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록수 북쪽 450리에 살수가 있다(수서 우문술 열전)
[출처 : 중국고대사서 고찰을 통한 수구리의 우리고대사 ]
--> https://tnrnfle.tistory.com/49
※주) 수서 우문술열전의每鬥便北 :"싸울 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다"를
--> 북송학자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每戰輒走 : "싸울 때마다 번번이 달아났다"로
변형시켰고, 삼국사기에서 수서가 아닌 자치통감 내용을 인용하면서
고구려 평양성인 장안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 수서 우문설 열전에
수나라 군대가 압록수를 건너오니 을지문덕 장군이 싸울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고,
살수를 동쪽으로 건넜으니 압록수 북쪽에 살수가 있다
우문술이 후퇴하면서 살수에서 1.5일동안 450리 도망쳐서 압록수에 도착했다
2) 구당서 이적열전에
압록수에서 200리 거리에 평양성(장안성)이 있으니
수서의 살수를 구당서에서 압록수로 기록한 것이니
압록수 지명이 이동하여 수나라 살수가 당나라 압록수가 된 것이다
3) 당나라 장회 태자가 후한서에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장안성)이 동옥저 땅인 지금의 진황도시에 있다고 주석 했다
(고구려 평양성 위치의 당나라 고종 시대 당대 기록임)
☞ 수서와 북사 『우문술 열전』
[원문] 述與九軍至鴨綠水,..., 遂與諸將渡水追之. 時文德見述軍中多飢色, 欲疲述衆, 每鬥便北. ...,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 遂因其詐而還.衆半濟, 賊擊後軍. ...,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우문술은 9군을 거느리고 압록수에 도착했다 ...,
그리하여 (우문술은) 여러장수들과 (압록)수를 건너 그(을지문득)을 추격했다.
당시 문덕은 우문술의 군대에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우문술의 군대를 무너뜨리려고 싸울 때마다 편하게 북쪽으로 갔다. ...,
(우문술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군영을 설치했다. ...,
(우문술은) 고구려의 거짓 항복을 핑게로 회군했다.
우문술의 군대의 절반이 살수를 건너자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했다. ...,
(우문술은) 1.5일을 도망쳐서 압록수에 도착했는데 도망친 거리가 450리다.
(그리고 압록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했는데,
요수를 건넌 수나라 군사 3십만 5천명 중에서 살아서 요동성에 도착한 군사는 2천7백명으로 기마병이다)
☞ 구당서 『이적 열전』
[원문] 率兵二萬略地至鴨綠水. 賊遣其弟來拒戰, 勣縱兵擊敗之, 追奔二百里, 至於平壤城.
(이적이)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며서 압록수에 도착했다. 고구려는 남건을 파병하여 저항했는데,
이적이 병사를 동원하여 남건군대를 격파하고 2백리를 추격하여 평양성이 도착했다
☞ 후한서 『동이열전』동옥저
[원문] 「東沃沮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이고,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개막대산)은 지금(당나라 고종 시대)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즉 왕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