '앵두'니 야리꾸리 붙은 다방들은 모두 지하였고 계단에서 퀘퀘한 냄새가 올라왔다. 하여, 순대국집에 들러서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냉수도 한 사발……그래도 시간이 남아 시장을 돌았다. 어머니 같은 여자들이 풋밤콩이나 사과 몇 알을 놓고 소꿉장난 좌판을 벌이다가.
'사과 좀 사유. 밤콩두 았다닝께유.'
잡은 가랑이를 놓지 않아서, '울컥' 올라왔지만 청과물을 살 형편은 아니었다. 초겨울 바람 탓일까, 꽉 찬 배낭이 무거워서 마음으로만 그 흑백사진 풍경을 오래도록 가슴에 쟁여두었다.
소년 소녀들은 초로의 사내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며 손을 번쩍 들고 질문도 했고 컨셉이 포함된 꺼부정 포즈에 관심도 보여주었다.
"작가님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떻게 푸시나요?"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십니다."
"아니, 우리처럼 사춘기 때를 묻는 겁니다."
"문고리 잠그고 거울 앞에서 훌쩍훌쩍 울었어요."
"여자 친구는 있었나요?"
"짝사랑 주특기였습니다. 지금 다시 세월의 바퀴를 돌릴 수 있다면…… 스물세 살로 돌아가 스물한 살 여자와 사귀어보고 싶어요. 솜사탕도 사주고 땅콩도 사주고……깨진 가로등 아래에서는……부끄러운 표정으로 그냥 지나칠 거예요.“
‘스물하나·스물셋’ 스토리는 망자 권정생 선생님의 얘기고 기실 나머지 문장도 허구적 센티멘탈리즘이 가미된 것이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셨요? 키스는? 푸하하."
"저는 플라토닉파였어요.“
김창태, 손성훈, 문유진 선생 등 금산팀 스승들과 잠깐씩 조우하면서.
정채선 선생의 명퇴 신청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지난 달 이진철, 김현식 선생의 명퇴 의지를 들으며 조마조마했었는데 또 그 소식통이다. 언제부턴가, 교단의 진보 진영에 명퇴 러시 현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선애 선생님이 첫 테이프를 끊더니 교사문학회 김흥수, 이문복 선배에 이어 조재도 선생도 교단을 떠났고 쌘뽈여고 지원종, 이교범, 이상국 선생까지 줄을 이었고 김상배 시인도 준비 중이란다. 그림쟁이 동창생 정태궁과 소설과 이시백 선배, 시인 하재일도 명퇴를 했고 정혜실·윤여관 선생은 아예 연금도 나오기 직전인 19년 차에 작별을 고했으니 그만한 이유가 필시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박경희, 계순옥, 김영숙, 진영서 등 부부교사 팀이 줄줄이 뒷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떠날 때마다 전교조 조합원이 한 명씩 줄어들었다.
“저는 끝까지 남을 거예요. 왜요? ”
요새는 누가 묻기도 전에 내가 빗장을 지른다.
‘청년 시절 그해 여름날, 우리는 평교사 정년퇴임을 약속 했잖아요’
그 말까지는 차마 던지지 못한 채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불안하게 지켜내고 있다. 그랬다. 쇠한 몸피의 평교사는 후배들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눈빛을 주지 못한다.
슬픈 우리 젊은 날,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담당 형사가.
“이거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미쳤다고 그러시느냐?”
답답해하던 그 시국의 눈빛이 솔직한 심정이었음도 안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이 땅의 아이들 모두 행복한 울타리에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게 스승의 임무다.’
또 그 울컥이 치밀어 중간에서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해직과 복직 그리고 징계위원회에 출두할 때마다 그저 ‘교단에 목숨을 걸겠다’ ‘나는 천부적 선생 체질이다’라며, 어금니 갈았던 결의를 토로하면 왜 안 되는 것인가?
각서를 챙기러 오는 관료들의 등을 지지 못한 것도,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교육현실 탓이므로 싱갱이할 때마다 내가 먼저 울었다. 어머니처럼 심약한 여자 관료 한 분은.
“일제시대 독립군들도 대개 해방 후에 더 힘들게 살았어요.”
손을 잡고 안타까이 비비기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한 다음 화장실에서 코를 풀고 눈시울을 닦았다. 그 세월의 실체를 놓치지 못한 건 너무 많은 벗들과의 작별 때문도 있다.
체육시간이라 급한 김에 누가 수도꼭지잠그는 걸 잊어버리고 뛰어나갔을까 안동 복주여중에서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 죽령 너머 단양의 내 방까지 들려온다.
- 정영상의 유고시 「환청」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풍경을 울타리 너머 멍하니 바라보던 해직교사 정영상의 시를 족히 수백 번 이상은 외웠을 것이다. 운동장 복판으로 뛰어다니는 노란 댕기 봄과 파란 목띠 두른 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그는 끝내 교단에 서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다. ‘나는 소박하게 시를 쓰는 선생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저 푸른 자유의 하늘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 식이었다. 착한 벗들은 모두 비슷한 풍경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더 오래도록 가슴에 못을 박았다.
신용길 선생은 죽음 직전 두 개의 눈동자를 세상에 내놨다. 하나는 앞 못 보는 뱃사람의 눈을 뜨게 했고 하나는 가난한 여인에게 빛을 보게 해줬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당신의 두 눈을 묻지 않았습니다’ 라고 조시를 읽으며 펑펑 울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쉽게 받는 것일까. ‘시와 사랑도 목숨을 걸 듯 이 땅에서 교사로 살아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다’ 라고 결기를 세우던 오송회 사건의 투옥교사 이광웅 선생님도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렇게 코끝이 시리게 마주한 차창가로 그리운 얼굴들이 물방울처럼 올랐다가 점점이 사라진다.
동대전 터미널에서 다시 공주로 갈아타는 창밖으로 땅거미가 밀려왔다.
터미널 편의점에서 단팥빵 봉지를 뜯으니 옛 추억이 콩당콩당 가슴을 때렸다. 아주 가끔이지만 풀빵이나 호떡을 사면 앙꼬나 설탕물이 아까워서 맨 나중에까지 아껴먹기 위해 가생이 밀가루부터 쬐끔씩 떼어먹었었다.
그런데 그 옛날 흑백사진들은 기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반바지 아래 하얀 맨살로 고등어처럼 물 좋은 비늘이 뚝뚝 떨어지던 터미널 그미들도 이제 초로의 주름이 채워졌으리라. 터미널 바닥에 주르르 흘러내리던 젊은 날의 생머리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청과물 누이들만 오그르르 모여 있을까.
객지 그리고 홀아비 생활로 이력이 붙었지만 기실 외로움은 없다.
아침은 아주 간단하게 먹고 (빵, 우유, 사과 혹은 고구마, 컵라면, 아주 가끔 김치 한 가지만 놓고 밥도 먹는다.) 점심은 식당에서 본전을 채우기 위해 수북하게 채워 먹고 그 대신 저녁은 조금 먹는다. 음주량은 작년도 수준의 3분의 1 정도. 내가 먼저 먹자고도 안하지만 남들 역시 나에게 마시자고 하지 않는다. 동창생들조차 술자리를 피하므로 나 혼자 가슴을 달랠 때가 많다. 그런데 그 가끔의 술자리를 만나면 끝장을 보려는 게 문제다.
어제는 모처럼 술독에 빠졌다. 사윗감 며느릿감 같은 젊은 교사들 틈새에서.
시국을 토로하고 싶었는데, 그만 그네들의 웃음소리 소용돌이에 깜빡 취했다. 그네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때까치처럼 조잘거리면 흡사 사춘기들 같다. 아름답다. 물 좋은 가물치 같다. 나의 젊은 날은 저렇듯 해맑게 웃은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저 쳐다만 봐도 배가 부르다. 덕분에 맛이 갔고 돈도 15만 원 가량 쓴 것 같다. 나는 원래 통이 작아서 대체로 5만원 안팎으로 쏘는데 그 정도 쏘았다는 건 맛이 완죠니 갔다는 얘기다.
이 후미진 곳에서도 가끔 길바닥에서 동창생들을 만날 때가 있어서.
'여기가 서산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동창생 박양렬의 처이며 초등학교 선배이자 내 조카님안 강현숙 보험설계사께서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그미는 초·중학교로 치면 우리의 선배인데 서산여고를 1년 뒤에 입학했으므로 동창생들 중에 서산여고 팀들은 친구로 맞먹을 수 있다. 나와는 당숙과 손위조카 사이로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사는데 그런 오래된 범절을 지키고 사는 것도 재미있다. 그미의 설계도를 받아 가벼운 걸로 들어놓고 해장국집에서 어제의 숙취를 달래는데.
그 식당에서 송시리 동창생 이경원을 만났다. 섬마을로 보일러 애프터서비스를 가는 중이란다. 고치는 시간은 십 분 남짓인데 승용차를 몰고 섬마을 배를 기다리고 어쩌고 하는 시간이 네 시간쯤 된다고 하니, 배보다 큰 배꼽이랄까. 벗들 이름 몇 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칼질하면서 밥을 말끔히 비우고 냉수도 한 사발. 헤어질 때는 악수를 청했고 그의 해장국 값도 지불했다. 그는 떠나면서.
"다음에 만나면 또 밥 사. 잉."
"예스. 반가웠소. 칭구."
전화번호도 따지 않고 그렇게 헤어졌다.
작년 안식년 때에 벗 유용태와 연희동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와 어느 한식집에서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전두환 씨가 가끔 경호원을 대동하고 들린다는 곳) 초딩 시절 이경원과 수비형 싸움 끝에 맞았다는 얘기를 하던 기억이 얼핏 떠올랐으나……리얼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초딩 시절 1,2등을 하던 나는 그 정도의 석차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다. 6학년 때부터 갑자기 공부가 좋아졌다나.
인터넷 뉴스에서 그를 보았다. 서울대 교수들은 무대에서 시국선언 중이었고 친구는 맨 앞줄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선언문을 읽을 즈음 소동이 났다. 00노인네 연합회 할아버지들이 후줄근한 차림새로 쳐들어와.
“빨갱이들아. 느이들이 교수냣?”
소리소리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교수들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대응하지 않는데 산지사방에서 ‘빨갱이 시키들아’ 똑같은 문구만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때 저만치 출입구에서 눈빛 맑은 대학생 몇이.
“할아버지. 나가주세요.”
손나팔 불던 풍경도 떠올랐다.
지난번엔 서산 먹자골목 갈빗집에 갔다가 벗 서홍석도 만났다.
'서 씨 종친회'에 참석했다는 근육질 그의 얼굴에도 잔주름이 다사다난하게 등장하는 중이다. 그는 초딩 시절 190명 중 싸움 4순위였고 달리기를 가장 잘했다. 선생님이 축구골대 돌아오기 선착순을 시키면 그가 항상 일착으로 달려서 나머지 모두 헉헉 그의 뒤를 쫓았었다. 악수를 한 다음 거리에서 엉거주춤 헤어지는 것도 나이 탓이다.
사흘 전에는 삼거리 신호등 앞에서 택시가 서더니
"병철아."
어렵쇼, 지금도 '병철아' 하는 사람이 있나, 두리번거리니 모범 운전사 신도현이다. 이 친구는 우리 동창생 중 몇 안 되는 대머리다. 친구는 초딩 시절 축구를 탁월하게 잘했었다. 그는 주력이 좋고 똥뽈과 동시에 고무신짝을 허공에 아주 멋있게 날려서 나는 사열대 아래서 햇볕을 가리며 감탄하곤 했었다.
뱃속에서 나올 때가 자정이고, 60년대 부석초에 입학했을 때가 '오전 세 시'라면
지금은 인생의 시계추로 '오후 네 시'쯤 되는 저물녘 시점이다.(도종환 시인의 운을 따면) 이미 몇 친구는 스물네 바퀴를 재빨리 돌려 '자유의 하늘'로 떠났으니 ……대두리 서유원이나 갈마리 최종민, 송시리 최병천 등이다.
최병천은 깡다구가 좋아 순둥이 아이들을 몇 번 때렸는데, 유독 나에게만큼은 날마다 친절 미소였다. 나중에 스무 살 동창회 때 ‘왜 안 때렸는냐’고 물었더니 이름자가 '병천' '병철' 비슷해서였단다. 그럴 수도 있다. 중학교 때 동급생 주먹 강병석도 나만큼은 건드리지 않으며 가끔 곰보빵도 사주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이름자가 비슷해서였단다.
지금은 기업체 회장이 된 이종만도 (6학년 때 나는 이 친구의 성적표를 견제하기 위해 호롱불에 머리를 태우며 공부하곤 했다.) 그는 반장에다 공부와 싸움까지 모두 짱을 먹어서 아이들을 꽉 잡고 살았는데 이상하게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작년도에 서울역 앞 식당에서 만났을 때(17명분을 그가 계산했다)이유도 묻기 전에 먼저.
'느이 아버지가 우리 학교 교감님이라서 괜히 때렸다가 깨질까 봐' 그랬단다. 그건 그렇고.
먼저 떠난 벗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구천에서 고도리패를 돌리고 있을까? 아니면 최루탄과 화염병 공방을 굽어보며 가슴을 쓸어내고 있을까. 그네들은 과연 무엇을 아끼다가 서둘러 떠났고 살아있는 나는 무엇이 아까워서 움켜쥐는 중일까, 눈시울 글썽이는 중인데, 그들이 불시에.
"너는 지금 살아있다고 우는 거니?"
허를 찌른다. 마찬가지였다. 바지랑대의 고추잠자리에게 내가 먼저.
"왜 위험한 자리에 꽁지를 펴고 뙤똑 서 있니?"
고추잠자리의 눈동자가 노랗고 파란 광채를 파닥이며.
"네가 서 있는 자리가 훨씬 위험해."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야자수나무에 매달려 잠을 자는 나무늘보도 대뜸.
"위험해요. 당신들의 교단은 왜 거꾸로 매달려 있나요? 거꾸로 가르치면 죄다 쏟아져요."
발 동동 구르던 사연들이 어깨를 친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움찔한 것은 어둠 속에서 ‘헛헛헛’ 웃음 짓는 벗들의 영상 탓이다.
그들을 떠올리며 나는 끝까지 머물고 싶은 것이다.
늙은 스승과 코흘리개 제자가 함께 닦던 유리창, 그 너머 은행나무 노란 이파리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 풍경. 농부가 된 제자와 밀짚방석 위에서 호박전 곁들여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하늘빛 자동차에서 나풀나풀 뛰어내리는 생머리 소녀, 경남식당 아점니가 끓여주는 순댓국 안주로 소주잔 나누는 옛 선생님의 자리. 초로의 동창생과 치는 묵내기 화투판 그리고 뿌연 담배연기의 사랑방 아랫목.
그런데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서 TV를 없앤 건 이데올로기 싸움이 방영될 때마다 심장이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한때 내 청춘을 바쳤던) 전교조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실체가 아니라, 가상의 유령을 만들어 놓고 달라붙는 좀비 같다.
해직교사를 쫓아내지 않으면 법외노조로 밀어내겠다고 하여 조합원 총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동지의 목을 치지 않은 죄로 해체되기 직전 다행히 법원에서 기각시켰다. 다시 노동부에서 재심을 청구하면서 싸우기 싫은 몸들을 자꾸 단련시키는 것이다. 또 있다. 역사과목 특정 출판사 채택률이 0%인 것도 전교조의 사주란다. 그 황당 궤변을 대충 던져놔도 찌라시 언론들은 일제히 빵빠레를 분다.
나는 평교사 정년퇴임의 길을 재삼 결심한다. 철봉대 아래에 서서, 먼저 떠난 벗들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느리게 세월을 보낼 것이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좁은 어깨들을 저물녘까지 오래도록 바라볼 것이다. 마지막 퇴임식장 마이크로 ‘나는 35년 간 빚이 많은 전교조 조합원이었노라’ 밝히고 떠날 것이다.
은행나무 노란빛이 순식간에 벌거숭이 나목으로 변신한 초겨울.
쇠한 이파리들이 벗들의 손바닥 같다며 바삭바삭 혀를 다시기도 한다. 그리고 떠난 자들이나 남아있는 자들 모두 날마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임을 안다. 그 초겨울 풍경을 떠올리면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