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는 사람들 / 유종환
돈암동 버스정류장, 빨간 셔츠를 자주 입는 중계동 그 아주머니가 보인다. 오늘도 돈암시장에서 사온 야채가 핸들카트에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음료수로 보이는 캔 하나를 검은 비닐봉지에 싸서 슬며시 건넨다. “또 만났네요! 고맙습니다.”
봉지 안에는 마른 오징어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만 음료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탈 때 마다
기사들에게 준다. 짐을 싣고 타는 것이 미안해서 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손님이 내릴 때면 버스를 보도에 바짝 붙여
짐을 편안하게 내릴 수 있도록 배려한다. 뒤로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기댄 월계동 할아버지가 올라오신다. “자리에
먼저 앉으세요. 돈은 나중에 내시구요.”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내 차를 타기위해 승객들이 몰린다. 성신여중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르르 다가온다. 맨 앞의 학생이 동전을 쏟아 넣는다. 50원짜리가 섞인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버스
운전을 하다보니 동전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얼마 냈는지 느낌으로 안다. 뒤에 서 있던 학생이 이미 섞여버린 동전
사이로 천 원짜리를 떨어뜨린다. “잔돈 주세요!” 100원을 거슬러 주고 승차권을 뽑는다. 아까 그 학생을 불렀다. “드림
랜드에 사는 학생! 잠깐 와볼래?” 도둑 발 저리듯이 슬금슬금 온다. “요금 맞게 넣지?” 더 묻지는 않았다. “저 할아버지
요금 받아다가 통에 넣어줄래?” 바로 뒤편에 앉은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아! 네....”
사실 버스운전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운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요금만 해도 그렇다. 물론 요즘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승객들의 시민의식이 성숙했지만 간혹 승객이 몰릴 때면 잔액도 없는 카드를 슬쩍 대고 뒤로
들어가는 얌체족도 있다. "손님, 잔액이 부족하대요." 물론 그 손님은 못들은 척 뒤쪽으로 가버린다. “손님, 다음에
두 배로 안내면 안태워 줍니다.” 하계동에서 시내를 다니는 버스는 단 두개 노선밖에 없다. 그래서 단골손님들이라
대체로 낯이 익다.
운전을 하다보면 반가운 사람,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바쁘다보니 미처 얼굴을 다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먼저 반갑게 인사하면 미안할 때도 있다. “안녕하세요.”란 짧은 말 한마디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기쁨이요,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말 한마디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축복의 언어일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길이 막히거나 하면 배차시간에 늦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데, 이럴 때 웃으면서 “조금 늦었네요.”
라고 말하는 승객을 만나면 피곤함도 사라지고 오히려 더 미안해지기도 한다. 사실 늦으면 운전기사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다. “죄송합니다. 늦어서요.”그러나 이런 경우 요금통에 잔돈을 집어던지며 “도대체 몇 분 배차인데 지금
오는 겁니까?” 물론 화도 나겠고 약속시간도 늦었으니 화풀이 하는 것은 당연 하겠지만 웃으면서 말하는 것과 결국
뜻은 같지 않은가?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입안으로 도로 들어가고 만다. 바쁘지 않은 사람 어디 있고, 일부러 늦게
다니는 기사 어디 있겠는가?
목적지를 잘 모르는 경우 “어디 어디 내려줘요.”이렇게 묻는다. 알려 줘야지 하면서도“안내방송 나오거든요.”일단
대답부터 해 놓는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혹시라도 잊을 것에 대비한 것이다. “초행길이라 잘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 앉는다. 바로 옆이나 뒤에 앉던지... 몇 정거장이라면 기억하고 있다가 “어디 어디 내릴
손님 다 왔습니다.” 대답해 주지만 몇 십분 거리 이상 거리이면 잊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간혹 시빗거리가 되기도
한다. “알려 달라고 했잖아요.” “깜빡 했거든요. 죄송합니다.” “요금 도로 주세요.”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나중에 답변
하지 않으면 한 마디 하고 내린다. “그러니까 평생 운전이나 해먹고 살지.” 그렇게 되면 나도 한 동안은 짜증내면서
운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끔은 손님도 별로 없는 정류장에 들어갈 때면 지나가는 차마다 다 잡아 세워놓고
“이차 어디어디 가요?”하고 묻는 승객도 있다. 물론 한가할 때면 주요 정류장이라도 간단히 대답해 주겠지만, 시내버스
운전이 항상 그렇게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파란색 간선버스 149번, 나는 그 버스를 운전한다. 버스 개편한지 1년여, 그 동안 거리는 먼데 운행대수가 적어 항상
시간에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퇴근 시간에 10분 조금 넘어 도착하면 승객을 다 태우지 못할 때도 있다. 다행이 얼마
전 3대 증차해서 9분 10분 배차시간이 7, 8분으로 줄어들어 한결 편안해 졌다. 시내버스개편 이후 중앙차로를 다니는
간선버스는 출고한지 얼마 안 된 새 차로 교체되었다.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도 시속 30키로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고, 무더운 한 여름에도 에어컨으로 더위를 잊을 수 있으니 전에 비하면 얼마나 쾌적하고 세련된 풍경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아로는 유난히 교통량이 많은 도로다. 도심에서 강북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종암로도 있지만
그 길 또한 만만치 않다. 출근 시간 때는 시내방향, 퇴근 시간 때는 외곽방향으로 밀려드는 차량이 홍수를 이룬다. 중앙버스
전용차로가 생기기 전에는 미아삼거리에서 혜화동사거리를 빠져 나가는데 적게는 2, 30분 많게는 40분도 더 걸렸던 곳이다.
내가 다니는 곳은 한번 운행하는데 약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그 중 중앙차로가 차지하는 거리는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승객이 많은 곳이고 또 가장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면 늘 기분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아마 대부분의 승객들도 그럴 것이다. 붉은색 아스팔트로 포장된 중앙버스전용차로, 그 복잡했던 미아삼거리에서 혜화동까지
지금은 단 10분이면 족하다.
우리는 고급식당에 가면 종업원으로부터 친절을 기대한다. 그러나 손님으로서 대우를 받으려면 먼저 지켜야 할 예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데 혼자 술에 취해 돌아다닌 다거나, 나이프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이야기 한다면 주위사람들은 불안
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가령 외국 같은 곳에는 고급식당에 운동복차림이나 노타이차림으로 입장하면 거절당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한 사람만의 장소가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공의 장소에서는 서로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주 싼 식당에 들어 갈 때면 별 다른 서비스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매너와 예의를 보인다면 여느 사람과는 다른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고의 대우를 받으려면 최고가 되면 된다. 비싼 값을 지불하는 비행기를 타거나 모범택시를 타야만
손님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손님에게는 어디에서나 최고의 친절이 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 타인을 기쁘게 해 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온갖 무료와 피로가 묻어 있는 승객들에게 편안한 공간
이 될 수 있도록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운전기사, 그리고 승객들은 늘 기쁜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다면 타는 승객도 버스기사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서민의 발이라 불리는 시내버스, 나는 오늘도 그 서민들의 발이 되어 전용차로를 달리고 있다. ‘이젠 버스를 타도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정류장 팻말 앞에 커다랗게 써진 글씨를 뒤로 하고 미아리고개를 힘차게 오른다. 서쪽하늘로 넘어가는 석양이
백미러를 발갛게 물들인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지자 붉은 전용차로는 더 선명해진다.
몇 년 전에 쓴 글이긴 한데 바람도 쏘여 줄 겸해서 끄집어 내 봤습니다.
첫댓글 글이 참 재미있고 생동감이 있습니다. 친절하고 부드러워 손해 볼 일이 없는데 우리는 이런 일에 인색하지요. 수고가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문장력을 가지셨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 곳에 계신 이웃님들에게는 따뜻한 인심과 포근한 정이 느껴집니다. 교수님의 친절한 가르침 때문이겠지요. 제가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를 아니 저 같은 나그네들을 붙잡아 두는 힘을 느끼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기사님이십니다 ^^*
택경 시인님 호월 시인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글은 그렇게 썼지만 승객분들께 인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핑계같지만 사실 운전하면서 신경 쓸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정작 하고 싶은 친절과 인사는 뒤로 가기 마련이지요. 오늘 부터는 꼭 인사해야지. 어제보다 2배 더 친절해야지.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출근합니다. 아~ 이거 공개적으로 밝혔으니 오늘 부터는 꼭 친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미 물씬 풍기는 파란색 간선버스 149번 버스 안의 장면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같이 훌륭한 분들의 노력이 승객들의 수준을 높여 줄 것입니다. 존경합니다.
부족하고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문자님 . 간혹 노선변경을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은 교수님 강의하시는 우이동 도봉도서관 앞을 지나는 1144번 노선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타실 기회가 있으시거든 뒷문에 기사 명패가 있으니 '유종환'을 확인하시고 말씀해 주시면 내신 돈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사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21세기 서울의 풍속도 그리듯이 나타납니다.움직인다는 것이 삶의 상징 이것이겠지요.하루에 몇번씩 도봉도서관을 경유한다하니 더욱 반갑고요.수필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이고~ 이거 참 부끄럽게....철 지난 버스에 손님이 많이 오셨네요. 안방에서 뵙다가 건너방에서 또 뵈니 더 반갑습니다. 한 판 깔아야 겠습니다.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힘든 일 하시면서도 여유를 가지시고 이렇게 작품 쓰시는 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흐르는 공간, 버스안의 풍경이 훤히 보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바다님도 무지하게 반갑고 고맙습니다. 작품한 번 보여주시면 성심껏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봄바다처럼 따뜻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네, 선생님, 조만간 졸작 한 편 올릴께요. 언제나 아주 정확한 분이신 것 같던데 평도 부탁드려야지요.
음, 참 멋지군요. 훌륭한 기사, 아름다운 글. 선생님의 칭찬 말씀에 제 말도 얹습니다. ^^
아~이거!! 풀시인님께서 칭찬의 말씀 얹어주시기 감개가 3-4배 더 무량합니다. 부족한 장문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필하십시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버스기사 하시면 이렇게 좋은 글이 나오나 봅니다. 푸근한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