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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웁시다
증언자: 전용호(남)
생년월일: 1958. 8. 10(당시 나이 23세)
직 업: 대학생(현재 출판업)
조사일시: 1988. 9
개 요
전남대 탈춤반 활동을 해오다 5월 18일부터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투사회보팀을 구성하여 선전활동에 주력, 22일 이후 도청 앞 궐기대회를 준비하였다.
들불야학 생활
우리 집은 아버지가 교육공무원이어서 엄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집안 형편은 보통이었다. 보성남국민학교를 다니다 전학하여 광주 계림국민학교, 충장 중,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나왔다. 삼수를 하여 전남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민족문화연구회(탈춤반) 멤버였고, 내가 상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에는 후진국사회연구회(후진국경제학회)라는 학회를 만들어 활동을 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1979년도 전반기까지는 들불야학의 강학으로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들불야학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들불야학을 설립한 사람들이 고등학교 동창들인 데다가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가입하였다. 들불야학은 광천동 천주교 교리실에서 들불야학 1학년생 교육을 하였으며, 천주교 옆에 있는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2, 3학년 교육을 하였다. 또 건너편 주택가에 방을 얻어 들불야학의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당시의 학교내 사회과학 서클은 그동안의 탄압시기에서 권력의 공백기가 되자 점점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생을 중심으로 한 후진국 경제학회, 나상진, 임낙평 등이 주요멤버로 노동문제연구회, 신영일, 박관현, 안진 등이 창립한 사회조사연구반, 고희숙을 중심으로 한 기독학생회의 전신인 B.M.(Bible and Music), 김경희가 주축을 이룬 여성문제연구회, 송선태가 주축이된 민족문학 연구회, 한국농촌문제연구회, 민속문화연구회(탈춤반) 등이 있었다.
정식 사회과학 서클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는 1979년 이전까지는 사회과학 서클이라기보다는 문화활동 클럽 즉, 얼샘(인문과학 연구써클로 발전할 수 있는 클럽) 탈춤반 등이었다. 1980년이 되면서 이념적인 학회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서클 등의 내용을 변경시켜 내고, 우리 한국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농민문제와 노동문제의 연구를 위해 노동문제학회, 농민문제연구학회를 만들고, 그렇게 해나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회현상에 대한 조사 및 탐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회조사연구반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경제상태가 후진국 경제에 속하므로 후진국 경제를 연구하는 학회를 상대에서 만들자고 하는 요구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전남대학교의 사회과학 서클이 태동하게 되었다 .
1980년 이전의 상황은 탄압기였으므로 합법적인 활동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형사들이 학교의 모든 기능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사를 할 때에는 상담지도관실에 행사신청서를 내어 허락을 받아야만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서클 소개 역시 상담지도관의 검인이 찍힌 포스터로만 소개됨으로써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적었다. 진짜 민주주의라 한다면 좌익이 있고 우익이 있어서 좌익과 우익을 대중의 눈앞에 보여주고 대중에게 선택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곧 다수가 선택한 것을 해나가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일 텐데 학생대중에게 탈춤반과 후진국 경제학회를 소개하는 통로마저 차단해 버려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다. 1979년까지 그러한 상황은 계속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학원의 자율성이 약간씩 부여되면서 점차 많은 학생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4월 총학생회가 소위 민주총학으로 건설이 되면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4월 하순쯤 같은 과 이재의 선배가 총학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을 지하신문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래서 지하신문의 재정과 기획을 이재의 선배가 맡기로 하고 조직은 내가, 박영환(법대 행정학과), 김동규(자연대 수학과), 오병학(농대), 또 사대 교육학과 학생 2명과 일곱 명은 팀을 이끌어가기로 했다. 지하신문의 이름은 '대학의 소리'로 정했다. 자연대 수학과에 다니는 김동규가 전남대 후문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취방에다 가리방, 등사기 등을 준비해 두고 그곳에서 총학생회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총학은 합법기구로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모든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지하신문을 통하여 해결해 나가야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일을 해 나갔다.
그러던중 5월이 되었다. 나는 탈춤반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5월초부터는 단대별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나는 상대 쪽에 참여하여 마이크를 잡았다.
5월 14일부터 전남대생들이 가두로 나가기 시작했다. 교문을 뚫고 나가고 도청에서 대중집회를 3회에 걸쳐 진행했다.
5월 17일에는 민족민주화대성회도 끝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쉬는 날이어서 개인적으로 만나던 친구 한 명과 화순에 있는 친구집으로 쉬러 갔었다.
그날밤 텔레비전에 계엄령이 확대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그것을 보면서 문제가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인물을 만들자
18일 아침 일찍 친구들과 함께 광주로 왔다. 급박한 상황이 생기면 오전 10시에 전남대 앞 정문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나 친구집이 화 순쪽이어서 일찍 올 수는 없었다. 광주에 와보니 11시가 조금 못된 시각이었다. 시내의 상황을 보고 학교로 들어갈려고 도청 앞에서 내렸다. 전일빌딩 쪽으로 가려는데 학생 200-300명이 '으싸', '으싸'하면서 금남로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우리들 모두가 학생운동의 지도부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사람들일까, 전남대생일까, 조선대생일까, 누가 지도를 하고 있는가를 파악해 보려고 세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발생적인 학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대열을 주시하다가 대열에 합류하려고 친구들에게 가방을 맡기고 보니 뒤쪽에서 박몽구 선배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시위 대열 옆쪽에도 눈에 익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대학의 소리' 팀에서 함께 일하던 김동규라는 사람이 옆에서 대열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하고 어떻게 된 상황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시위대열을 따라갔다. 시위대열이 도청을 향해 갔는데 그때는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청 앞 광장으로 가려다가 우회전하여 광주우체국 쪽으로 대열을 돌렸다. 관광호텔 옆 삼양백화점 앞을 지나 광주우체국으로 갔다. 광주우체국 쪽에서 다시 충장로파출소 쪽으로 가면서 돌을 던져 기물을 파손했다. 그 순간부터 전경들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금남로 쪽을 봉쇄하고 충장로파출소 앞쪽도 봉쇄하기 시작했다. 충장로파출소 부근에 있던 대열이 2개로 갈라져서 한쪽은 공원 쪽으로 가고, 한쪽은 다시 금남로 쪽으로 가면서 인도에 있던 사람들과 합류해 버렸다. 나 역시 인도로 가서 사람들 틈에 끼었다.
다시 금남로로 와서 거리를 둘러보려고하니 인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다. 전남여고 쪽으로 내려오면서 인문대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오후 3시 남선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아는 학우들을 만나면 만나는 사람마다 남선다방에서 모이자고 말했다.
그때 많은 학우들을 만나 총학생회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대처 방안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금남로에서 내려오던 중 중앙국민학교 뒷담 부근에서 탈춤반 동료들을 만났다. 이런 상태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민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의하여 당장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선전작업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인물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가리방, 등사기 등은 '대학의 소리' 팀에서 사용했던 것을 사용하기로 하고 전남대 후문의 김동규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자취방에 데리고 가서 문안을 상의하여 짜고 5백여 장을 인쇄했다. 오후 3시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동안에 시내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유인물 작업을 했다.
"계엄령이 떨어졌다. 계엄령의 의미는 무엇인가, 계엄령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치고 있다. 우리 시민들은 들고일어나야 한다."
시내상황을 전혀 모른 채 이런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했다. 유인물 5백여 장을 담고 또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등사기와 가리방, 잉크 등을 쌀가마니에 넣어서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3시에 남선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있고 시내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갔다.
"시내로 갑시다."
"시내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시내로 갈 수 없습니까?"
"시내는 난리가 나버렸소."
"그러면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봅시다."
"가는 데까지는 태워다주겠는데 지금 시내는 난리가 났소. 공수부대가 와가지 고..."
유인물을 배포하고
전남대 후문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을 지나가야 하는데 택시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도 미처 다 못 가서 우리를 내려주고 갔다. 시내의 상황이 몹시 궁금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탐문을 하기 위해 두 명은 막걸리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등사기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또 한 사람은 시내 쪽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우선 남선다방에 전화를 해보았다. 남선다방 주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 지금, 정신이 있소, 없소. 지금 다방에는 아무도 없소. 최루탄만 난무하고 있소."
"3시에 사람을 만나려고 약속을 했는데 혹시 전화같은 것 온 적 없었나요?"
"그런 사람 찾는 전화는 한두 번 왔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소. 바깥 금남로는 지금 난리요."
'아! 상황이 아주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전화를 끊고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많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썰렁하기만 하였다.
공수부대가 지나간 뒤인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대인동 술집 아가씨들이 즐비하게 서 있던 자리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가끔 여기저기서 헝클어진 옷을 입고 있는 청년들이 보일 뿐이었다. 단 몇 시간의 공백으로 인하여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정말 힘이 들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대쪽 입구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군인차 서너 대가 쭉 지나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적재함에 무엇인가가(사람들이 엎어져 있는 듯한 형상) 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무엇인지를 몰랐다. 다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바퀴 돌다 다시 막거리집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에 있던 두 친구 역시 술집 주인에게 어느 정도 상황을 들은 것 같았다. 친구들은 내가 가자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민들은 금남로 쪽에서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쪽으로 쫓기면서 공수들에게 얻어맞다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다시 공수부대가 쓸고 가버렸다고 했다.
우리들이 계속 시내로 들어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것 같아서 가지고 온 유인물을 2인 1조 두 개팀으로 나누어 뿌리고 다녔다. 한 팀은 산수동 쪽으로 올라 가고 또 다른 한 쪽은 중앙국민학교 후문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집결하기로 하였다. 나는 산수동 팀에 속하여 집집마다 유인물을 뿌리며 산수동 쪽으로 걸어 갔다. 산수동에서 유인물을 다 뿌리고 학동에서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다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계엄령으로 인하여 통금시각을 앞당겼다는 방송을 했다. 학동에서 모여 그날 뿌렸던 유인물에 대해 정리를 하고 각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가면서 그 다음날 유인물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인쇄에 필요한 시험지 2천여 장을 사서 밤새도록 인쇄했다.
19일 아침 각자 후배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여 나온 사람으로 다시 팀을 만들어 방림동에서 사는 임낙평 집에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각자 가두에다 뿌리면서 방림동으로 갔다. 그런데 임낙평은 없었다. 그때 시간이 2시쯤 되었다. 그 친구집이 산동네 사글세 방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시내의 서너 군데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아마도 페퍼포그를 뿜어대는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남은 유인물을 뿌리면서 산수오거리 근방에서 다시 집 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조는 오지 않았다. 그 곳에서 연극반에서 활동하는 후배집으로 가 저녁을 먹고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공수부대들이 산수동 쪽으로 가택 수색을 해온다는 소문을 듣고 공포감에 싸여서 하룻밤을 새워야 했다.
20일 오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배와는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갈 데가 없었다. 30여 장의 남은 유인물을 가방 속에 넣고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친구와의 모든 소식은 끊어진 상태여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나는 택시를 타고 광천동 들불야학 장소로 향했다. 광천동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가야 했으므로 혹시나 검문을 할까봐 매우 불안해 했다. 일단 유인물을 시트 밑에 감추었다. 다행히도 그날 아침에는 검문이 없었다. 광천동 천주교, 야학하는 곳으로 갔더니 야학교사들, 즉 대학 선후배 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 온몸에 다시 힘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들은 죽어라고 유인물을 작성, 배포하고 다녔는데 여기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서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 했더니 자기들도 유인물 뿌리면서 다녔다고 말했다. 아마 야학교재를 만들려고 사놓은 복사기로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던 모양이다. 그날은 양일간의 피로로 인해 모두 다 지쳐 보였다. 그야말로 긴장이 풀어졌다. 윤상원, 김영철 선배들도 만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그날 하루를 광천동에서 보냈다.
감동적인 순간
광천동에서 나와 전남대 앞 사거리에 다다랐다. 전남대 사거리 부근에는 한 200여 명쯤의 군인들이 허리총을 하고 양팔 간격으로 서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군인들은 선무 방송을 통해, "시민 여러분, 향토사단 31사단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며 지금 퇴각중입니다."라고 계속 말하면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친구와 같이 금남로 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날이 어두워져 9시가 다 되었다. 임동 전남방직 사거리 쌀집 앞 창고에서 일찌감치 잠을 자려고 누워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데모하는 함성이 들렸다. 우리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무등경기장에서 각 차량에 청년들이 피난민 행렬처럼 둘러타고 각목을 들고 있었다. 차량행렬의 끝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길었다.
그때가 1차 차량시위였던 것으로 안다. 모든 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예비군가, 통일의 노래, 애국가 등의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차량행렬의 일부는 금남로 쪽으로 갔고 일부는 중앙고속 쪽으로 갔다. 나는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 대열은 다시 중앙고속사거리에서 일부는 광주역 쪽으로 가고 일부는 광주고속 쪽으로 갔다. 광주역 쪽으로 가는 대열의 공격 목표는 KBS 방송국이었다. 나는 그 들을 따라갔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가루가 뿌려지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최루탄 가루였다. 그런 점으로 보아 그곳에 군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지나니까 갑자기 탕, 탕, 탕 총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났다. 그 총소리는 공포탄이었고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다시 MBC 방송국으로 갔는데 MBC 방송국은 불에 타고 있었다. 시위대 들이랑 같이 청산학원 쪽으로 갔다. 거기 역시 군인이 있었고 공포탄이었는지는 모르나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장갑차가 시민관 앞까지 빠르게 왔다갔다하였다. 우리도 쫓겨서 전남여고 담을 넘어 도망갔다.
전남여고 담을 넘고 다시 정문 쪽 담을 넘어 계림동 쪽으로 나오니까 청년들이 싸움을 벌이려고 드럼통에다 기름을 넣고 굴리면서 점점 접근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임동 창고로 와서 잠을 잤다. 그때가 새벽 2시쯤 되었다.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그날밤 계림동 쪽에서는 2시 이후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졌고 공수들이 총을 쏘았다고 했다.
투사회보팀 구성
21일 오전 녹두서점으로 갔다. 교수님과 선배들이 모여 있었다. 녹두서점 앞 세무서에서 플래카드를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염병도 만들었고 도청 쪽에서 시위도 하고 있었다. 그날 동구청 뒤에서 시체 8구를 보았다. 그 중에 한 구의 시체를 시민들이 리어커에 싣고서 다녔다. 금남로에는 시민들이 꽉차 있었다.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는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다시 녹두서점으로 돌아갔다. 그때 윤상원 선배가 무슨 회의를 마치고 나서, "우리 들불야학은 일을 맡았다. 투사회보를 제작하기로." 라고 말했다. 지나가는 트럭을 타고 광천동으로 가서 사람들을 모으고 투사회보를 제작하기로 했다. '투사회보'라는 명칭은 상원이형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고 조직은 물자 조달조, 문안 작성조, 필경 등사조, 배포조의 4개조로 나누었다.
모두 10여 명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배포조는 의미가 없었다. 그때의 상황은 시내 길가에다 놔두기만 하면 차량들이 가져다 배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사회보팀이 꾸려졌다.
22일 오후 5시쯤 도청 앞에서 자연스럽게 시민집회가 열렸다. 그때 한일극장 사장 장휴동이라는 사람이 아주 어용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이 항복을 해야한다고 말을 했다. 김종배(수습위원장 조대 4)라는 사람이 마이크를 빼앗아버려 분수대에서는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관광호텔에서 경비를 서며 지켜보고 있던 시민군이 공포를 쐈다. 총소리를 듣고 계엄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분위기가 우왕좌왕했다. 나는 YWCA로 갔다. 그곳에서 시민집회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 동료와 선배들, 처음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던 친구들과 만났다. 다음날 선배가 경영하고 있던 광주공원 앞 보성기업에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잤다.
궐기대회 준비
23일 아침 9시 30분에 보성기업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때문에 걸어서 갔다. 보성기업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는 왜 비었는지 영문을 몰랐으나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보성기업에서 모였다가 흩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YWCA로 발길을 돌렸다. 몇 사람의 젊은 사람들과 박효선(극단 광대), 윤상원 선배도 모여서 임시로 선전팀을 짰다. 선전팀은 도청 궐기대회를 개최해 보기로 했다. 궐기대회 선전팀은 전남대 연극반이 주축이 되어 궐기대회 연사를 구성하고, 우리들은 문안 작성과 마이크설치를 하기로 했다. 전날 집회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궐기대회를 질서있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첫날 궐기대회는 개회사, 묵념, 경과보고, 광주사태를 본 느낌 순으로 하기로 진행되었다. 주부대표, 시민대표, 노동자대표 등이 이야기하기로 하고 투사회보팀은 시민궐기대회에 대한 홍보를 부탁했다. 그후 투사회보를 제작, 배포했고 전남대 차에 마이크를 설치하여 변두리를 돌면서 시민궐기대회 홍보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제1차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때 자연스럽게 시민궐기대회 선전팀이 YWCA로 모두 옮겼다. YWCA 안방에서 투사회보 등사를 하고 바깥 강당은 선전팀이 사용하였다.
나는 선전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가두방송 차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유인물도 뿌리고 대자보도 붙였다. 바쁠 때는 마이크를 직접 잡고 연단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고 마이크 설치도 하였다. 24일도 전날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24일인가 25일부터는 YWCA는 대학생집결소라고 대학생들에게 모이라고 하였다. 찾아오는 대학생들에게는 우리가 현재 무엇을 해야겠느냐, 다 같이 싸우자며 설득하여 조를 만들어 도청으로 들여보냈다. 24일 2차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25일 3차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끝까지 싸웁시다
26일 아침에는 계엄군이 진입해 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때 수습위원회 사람들이 우리를 밟고 지나가라고 하면서 그들을 저지했다. 계엄군들은 진흥원 앞까지 왔지만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거기까지 들어왔던 것은 자신들의 보급로인 외곽도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26일 곧바로 비상집회를 소집했다.
매일 오후 5시에 개최하던 시민궐기대회를 26일에는 오전에 제4차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오후에 다시 제5차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이유는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더욱 확실했던 것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상무대에 살고 있는 군인 부인에게서 26일 오후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전화내용은 계엄군이 내일 새벽에 도청으로 밀고 들어갈 거라는 얘기와 함께 집에 숨어 있으라는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오늘 밤에 돼지고기 회식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이미 접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 결국은 알리기로 하고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에게 알렸다.
"시민 여러분 ! 드디어 내일 새벽에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싸웁시다."
하고 호소했다. 집회가 끝나고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진흥원 앞까지 걸어가 시위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최후까지 사수하실 분은 남아주세요"라고 말하니까 5백여 명이 남았다. 그 사람들은 YWCA와 도청 부근에 배치를 시켰다. 26일에는 도청에서 상황을 살핀 후 YWCA와 도청에서 문제가 터지면 전화를 해주기로 하고서 잤다. YWCA에서는 투사회보팀, 선전팀 등 50여 명이 잠을 잤다. 그리고 젊은 고등학생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27일 새벽 3시쯤 여자(박영순) 목소리가 들렸다.
"시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먼저 여자들을 뒤문으로 해서 산수동 쪽으로 대피를 시키고 남자 20여 명이 남았다. 나와 김상집 선배는 도청에 가 보기로 하고 도청으로 향했다. 가면서 우리는 도청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겁이 나서 나도 녹두서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조금 있으니까 총소리도 나고 헬기 소리도 들렸다. 방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아침 8시쯤 일어나 세수를 했다.
9시쯤 되자 한두 명씩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궐기대회 때 낭독했던 궐기문을 가지고 녹두서점에서 나왔다. 내가 나가자마자 녹두서점도 계엄군들에게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한다.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변혁과정에서 계급성의 중요성을 느꼈다. 당시 총을 잡았던 사람들은 수탈받고 착취받는 계급이었고 사회변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은 집에 숨어서 지냈다는 것이다.
(조사.정리 이부범, 김명수)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