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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아름다운 교회 | |
연합의 3가지 목표 비전 Vision |
①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의 연합(요15:5,17:11) ② 주님처럼 섬김의 본을 위한 연합(요13:14-15) ③ 선함과 아름다운 실현을 위한 연합(시133:1-3) |
1. 교회 행사 및 소식
➊전용환‧박해선 성도께서 저희 교회에 등록하셨습니다. 함께 기뻐하시고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과 배려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➋ 예배후 유아세례 부모 문답식이 당회실에서 있겠습니다.
➌ 금일은 당회원, 교사회 모임과 생일축하행사(7-8월 생일자)가 있습니다.
➍ 다음주일에는 제직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지니며, 아랍어로는 '푸줏간'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그것은 목축업이 활발했던 것과 양을 잡는 날에 행해지던 잔치 (삼상 25: )에 그 기원이 있다. 또한 '에브라다'와 함께 병용하여 사용 (미 5:2) 되기도 하였고 '에브랏' (창 35:16, 19, 48:7) 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다윗 왕의 고향 (롯, 삼상 16: )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 (삼상 16:1)이며, 다윗의 우물 (삼하 23:13 ~ 17)이 있던 곳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의 개인 제사장 레위 인의 고향 (사 17:7 ~ 13), 사무엘은 왕에게 베들레헴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성지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르호보암 왕 때는 이곳에 요새가 쌓아졌고 (대하 11:6), 한때 블레셋에 의해 점령되었고 (삼하 23:14), 예수님의 탄생지로 예언되었고, 그 예언이 성취된 곳 (미 5:2, 눅 2:1 ~ 5, 마 2:1~18, 요 7:41~42) 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 Km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감람나무가 많은 해발 700여 m 높이의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➎ 김성삼집사님 인도출장(20-29일) 중입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
니다.
➏ 이남순 권사님 파티마병원 805호실에 입원중입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➐ 각 가정에 교패가 없으신 분은 비치된 교패를 가져 가셔서 대문에 부착해
주시기 바랍니다.
➑ 헌금위원들께서는 방송실에 비치되어 있는 전용 가운을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➒ 예배시간 10분 일찍 와 주시고, 오후찬양 예배시간에도 일찍 오셔서 다함께 찬양해 주시
기 바랍니다.
➓ 예배 후 사용한 곳 정리정돈 및 전원상태를 꼭 확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
주후 135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은 제2차 유태인 반란을 진압한 후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예수님 탄생 동굴 위에 아도니스 신전을 만들어 세워 놓는다. 그 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는 이 아도니스 신전을 철거하고 이곳에 예수님 탄생 교회를 건립한다. (주후 325년)이 교회는 주후 529년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마리아 인들에 의하여 크게 손상을 입게 되지만 곧 이어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서 복원된다.(주후 565년)
현재의 건물은 십자군 시대의 예배당 모양을 보존하여 수리한 것이다. 탄생의 동굴은 성탄교회 내부 지하에 있다. 예배당의 모양은 십자가 모양의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십자군 당시 교회를 보수할 때 입구의 높이를 1.2 m 정도로 낮추고 그 폭도 좁게 만들어 놓았다. 머리를 굽히고서야 교회에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약탈자들이 말이
나 마차를 타고 교회에 출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방어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자세를 낮추고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주후 1100년 성탄절 날 볼드윈 1세는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 왕으로서 그 즉위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주후 386년 제롬은 예수님 탄생교회 바로 옆에 있는 동굴에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때 번역한 불게이트(Vulgate) 성경이 지금까지 카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다.
라헬의 무덤
이곳은 '라마'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에레미야 31장 15절), 무슬림, 기독교인, 특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기념 장소이다. 야곱의 사랑을 받던 라헬의 무덤 (창 35:19, 48:7)은 헤브론 길에서 베들레헴 길로 꺾어지면서 곧바로 보이는 곳에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을 늘상 보게 된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나 중요한 절기 때 이곳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다. 그들도 죽은 성인이나 조상들을 숭배하는 풍습이 있다. 이 외부 건물 구조물은 1860년에 새로이 지어진 것이다. 이 무덤에 와서 기도하면 번성과 안전한 출산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서 기도하기도 한다. 간간이 세파르딤 파에 해당되는 유대인 여성들이 이곳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 하더니 (창 35:16)
※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창 35:19 ~ 20)
2. 노회․총회 행사 및 소식
갈릴리 하구로부터 남쪽으로 약 24 Km 지점에 위치한 벧샨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에서의 전투에서 죽은 사울 왕의 목없는 시체가 '벧샨 성벽에 못박힌' 도시로 유명하다 (삼상 31:7 ~ 13). 다윗의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노래 (삼하 1:17 ~ 27) 또한 유명하다.
본래 이 도시는 이즈르엘 골짜기와 요르단 골짜기의 접경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BC 19세기 이집트의 자료에 언급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지배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다. BC 13세기 이스라엘의 므낫세 지파에게 영토로 분배되었으나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의 이 도시를 정복하지 못하였다. (삿 1:27).
BC 10세기 솔로몬이 정복한 이후 (왕상 4:12) BC 3세기 헬라 사람들이 정복하여 스키도폴리스 (Scythopolis) 라 개칭되기까지 이스라엘이 다스리고 있었다. 안디오쿠스 4세 (BC 175 ~ 164) 가 이 도시의 지배자로 등장한 후 한때 이 도시는 닛사 (Nysa)라 불리워졌으며, 헤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John Hyrcanus)는 BC 107년 이곳에 사는 헬라인들을 유대인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AD 66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기도 하였다.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벧샨은 대규모의 도시로 발전하여 Palestina Secunda 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된다. 현재 진행중인 고고학적 발굴은 고대 도시인 텔 벧샨 (Tel Bet Shean) 과 잘 조화를 이룬 대규모의 로마-비잔틴 도시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극장과 목욕탕, 거리와 화려한 모자이크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시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➊ 연지교회 김영환 목사님 막내딸 은채(고3)가 8월 27일(화)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합니다. 위해서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황금의 도시, 영원한 도시,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3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숨쉬는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아무런 보잘 것 없는 풍경과 전무한 상태의 부존 자원을 가진 유대 광야의 동편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있는 이 도시를 성경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2) 하였다. 이런 아무 쓸모없는 땅이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았고, '일신교의 보루로서', '세계인의 성도' 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모의 언덕에서 유명한 철학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설교와 도덕적 계율들, 그리고 한 형제로서의 사랑을 가르치셨고 실수와 우상숭배로 인해서 눈 어두워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바른 판단의 기준과 신앙적인 확신을 심어준 신앙의 틀을 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미 4:2)
이곳은 전인류의 절반이 종교적인 수도로 믿고 있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옛날의 영광이요 미래 희망의 상징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펼쳐진 곳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지켜본 도시이다. 또한 회교도들은 이곳이 선지자 모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 믿고 있다.
예루살렘은 신앙과 평화의 원천이며, 가장 신성한 도시인 동시에 테러와 전쟁의 피가 끊임없이 흘려진 곳이다. 즉, 칼이 오랜 동안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들의 자손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지구상의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전쟁을 거쳐왔고, 사람들의 피로 바다를 이룬 적이 수없이 많았었다. 무려 50차례 이상을 포위 공격 당했으며, 36차례에 걸친 정복과 10차례의 심한 파괴를 당했다.
예루살렘의 시초는 고대사 속에 묻혀 있어 알 길이 없지만, '평화'라는 뜻의 '살렘'(salem) 이라는 이름으로 가나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8), 또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겔 16:3) 하였다. 사실상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곳이 된 것은 주전 10세기에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그의 수도로 삼고 (삼하 5:6 ~ 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옯겨온 (삼하 6:1 ~ 23)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윗성(City of David)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자신을 포함한 역대 왕들의 무덤이 되기도 하였다.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이정순, 김공예, 자원자
<다음주> 정지영, 임은득, 자원자
황금문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성을 내려다 보면 정면에 있는 성전산의 동편으로 담을 쌓아 막아 버린 문을 보게 된다. 이 문이 11개 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미문'이라고 불리던 문이다. 유대인들은 '자비의 문'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에는 황금문이라고 부른다.
이문은 예루살렘 선전의 지성소에서 가장 가까운 외부 출입문이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출입하던 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문도 이 문이며,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불구자들에게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베푼 것도 이 문에서였다. 이 문은 1530년 오토만 터어키에 의해서 막혀지고 말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메시아가 바로 이 황금문으로 입성할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입구 쪽에는 무슬림들의 무덤 지역이 자리하고 있다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한용균 목사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5:5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26
성시교독 ᠁᠁᠁᠁ / No. 12
찬송 ᠁᠁᠁᠁᠁᠁᠁ / 440장
기도 ᠁᠁᠁᠁᠁᠁᠁ / 이종운 장로
성경봉독 ᠁᠁᠁᠁ / 고린도전서 13장 13절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라틴어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 m 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 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된 것이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 검증되기도 하였다.
설교 ᠁᠁᠁᠁᠁᠁᠁ / “항상 있어야 할 필수품목”
봉헌찬송 ᠁᠁᠁᠁᠁ / 450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교회소식 ᠁᠁᠁᠁᠁ / 이종운 장로
※. 찬송 ᠁᠁᠁᠁᠁ / 38장
4개의 봉우리를 가진 조그마한 언덕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약 800 m 정도인 이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예루살렘 보다 약 90 m 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AD 1세기 경에 숲이 다 망가져 버렸다. 유대인들은 이 산을 출발점으로 하여 일련의 봉화들을 밝혀두곤 하였는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동족들에게 새로운 달이 시작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죽은자들이 감람산 위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옜부터 이곳 감람산은 무덤 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예루살렘 동편의 산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경배 (삼하 15:30 ~ 32) 하였으며, 솔로몬의 산당 (왕상 11:7 ~ 8)이 있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 산을 자주 찾아와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기도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부활 후 마침내 이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시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장소를 베다니 근방 (눅 24:50)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이 감람산 꼭대기하고 한다.
예수님이 체포 당하신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이곳 감람산의 서쪽 기슭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마 21:1 ~ 10, 막 11:1 ~ 11, 눅 19:28 ~ 38, 요 12:12 ~ 19)이 시작되었고, 예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 (막 13, 마 24, 눅 21)하신 곳이기도 하다.
※.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 주일오후예배 ****
오후3시 사회/ 한용균 목사
찬양 ᠁᠁᠁᠁᠁᠁᠁᠁᠁᠁᠁᠁᠁᠁ 주사랑 찬양
기도 ᠁᠁᠁᠁᠁᠁᠁᠁᠁᠁᠁᠁᠁᠁ 이은신 집사
성경 ᠁᠁᠁᠁᠁᠁᠁᠁᠁᠁᠁᠁᠁᠁ 잠16:1-9
사마리아는 BC 876 년 오므리 (Omri) 왕에 의해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왕상 16:24). 히브리어의 쇼므론 (Shomron) 이라는 이름은 사마리아의 산 주인이었던 세멜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아들 아합왕은 두로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사마리아를 페니키아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고, 그곳에서 22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이방문화에 대한 치적에 관하여는 선지자 엘리야의 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왕상 16:29 ~ 34)
사마리아 왕궁의 화려함은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를 통해 반영된다. '겨울궁'과 '여름궁', 그리고 '상아궁'과 '큰 궁'등의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암 3:15, 6:4, 왕상 22:39), 상아를 비롯하여 엄청난 규모의 아합의 도시는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진 : 사마리아 산지의 염소떼)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치고 그곳에 군대를 주둔 시켰으며 (왕하 17:24), 페르시아는 영주의 수도로 삼았다. BC 108 년 헤스모니안의 존 힐카누스는 로마의 허락으로 재건하였으며, BC 30 년 헤롯 대왕은 옥타비아누스 황제를 위해 이 도시를 수축하여 그에게 헌정하면서 도시의 이름을 세바스티아 (Sebaste Augustus 의 헬라 이름)라 불렀다. 그가 대리석으로 세운 신전과 극장, 그리고 탑등은 제 1차 유대 반란 기간 동안 로마에 의해 무너졌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처형된 곳이 바로 사마리아며, 11세기에 요한 순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가족창 ᠁᠁᠁᠁᠁᠁᠁᠁᠁᠁᠁᠁᠁ 이종운 장로
설교 ᠁᠁᠁᠁᠁᠁᠁᠁᠁᠁᠁᠁᠁᠁ 한용균 목사
지혜롭게 사는 인생
기도 ᠁᠁᠁᠁᠁᠁᠁᠁᠁᠁᠁᠁᠁᠁ 한용균 목사
찬송 ᠁᠁᠁᠁᠁᠁᠁᠁᠁᠁᠁᠁᠁᠁ 보혈을 지나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예루살렘의 동쪽 성문 중의 하나인 스테반 문 (일명 사자문)에서 성 내부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연못은 예수님 당시에는 성의 북쪽벽 밖 가까운 곳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 (Sheep Gate, 느 3:1, 요 5:2) 곁에 위치하고 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 ~110 m, 너비 62 ~ 80 m, 그리고 깊이 7 ~ 8 m, 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늘 집합되는 장소였고,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로서 성스러운 성지로 지켜져 오는 곳이다 (요 5:2 ~9),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다.
<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8 28 저녁7시 30분>
설교자 : 한용균 목사
성경본문 : 시편 5:1-12
설교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
압살롬의 무덤
기드론 골짜기로부터 감람산 100여 m 까지의 남쪽 산기슭에는 넓은 지역의 유대인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물론 이들 유적들은 그리스 통치 시기 이후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그 시기를 헬레니즘 시기로 추정 하기도 한다. 또한 기드론 골짜기 왼쪽 언덕은 다윗성 (삼하 5:7 /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이 자리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 |
*****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김가연 장로
주일오후기도 : 조금연 권사
주일오후찬양 : 김현우 집사
**** 중보기도하기
다윗성 (City of David)
예루살렘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으로 성전산 남쪽의 경사지인 오벨 (Ophel)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서쪽의 중앙 골짜기 (Tyropoeon Valley)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본래 기원전 20세기 이래 가나안 원주민인 여부스의 도시였다. 가나안 정복 이후 베냐민에게 분배된 땅이었으나 BC 997년 다윗 왕이 정복하여 (삼하 5:6 ~ 9, 대상 11:4 ~ 7) , 이곳에 법궤를 옮기고 수도로 삼았다 (삼하 6장) 이곳은 본래 예루살렘의 유일한 물의 근원인 기혼샘 (Gihon Spring, 왕상 1:33 ~ 38) 이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BC 18세기 여부스족은 기혼샘의 물을 성 안에서 길어 마실 수 있는 작은 터널 (a tunnel and shaft system)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으며, 다윗은 이 통로를 이용하여 여부스의 성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하 5:8, 대상 11:6). 19세기 영국의 워런 경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하여 Warren's Shaft 라 불린다. 한편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적인 언덕이 요새로서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경사지에 세운 망대와 외성과 밀로는 견고한 성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대하 32:5). 경사지에 발달된 도시이기 때문에 집 또한 경사지에 계단식으로 건축되었다. 다윗왕이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삼하 11:2)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이 도시의 특징을 반영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솔로몬 시대에 이곳은 기드론 골짜기 쪽으로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으며, 이를 '왕의 동산' (왕하 25:4)이라 부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 때 앗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은 유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 밖의 모든 물 근원" 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아 " 적에게 물 공급을 차단하는 일을 하게 된다 (대하 32:2 ~ 4). 이 사건을 계기로 히스기야는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 (왕하 20:20), 곧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 (대하 32:20) 히스기야 터널을 만든 일은 유명하다. 이 수로는 성 밖 기혼샘으로 부터 성 안 실로암 연못에 이르는 533 m 의 S 자형 터널로서, 터널 중앙부에 새겨놓은 실로암 비문 (Siloam Inscription)의 발견으로 공사의 방법이 확인되었다. 이 비문에 따르면 터널은 각각 양쪽으로 파 들어갔으며, 마지막 관통되는 순간 물이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 들어 갔다고 한다. 다윗성은 1978 ~ 1982년 히브리 대학교의 이갈 실로 (Yigal Shiloh) 교수의 발굴에 의해 성경의 이 지역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이 역사적-고고학적 싫증으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 할 수 있다. |
① 성도들의 삶과 가정과 생업과 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늘 하나님의 보
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② 온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주의 뜻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③ 교회안 밖으로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치유,건강 회복,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을 위하여
⑤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⑥ 심방을 통해 모든 가정이 축복되게 하소서.
⑦ 담임목사의 목회사역을 위해
실로암 연못 기혼샘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20:20 |
➇ 나라(안보,평화,전쟁 막아주심,경제회복,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공산체제,
신앙자유,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하나됨,복음능
력회복을 위해
➈ 새로 등록한 교우들이 잘 정착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경험하게 하소서.
➉ 임신중에 있는 성도와 태아의 건강을 지키시고, 잘 자라서 순산케 하소서.
***** 2013년 8월 추천신앙도서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 A.W. 토저 / 규장 / 9,500원
고대 제라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도시를 가지고 있는 여리고는 사해 북동 쪽 13 ㎞ 지점 유다 광야에 자리잡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도시이다. 여리고는 예로부터 키가 10 m 가 넘는 종려나무들이 많아 '종려의 성읍' (신 34:3, 삿 3:13) 으로 불리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첫 발을 디디던 도시였다. 물이 귀한 사막 한 가운데 물이 솟아나오는 여러 개의 샘을 가지고 있어, 주변의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유다 광야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천연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한다. 요르단 골짜기 (해발 -225 m )에 위치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매우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있다. 헤롯 대왕은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도시에 자신의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으며, 그의 삶도 여기서 끝이 났다. |
***** 2013년 8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예수께서 이 도시를 들러 지나가시곤 하였던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헤롯이 지은 별장이 있는 와디 퀠트 (Wadi Qult)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 (눅 19:1 ~ 10)와 또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만나 구원을 이루시기도 하셨다 (막 10:46 ~ 52). 신약의 여리고는 AD 68~69년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가면서 모두 멸망시켜 버렸다. 비잔틴 시대에 여리고 근처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자리를 잡았으며, AD 480년 이집트 테베의 요한이 와디 퀠트에 자리잡은 성조지 수도원은 유명하다. 요한은 516년에 가이샤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노년에 이 수도원에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525년 그가 죽은 후 코시바의 게오르기아, 즉 성 조지가 이 수도원에 살면서 그를 기념하여 수도원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9세기 이후 십자군 시대에 매우 활발한 수도원으로 자리 잡았으나 십자군 이후 급격히 퇴락하였다. 한편 여리고 서편의 유다 광야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막 1:4~5, 마 3:1), 요단강에서 멀지 않은 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 4:1~11, 막 1:12~13), 성경이나 다른 자료들에서는 예수님이 정확히 어느 곳에서 사십 일간 금식을 하셨는지 찾아 볼 수 없다. 훗날의 구전(later tradition)에 의하면 여리고 옛 도시 뒷켠에 높이 솟아 있는 카란탈 산 (Mount of Qarantal)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받던 시험산이라고 한다. 6세기에 산 동쪽 기슭 예수님이 있었다는 동굴 윗켠에 교회가 하나 지어져 있었으나 13세기에 없어져 버리고 다시 1874년에 희랍 정교회에서 지은 수도원(Sadandarion Monastery)이 남아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여리고는 난민 수용소로 변했으며, 1948년부터 1967년에 이르는 동안 7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흙벽돌로 지은 난민촌에서 살았다.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 도시는 쫓겨난 난민들의 무너진 집들만이 남아 있으며, 아름다운 '종려의 도시'에는 일부 아랍인들이 머물러 살아가고 있다. 1993년 9월 13일 와싱톤에서 조인된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협정으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PLO의 자치 행정구로 인정되어, 당분간 PLO의 행정수도로써 그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도시가 새로운 건설을 위한 주역을 담당할 도시로 변하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여리고는 알렌비 다리를 통한 요르단과의 교류의 창구로써 팔레스타인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과의 통행으로, 외교 및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다. |
*****하나님을 열망하라....
- E.M 바운즈 목사 -
갈망과 기도는 그분을 보기를 원하는 열정으로 불타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은혜롭고 풍성하게 보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불타야 한다.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기도의 골방에서 영광스러운 빛과 계시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성경과 그리스도가 새롭게 보인다. 나는 우리의 갈망이 더욱더 강력하게 불타오르고 계속해서 커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의 영께서 주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최고의 은사와 은혜는 ‘참되고 효과적인 기도’라는 정당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봉사는 분리될 수 없고 도저히 나뉠수 없다. 더 나아가, 갈망은 각자 개인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갈망은 하나님과 그분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42:2)라고 고백했다. 참된 기도를 드리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열망하고 찾는 것이다. 최상의 선물이 하늘로부터 풍성히 내려올 때까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뜨거운 갈망이 없다면 참된 기도를 드리 수 없다.
여리고 옛 도시 (The Jerico Excavations)
고고학적으로 여리고는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도시(Walled City)이다. 이곳은 1930-1936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죤 카스팅(John Garstang)이 발굴했고, 1952-1958년에는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 캐더린 캐년(Kathleen kenyon)이 정밀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성을 발굴하고 성벽과 둥근 망대(Round Tower)를 발굴하였다. 즉 주전 7000년경에 이미 성을 쌓고 도시 생활을 시작한 증거인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집안 벽을 그림으로 장식하였고 죽은 사람의 두개골은 방바닥에 매장 하였다. 또한 진흙으로 만든 여자의 형상, 동물 형상도 발굴되었다. 이 시대에 속하는 주거 층에서 터어키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오석(Turquoise)으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미 이 시대에 여리고는 여러 먼 곳의 지역과 왕래와 교류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
***** 핵심을 찌르는 질문 (요 21:17)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7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지금 베드로는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합니다(참조, 마26:33-35). 자연적 개별성은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인격성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뼈 아픈 질문에 의해서 발견됩니다. 베드로는 일반 자연인들이 훌륭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기질적인 사랑으로서 개별성까지 깊게 닿을 수 있지만 인격의 중심부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호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마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로만 사랑을 고백하지 말고 모든 행위로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간교함에 대해 아파한 적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주는 그 어떤 아픔보다 우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오히려 죄는 감각을 무디게 하기 때문에 점점 아픔이 줄어듭니다. 주님의 질문은 우리의 감정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상상할수 없을 만큼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심지어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므로 거짓이란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을 감상적으로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픔의 그 순간이 사실 위대한 계시의 순간인 것입니다.
최장 길이 85 Km, 최장 폭 17Km 표면적 약 1,015 평방 Km 인 사해는 그 수면이 지중해보다 398m나 더 낮다. 즉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이다. 구약에는 염해(Yam Hamelach = Salt Sea 창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지 않기 때문에 사해(死海) 라고 불리며 염도가 약 33%로서 세계적으로 염분이 가장 많은 물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해에 들어가면 손발을 휘젖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둥둥 떠 있게 된다. 혹시 손발을 휘젖다가 물방울이라도 튀어 눈에 들어 간다면 눈이 쓰라려서 그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다. 보통 바닷물이 4-6 퍼센트의 염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해물은 그 5배나 되는 것이다. 사해가 그렇게 많은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는 그 물이 흘러 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요단강 등 주변에서 유황과 질산 성분의 물질들이 함유된 약 7백만 톤의 물이 매일 쏟아져 들어 오는데 빠져 나갈 구멍은 없고 요르단 계곡의 뜨거운 열기는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화학물질 등 고체 성분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사해의 포타슘 매장량은 전세계가 이곳에서 나는 것만 쓰더라도 100년을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포타슘은 비누, 비료들을 만드는데 쓰인다.사해 주변에는 사해 물을 분석해서 광물질을 추출해 내는 공장 들이 있다. 사해의 물은 피부병에 특수한 치료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또한 이곳의 검은 흙은 신경통 등에 특효라고 전해진다. 세계 각국에서 치료차 사해에 오는 사람들이 있고, 이 근처에는 이들을 위한 특수 병원도 있다. 사해 지역에 위치하였던 도시로는 소돔, 고모라, 아마드, 스보임 (창 10:19) 이 있으며, 이 도시의 왕의 목록도 이어 기록되어 있다 (창 14:2), 소알 (창 13:10) 또한 이 지역의 도시였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이 지역은 "물이 넉넉하여 .....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다" 고 해석하고 있다. (창 13:10, 사 1:10, 마 11:23~24) 고대에 이곳에 많은 물이 있었음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아주 오래 전에는 적어도 사해의 물이 해발 -225 m 까지 채워져 있었으며, 19세기 연국인들에 의해 탐험되었을 때에도 현재의 수위보다 12 m 나 높았었다. 오늘날에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요단강과 요르단으로부터 내려오는 야르묵 강의 물을 차단하여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면이 자꾸만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 여름철 하루 평균 수분 증발률 (25 ㎜)도 수면이 낮아지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 사해에는 보통 바다의 염분 농도보다 무려 10배가 넘는 26 ~ 33 % 의 소금이 녹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러 여름철에는 바다 위에 결정 (結晶)으로 떠있는 많은 소금은 마치 바다에 핀 꽃이나 얼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불의 부력이 매우 커 사람이 물에 들어가 누우면 모의 절반 가량이 저절로 물 위에 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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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5일 창원 아름다운교회(055-283-3450)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49-7
아름다운교회/한용균목사
엔게디
오늘날 사해 주변의 좋은 휴양지의 하나로 자리한 엔게디는 사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샘이 넘쳐 나고 있는 곳이다. 사무엘상 24장 1절에 의하면 다윗은 한때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이곳에 숨어 들었다. 나할 데이비드 자연보호 구역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면 다윗의 폭포라 불리는 엔게디 폭포가 나온다. 가던 방향으로 곧장 따라 올라가면 샘 하나를 지나서 동굴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몸을 숨겼다는 동굴이다. 폭포에서 이곳까지 약 40 ~ 50분이 걸린다. ※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삼상 2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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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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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 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 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 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를 통하여 마사다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으나 나중에 로마군에 넘어간 사람이다. 그는 비록 조국에 등을 돌렸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기록으로 남겼다. 요세프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마사다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서기 73년의 어느 봄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특징은 바로 ‘기도’이다.”- E.M 바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