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웃음이 싱그럽다. 봄을 맞이하는 어느 수목인들 저리 푸를까. 자꾸만 아이가 던진 인사의 여운이 무딘 내 감정을 흔들어 깨운다.
설날 두 주일 전, 수화기 너머로 지인이 일을 좀 도와달라며 간곡히 매달린다. 설날 대목을 노려 마트 매대에 진열할 인삼과 더덕 선물 세트를 잔뜩 준비해놓았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그만 코로나에 걸렸다고 한다. 백수가 된 내가 듣기에도 사정은 딱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단기간의 명절 아르바이트 고충을 너무나 잘 알거니와 생물이라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잔손질이 성가시다. 더구나 설 전날은 밤늦게까지 근무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시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야 할 입장이다. 허나 호박꽃 속의 벌처럼 징징거리며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는 전화에 결국 그녀에게 부개비잡혔다. 진즉에 하겠다고 했더라면 모양새라도 좋을 텐데….
며칠 동안 직장인의 출근 대열에 나도 끼어들었다. 얼마 전까지 다녔던 일터는 집과 가까워 자전거를 타고 다닌지라 버스 출근길이 생소하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북구에 있는 마트까지 40분이 소요되는 스무 번의 정류장을 거쳐야하는 거리다. 수성구에서 남구, 중구를 거쳐 북구에 이르니 대구 도심지를 두루 구경하는 셈이다. 어디로든 환승되는 도시철도가 시민의 발이 된 이후로 서 있는 승객이 몇몇일 뿐 크게 붐비지 않는다. 시야가 트이니 마음마저 낙낙하다. 어제 버스에서 마주친 사람이 더러 보인다. 모두 무슨 일로 나가는지 궁금하다.
그날도 경산과 인접한 수성구의 끝자락에서 출발하는 349번 버스에 올랐다. 보기 드물게 젊은 기사라 나도 덩달아 젊어진 기분이다. 타고내리는 승객에게 일일이 웃으며 인사말을 건넨다.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위쪽 지방의 말투는 폭신한 빵처럼 부드럽다. 인사 한마디가 고단함을 밀어내며 어깨에 힘이 샘솟는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하세요.”
‘좋다. 오늘은 차창 밖의 구경을 잠시 접어두고 그의 부드러운 인사를 흉내 내리라.’ 마스크로 가려진 입이라 남의 시선도 상관없겠다. 몇 번인가 따라 속살거렸지만, 좀처럼 감미로움에 근접하지 않아 애꿎은 입술을 꼬집는다. 그러다 되풀이 하는 인사에 같은 말이라도 입 모양의 크기에 따라 들리는 차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낀다. 안면근육은 표정을 나타낸다고 하더니…. 한때 표정 관리를 한답시고 뺨의 근육을 자극하는 “위스키”를 얼마나 외쳤던가.
정류소마다 오르내리는 승객에게 인사를 하는 기사였지만, 그 누구도 맞인사는 하지 않는다. 반응은커녕 무뚝뚝하니 화가 난 모습이다. 젊은이나 지긋한 어른이나 모두 벙어리다. 기사는 혼자만의 인사에 멋쩍어 한두 번 빠뜨리거나 아름찰 만하건만 처음과 같이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다. 문득 이 버스에 그의 가족이 탔더라면 얼마나 속상할까싶다. 나는 내리는 사람마다 인사하기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대구역 부근에 이르자 열 살쯤 돼 보이는 아들과 어머니가 버스에 오른다. 자동차 뒷바퀴 부분의 불쑥 솟아오른 의자에 모자는 다정스레 앉는다. 바로 내 앞자리다. 버스는 노선 따라 움직이고 기사의 맞이· 배웅 인사는 여전히 바쁘다. 아무도 인사 없이 내릴 때마다 아이는 이상한 듯 제 엄마를 쳐다본다. 이윽고 소년은 엄마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가방을 메고서 하차 벨을 누른다. 나도 모르게 곧추앉는다.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수고하세요.”
큰 소리로 외치는 아이의 맞인사에 속이 시원하면서도 나도 기사의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은지라 얼굴이 화끈하다.
오늘 아이는 내 선생님이다. 어찌 배움에 위아래가 있겠는가. 각박하고 메마른 우리 주변에 눈에 뜨이는 선생님이 더러 있으니 아직 세상은 아름답고도 살만하다. 이순을 바라보는 인생길에서 뜻하지 않게 아이 선생님을 만난 이 아침이 고맙다.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