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 / 김양희
빛 속에서 빛을 보았다. 현란하게 반사되는 햇살만이 빛이 아니라 어두움의 명암이 바로 빛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와 숨죽인 청중들의 호흡 소리마저도 미세한 음률이 되어 파장을 전해왔다. 무대 위에 반사되는 한 줄기 조명 아래 말없이 선, 정물이 된 그는 감은 눈으로 숨결을 고르며 객석을 응시한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 그것은 정제된 테너의 목소리가 아니라 차단된 빛의 심연에서 흘러내리는 부드럽고 처연한 강물의 소리였다. 단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육신의 장애는 영혼 저 너머로 침잠하는 소리의 울림을 증폭케 해 줄 뿐이었다. 「안드레아 보첼리」, 그는 이렇듯 동영상의 화면을 통해 오늘도 국경을 초월한 세계인의 영혼을 적시고 있다.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 게 음악의 순정한 기능일까. 그의 목소리는 애절한 가사에 실려 눈만 자극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의 현(絃)을 건드리고 있었다.
내게는 닫혀 진 그 빛이 거리로 흘러넘치네/ 그대와 함께 떠나리/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그대와 함께 풍경을 보고 들으며/ 바다로 배를 타고서/ 아니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그대와 함께 거기서 살리라.
매끄럽고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수백만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대와 함께 떠나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음으로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담았기에 진정 성이 더한 그의 대표 곡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농촌 지역 투스카니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보첼리는 선천적인 시각장애는 아니었다. 날 때부터 약간의 장애는 있었으나 12살 때 축구경기 중의 사고는 그의 시력을 완전히 빼앗고 말았다. 빛을 잃은 그에게로 소리의 세계가 열려 왔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 본 부모는 일찍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후에는 플루트와 색소폰을 배우게 됐다.
그러나 애초부터 음악을 택한 건 아니었다. 피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일 년 여 동안 법정 선임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잠재의식 안에서 춤추는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의 인생을 결국 테너 가수의 길로 이끌었다. 어릴 적 꿈의 실현을 위해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넬리>를 찾게 되고 그의 문하생이 된다. 교습비 마련을 위해 클럽과 식당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니 미래의 아내인 엔리카를 만나게 된 것도 당시의 일이었다.
젊은 날의 보첼리 - 앞을 못 보는 장애는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가로막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활동에의 염원을 가로 막는 장벽의 원동력이 되었다. 물 흐르듯 유장한 그의 음성은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우리 영혼에 여과되어 또 다른 삶의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분명 다른 성악가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뭔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소리에 영혼을 불어넣는 능력이었다.
상처를 극복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들을 잠식하며 어떤 숭고함마저 일깨운다. 이제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의 빅3에 이어 ‘네 번째 테너’로 우뚝 선 그를 세인들은 ‘영혼의 목소리‘요 ’눈 먼 천사‘라 칭한다.
그러나 천사의 보이지 않는 날개 속을 우리는 보았는가. 보첼리가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 세상의 명리를 따랐다면 아마도 법조인으로서의 단순하고 순탄한 개인적 삶을 택했을 것이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기에 목전의 세계에 탐닉하기보다는 영혼 저 너머의 깊은 내면세계에 생의 두레박을 던졌다. 이제 그 한 사람 인생의 나침반 앞에서 셀 수 없는 수많은 영혼이 평화 속에 침잠하며 위안과 휴식의 진정한 의미에 젖어 든다.
우리는 너무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에만 매달려 생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살아 온 것은 아닐까. 육안(肉眼)으로만 보지 말고 심안(心眼)으로 좀 더 멀리를 바라볼 일이다. 결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화려한 연극 무대의 성공 뒤편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스텝들의 손길이 있을 것이고, 하늘이 흐리면 비가 오겠거니 하지만 구름 저 너머에는 깊고 심오한 천체와 기상과학의 힘이 있지 않던가.
눈만 뜨면 부르짖는 사랑이라는 것도 드러내는 사랑보다는 깊이 있는 사랑이 더 커 보이지 않던가. 시인 구상 선생은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이들은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으니/ 이 눈 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다.
일전에 본 이란영화 「버드나무」의 주제 역시 침묵의 세계였다. 문학교수인 ‘요제프’는 어렸을 적 시력을 읽고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을 때 세상은 행복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에겐 낙원의 색깔이 내내 고통스러웠고 새로이 꿈에 부풀어 시작하는 삶 역시 지뢰 가득한 미로를 헤매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에서 목격한 소매치기의 야비한 미소, 폭력과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생존의 현장에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갈등에 젖어들게 된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다는 것은 안 보고 살 때의 내적 고요에 비하면 고통만을 동반한 카오스의 세계였다. 침묵 속에 내재하던 상상과 꿈의 세계, 이성으로만 그려 오던 화려한 유토피아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자학하며 호수에 빠져들기도 하는 요제프의 고뇌는 오늘도 마음 걸어둘 곳 없어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밤중 세상이 고요 속에 침묵할 때 보첼리의 음악을 듣는다. 세상을 잠재우는 그의 음악 속에서 영혼의 본질 속을 걸어간다.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 안 뜰에 있는 깊은 세계의 바닥을 들여다본다. 몸은 마음의 종(從)에 불과한 것. 향기도 빛깔도 소리도 마음의 눈으로 응시했을 때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주 가끔씩 마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상의 강을 건너는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